아픈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정확히는, 아픈데 내가 아픈 것을 아는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_이윤주 <나를 견디는 시간> 중
권정생의 소설 <몽실 언니>를,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를, 제임스 설터의 단편 <어젯밤>을, 페르난두 페소아의 소설 <불안의 서> 등을 읽으며 위로와 힘을 얻는다는 그녀. 역시 국문학도다. 소개된 책 중 <몽실언니> 외에는 낯설다.
찾아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삼십의 문턱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두 아이의 엄마.
그 시절을 어찌 견뎠을까 잘 모르겠다. 하루하루 힘들었지만 돌이켜보면 잘도 견뎌냈다.
나만의 비밀스러운 시간들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소중한 책, 장 그르니에의 <섬>이 생각났다.
내가 인간의 삶을 일종의 광기로 생각하고 이 세상을 티끌 하나 남김없이 사라지는 한 줄기 수증기라고 생각했던 그때, 그 쓰잘 데 없는 주제(고양이)에 대해 심각하게 연구하는 것보다 더욱 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일은 하나도 없었다. 이러한 연구는 우리를 살아가게 해 주고 헛되이 나마 오래 살도록 도와준다.
앞으로 다가오는 나날을 어떻게 해서든 견디어내고 싶다면, 그 어떤 것이건 하나의 대상에 다만 몇 시간이라도 열중해 보라. 아마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으리라.
알고 보면 우리가 배우는 그 수많은 것들은 모두 무시해 버려도 좋을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끝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인내의 놀이'를 배운다는 것은 결코 그대로 간과해서는 안될 일이다.
인수공통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가상의 도시 화양에서 일어난 끔찍하고도 참담했던 28일의 이야기이다.
광견병처럼 사람과 동물 사이에 상호 전파되는 전염병.
코로나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때 소설을 접해서인지 더 긴장감 있게 글을 읽었다.
절대악의 존재동해의 악행들과,
재앙의 혼란 속에서 고개를 든 후 거침없이 행해지는 온갖 야만적인 일들의 연속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구역질 나게 악랄한 일들이 벌어졌던 과거, 그리고 상상도 못 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작가가 재앙 속에서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생존을 향한 살아있는 존재들의 처절한 노력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생존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을 지켜내려는 울부짐.
기자윤주의 시선과 생각이 담긴 글에서 그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살아남기'는 윤주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목표였다. 그 외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다.
그 손이 떨고 있었으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않았다. 재형은 처음부터 그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무섭다고 호소하고 있었는데. 살아 있어 무섭고, 살고 싶어서 무섭다고.
그때 살려고 애쓰는 것 말고 무엇이 가능했겠느냐고, 삶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본성이었다. 생명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본성. 그가 쉬차를 버리지 않았다면 쉬차가 그를 버렸을 터였다. 그것이 삶이 가진 폭력성이자 슬픔이었다. 자신을, 타인을, 다른 생명체를 연민하는 건 그 서글픈 본성 때문인지도 몰랐다. 서로 보듬으면 덜 쓸쓸할 것 같아서, 보듬고 있는 동안만큼은 너를 버리지도 해치지도 않으리란 자기기만이 가능하니까.
그들은 누군가를 향해 모이는 것이었다.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걸 확인시켜 줄 누군가. 시선을 맞대고 앉아 함께 두려워하고 분노하고 뭔가를 나눠 먹을 수 있는 누군가, 시시각각 조여드는 죽음의 손을 잊게 해 줄 누군가를 만나고자 그곳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가 그리웠다. 밤은 미치도록 길었다.
수의사 재형.
어린 시절, 사랑하는 개들을 살리지 못했던 죄책감으로 유기견들을 보살피며 드림랜드라는 곳을 운영한다.
종에 관계없이 살아있는 것들의 생명을 지키고자 헌신했지만, 어린 시절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개를 향한 절대적인 사랑은 결국 그를 파멸의 길로 몰고 간다.
작가의 말을 보면 이 이야기는 우리의 이기심으로 참혹하게 죽어간 동물들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는 이야기이며, 인간을 넘어 생명을 지키고자 헌신하는 존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인간일 거라는 희망에서 소설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희망의 끈을 쥐고 끌고 가는 인물은 바로 재형일 것이다.
나는 때로 인간 없는 세상을 꿈꾼다. 자연의 법칙이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곳, 모든 생명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세계, 꿈의 나라를__________. (재형)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온몸으로 버티고 살아야 할 119 구조대원기준.
개들에게 처참히 살해된 아내와 전염병으로 잃은 딸,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목격한 간호사수진의 끔찍한 최후.
그것도 모자라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극적으로 얻은 삶.
살아남기가 이토록 힘들다면 누가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아니, 누가 살아남으려 하겠는가.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라고 이해하기에는 너무 잔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주인공 쿠키, 스타, 링고 세 마리 개들.
인수공통 전염병이 상징하듯 이들은 인간들과 함께 사는 또 다른 가족이다. 서로를 보듬을 수도, 서로를 해칠 수도 있는.
개들의 세계에서도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노력은 인간과 다르지 않았다.
인간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감정 표현이 너무 생생해, 그들의 시선으로의 감정이입이 어렵지 않았다.
스타가 코를 들고 목을 문질러주거나, 입술을 핥아주거나, 온화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면 링고의 가슴에는 한 여름 밤하늘처럼 찬연한 별들이 뜨고는 했다. (링고)
직접 눈으로 보듯, 내가 그 인물이 된 듯 , 실감 나는 표현과 묘사는 한강의 소설을 읽으며 감탄했었던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또 다른 작품 <7년의 밤>과 <종의 기원>이 궁금하다.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재미와 그 안에 알맹이가 담긴 소설일 거라 생각하며 기대를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