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히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묘사만으로 극도의 슬픔을 자아내는
김훈의 단편 소설 <화장>을 다시 읽어 보았다.
"운명하셨습니다"
뇌종양으로 투병 중이던 아내가 오랜 고통을 마감했다.
그녀 옆에서 온갖 수발을 들어가며 희생한 그의 남편, 오상무.
병시중과 전립선염으로 고생하는 짓눌린 그의 행색과는 다르게
그는 잘나가는 화장품 회사 마케팅팀의 능력 있는 상무다.
그는 시종일관 고요한 감정선을 유지한다.
아내의 더러워진 기저귀를 처리할 때도, 아내가 유명을 달리했을 때도, 장례식장에서도, 아내의 시신을 화장할 때도,
아내가 사랑했던 개 보리를 안락사 시킬 때도, 남몰래 흠모하는 회사 사원 추은주를 대할 때도 말이다.
그는 너무 고요하다. 너무 절제되어 있다.
소리치고 화내고 울분을 터트리지 않아 오히려 짠하다. 더 초라하고 슬프다.
삶과 죽음
생기 넘치는 젊음과 축 늘어진 늙음
젊은 여성의 화장(化粧)과 죽은이의 화장(化粧)
능력있는 상사와 초라한 가장
선과 악
이성과 감성
일상과 일탈
중대함과 하찮음
책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른 두 극.
그가 어느 하나로 결정해야만 하는 화장품 광고 문안 '내면 여행'과 '가벼워진다'처럼
그는 늘 두 가지의 모습을 마주하며 서있다.
마지막 결정은 하나.
그러나 인간은 둘 중 완전하게 '이거다' 하고 선택하지 못하기에
인간은 약하디 약한 존재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 슬픔과 고통은 오롯의 개인의 몫이다.
아내가 두통 발작으로 시트를 차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때도, 나는 아내의 고통을 알 수 없었다.
나는 다만 아내의 고통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고통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누구나 삶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끈을 잘라낼 수는 없다.
그 질기고도 가는 끈은 오롯이 혼자 만이 감당해 내야 하는 것이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내친김에 임권택 감독의 영화 <화장>을 보았다.
조금은 다른 설정과 스토리 때문인지 책에서 느낀 감정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배우분들의 절제된 감정 연기가 좋았다.
큰 소용돌이가 없는 잔잔함 속 인간의 죽음과 슬픔
사실적 묘사와 표현들이 오히려 슬프고 아리게 다가온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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