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지날 때 바라보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예쁘고 화려한 젊은 여성, 멋지고 잘생긴 남성들이 아니다.
언젠가부터 내 눈에 깊이 새겨지는 사람들은 희끗희끗한 머리와, 굽은 등, 깊은 세월의 주름을 가진 지친 얼굴의 노인들이다.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나이를 먹어가는 나 그리고 조금 더 미래의 상황들을 떠올려보며 그들을 한없이 바라보게 된다.
이 책은 미국 메인 주의 작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열 세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는데 이 중심에 올리브 키터리지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녀는 전체 이야기의 주인공 이지만, 어떤 단편에는 스쳐 지나가는 인물처럼 묘사된다.
이런 책의 구성이 참 독특하고 기발하다. 무게있는 주인공이 아닌 다양한 주변 인물들이 스치듯 바라보는 그녀에 대한 묘사가 색다르게 느껴졌다. 이 때문에 올리브를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올리브 키터리지는 젊어서는 수학교사였고 정년퇴임한 여성이다. 덩치가 크고 고집 세며 무뚝뚝하고 사과하지 않는 성격 덕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정하지 않고, 강인하고 변덕스러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녀를 봤다면 기가 세서 함께 있기가 조금 어려운..... 그러나 쿨하고 재지 않고 시원시원한 이웃들과 닮아있는 듯한 느낌이었을 것 같다.
당당하게 열심히 살았고, 아들 크리스토퍼에게 엄격했지만 나름대로 사랑을 쏟으며 최선을 다해 양육했던 그녀에게 닥친 노후는 그리 화려하지 않았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던 다정한 남편 헨리의 요양원 신세. 아들의 이혼과 재혼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냉담한 아들, 크리스토퍼.............
크리스토퍼의 초대로 일말의 희망과 기쁨을 느끼는 듯 했지만, 도시에서 며칠 지낸 그녀는 여벌을 챙기지 못해 너덜너덜해진 그녀의 스타킹처럼 상처 받은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 늘 부족하고 실수투성이다. 어느 부모나 자식을 양육함에 최선을 다하고 사랑하려 애쓰지만 그들을 향한 과도한 기대, 그리고 모본을 보이기엔 부족한 성품 등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식들에게 실망과 상처를 주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고 부모의 인생은 실패작인가? 자식들을 위해 살아왔던 그 모든 인생이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것이었던가?
그건 아닐거다....... 부족한 인생 또한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깨닫는 순간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의 삶은 참으로 슬프고 또 슬프다.
올리브는 생이 그녀가 '큰 기쁨'과 '작은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큰 기쁨은 결혼이나 아이처럼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일이지만 여기에는 위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가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작은 기쁨도 필요한 것이다. 브래들 리스의 친절한 점원이나, 내 커피 취향을 알고 있는 던킨 도너츠의 여종업원처럼.......
정말 어려운 게 삶이다. -<작은 기쁨 중>
인생은 어떤 길을 따라, 그 길을 타고 가는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크리스토퍼의 집이 지어지기 전부터 수십 년 동안 쿡스 코너에서부터 테일러네 들을 지나 집으로 돌아오던 것처럼, 그 뒤부터는 그 자리에 아들 집이 있었고, 크리스토퍼가 거기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부터 아들은 이제 거기 없었다. 다른 길. 이제는 그 다른 길에 익숙해져야 한다. 하지만 정신은, 혹은 마음은, 둘 중 어느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요즘 좀 느려서 보조를 맞추지 못했고, 그녀는 점점 더 빨리 도는 공위에 올라가려는 뚱뚱한 들쥐가 된 기분이었다. 그녀는 공을 네 발로 긁을 뿐 그 위에 올라가지는 못했다._<단편 다른 길 중>
중년의 그들, 전성기의 그들. 그들은 그 순간을 조용히 기뻐할 줄 알았을까? 필시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정작 인생을 살아갈 때는 그 소중함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올리브는 지금은 그 추억을 건강하고 순수한 것으로 간직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축구장에서의 그 순간들이 올리브가 지녔던 가장 순수한 추억들인지도 모른다. 순수하지 않은 다른 추억들도 있었으니까._<단편 튤립 중>
매일 아침 강변에서 오락가락하는 사이, 다시 봄이 왔다. 어리석고 어리석은 봄이, 조그만 새순을 싹틔우면서. 그리고 해를 거듭할수록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런 봄이 오면 기쁘다는 점이었다. 물리적인 세상의 아름다움에 언젠가는 면역이 생기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고, 사실이 그랬다. 떠오르는 태양에 강물이 너무 반짝여서 올리브는 선글라스를 써야 했다._<단편 강 중>
오, 젊은 사람들은 정말로 모른다. 그들은 이 커다랗고 늙고 주름진 몸뚱이들이 젊고 탱탱한 그들의 몸만큼이나 사랑을 갈구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내 차례가 돌아올 타르트 접시처럼 사랑을 경솔하게 내던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른다. 아니, 사랑이 눈 앞에 있다면 당신은 선택하거나,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녀의 타르트 접시는 헨리의 선량함으로 가득했고 그것이 부담스러워 올리브가 가끔 부스러기를 털어냈다면, 그건 그녀가 알아야 할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알지 못하는 새 하루하루를 낭비했다는 것을. _<단편 강 중>
한 인터뷰에서 일상적인 매일의 삶이 쉬운 것만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존중할 만한 것이라는 점을 독자들이 느끼길 바란다고 한 작가의 말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매일의 사소한 일상, 나는 그것이 소중하다고 생각했지만 존중이라는 면에서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_<옮긴이의 말 중>
이 책을 읽는 중간중간, 강풀의 만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모티브가 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같은 느낌을 주는 구절과 내용들이 있었다. 이 책은 오랜 기간에 걸쳐 천천히 두 번 읽었다. 이제 막, 앞의 학년이 바뀐 나의 나이, 군 입대를 앞두고 있는 아들, 오랜 고통 끝에 스무 살의 찬란한 성인이 된 딸.........
쉽지 않은 삶, 실수 투성이의 삶이지만 존중받고 싶다는 생각과 더불어 나의 부모, 남편, 자식, 이웃들의 삶도 존중하는 삶의 태도를 끊임없이 상기하며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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