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아자르(로맹 가리)의 소설 [자기 앞의 생]  & 에두아르도 폰티 감독의 영화 [자기 앞의 생] 

 

몇 해 전 읽었던 삽화가 있는 책도 너무 좋았지만, 글에 집중해서 읽는 것 또한 다른 매력이 있었다. 내친김에 소피아 로렌이 주연한 영화도 봤다. 지난번, 영화 초반만 보고 책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라 보기를 멈췄던 영화다.

이번에는 끝까지 봤지만 아쉬운 점이 많았다. 소설과 다른 설정도 많았고, 인상적이었던 인물들이 생략된 영화는 나에게는 무척 실망스러웠다. 책의 느낌이 전달되지 않아 다른 작품을 보는 듯했다. 

 

에밀 아자르의 소설은 부조리하고 불행한 인간 삶을 이야기하지만, 슬픔과 아픔 그 어딘가에 줄곧 따뜻하고 아름다운 기운이 흐른다. 에두아르도 폰티 감독의 영화는, 그러한 인간의 삶이 내내 어둡게 느껴졌고 슬픔 가운데 숨어 반짝이는 그 무엇이 잘 전해지지 않았다. 

 

 

 

온갖 풍상을 겪고 늙어 죽음을 앞두고 있는 노인의 모습은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 또한 젊고 화사했던 시절이 있었다. 동정심 없는 자연의 법칙은 인간을 추하게 만든다. 생이 그들을 파괴한 것이다. 온화한 노인의 얼굴, 심술궂은 노인의 얼굴, 요양원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인들의 모습, 검버섯과 주름으로 가득한 그 얼굴들을 보면 속이 상한다. 밉다. 추하다. 눈물이 난다. 

 

p. 280 "난 너무 추한 꼴이 되었구나, 모모야." 나는 화가 났다. 늙고 병든 여자에게 나쁘게 말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니까. 하나의 자로 모든 것을 잴 수는 없지 않은가. 하마나 거북이 다른 모든 것들과 다르듯이 말이다. 그녀는 두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p. 137 거꾸로 된 세상. 이건 정말 나의 빌어먹을 인생 중에서 내가 본 가장 멋진 일이었다. 나는 튼튼한 다리로 서 있는 생기 있는 로자 아줌마를 떠올렸다. 나는 좀 더 시간을 거슬러올라 아줌마를 아름다운 처녀로 만들었다. 그러자 눈물이 났다.

 

그러나 늙지도, 고통받지도, 불행에 빠지지도 않는 삶은 없다. 그것은 인간 세상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생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다. 

 

p. 300 더 이상 살아갈 능력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의 목구멍에 억지로 생을 처넣는 것보다 구역질 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삶이 고통스러울지라도 모모와 리사 아줌마를 도울 이웃들이 있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p. 97 하밀 할아버지는 위대한 분이셨다. 다만 주변 상황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

p. 275 그 세네갈인이 나타나면 언제나 해가 뜨는 것 같았다.

p. 246 그들에게 얘기를 하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끔찍했던 일들도, 일단 입 밖에 내고 나면 별게 아닌 것이 되는 법이다.

 

이웃들의 보살핌 속에서 모모와 리사 아줌마, 그 둘은 트라우마와 가난과 모욕과 고통 가운데 두 손을 맞잡고 생을 살았다. 그렇게 함께한 순간은 삶의 추함도 불행도 고통도 잠시 잊을 수 있었고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했다. 노인들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본다면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줄 수 있다.

 

p. 279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던 것 같다.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p. 305 그녀는 이제 숨을 쉬지 않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숨을 쉬지 않아도 그녀를 사랑했으니까.

 

 

 

소설과는 다른 감정이었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한 암사자, 모모의 엷은 미소, 서로 어깨를 토닥이며 멀어져 가는 이웃들의 모습에서 가슴이 찡했다. 소설과 영화 속 모모는 리사 아줌마에 대한 기억과, 이웃들의 사랑으로 자기 앞에 주어진 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슬프지만 또 아름답게. 불행하지만 또 행복하게. 

 

p. 311 사랑해야 한다.

 

 

 

 

 

 

 

 

 

 

 

한강의  소설 [여수의 사랑]

 
한강 작가가 20대 초반에 썼던 단편 소설들을 모은 <여수의 사랑>.
여수가 주는 낭만과 그곳에서의 좋은 추억으로 소설의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 책은 여수의 낭만에 대한 글이 아니었다. 여수는 삶의 고통이 시작된 지점, 아픔을 끊어내는 공간, 영혼의 장소였다.
 
42. 다만 그녀의 지치고 외로운 얼굴에 여수[麗水] 아닌 여수[旅愁]가 어두운 그림자를 끌고 지나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 여수[旅愁] : 객지에서 느끼는 시름이나 걱정
 
작가는 가족을 잃은 상실의 고통으로 인해 안정된 생활이라곤 전혀 할 수 없는 청년들의 외로움과 지난한 삶을 그려낸다. 그녀의 책을 읽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럽다. 이 소설 역시 다른 작품들과 결이 같다. 폭력적인 삶, 끝이 없는 고통,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인간들.
 
 
 
10. 음산한 하늘 아래 나무들은 비바람에 뿌리 뽑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젖은 줄기와 가지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휘어졌다. 노랗고 붉게 탈색된 낙엽들이 무수한 불티처럼 바람 부는 방향으로 흩날렸다. 조금 큰 활열수 들은 의연하게, 줄기가 여린 묘목들과 갈대숲은 송두리째 제 몸을 고통에 바치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도, 그들의 뿌리를 움켜 안은 대지도 놀라운 힘으로 인내하고 있었다.
 
나무는 사람 같다.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는 인간들은 놀랍다.
소설의 주인공 정선과 자흔 역시 고통의 나날들을 견디고 또 견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은?
 
정선, 스물여덟.
그녀는 다섯 살에 어머니를 잃고, 일곱 살에 아버지의 동반 자살 시도로 동생과 아버지는 죽고 그녀 혼자 살아남는다. 이후 여수를 떠나 외가댁에서 지내다, 서울에서 홀로살이 하며 발작적인 결벽증과 위장경련을 앓으며 힘겹게 지내고 있다.
 
자흔, 스물여섯.

두 살 때 강보에 싸인 채 여수발 서울행 열차 안에 버려져 발견된 자흔은 보호 기관을 떠돌다 고아원을 거쳐 입양된다. 양아버지가 죽고 양어머니 밑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후, 여수가 고향이라고 믿으며 여기저기 떠도는 삶을 살고 있다. 
 
둘은 우연히 한 자취방을 공유하며 살게 되지만, 그들이 가진 상처와 고통은 서로에게 힘겨울 뿐이다. 결국 자흔은 떠나고 정선은 여수를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13. 명치끝이 찢기듯이 아파왔다. 적요한 햇빛 속으로 무수한 먼지 입자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아름답구나, 하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먼지는 진눈깨비 같았다. 먼 하늘로부터 춤추며 내려와 따듯한 바닷 물결 위로 흐느끼듯 스미는 진눈깨비......, 여수의 진눈깨비였다.

 

상처의 시절은 단단히 기억하지,
밀려온 진눈깨비조차
참 따뜻한 나라라고
-김영인의 시 [여수]


비가 섞여 내리는 눈. 진눈깨비. 차갑고 우울한 눈비. 정선은 그것을 따뜻하고 아름답다고 느낀다. 삶의 고통이 얼마나 크기에 그 안에서 발견하는 작은 어떤 것에 위로를 받는 것일까.

 


 
25. 이렇게 고요해질 통증인 것을, 지난밤에는, 또 수없이 반복되었던 그 밤들에는 이런 순간을 믿지 못했었다. 마치 밤이 깊을 때마다 새벽을 믿지 못하듯이, 겨울이 올 때마다 봄을 의심하듯이 나는 어리석은 절망감에 사로잡히곤 했던 것이다.
 
폭풍 속에서의 인내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아 견딜 수 없이 괴롭고 절망한다. 그러나, 지나간다. 모든 일들은 어떻게든 끝이 난다. 통증은 가라앉고, 상처는 흐려지고, 슬픔은 추억을 불러일으키며, 생은 죽음으로 끝이 난다. 그렇다면 또 한 번 용기를 내어 견뎌야 하는 것일까.
 
 
 
34. 다만 신기한 것은 때때로 자흔의 얼굴에 떠오르는 웃음이었다. 모든 것에 지쳤으나 결코 모든 것을 버리지 않은 것 같은 무구하고도 빛나는 웃음이 순간순간 거짓말처럼 그녀의 어둠을 지워내버리곤 했다. 그런 자흔을 보면서 나는 종종 어떻게 사람이 저토록 희망 없이 세상을 긍정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의아해지곤 했던 것이었다.
 

62. 마침내 오래 기다렸던 전동차가 라이트를 밝히며 천천히 승강장으로 들어왔을 때, 저마다의 눈에서 어슴푸레하게 빛났다가 이내 스러지는 무감각한 희망들을 나는 보았다.


희망 없이 세상을 긍정한다는 말. 
가난과 부조리에 짓밟힌 사람들의 소박한 웃음, 암으로 죽어가는 한 여인의 의연하고 담담한 표정, 실패의 실패를 경험하고 이제는 다른 길을 선택한 사람의 긍정.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한 것일까. 

웃음 너머에 슬픔, 희망 너머에 체념이, 외로움이, 절망이 느껴진다. 그래서 그 모든 긍정은 슬프도록 아름답다.
 
 
 
64. 차창 밖 승강장에는 얼마나 바람이 불어대는지 승객들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 흩날리는 모습이 보였다. 저마다 빗물에 젖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승객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역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타지에서 고향으로, 혹은 어딘가를 떠나 또 다른 목적지로 돌아온 그들은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 속으로 담담하게 용기 내어 달려간다. 어떤 고통을 마치고 또 다른 시련 속으로 들어가고 있지만, 하나의 산을 넘었다는 안도감이 그들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일까. 그 찰나의 안도감과 평화로 인간들은 숨을 쉬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
 

 

 

 

 

 

 

케네스 로너건 감독의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영화의 주인공 리(케이시 애플렉)는 자신의 실수로 두 딸을 잃고, 아내와 헤어진 후, 맨체스터를 떠나 매사추세츠에서 잡역부로 일하고 있다. 심장병이 있던 형의 부음을 듣고 맨체스터로 돌아가 모든 일을 처리하고 조카 패트릭을 보살펴야 했던 그는, 그곳에서 담담하게 지내보려고 하지만 과거의 고통과 삶을 견딜 수 없어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된다.

 

리가 뱉은 한 마디, "I can't beat it." 


어떤 마무리도, 어떤 결말도, 어떤 해결도 없이 그저 또 살아가야 하는 너무나 인생 그 자체였던 영화. 

떠나는 리는 조카가 언제든 올 수 있게 두 개의 방 혹은 소파배드를 준비하려고 한다. 견딜 수 없는 삶의 한가운데 숨을 쉴만한 그 작은 공간 때문에 리도 패트릭도 또 다음 삶을 이어나가지 않을까.  

 

 

 

한강의 단편 [여수의 사랑]과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가족을 잃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견딜 수 없는 삶을 살아내며 무감각한 희망, 희망 없는 긍정을 반복하며 나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지독히 슬프고, 외롭고, 우울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기 위해 여수로 떠나는 정선과,

견딜 수 없어 맨체스터를 떠나는 리의 삶은, 또 다른 아침을 맞이하듯 다를 것이다.

 

 

 

 

 
 

 

 

 

[서영동 이야기] 조남주 연작소설 (한겨레 출판)

 

[82년생 김지영]의 저자, 조남주의 소설은 우리네 삶의 모습을 덜거나 보탬 없이 자연스럽게 묘사한다. 긴장감과 반전 없이 잔잔하지만, 인간의 욕심과 간사함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서영동을 배경으로 한 일곱 편의 연작소설은 조금씩 연결되어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부모 잘 만나 안정적이고 편안한 생의 기반을 마련하는 이들이 있다. 반면에 가난한 부모 탓에 독립할 자금은커녕 그나마 번 돈을 집에 갖다 바쳐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능력과 운의 기막힌 조화로 자수성가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그 재능이 발목을 잡고 초라한 삶을 살아간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하루하루 고단하게 살아 가지만,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는 것은 너무도 멀리 있는 일이다. 

 

이런 불균형의 세계에서 사람들이 품고 있는 욕망, 이기심 등의 마음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이익을 좇아 반응하며, 갖지 못한 어떤 것들을 선망하고, 남과의 비교로 괴로워한다.

38. 아내는 그만 욕심을 부리라지만 용근은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8월 말의 실거래 정보를 보면 지금 내놓은 가격에도 거래가 될 것 같다. 분명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인데 내 것이었던 것 같고, 빼앗긴 것 같다. 용근은 박탈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봄날아빠)

72. 대답할 수 없었다. 말한다고 네가 이해할 수 있을까.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서울의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 소유주가 된 네가, 작은 아버지의 레스토랑에서 일하다가 큰 아버지의 회사로 이직한 네가, 가족 단톡방의 부모님 해외여행 사진에 무심히 이모티콘을 보내는 네가, 그 모든 일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네가 이해할 수 있을까 (경고맨)

96. 단지 입구 쪽에 작은 평형이 모여 있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은 평형이다. 은주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샐리엄마 은주)

241. 학원 사이트에서 초등부 진도표를 확인하려고 크롬을 열었는데 포털 사이트 메인에 '2030 영끌족, 수도권 아파트 매수세 심상찮아'라는 기사가 떠 있었다. 아영은 기사에 나열된 30대의 사례들이 무척 낯설었다. 너무 다른 세상 이야기라 오히려 황당하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끌어모으면 아파트를 살 수 있는 영혼은 대체 어떤 영혼일까. 나는 영혼마저도 실속이 없네, 웃음이 나왔는데 솔직히 웃기지는 않았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

 

 

 

내 아파트 가격이 오르는 것을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 돈을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나 역시 부동산 사이트를 드나들었던 기억, 남편의 승진과 더불어 생긴 이러저러한 혜택들에 좋아했던 일들이 이렇게 선명한데 말이다. 속물적인 마음을 표현하는 정도야 다르겠지만, 인간은 못나고 미운 마음을 가슴 한 구석에 아슬아슬하게 숨기고 살아간다.

188. 그런데요, 사장님. 저는 전세보다는 자가인 게 좋고요. 작은 집보다는 큰 집이 좋아요. 집값 오르는 거 느긋하게 보면서 그때 무리해서 사길 잘했지, 그때 안 샀으면 지금 넓혀가지도 못했지, 하는 기분도 썩 나쁘지는 않더라고요.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속물이고 투기꾼이라고 생각하시겠죠? 그래서 말하지는 않으려고요. 생각이야 참을 수 없지만 말은 가릴 줄 알거든요. 이게 현대인의 교양이죠. (교양 있는 서울 시민 희진)

109. 지긋지긋하기는 은주도 마찬가지였다. 샐리 엄마도, 새봄엄마도, 그런 여자들 중 하나로 보이지 않으려 애쓰는 생활도, 그런 여자들을 둘러싼 말들도, 오해도, 적의도, 정말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대체 그런 여자는 어떤 여자고 그렇지 않은 여자는 또 어떤 여자인데. (샐리엄마 은주)

 

 

 

그러나 욕심과 이기심, 못나고 미운 마음을 품고 표현하고 심지어 행동한 후, 또 인간이라면 가지게 되는 미안함과 후회, 수치심이 밀려온다. 양심버튼이 작동하는 순간이다. 

143. 부끄러웠다. 무례한 아버지가, 속물 같은 아버지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아버지가, 그리고 그런 아버지와 다르다고 생각했던 자기 자신이. (다큐멘터리감독 안보미)

160. 노인이나 어린이, 장애인 시설을 기피하는 이기적인 주민들. 경화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두통이 밀려왔다.  (백은학원 연합회 회장 경화)

174. 카메라가 있고 없고서가 아니라 그냥 제 처지가 달라졌어요. 그때도 지금도 저는 아무 생각이 없고 이런 제가 한심하고 답답하고 부끄러워요. 부끄럽다고요. 이제 와 부끄럽다고 말하는 것도 부끄러워요. 경화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백은학원 연합회 회장 경화)

 

 

 

인간은 어떻게 디자인되었길래 이러나저러나 괴로운 마음을 안고 고통받으며 살아야 하는 걸까.

피해보지 않겠다고, 내 자식은 굶기거나 고생시키지 않겠다고, 잘 살아보겠다고 했던 것들. 나의 이익을 위해 정의를 모른 척했고, 나의 편안함을 위해 손 내미는 어떤 것들을 마다했던 일들. 이런 속물적인 이기심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은 늘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존재일까.

143. 부족한 것 없이 자랐다. 넘치도록 지원을 받았고, 결혼하고도 부모님께 기대어 살았다. 게다가 아버지의 속물근성을 까발리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커리어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 어쩌면 보미도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속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큐멘터리감독 안보미)

194. 남편의 가치관과 생활습관을 존중하려 노력했고, 딸 하나 아들 하나 잘 키웠고, 회사도 성실하게 다녔다.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은 사람이고 삶이라고, 좋은 아내라고 자부해 왔다. 그런데 남편에게는 희진이 자산 관리를 잘해서, 부동산 투자를 잘해서, 결국 10억을 만들어내서 최고의 아내인 걸까. (교양 있는 서울 시민 희진)

 

 

 

<서영동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고위직도, 기업인도, 정치인도, 연예인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 소설들을 쓰는 내내 무척 어렵고 괴롭고 부끄러웠습니다."라는 작가의 말도 어쩌면 너무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이기에 그랬으리라 짐작한다. 

 

그렇게 다행이기도 불행이기도, 행복하기도 우울하기도, 자랑스럽기도 부끄럽기도 한 삶은 지속된다. 

208. 그렇게 시끄러운 윗집과 예민한 아랫집 사이에서 병들어가는 사이 집값은 계속 올랐다. 이사한 지 1년여 만에 시세는 15억이 되었다. 희진이 집이 좋기도 싫기도 했다. 이 집을 가져서 다행이기도 불행하기도 했다. 행복하기도 우울하기도 했다. (교양 있는 서울 시민 희진)

 

 

 

인간은 약하기에 못나고 미운 마음들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하다. 누구나 그렇다. 그러나 성인(聖人)까지는 아니지만 작은 잘못에도 부끄러워하고, 예쁜 마음씨를 갖고 살려고 노력하는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고, 그렇게 조금씩 나아가고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이기심이 모여 삶이 각박해지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욕심이 더해져 세상은 무너진다. 무너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 2023

 

엄태화 감독의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위기사항에 처했을 때,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던 욕심과 이기심이 얼마나 극도의 이기주의로 발현되는지 엿볼 수 있는 영화이다.

 

대지진으로 하루아침에 서울은 처참히 무너졌고, 그 폐허 가운데 '황궁 아파트' 만이 유일하게 그대로다.

소문을 들은 생존자들이 아파트로 몰려들자 입주민들은 위협을 느끼고 집단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양심과 부끄러움을 버리지 않았던 인물, '명화'(박보영)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책과 영화의 상황과 결은 다르지만, 결국 두 이야기는 맞닿아 있는 듯하다. 

 

 

 

 

 

 

 

 

 

 

한가람 미술관 <반고흐 전시회>에 다녀왔다. 고흐의 인기를 증명하듯 오픈 시간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발권과 관람을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인원을 제한한다고는 했지만 여유로운 관람은 어려웠다. 그럼에도 미술관을 다녀오는 길은 역시나 좋다.

 

전시를 앞두고, 언젠가는 봐야지 다짐만 했던 책을 책꽂이에서 꺼냈다. 질 좋은 종이에 200여 점의 그림이 삽입되어 있는 책은 생각보다 빠르게 집중해서 읽을 수 있었다.

 

 

[고흐] 주디 선드, 남경태 옮김 (한길아트)

 

한 예술가의 삶의 여정대로 기획된 알찬 전시를 본 느낌이었다. 

 

성장기, 1853~80

도시와 농촌 사이에서, 80~83

성숙기, 84~85

파리 시절, 86~88

우키요에의 영향, 87~88

아를에서 그린 인물화, 1988

예술과 병, 89~90

마지막 나날

사후에 얻은 명성

 

 

그의 유명한 작품들과 삶을 영화나 책 등을 통해 많이 알고 있다 생각했지만, 한 사람을 제대로 아는 것은 역시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외에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할까. 

 

디킨스와 공쿠르 형제, 에밀 졸라 등의 책을 좋아했던 고흐는 문학에 심취해 있었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던 듯하다. 책에 나온 지역을 탐방하며 소설 속 주인공의 심정으로 전망을 바라보는 그를 상상하니 왠지 친근하고 짠하다.

 

70. "예술은 기질을 통해 바라본 자연의 한 측면"이라는 졸라의 유명한 명제는 반 고흐의 생각에 딱 들어맞았으며, 전통을 버리더라도 자신에게 충실하고 싶다는 그의 입장을 지지해 주었다.

 

83. 반고흐는 시각적 유사성보다 언어적 유사성을 강조하면서 종교는 물러가지만 신은 남는다"는 빅토르 위고의 말을 써 보냈다. 그는 자신이 그린 장면의 의미를 이렇게 말했다. " 신앙과 종교는 썩어버리지만...... 농부들의 삶과 죽음은 마치 교회 안뜰에서 규칙적으로 자라고 시드는 풀과 꽃처럼 영원하게 마련이지." 

 

208. 그런 회화에서 색채는 화가의 감정을 담고 있으며, 음악과 같이 비형상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감상자에게 전달된다. 아를에서 반 고흐는 "회화를 베를리오즈나 바그너의 음악처럼 상심한 마음을 위로하고 위안을 주는 예술로 만들고자"결심했다.

 

 

 

독립적이고 고집이 셌지만 반면에 예술가들의 협동에 관심을 보였고, 고갱의 확고한 자신감에 매료되어 있으면서도 또 이따금 회의에 빠져 갈등을 피하지 못했던 고흐 역시 삶은 답을 낼 수 없는 어려운 것이었다. 

 

희망을 꿈꾸고 낙담하고, 자신감에 넘쳐있다 실망하는 그의 크고 작은 롤러코스터 인생 속에서 나를 본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누군가의 조언대로, 내 앞에 놓인 작품을 있는 그대로, 편견 없는 시선으로 감상하려다가도, 나는 감히 고흐의 마음을 짐작하거나, 상황을 그려보거나, 주변 인물들의 영향을 추측하거나 하는 등 인간적인 연민으로 그것들을 바라보는 나를 발견한다. 어느 누군가의 우주를 완벽히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으면서 또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4. 부풀려진 대중적 상상력의 페르소나를 제한하고 현실적인 면모를 찾아내는 것이 1980년대 이래 반 고흐 연구의 주류였고 또한 이 책의 목적이기도 하다.

 

5. 그의 그림이 큰 인기를 누리는 이유는 일단 정서가 뒷받침된 즉흥성 때문이겠지만, 실상 그의 작품은 강렬한 목적의식을 지닌 성찰적이고 지적인 산물이다. 

 

 

 

 

별이 빛나는 밤 (1889) / 캔버스에 유채 / 뉴욕 현대미술관

 

 

유럽 화가들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사이프러스 나무는 늘 인상적이었다. 이 나무는 고흐의 작품에도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그려져 있다. 너무도 유명한 그림이지만, 책에 실린 설명을 읽으니 또 다르게 다가온다.

 

257.

별이 빛나는 밤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하늘 풍경은 죽음으로써 갈 수 있는 별에서의 고결한 삶에 대한 꿈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별 아래 작고 어두운 마을은 속세의 삶이 더 원대한 범위에서는 상대적으로 왜소함을 나타내며, 그 삶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을 일깨운다. 

[별이 빛나는 밤]은 신앙을 통해 그 너머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시도를 나타낸다.

사이프러스는 지중해 문명권의 묘지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전통적으로 슬픔(색이 어둡기 때문에)과 불멸(향기가 있는 상록수 이기 때문에)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생레미에서 반 고흐는 " 내 마음에는 늘 사이프러스가 있다"라고 말했다. [별이 빛나는 밤]에 나오는 사이프러스는 죽음을 상징하는 기차 같은 교통수단을 의미하는 듯하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별에 갈 수 없으므로" 그것은 우리를 별까지 데려다주는 수단이다.

달빛이 비치는 [별이 빛나는 밤] 은 칙칙하고 제한된 속세의 영역 너머, 에너지와 빛으로 맥동하는 무한성 속의 삶을 가정한다.

 

 

조지 큐커 감독의  [Lust for Life, 열정의 랩소디] ,1956

 

 

 

1956년 제작된 전기영화 <열정의 랩소디>는 탄광지대 전도사로 부임한 고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커크 더글라스가 고흐로, 안소니 퀸이 고갱을 연기한 영화는 그의 인생을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다. 고흐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유럽의 낭만적인 장소들과,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고흐의 그림들과 동시대 예술가들의 작품들은 정말 아는 만큼 보인다. 

 

 

책과 전시 그리고 또 한 편의 영화, 모두 같은 인물에 대한 탐구이지만 묘하게 다른 느낌으로 다가와 서로 시너지 효과를 준다. 그림 그리는 것을 사랑했고, 작품을 통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주고 싶었던 그의 열정과 사랑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 [맡겨진 소녀] & 콤 베어리드 감독의 영화 [말없는 소녀]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책.

[맡겨진 소녀, Foster ]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아 늘 지쳐있는 엄마, 다정하지도 성실하지도 않은 무책임한 아빠.

엄마의 출산을 앞두고 소녀는 엄마의 먼 친척 집에 잠시 맡겨진다. 

아빠와 함께 낯선 곳에 도착한 소녀는 집에서 경험해 본 적 없는 킨셀라 아주머니의 다정함과 따스함을 느끼며 묘한 기분이 든다.

 

17. 아빠가 나를 여기 두고 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지만 내가 아는 세상으로 다시 데려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든다. 이제 나는 평소의 나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다.

 

24. 아주머니의 손은 엄마 손 같은데 거기엔 또 다른 것, 내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것도 있다. 나는 정말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지만 여기는 새로운 곳이라서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

 

숨 막히던 집에서 가족들과 소통하며 지낼 수 없었던 소녀는 최소한의 말만을 하며, 많은 비밀을 가지고 지냈을지도 모른다. 그런 환경은 소녀를 눈치 보고 주눅 들게 만들었고, 두려움에 갇히게 했을 것이다. 소녀는 두렵지만 또 어떤 호기심으로 새로운 곳에서의 삶에 용기를 내어본다. 

 

27. 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야. 아주머니가 말한다. 우린 부끄러운 일 같은 거 없어도 돼.

 

30.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잃은 킨셀라 아저씨는 처음에는 소녀에게 무뚝뚝했지만 점점 관심과 애정을 주게 되고, 받아본 적이 없는 보살핌과 사랑은 소녀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인다. 

 

69.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75. 바로 그때 아저씨가 두 팔로 나를 감싸더니 내가 아저씨 딸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끌어안는다.

 

찬란했던 여름날은 지나가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다가온다.

부모 그 이상이었던 아주머니와 아저씨 그리고 정겹던 주변의 많은 것들은 소녀를 또 얼마큼 변하게 만들었고 성장시켰다. 

 

79.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불을 빤히 보면서 울지 않으려고 애쓴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 정말 오랜만이고, 그래서 울음을 참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 이제야 떠오른다.

 

83. 물건을 하나하나 모으면서 나는 우리가 함께한 나날을, 우리가 물건을 샀던 곳과 이따금 나누었던 대화를, 그리고 거의 항상 빛나고 있던 태양을 떠올린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은 [말없는 소녀, The Quiet Girl]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67. 해야 하는 말은 하지만 그 이상은 안 하죠. 이런 애들이 많으면 좋을 텐데요.

 

73. 넌 아무 말도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렵.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96. 아무 일도 없었어요. 다른 사람도 아닌 엄마가 묻고 있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만큼 충분히 배웠고, 충분히 자랐다. 입을 다물기 딱 좋은 기회다.

 

영화를 보면서도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며, 때로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보석 같은 일인지 깨달았던 순간이 몇몇 있었다.

 

킨셀라 부부의 숨겨진 아픔을 소녀에게 함부로 얘기하고, 그들의 생활을 꼬치꼬치 묻던 이웃 아주머니.(제발 말 좀 그만했으면 하고 생각했다.)

딸을 잘 보살펴 준 킨셀라 부부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 딸이 감기에 걸렸다며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고 불평한 아빠.(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감자를 선물로 주고 언제든 소녀를 다시 보내도 된다며 길을 떠난 킨셀라 부부.(훌륭한 품격이 느껴지던 순간)

 

영화는 킨셀라 부부가 있는 곳의 빛과, 소녀 집의 어둠을 대비시키며 그녀의 참담한 상황을 더 짙게 드러낸다.

가난으로 고통받고 돌볼 것들이 많은 엄마는 자식들에게 살갑게 대하거나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다. 그러나 말과 태도에 최소한의 예의가 느껴져 연민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빠는 대책없는 최대의 빌런이었다.

 

영화의 아름다운 장면들 색감들 빛들. 책의 그림 같은 묘사 장면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어 좋았다.

영화 역시 잔잔하게 흘러가다 후반부에 몰아치는 엔딩이 너무 인상적이다.

 

떠나는 킨셀라 부부를 향해 소녀는 전속력으로 달려가 아저씨의 품에 가득 안긴다. 그리고 그 따스한 품에서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아빠를 바라보며 말한다. 경고한다.

 

98.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책도 영화도 단숨에 읽고 한 호흡에 볼 수 있는 분량이지만 그 여운은 꽤 오래 지속된다.

자식을 낳고 제대로 보살피지 않는, 보살피지 못하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가. 가난과 무지, 환경과 제도, 상황과 인격 등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기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소녀가 경험한 그 여름의 추억들과 따스한 빛들 그리고 사랑으로 앞으로의 많은 날들을 보낼 수 있기를, 소녀가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응원한다.

 

 

 

 

 

 

 

 

 


시그리드 누네즈의 장편소설 [어떻게  지내요] & 파스칼 포자두 감독 [마지막 레슨]
 
 
영화 [마지막 레슨]의 주인공, 마들렌은 92세의 생일날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한다. 더 이상 내 몸을 어찌할 수 없을 때, 나의 품위와 존엄을 지킬 수 없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말이다. 그 선언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던 가족들은 저마다 혼란스러워한다.
 
결국, 마들렌의 딸 디안은 의미 있는 시간들을 보내며 엄마 곁을 지켜주고, 아들 피에르는 끝까지 괴로워하며 그녀의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한다. 디안과 피에르 각자의 생각과 방식대로 엄마를 사랑하는 진심이 느껴져, 마들렌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들렌의 죽음은 슬프지만 또 아름답다.
 
"내 눈물은 어디로 갔을까?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다. 이것이야말로 엄마가 준 마지막 레슨이다."
 
 
 
소설 [어떻게 지내요]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삶을 스스로 끝내려고 하는 친구와, 그 마지막을 함께 보내게 된 작가의 이야기다. 소설 속에 나오는 다양한 이야기들의 주제는 무겁고 비관적이며,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들이다. 
그럼에도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도 슬픔이 와락 몰려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삶의 그 어떤 면들을 인정하게 되는 편안한 느낌이 들었달까?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특징과 매력인 듯하다. 
 
암에 걸린 엄마의 치료를 두고 "엄마가 결정할 일이죠." 그저 이렇게 말하는 친구의 딸. 결국, 딸에게 삶의 마지막 계획을 알리지 못한 모녀의 거리. / 아내가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 삶에 활기가 생기고 미소가 많아진 한 남편 이야기.
이처럼 무관심하거나 서로를 증오하는 가족들이 얼마나 많은가. (영화 [마지막 레슨]의 마들렌 가족은 어쩌면 너무 이상적인 가족일지 모른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사람들은 그저 상투적인 위로나, 그 사람의 감정을 부정하며 긍정적인 말만 되풀이한다.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그러나, 그런 일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166.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했다.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서 내게도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생각하는 사람과 내게는 절대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생각하는 사람. 첫 번 째 유형의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견디며 살고,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
 
가족과 관련된 슬픈 이야기는 맘이 저리게 아프다. 누구나 세월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는 사건들이 왜 없겠는가. 
 
195. 절대 씻어낼 수 없는 삶의 얼룩이라고 표현했다. 어느 때건 예기치 않게 불쑥 밀려드는 슬픔, 특히 행복하고 평온한 순간이면 그렇게 찾아들어- 그 순간들을 망쳐놓는 슬픔이라고.
196. 그런데 어떤 것들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는 거야. 살날이 얼마 안 남았음을 아는데도. 그러고 나면 그대로 벌어진 상처가 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암 치료를 거부하고 삶을 끝내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선 안된다고, 버터야 한다고, 이겨낼 수 있다고 희망의 말들을 한다. 무슨 영웅 서사처럼 말이다.  (딱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183.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권리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123. 이것이 싸우는 내 나름의 방식이라는 걸 사람들도 이해해야 해. 내가 먼저 나를 없애버리면 암이 나를 없앨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데 기다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이 모두를 이해하고 내 편이 되겠다고 약속해 줄 사람, 내가 잠든 사이에 약을 변기에 넣고 내려버리는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사람이야.
 
211. 가능한 한 세상에 누를 끼치지 않고 내 식대로 죽고 싶었다고. 평온함을 바랐어. 질서 정연함을 바랐고. 주변이 평온하고 질서 정연하기를 바랐을 뿐인데. 차분하고 말끔하고 품위 있고, 심지어- 안 될 게 뭐야? -아름다운 죽음. 내가 생각한 건 그것이었는데.
 
주인공은 친구의 결정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묵묵히 그녀의 곁을 지켜낸다. 외롭지 않도록, 웃을 수 있도록, 기쁨과 슬픔을 간직할 수 있도록, 안락하고 간결한 마무리 할 수 있도록 말이다. 
 
239. 우연의 일치. 요즘 새로 읽고 있는 책에 죽어가는 사람을 지켜보는 경험을 사랑에 빠질 때의 강렬함과 비교한 대목이 있다.(......) 이 모든 일이 먼 과거의 기억이 됐을 때는 과연 어떨지 알고 싶다. 더없이 강렬한 경험이 결국엔 얼마나 자주 꿈과 비슷해지는지, (......) 인생은 한갓 꿈일 뿐. 생각해 보라. 그보다 더 잔인한 관념이 과연 있을 수 있나?
 
친구의 죽음과 반대로 그녀는 또 살아가야 한다. 분명 이전의 그녀와 얼마큼 또 달라진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다.
 
213. 그게 사는 거야. 무는 일이 있건 삶은 이어진다. 엉망의 삶. 부당한 삶.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는 삶. 내가 처리해야 하는.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122. 어떻게 지내요?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것이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의 진정한 의미라고 썼을 때 시몬 베유는 자신의 모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프랑스어로는 그 위대한 질문이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
 
"친절하라. 네가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으니." 소설 속 언급된 플라톤의 이 말처럼, 
가족에게, 친구와 이웃에게, 마주치는 모든 이들에게 "어떻게 지내요?" 다정하고 상냥하게 진심을 전하는 것이 파괴된 지구에서 시끄러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게 무슨 일이지? 공포로 심장이 쿵쾅거린다. 곧 끝날 거야. 이 동화 같은 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가장 슬픈 이 시간은 지나갈 거야. 그러면 혼자가 되겠지."
 

이번 주 주말, 소설 <어떻게 지내요> 를 영화화 한 <룸 넥스트 도어>를 볼 예정이다. 대단한 두 배우의 연기와 함께 소설의 내용을 어떻게 전달할 지 무척 기대되는 작품이다.
 

 

 

 

 

영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ROH 시네마 기획전, <영화와 민주주의>에서 영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를 관람했다.

 

1973년 9월 11일 시작된 칠레 군사 쿠데타를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문민정부를 부르짖던 아옌데 신사회주의 정권이 미군의 지원을 받는 피노체트 장군에 의해 무너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우리나라와 너무도 닮아있는 비참한 상황을 두 시간 가까이 힘겹게 지켜보았다. 영화 후 이어진 GV는 중남미 역사와 현실 등에 대해 알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다.

프랑스와 불가리아에서 촬영되어, 1975년 세상으로 나온 영화에 대해 놀라울 따름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은 네루다의 장례식으로 끝이 난다. 

책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다시 꺼내 들게 만들 정도로 이 장면은 나에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1971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였고, 칠레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시인. 1969년 대통령 후보에 지명되었지만, 아옌데 대통령을 추대하고 후보에서 사퇴했던 정치인 파블로 네루다. 

 

소설은 네루다의 열정적이고 혁명가적 기질보다는 유머러스하고 인간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춘다. 바닷가 시골마을, 이슬라 네그라의 우편배달부 마리오의 설정이 그의 무거움을 가볍게 만들어 준다.

그러나, 서문에 쓰인 대로 이 이야기는 열광적으로 시작해서 침울한 나락으로 떨어지며 끝을 맺는다.

 

 

51. 천둥이 몰아치듯 정치가 나의 일을 중단시켰다. 민중은 내게 삶의 교훈이 되어왔다. 나는 민중에게 다가갈 수 있다. 시인 특유의 수줍음을 띠고, 수줍어하는 사람에게 두려워하면서. 그러나 민중의 품에 안기고 나면 내가 변하는 것을 느낀다. 나는 대다수 참된 민중의 일부고 인류라는 거대한 나무에 달려있는 이파리 중 하나인 것이다.

 

131. 정확히 백 년 전, 가련하지만 찬란한 시인, 처절하게 절망하던 한 시인이 이런 예언을 썼습니다. "여명이 밝아올 때 불타는 인내로 무장하고 찬란한 도시로 입성하리라." 저는 예지자 랭보의 이 예언을 믿습니다. 저는 지리적으로 철저히 격리된 나라의 알려지지 않은 한 지방 출신입니다. 가장 버림받은 시인이었고, 저의 시는 지방적이고 고통스럽고 비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항상 인간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결코 희망을 잃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기 도달했습니다. 시와 깃발을 가지고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미래는 랭보의 말대로라는 것을 노동자, 시인 그리고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불타는 인내를 지녀야만 빛과 정의와 존엄성이 충만한 찬란한 도시를 정복할 것입니다. 이처럼 시는 헛되이 노래하지 않았습니다. 

 

 

아옌데 정권이 무너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상황 속 죽음을 맞이한 네루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불타는 인내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었을까. 빛과 정의와 존엄성은 결국 헛된 희망이었을까.

 

시인의 수많은 메타포들은 민중들을 일으켜 세운다. 네루다의 장례식은 쿠데타 이후 최초의 항의 시위가 되고, 17년간의 긴 독재정권은 결국 무너지고 민주주의는 실현된다. 여전히 빛과 정의와 존엄성은 희미하지만 또 그렇게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믿고 싶다. 고단한 사람들이 인내의 불을 꺼트리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소설을 영화화 한 <일 포스티노>를 보고 싶다. 

 

 

 

 

 

 

 

 

 
 

김태용 감독의 영화 [만추],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

 
영화 [만추]에서 안개 낀 시애틀을 보며, 소설 [무진 여행]의 무진읍이 떠올랐다.
 
남편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7년째 감옥에 수감 중인 애나(탕웨이)는 엄마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 3일간의 외출을 얻는다. 
시애틀에서 자유와 일탈의 기회를 얻었지만, 그 시간 속에는 엄마의 장례식, 피하고 싶은 인연과의 해후, 가족들의 다툼을 마주해야 하는 고통 또한 존재한다. 
 
희중은 승진을 앞두고 잠시 긴장을 풀기 위해 고향인 무진행 버스를 탄다.
무진은 현실의 도피처였지만, 그의 어두운 젊은 시절을 상징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애나에게 시애틀은, 희중에게 무진은, 유쾌하지 않은 장소임에도, 또 탈일상이 가능한 양가적인 장소이다. 
희중과 애나는 짙은 안갯속에서 현실의 나를 부정하며 술 취한 듯, 내가 아닌 듯, 어떤 용기를 내어본다.
 
허름한 옷의 애나는 한 상점에서 화려한 옷과 귀걸이를 사고 짙은 립스틱을 바른 채 거리를 거닌다.
수감생활의 원인이 되었던 옛 애인 왕징에게 억울함에 대해 울부짖으며 소리도 쳐본다.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훈(현빈)과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감옥으로부터 걸려오는 감시 전화는 그녀의 현실을 일깨운다.
 
무진으로 내려온 희중은 자신과 닮아있는 인숙에게 연민을 느끼고 충동적인 사랑을 하게 된다.
그러나, 희중에게 온 아내의 전보  "27일회의참석필요, 급상경바람 영" 
 
결국, 현실은 피할 수 없고, 맞서지 않으면 안 되는 무서운 것이다.
 
짧게 지나가는 가을, 그중에서도 가을의 끝자락 만추.
찰나가 되어 희미해질 헛된 희망들은 지독히도 슬프다.
 
" 2537 지금 돌아가는 길입니다"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사람들은 어디를 떠나 어디로 돌아가는 것일까?
반짝 찾아온 햇살은 금세 안개와 비로 얼룩진다. 기다렸던 햇살은 언젠가는 또 내리쬔다. 햇살 속에도 슬픔을, 안갯속에도 희망을 가지고 살고 있는 사람들은 쓸쓸하다. 완전하지 않은 인간에게 완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영화의 마지막, 출소한 애나는 훈과 왔었던 카페에 앉아있다. 그녀와 놀랍도록 비슷한 처지의 훈을 만났을까?
소설의 마지막, 희중은 서울행 버스를 타고 무진을 떠난다. 상경 후, 그의 젊은 시절과 닮아 연민을 느꼈던 인숙과 다시 만남을 가졌을까?
 
카페 문이 여닫히지만 그녀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없다. It's been a long time. 혼잣말을 건네는 그녀.
인숙에게 부치지 못하고 찢은 편지.
 
그 끝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인간들은 안갯속에서 휘청거리다, 자명종처럼 울리는 현실자각을 하며 깨어나지만, 안갯속에서 겪은 경험들이 결코 사라지진 않는다. 환멸과 슬픔으로 가득한 세상이지만 우리는 또 성장하게 될 것이다. 
 
짙은 안개 그리고 쓸쓸함이 닮아있는 두 작품은 긴 여운이 남는다.
 
 
 
 
 
 
 

 

 

 

 

 

 

황정은의 소설 [디디의 우산] & 조현철 감독의 영화 [너와 나]

 

 

<d>,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었다> 두 편의 연작 소설이 실려있다.

선물 받은 책이었고, 제목만으로는 어떤류의 소설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채, 붉은 표지에 매료되어 읽기 시작했다.

 

 

 

소설은 혁명에 관한 이야기였다.

 

1950. 6.28 한강대교 폭파로 붕괴된 개개인의 두개골

1960년대 후반 세운상가의 화려한 완공식과, 세월이 지난 후 상가 재생 프로젝트에서 제외된 상인들

1983. 2.25 북한의 공군 이웅평 대위가 북쪽 삶에 환멸을 느끼고 남한으로 귀순한 사건

1996년의 연세대 사태로 고립된 학생들

2008. 6.10 명박산성

2009. 1.20 용산구 남일당 건물 철거민들의 농성과 사망

2014. 4.16 세월호

2016 수차례의 촛불집회

그리고,

2017. 3. 10. 박근혜 대통령직 파면

 

열차 안 차창으로 지나치는 풍경처럼 역사적인 사건들이 배경이 되어 소설을 이끌어 간다.

 

 

 

조현철 감독의 영화 [너와 나] 생각을 했다.

2014년 4월에 대한 이야기를 절절한 방식으로 추모하고 위로한 대단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정동진 독립 영화제를 시작으로, 최근 N차 관람을 했다.

 

 

 

 

 

 

부조리한 현실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소극적 혹은 적극적으로, 시위 참여 혹은 주도로 각자의 촛불을 손에 들고 거대한 무언가에 소리치며 대항한다. 각자가 생각하는 수준의 혁명가가 되어 혁명을 기대하고, 때로는 약간의 위안과 찰나의 희망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혁명은 바르게 진행되고 있는가?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되고 있는가?

우리가 들었던 촛불은 개개인의 삶을 변화시켰는가?

 

 

 

영화 [너와 나]에서 세미가 수학여행 가기 전 날, 엄마 아빠와 국수를 먹는 장면이 나온다.

세미가 자신의 태몽을 물어보자, 엄마는 빨간 수박 이야기를 한다. 세미가 '수박은 다 빨갛지' 하며 시시하게 생각하자, 엄마는 수박이 정말 선명하고 빨갰다고, 아빠는 '우주에 단 하나' 밖에 없는 빨간색이라고 이야기해 준다.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빨간색.

단 하나의 우주가 파괴되었다. 그 유일했던 것이. 

 

개개인의 맥락이 없는, 나와는 무관한, 내가 소외된 상태로 전개되는 혁명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냥 조용히 아닌 척하고 망해가는 것보다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박조배는 금방이라도 세계가 망할 것처럼 이야기했으나 디는 의아했다. 망한 다고? 왜 망해. 
내내 이어질 것이다. 더는 아름답지 않고 솔직하지도 않은 삶이. 거기엔 망함조차 없고....... 그냥 적나라한 채 이어질 뿐.

 

 

 

진공관은 소리를 좌우한다고 그는 말했다.
정류와 증폭이라고..... 들어봤나? 정류는 산만하게 흩어진 것을 한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것이고, 증폭은 신호의 진폭을 늘리는 것인데 말이야. 이 앰프에서 그걸 하는 게 얘네들이야. 이게 제대로 켜져야 이 앰프가 사는 것이고, 모든 게 제대로 흐르는 거라고.

 

디는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느꼈던 진공을 생각하고, 문득 흐림이 사라진 그 공간과 그 너머, 거기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과 디에게는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다른 장소, 다른 삶, 다른 죽음을 겪은 사람들.
그들은 애인을 잃었고 나도 애인을 잃었다. 그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디는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무엇에 저항하고 있나.
하찮음에 하찮음에.

 

 

 

 

세운상가에서 진공관 앰프를 수리하는 여소녀의 낡은 가게에서, d는 불을 밝힌 유리 벌브에 무심히 손을 대어 본다.

 

디는 놀라 진공관을 바라보았다. 이미 손을 뗐는데도 그 얇고 뜨거운 유리막이 달라붙어 있는 듯했다. 통증은 피부를 뚫고 들어온 가시처럼 집요하게 남아 있었다.
우습게 보지 말라고 여소녀가 말했다. 그것이 무척 뜨거우니, 조심을 하라고.

 

 

 

누구도 죽지 않는 이야기를  꿈꾸는 이 소설들이 그의 손에서 아직 완결되지 않았으므로, 혁명으로 이루어진 날은 오늘이 아닐 것이다. 일상 속에서 사소하게 치부되어 온 문제들과 지워져 온 존재들을 무한히 많은 혁명들이 계속되어야 하고, 정말 혁명이 도래하는 그날에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는 대신에 모두가 말하게 될 것이다. <문학 평론가 강지희>

 

 

 

하찮음에 하찮음에 끝없이 저항하고 있는 우리는, 낡아 거무스름하게 그을린 유리 벌브 안 빛처럼, 정류와 증폭을 거쳐 우습게 보지 못할 강력한 빛을 뿜어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건네는 이 책. 

 

무한한 혁명. 

진실된 관심, 글, 박수, 응원, 기부, 참여, 시간, 노동, 연대의 힘은 결코 하찮거나 우습지 않다. 

그러니 계속되어야 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