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절판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송동준 옮김)]으로 몇 번을 읽었던 책이다. 다른 번역본이 궁금해 구입했다.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이재룡 옮김은 이전 책 보다 읽기 수월했다. 읽고 이해하기 쉬운 번역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여러 번 읽은 책이라 그런 건지 모르겠다. 아마 둘 다 아닐까 싶다.
다 읽고 나면 토마스,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 네 명의 인물들 중, 소설의 끝에 홀로 살아남은 사비나가 주인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프란츠는 진리 속에서 산다는 것을 유리집에 사는 것처럼 아무 비밀이 없는 것이라 여겼다. 그는 사비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아내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사비나에게로 간다. 그러나 사비나는 자신을 관찰하는 목격자가 있는 한 거짓 속에서 살 수밖에 없고, 은밀한 삶만이 진리 속에서 사는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사랑을 감추는 것만이 진리 속에서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공개적으로 변한 사랑은 무거워졌다. 사비나는 프란츠를 떠난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마이클 니콜스 감독의 영화 [클로저(Closer)]
영화 [클로저]에서 진실에 대한 서로의 생각이 달랐던 앨리스와 댄.
앨리스는 댄을 사랑하는 것이 진실이었다. 댄은 앨리스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며 그녀에게 래리와의 하룻밤에 대한 진실을 요구한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사실을 말할 수 없었던 여자, 중독처럼 진실을 강요했던 남자. 결국 그녀는 그를 떠난다. 새로운 삶을 찾아, 자유와 행복을 찾아. 사비나가 프란츠를 떠나는 대목에서 이 영화가 생각났다.
소설에서 사비나는 삶에 부여하는 의미와 허영과 키치의 무거움을 배제하려고 했다. 가족도 사랑도 조국도 배반하며 가벼움을 찾아 떠났지만 사비나는 공허감을 느꼈다. 의미를 두지 않으려 애쓰고 살았지만 의미가 사라진 세계의 무한한 가벼움도 그녀에게 완벽한 인생은 아니었다.
p.201 한 인생의 드라마는 항상 무거움의 은유로 표현될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 어깨에 짐이 얹혔다고 말한다. 이 짐을 지고 견디거나, 또는 견디지 못하고 이것과 더불어 싸우다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그런데 사비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 일도 없었다. 그 후 그 남자가 그녀를 따라왔던가? 그가 복수를 꾀했던가? 아니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이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영화의 또 다른 인물인 안나는 진실을 요구하는 남편 래리와 연인 댄에게 수치스럽지만 사실 그대로를 말한다. 모든 것을 투명하게 밝히고 인생을 무겁게 받아들이며 살고 싶었던 그녀는 결국 래리의 곁에 남는다. 누가 더 행복한가. 엘리스가? 안나가? 무엇이 좋은 것인가. 가벼운 것이? 무거운 것이?
p.391 저주와 특권, 행운과 불운, 사람들은 이런 대립이 얼마나 서로 교체 가능한지를 인간 존재에 있어서 양극단 간의 폭이 얼마나 좁은 지를 이보다 더 구체적으로 느낄 수는 없었다.
p.358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유럽 역사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아 역사도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보헤미아 역사와 유럽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연기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팬텀 스레드]
몇 개의 우연으로 토마시와 테레자는 사랑에 빠진다. 여성과의 관계를 즐기며 삶을 가볍게 사는 토마시와, 토마시를 운명으로 여기는 테레자. 사랑의 약자인 테레자는 끊임없는 그의 외도에 질투를 느끼며 고통스러워한다. 토마시는 테레자가 그의 유일한 사랑임을 수없이 말해보지만, 그럼에도 고통스러운 그녀를 바라보며 괴롭다. 둘은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에게 가시 같은 존재가 된다.
p.232 그녀는 세상일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매사를 비극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육체적 사랑의 가벼움과 유쾌한 허망함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가벼움을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p.130 당신이 늙기를 바라. 지금보다 열 살 더, 스무 살 더.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은 당신이 나약하길 바라. 당신도 나처럼 나약하길 바라였다.
저명한 외과 의사, 돈후앙 같은 인기를 가진 토마시는 사랑의 강자였다. 테레사는 그가 늙기를 바란다. 약해지기를 바란다. 그는 권위 있는 의사에서 소도시 작은 병원으로, 유리 청소부로, 트럭 운전사로 끝없이 추락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들은 프라하에서 스위스로, 다시 스위스에서 체코로 그리고 마침내 어느 시골 지방에 정착하게 된다. 테레사는 마침내 토마시를 온전히 차지할 수 있게 된다. 그의 약함 앞에서.
p.500 그녀는 꼼짝도 않고 서서 그로부터 눈길을 돌릴 수 없었다. 토마시가 늙어 보였다. 머리카락에 회색이 감돌았고 어색하게 일하는 그 서툰 모습이란 트럭 운전사가 된 의사의 어색함이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젊지 않은 한 남자의 서투름이었다.
p.502 테레자의 약함은 그가 더 이상 강하지 않아 그녀 품에서 토끼로 변할 때까지 매번 그에게 타협을 강요했던 공격적인 약함이었다.
테레사는 토마시의 가볍고 유쾌한 인생을 그녀 자신의 무거움으로 눌렀다.
토마시의 강함은, 테레자의 나약함을 더 짓밟았다.
영화 [팬텀 스레드]에서 레이놀즈는 연인 알마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알마는 그가 전부인 사랑을 한다. 사랑에 약자였던 알마는 사랑에 위기감을 느끼자 레이놀즈를 약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독버섯을 요리해 준다. 독의 기운이 그를 병들게 하고 결국 알마의 보살핌이 필요하게 되면, 그는 온전히 그녀만을 의지하고 사랑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약하게 만들기 위해 독버섯을 주는 것에 진저리 치면서도 묘하게 공감이 갔던 영화다.
사랑의 약자는, 나보다 잘나고 인기 많은 이성에 대한 질투를 멈출 수 없다. 그가 약해지기를, 나만의 토끼가 되기를 바라는 이상하고 묘한 감정이 있다.
테레자와 알마는 약한 존재였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그들과 같이 나약하게 만들었고 사랑을 쟁취했다. 토마시와 레이놀즈는 강한 존재였지만 사랑을 위해 나약해지기를 무릅쓴다. (음식에 독버섯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먹는 레이놀즈역의 다이엘 데이 루이스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 사랑한다. 고통스럽지만 또 행복하게.
p. 506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몇 개의 우연이 사랑을 만들고, 한 마디의 진실이 사랑을 부숴버리며, 고장 난 타이어 하나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며, 한 사람의 무지가 역사를 만드는 이 삶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다. 그러나 가벼움도 무거움도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며 행복과 슬픔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삶이라면, 너무 무겁게도 너무 슬프게도 살지 말기를.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행복하게 살기를. 때로는 삶의 의미에 아름다운 거짓말을 보태며 기억하기를. 참을 수 없는 삶의 가벼움 안에서도.
p. 415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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