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키건의 소설 [맡겨진 소녀] & 콤 베어리드 감독의 영화 [말없는 소녀]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책.
[맡겨진 소녀, Foster ]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아 늘 지쳐있는 엄마, 다정하지도 성실하지도 않은 무책임한 아빠.
엄마의 출산을 앞두고 소녀는 엄마의 먼 친척 집에 잠시 맡겨진다.
아빠와 함께 낯선 곳에 도착한 소녀는 집에서 경험해 본 적 없는 킨셀라 아주머니의 다정함과 따스함을 느끼며 묘한 기분이 든다.
17. 아빠가 나를 여기 두고 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지만 내가 아는 세상으로 다시 데려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든다. 이제 나는 평소의 나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다.
24. 아주머니의 손은 엄마 손 같은데 거기엔 또 다른 것, 내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것도 있다. 나는 정말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지만 여기는 새로운 곳이라서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
숨 막히던 집에서 가족들과 소통하며 지낼 수 없었던 소녀는 최소한의 말만을 하며, 많은 비밀을 가지고 지냈을지도 모른다. 그런 환경은 소녀를 눈치 보고 주눅 들게 만들었고, 두려움에 갇히게 했을 것이다. 소녀는 두렵지만 또 어떤 호기심으로 새로운 곳에서의 삶에 용기를 내어본다.
27. 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야. 아주머니가 말한다. 우린 부끄러운 일 같은 거 없어도 돼.
30.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잃은 킨셀라 아저씨는 처음에는 소녀에게 무뚝뚝했지만 점점 관심과 애정을 주게 되고, 받아본 적이 없는 보살핌과 사랑은 소녀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인다.
69.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75. 바로 그때 아저씨가 두 팔로 나를 감싸더니 내가 아저씨 딸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끌어안는다.
찬란했던 여름날은 지나가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다가온다.
부모 그 이상이었던 아주머니와 아저씨 그리고 정겹던 주변의 많은 것들은 소녀를 또 얼마큼 변하게 만들었고 성장시켰다.
79.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불을 빤히 보면서 울지 않으려고 애쓴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 정말 오랜만이고, 그래서 울음을 참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 이제야 떠오른다.
83. 물건을 하나하나 모으면서 나는 우리가 함께한 나날을, 우리가 물건을 샀던 곳과 이따금 나누었던 대화를, 그리고 거의 항상 빛나고 있던 태양을 떠올린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은 [말없는 소녀, The Quiet Girl]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67. 해야 하는 말은 하지만 그 이상은 안 하죠. 이런 애들이 많으면 좋을 텐데요.
73. 넌 아무 말도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렵.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96. 아무 일도 없었어요. 다른 사람도 아닌 엄마가 묻고 있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만큼 충분히 배웠고, 충분히 자랐다. 입을 다물기 딱 좋은 기회다.
영화를 보면서도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며, 때로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보석 같은 일인지 깨달았던 순간이 몇몇 있었다.
킨셀라 부부의 숨겨진 아픔을 소녀에게 함부로 얘기하고, 그들의 생활을 꼬치꼬치 묻던 이웃 아주머니.(제발 말 좀 그만했으면 하고 생각했다.)
딸을 잘 보살펴 준 킨셀라 부부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 딸이 감기에 걸렸다며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고 불평한 아빠.(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감자를 선물로 주고 언제든 소녀를 다시 보내도 된다며 길을 떠난 킨셀라 부부.(훌륭한 품격이 느껴지던 순간)
영화는 킨셀라 부부가 있는 곳의 빛과, 소녀 집의 어둠을 대비시키며 그녀의 참담한 상황을 더 짙게 드러낸다.
가난으로 고통받고 돌볼 것들이 많은 엄마는 자식들에게 살갑게 대하거나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다. 그러나 말과 태도에 최소한의 예의가 느껴져 연민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빠는 대책없는 최대의 빌런이었다.
영화의 아름다운 장면들 색감들 빛들. 책의 그림 같은 묘사 장면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어 좋았다.
영화 역시 잔잔하게 흘러가다 후반부에 몰아치는 엔딩이 너무 인상적이다.
떠나는 킨셀라 부부를 향해 소녀는 전속력으로 달려가 아저씨의 품에 가득 안긴다. 그리고 그 따스한 품에서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아빠를 바라보며 말한다. 경고한다.
98.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책도 영화도 단숨에 읽고 한 호흡에 볼 수 있는 분량이지만 그 여운은 꽤 오래 지속된다.
자식을 낳고 제대로 보살피지 않는, 보살피지 못하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가. 가난과 무지, 환경과 제도, 상황과 인격 등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기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소녀가 경험한 그 여름의 추억들과 따스한 빛들 그리고 사랑으로 앞으로의 많은 날들을 보낼 수 있기를, 소녀가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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