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용 감독의 영화 [만추],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
영화 [만추]에서 안개 낀 시애틀을 보며, 소설 [무진 여행]의 무진읍이 떠올랐다.
남편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7년째 감옥에 수감 중인 애나(탕웨이)는 엄마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 3일간의 외출을 얻는다.
시애틀에서 자유와 일탈의 기회를 얻었지만, 그 시간 속에는 엄마의 장례식, 피하고 싶은 인연과의 해후, 가족들의 다툼을 마주해야 하는 고통 또한 존재한다.
희중은 승진을 앞두고 잠시 긴장을 풀기 위해 고향인 무진행 버스를 탄다.
무진은 현실의 도피처였지만, 그의 어두운 젊은 시절을 상징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애나에게 시애틀은, 희중에게 무진은, 유쾌하지 않은 장소임에도, 또 탈일상이 가능한 양가적인 장소이다.
희중과 애나는 짙은 안갯속에서 현실의 나를 부정하며 술 취한 듯, 내가 아닌 듯, 어떤 용기를 내어본다.
허름한 옷의 애나는 한 상점에서 화려한 옷과 귀걸이를 사고 짙은 립스틱을 바른 채 거리를 거닌다.
수감생활의 원인이 되었던 옛 애인 왕징에게 억울함에 대해 울부짖으며 소리도 쳐본다.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훈(현빈)과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감옥으로부터 걸려오는 감시 전화는 그녀의 현실을 일깨운다.
무진으로 내려온 희중은 자신과 닮아있는 인숙에게 연민을 느끼고 충동적인 사랑을 하게 된다.
그러나, 희중에게 온 아내의 전보 "27일회의참석필요, 급상경바람 영"
결국, 현실은 피할 수 없고, 맞서지 않으면 안 되는 무서운 것이다.
짧게 지나가는 가을, 그중에서도 가을의 끝자락 만추.
찰나가 되어 희미해질 헛된 희망들은 지독히도 슬프다.
" 2537 지금 돌아가는 길입니다"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사람들은 어디를 떠나 어디로 돌아가는 것일까?
반짝 찾아온 햇살은 금세 안개와 비로 얼룩진다. 기다렸던 햇살은 언젠가는 또 내리쬔다. 햇살 속에도 슬픔을, 안갯속에도 희망을 가지고 살고 있는 사람들은 쓸쓸하다. 완전하지 않은 인간에게 완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영화의 마지막, 출소한 애나는 훈과 왔었던 카페에 앉아있다. 그녀와 놀랍도록 비슷한 처지의 훈을 만났을까?
소설의 마지막, 희중은 서울행 버스를 타고 무진을 떠난다. 상경 후, 그의 젊은 시절과 닮아 연민을 느꼈던 인숙과 다시 만남을 가졌을까?
카페 문이 여닫히지만 그녀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없다. It's been a long time. 혼잣말을 건네는 그녀.
인숙에게 부치지 못하고 찢은 편지.
그 끝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인간들은 안갯속에서 휘청거리다, 자명종처럼 울리는 현실자각을 하며 깨어나지만, 안갯속에서 겪은 경험들이 결코 사라지진 않는다. 환멸과 슬픔으로 가득한 세상이지만 우리는 또 성장하게 될 것이다.
짙은 안개 그리고 쓸쓸함이 닮아있는 두 작품은 긴 여운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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