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람 미술관 <반고흐 전시회>에 다녀왔다. 고흐의 인기를 증명하듯 오픈 시간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발권과 관람을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인원을 제한한다고는 했지만 여유로운 관람은 어려웠다. 그럼에도 미술관을 다녀오는 길은 역시나 좋다.
전시를 앞두고, 언젠가는 봐야지 다짐만 했던 책을 책꽂이에서 꺼냈다. 질 좋은 종이에 200여 점의 그림이 삽입되어 있는 책은 생각보다 빠르게 집중해서 읽을 수 있었다.
[고흐] 주디 선드, 남경태 옮김 (한길아트)
한 예술가의 삶의 여정대로 기획된 알찬 전시를 본 느낌이었다.
성장기, 1853~80
도시와 농촌 사이에서, 80~83
성숙기, 84~85
파리 시절, 86~88
우키요에의 영향, 87~88
아를에서 그린 인물화, 1988
예술과 병, 89~90
마지막 나날
사후에 얻은 명성
그의 유명한 작품들과 삶을 영화나 책 등을 통해 많이 알고 있다 생각했지만, 한 사람을 제대로 아는 것은 역시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외에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할까.
디킨스와 공쿠르 형제, 에밀 졸라 등의 책을 좋아했던 고흐는 문학에 심취해 있었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던 듯하다. 책에 나온 지역을 탐방하며 소설 속 주인공의 심정으로 전망을 바라보는 그를 상상하니 왠지 친근하고 짠하다.
70. "예술은 기질을 통해 바라본 자연의 한 측면"이라는 졸라의 유명한 명제는 반 고흐의 생각에 딱 들어맞았으며, 전통을 버리더라도 자신에게 충실하고 싶다는 그의 입장을 지지해 주었다.
83. 반고흐는 시각적 유사성보다 언어적 유사성을 강조하면서 종교는 물러가지만 신은 남는다"는 빅토르 위고의 말을 써 보냈다. 그는 자신이 그린 장면의 의미를 이렇게 말했다. " 신앙과 종교는 썩어버리지만...... 농부들의 삶과 죽음은 마치 교회 안뜰에서 규칙적으로 자라고 시드는 풀과 꽃처럼 영원하게 마련이지."
208. 그런 회화에서 색채는 화가의 감정을 담고 있으며, 음악과 같이 비형상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감상자에게 전달된다. 아를에서 반 고흐는 "회화를 베를리오즈나 바그너의 음악처럼 상심한 마음을 위로하고 위안을 주는 예술로 만들고자"결심했다.
독립적이고 고집이 셌지만 반면에 예술가들의 협동에 관심을 보였고, 고갱의 확고한 자신감에 매료되어 있으면서도 또 이따금 회의에 빠져 갈등을 피하지 못했던 고흐 역시 삶은 답을 낼 수 없는 어려운 것이었다.
희망을 꿈꾸고 낙담하고, 자신감에 넘쳐있다 실망하는 그의 크고 작은 롤러코스터 인생 속에서 나를 본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누군가의 조언대로, 내 앞에 놓인 작품을 있는 그대로, 편견 없는 시선으로 감상하려다가도, 나는 감히 고흐의 마음을 짐작하거나, 상황을 그려보거나, 주변 인물들의 영향을 추측하거나 하는 등 인간적인 연민으로 그것들을 바라보는 나를 발견한다. 어느 누군가의 우주를 완벽히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으면서 또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4. 부풀려진 대중적 상상력의 페르소나를 제한하고 현실적인 면모를 찾아내는 것이 1980년대 이래 반 고흐 연구의 주류였고 또한 이 책의 목적이기도 하다.
5. 그의 그림이 큰 인기를 누리는 이유는 일단 정서가 뒷받침된 즉흥성 때문이겠지만, 실상 그의 작품은 강렬한 목적의식을 지닌 성찰적이고 지적인 산물이다.
유럽 화가들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사이프러스 나무는 늘 인상적이었다. 이 나무는 고흐의 작품에도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그려져 있다. 너무도 유명한 그림이지만, 책에 실린 설명을 읽으니 또 다르게 다가온다.
257.
별이 빛나는 밤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하늘 풍경은 죽음으로써 갈 수 있는 별에서의 고결한 삶에 대한 꿈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별 아래 작고 어두운 마을은 속세의 삶이 더 원대한 범위에서는 상대적으로 왜소함을 나타내며, 그 삶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을 일깨운다.
[별이 빛나는 밤]은 신앙을 통해 그 너머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시도를 나타낸다.
사이프러스는 지중해 문명권의 묘지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전통적으로 슬픔(색이 어둡기 때문에)과 불멸(향기가 있는 상록수 이기 때문에)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생레미에서 반 고흐는 " 내 마음에는 늘 사이프러스가 있다"라고 말했다. [별이 빛나는 밤]에 나오는 사이프러스는 죽음을 상징하는 기차 같은 교통수단을 의미하는 듯하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별에 갈 수 없으므로" 그것은 우리를 별까지 데려다주는 수단이다.
달빛이 비치는 [별이 빛나는 밤] 은 칙칙하고 제한된 속세의 영역 너머, 에너지와 빛으로 맥동하는 무한성 속의 삶을 가정한다.
조지 큐커 감독의 [Lust for Life, 열정의 랩소디] ,1956
1956년 제작된 전기영화 <열정의 랩소디>는 탄광지대 전도사로 부임한 고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커크 더글라스가 고흐로, 안소니 퀸이 고갱을 연기한 영화는 그의 인생을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다. 고흐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유럽의 낭만적인 장소들과,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고흐의 그림들과 동시대 예술가들의 작품들은 정말 아는 만큼 보인다.
책과 전시 그리고 또 한 편의 영화, 모두 같은 인물에 대한 탐구이지만 묘하게 다른 느낌으로 다가와 서로 시너지 효과를 준다. 그림 그리는 것을 사랑했고, 작품을 통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주고 싶었던 그의 열정과 사랑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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