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그리고 저녁]에 이어 읽은, 욘 포세의 두 번째 소설이다.

이전 소설이 한 인간의 탄생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샤이닝]은 한 인간이 죽음을 마주하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의 이름, 나이, 어떤 서사도 나오지 않지만 몇몇 글들로 그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혼자 사는 사람 / 내가 젊었을 때, 아주 오래전 / 죄 많은 나의 한평생 / 사실 누군가 마지막으로 나를 방문한 게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 나는 그들을 단 한 번도 어머니와 아버지라 불러본 적이 없다 

 

주인공은 어느 정도 나이 들었을 것이고, 부모의 풍족한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자랐을 것이고,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않은 외로운 사람일 것이다.

 

p.7 나는 차를 타고 벗어났다. 기분이 좋았다. 움직이니 기분이 좋았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랐다. 단지 나는 운전을 할 뿐이었다. 나를 덮친 것은 지루함이었다.

 

그를 둘러싼 외로움과 지루함, 어떤 고통들로 인해 그는 삶의 방향을 잃었다. 충동적으로 차를 몰고 나와 일상으로부터 달아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오히려, 공허함과 두려움으로 자신을 몰고 간다.

 

p.9 내가 두려움을 느낀 건 바로 그 때문이리라. 나는 차를 타고 가다가 숲 속의 막다른 길에서 꼼짝도 못 하게 되었고, 그곳에서는 차를 돌릴 수도 없었으니까. 사실 이 숲길에 들어선 후 차를 돌릴 만한 곳을 지나온 기억도 없었다. 그럴 리는 없었을 것이다. 

 

p.17 도대체 나는 무슨 생각으로 이토록 깊숙한 숲 속으로 차를 몰았을까. 어쩌면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차를 몰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얼마나 멀리까지 왔는지는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그렇다, 바로 그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내 차를 빼내줄 수 있는 사람, 트랙터나 차를 소유한 사람을 찾아 나서야 한다. 한데 문제는 바로 그거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도와줄 사람이 절실하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이상하기만 하다. 그를 도울 누군가를 혹은 무엇을 찾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부터 멀어지고 있다. 설상가상 눈은 점점 더 많이 내려 쌓이고, 어둠이 밀려든다. 

 

p.21 내 머릿속에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최대한 빨리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그런데 나는 무슨 생각으로 더 깊은 숲 속으로 들어왔을까, 이처럼 깊은 숲 속에서 정말 사람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이보다 더 절망적일 수는 없었다. 

 

헤어 나올 수 없는 공포의 순간 따스한 손 내미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달랐을까. 아니 어쩌면 도움을 주려하는 사람들을 애써 피하며 숨어버리는 나약함이었을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제대로 된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는 인간 세상에 도무지 없는 것일까.

 

p.21 나는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 깊은 숲 속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 그것을 생각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조차 옳지 않다, 그것은 문득 떠오른 무엇, 일시적인 충동이라든가, 뭐 비슷한 것이었다. 어리석은 일이었다. 너무 바보 같은 일이었다. 멍청했다. 그보다 더 멍청할 수는 없었다. 나는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p.25 어쩌면 내가 숲 속으로 들어온 것은 얼어 죽고 싶어서였을까. 아니, 그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아니,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왜 죽고 싶은 것일까. 아니, 내가 원하는 건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차로 되돌아가려는 것이다. 

 

결국, 어둠 안에 숨고 갇혀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진퇴양난의 지경에 처한 인간은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이 쉽지 않다. 심지어 죽음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 고통스럽고 두렵다.

 

 

 

이 책은 열린 결말이다. 주인공이 죽음에 이르렀는지, 아니면 살아남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가 죽음에 이르는 어떤 과정을 지나갔음을 느낀다. [아침 그리고 저녁]에서 요한네스는 죽음 직전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샤이닝]의 주인공은 순백색의 형체와 부모님을 만난다.

 

어둠 속에 나타난 하나의 하얀 형체, 밝은 빛을 내뿜는 존재, 완전히 순백색의 알 수 없는 형체, 어떤 윤곽이라기보다는 하얗고 선명한 공간에 가까운, 사람의 형체를 닮은, 강렬하지만 눈이 아프지 않은 기분 좋은 빛, 편안한 빛, 그 하얀 존재와 나.

 

죽음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따스한 느낌을 주는 이유는 이 순백색의 빛 때문이다. 어둠과 추위의 한가운데서 빛을 만난 주인공은 더 이상 춥지 않았다. 온기를 느꼈다. 누군가의 팔이 따뜻하게 어깨를 감싸는 것 같은 빛.

빛과 온기가 삶일 수도 있지만, 죽음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 죽음이 나를 위로하며 어깨를 두드려 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를 찾아 나선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목소리를 듣는다. 또한  검은 양복을 입은 알 수 없는 형체도 본다. 

 

p.56 그들은 내게 대답해야 한다, 나는 적어도 그들이 낳은 아들이 아닌가, 나는 말한다 : 제가 뭘 물어보면 대답을 해주셔야죠, 대답해 보세요, 거기 가만히 서 계시지만 말고 무슨 말이라도 해주세요, 제게 대답을 해주시란 말이에요- 내 귀에 들리는 내 목소리는 애원하는 듯하다, 불쌍하고 처량한 데다, 완전히 울먹이고 있고, 무기력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p.66 어머니는 내게 변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나는 항상 그랬다고,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했지 어머니가 원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예나 지금이나 다른 사람의 말은 들은 적이 없다고, 그러니 자, 이제 그 결과가 어떤지 한번 보라고, 그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머니는 이대로는 안 된다고, 너무 추워서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지 나는 궁금하다, 하긴 아버지는 언제나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p.74 그들은 나만 바라보고 있다. 이제 나를 그만 좀 바라보면 안 될까. 왜 그들은 나만, 다른 것은 보지 않고 오직 나만 바라보고 있을까. 이제 다른 걸 좀 쳐다보면 안 되는 걸까.

 

가장 가깝고 사랑해야 할 존재들이 어떤 상황들로 멀어져 회복할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언제 도움이 필요한지 무엇을 도와야 할지 알 수 없다. 도움을 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가 안타깝고 슬프다.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 그가 떠올릴 수 있었던 사람은 부모님이었다. 여러 감정이 들었던 부분이다.

 

 

 

지루함에서 시작된 그의 충동적인 여정은, 공허와 두려움, 후회와 번민, 텅 빈 무(無)의 세계, 결국 죽음에 이른다.

 

p. 8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또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든, 항상 다른 무언가로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 80 문득 나는 그 빛나는 존재가, 순백색의 반짝이는 존재가 우리 앞에 서있는 것을 본다, 그가 따라오라고 말하고,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간다, 아주 천천히, 한 발짝 또 한 발짝, 한숨 또 한숨, 검은 양복을 입은 얼굴 없는 남자, 나의 어머니, 나의 아버지, 그리고 나, 우리는 맨발로 무의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한숨 또 한숨, 어느 순간 숨이 사라지고, 그곳에 있는 것은 오직 호흡하는 무를 빛처럼 뿜어내는 존재뿐이고, 어느새 숨을 쉬고 있는 것은 우리다. 각각의 순백색 속에서.

 

 

 

짧지만 어렵고 철학적인 이 소설은 작가의 의도도, 독자들의 다양한 해석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 주인공의 죽음은 자살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소설의 제목(Shining)처럼, 반짝이고 빛나는 순백색의 존재 때문에 그의 죽음이 더 애처롭고 안타까운 느낌이 들었다. 

 

외로운 삶의 끝에서 만난 따뜻한 빛,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부모님, 맨발로 말없이 동행하는 검은 양복을 입은 누군가의 존재. 죽음의 순간 그것들과 함께 할 수 있어 다행이지만, 삶 속에서 내내 그렇게 살 수 없음이 마음 아프다.

 

p. 38 여기 누구 없나요 / 나는 여기 있습니다, 나는 항상 여기 있고, 여기에는 항상 내가 있습니다.

 

우리의 곁에는 항상 누군가가 있다. 그것은 내가 믿는 신일수도, 사랑하는 가족 혹은 친구, 이웃일 수도, 또 그저 타인을 도울 준비가 되어있는 누군가 일 수도, 그것도 아니면 어떤 희망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삶과 죽음이 내내 빛날 수는 없겠지만, 내 어깨를 살포시 두드리는 무언가의 위로를 받으며 살 수 있기를, 또 그런 사람이 되어 주기를.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의 작품이다.
 
마침표가 거의 없다는 얘기를 듣고 포르투갈 출신 작가, 주제 사라마구가 생각났다.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을 때 마침표와 쉼표 외의 문장 부호가 전혀 없고 심지어 줄 바꿈도 없어 온 신경을 집중했던 기억이다. 주제 사라마구도 198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라는 사실이 신기하다.
 
 
 
[아침 그리고 저녁]
 
1부는 요한네스의 탄생, 2부는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을 읽으면 늙고 죽는다는 것은 고약한 일임에 분명하지만, 아침이 지나 저녁이 오고, 또 저녁은 아침으로 이어지듯이, 삶과 죽음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고요히 흘러가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슬프고 외롭지만, 또 아름답고 평화롭다.
 
작가 특유의 의식의 흐름대로 써 내려간 문체는 반복과 여백으로 음악적인 리듬감을 주고, 한 인물의 침묵과 고뇌는 그 인물에 대한 신뢰와 연민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1부>
 
p.15-16 이제 사내아이, 어린 요한네스가 세상 빛을 보게 된다. 아이는 마르타의 몸 안에서, 그녀의 뱃속에서 자라났다, 충분히 크고 강하고 어여쁜 모습을 갖출 때까지, 아무것도 아니던 것이 사람이 되어, 작은 사내아이가 되어, 그래 저기 마르타의 몸 안에서, 그녀의 뱃속에서 손가락을 얻고, 발가락과 얼굴, 눈이 생겨나고 뇌와, 아마 머리카락도 약간 자라 있겠지, 그리고 그 아이가 이제 나온다. 마르타, 아이의 어머니는 고통으로 비명을 지른다, 이제 아이는 추운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혼자가 된다, 마르타와 분리되어, 다른 모든 사람과 분리되어 혼자가 될 것이며, 언제나 혼자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 모든 것이 지나가, 그의 때가 되면, 스러져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무에서 무로, 그것이 살아가는 과정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새, 물고기, 집, 그릇,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올라이는 생각한다,
 
p.17 확실한 것은, 그가 올라이이고 어부이며 마르타와 결혼했고 요한네스의 아들이며 이제, 언제라도, 조그만 사내아이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 아이가 할아버지처럼 요한네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리라는 것이다. 신이 존재하기는 하겠지, 올라이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너무 멀리 있거나 너무 가까이 있다. 그리고 그는 전지전능하지도 않다
 
열네 개의 마침표를 찾았다. 또 어디 숨어있을지 모르지만.
작가 혹은 올라이가 결론에 이른 것만이 유일하게 마침표를 갖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머지 문장들은 모호하고 정해져 있지 않은 그저 불확실한 것들일까? 그렇다면 그저 꿈같은 몽롱함 속에서 살아가는 게 인생일까?
 
 
 
<2부>
 
잠에서 깬 요한네스는 몸이 가볍게 느껴지고 모든 것이 여느 때와 다르다. 아주 이상하게 느껴진다.

p.42-43 그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 선 채로 자전거를 바라본다, 빨래통 두 개, 모탕, 벽에 걸린 갈퀴와 삽, 어쩐지 모든 것이 제 안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말하는 듯하다, 자신이 무엇인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쓰였는지, 모든 것이 그 자신처럼 나이 들어, 각자의 무게를 지탱하며 거기 서서, 전에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고요를 내뿜고 있다,
 
p.43 그러나 물건들은 제각기 지금까지 해온 일들로 인해 무겁고, 동시에 가볍다,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요한네스는 생각한다, 상상해 보라, 세탁기가 생기기 전에 에르나가 저 통을 얼마나 자주 사용했는지, 저 안에다 얼마나 많은 빨래를 했는지, 그래 결코 적지 않은 빨래였다. 그리도 이제 에르나는 가고 없는데 빨래통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것이다, 사람은 가고 사물은 남는다,
 
p.49 달라진 것이 있어도, 그것은 아마 그의 내부에서 일어났다고 보는 게 가장 그럴듯한 것이다, 아니면 혹시 밖으로부터 온 것일 수도 있을까? 저 바깥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을까, 대수로운 게 아니라도, 그에게 이런 느낌을 주는, 그저 뭔가 아주 사소하지만 모든 것을 완전히 달라 보이게 하는 그런 일이? 
 
 
 
새벽에 죽음을 맞이한 그의 영혼은 영원한 무로 돌아가기 전 사랑했던 사람들을 기억한다. 아내 에르나, 막내딸 싱네, 친구 페테르, 구두장이 야코프, 아마도 짝사랑했었을 안나 페테르센. 
 
p.37 요한네스는 에르나가 늘 앉던 식탁 맞은편을 바라본다, 그리고 지금은 빈 의자인데도 오늘 아침에는 그녀가 앉아 있는 것만 같다
 
p.101 에르나가 살아 있다면 더없이 좋을 텐데, 에르나가 가고 없는 것이 슬프다, 그래도 집이 따뜻하기는 하겠지, 먹을 것도 조금 있고, 하지만 에르나 일은 너무나 안타깝다, 그녀가 떠나야 했던 것은, 그는 늘 자기 차례가 먼저 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르나가 앞서갔고, 혼자 사는 일은 익숙지 않았다, 그들은 오랜 세월 금실 좋은 부부로 살았고 일곱 명의 아이를 낳았다, 물론 티격태격 싸울 때도 있었지만 고요하고 평화롭게 산 편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영영 가고 없다 그래 그런 거지, 요한네스는 말한다
 
p.47 막내 싱네는 거의 매일 그를 보러 오다시피 한다, 장을 보러 갈 때면 꼭 들러 살펴보고 전화도 자주 한다,
 
p.47 페테르와 요한네스, 그들은 오랜 세월 서로의 머리를 잘라주었다, 그런 식으로 둘은 많은 돈을 절약했고 단정해 보이도록 신경 썼다, 하지만 이제 페테르는 죽고 없다,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난 것은 슬픈 일이다,
 
p.51-52 그래 구두장이 야코프는 사람이 좋고 믿음도 강했다, 다른 사람은 흉내도 못 낼 만큼, 그랬고말고, 그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믿고 싶은 것을 믿게 두었다, (........) 구두장이 야코프는 친절하고 선한 사람이었다, 그는 신발을 고쳐주고도 거의 돈을 받지 않았다,
 
p.86 다시 젊은이가 된 것처럼 가볍고 건강한 느낌이 드는걸, 그리고 부두를 내려다보는데 거기 안나 페테르센이 다가오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는 이제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지? 그가 보낸 편지에 그녀가 답장을 하지 않았으니, 서로 민망한 일이었다,
 
 
 
삶이 더 이상 우리를 원하지 않을 때, 우리는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다. 하지만 죽음도 삶과 그렇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무거우면서 가볍고, 다르면서 같고, 꿈같으면서 또 현실 같고, 마침표 없이 무수한 쉼표가 쓰인 소설처럼 그렇게 쉬엄쉬엄 흘러가다 스러지는 것이다.
 
p.81 루어가 내려가지 않는 건가? 페테르가 묻는다 안 내려가, 요한네스가 말한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젓는다 그거 고약한 일이군, 페테르가 말한다 그리고 요한네스가 올려다보니 페테르의 눈에 눈물이 고여있다 정말 고약한 일이다, 페테르가 말한다 바다가 더 이상 자네를 원하지 않는구먼, 그가 말한다 그리고 페테르는 눈물을 닦아낸다 그럼 남는 건 땅뿐인가, 페테르가 말한다
 
p.134 그들은 더 이상 페테르의 고깃배가 아닌 다른 배에 앉아 바다 위에 떠 있다 그리고 하늘과 바다는 둘이 아닌 하나이고 바다와 구름과 바람이 하나이면서 모든 것, 빚과 물이 하나가 된다 그리고 거기, 에르나가 눈을 반짝이며 서 있다, 그녀의 눈에서 나오는 빛 역시 다른 모든 것과 같다, 그러고 나서 페테르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래 이제 길에 접어들었네, 페테르가 말한다 그리고 페테르와 그는 그 자신이면서 동시에 아니기도 하다, 모든 것이 하나이며 서로 다르고, 하나이면서 정확히 바로, 그 자신이기도 하다, 저마다 다르면서 차이가 없고 모든 것이 고요하다
 
 
 
그럼에도 역시 늙는다는 건 고약한 일이다. 죽는다는 건 마음이 너무 아픈 일이다.
일주일 동안 죽음으로 건너간 몇몇 사람들의 소식을 들었다. 조문을 가야 하는 한 친척, 지인에게 들은 노부부의 고요한 죽음, 중년에 돌연사한 한 직장인의 가족, 그리고 나는 욘 포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소설, [아침 그리고 저녁]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 [샤이닝]을 읽고 있다. 그렇게 삶은 죽음과 하나란 사실에 불현듯 놀란다.
 
p.111 에르나가 아직 살아 있던, 지난 몇 년 동안 그들은 참 편하게 살았다고, 돈 걱정 없이, 고생도 걱정도 없이 조용하고 만족스럽게, 그러다 어느 날 아침 에르나가 돌연 다락방 침대에 누운 채 숨을 거뒀다, 그리고 그는 에르나가 늘 서 있던 부엌 창가를 바라보지만, 에르나는 거기 없고 텅 빈 마룻바닥만 남아 있다, 
 
p.135 그리고 싱네는 요한네스의 관 위로 목사가 흙을 더지는 것을 보며 생각한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요한네스, 아버지는 독특한 분이었죠, 유별난 구석이 있었지만, 자애롭고 선한 분이었어요, 그리고 아버지의 삶이 녹록지 않았다는 걸 저도 알아요, 아침에 일어나면 늘 속을 게워내야 했죠, 하지만 아버지는 자애롭고 선한 분이었어요, 싱네는 생각한다,
 
 
 
또 한 해가 지나고, 늙음과 죽음은 나에게 많은 자극을 준다. 타인의 늙음이 거울로 다가온다. 현재의 나와, 죽음이 멀지 않은 그때의 나를 비춘다. 뭐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예측 불가능하고 두렵다. 살아온 날들을 생각해 보면 최선을 다했고 허투루 살진 않았지만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조용하고 만족스러운 삶은 너무 늦게 찾아왔고, 이 평안은 잠시 지속되다 에르나처럼, 요한네스처럼 끝이 날 것이다.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죽음도 삶의 한 부분이고 돌아가야 할 장소임에 틀림없으니, 하루하루에 감사하며 친절하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말이 없는 세계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또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p. 133  하지만 에르나, 에르나도 거기 있나? 요한네스가 묻는다 자네가 사랑하는 건 거기 다 있네, 사랑하지 않는 건 없고 말이야, 페테르가 말한다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육식을 끊고 나무가 되려고 했던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처럼, 인간은 폭력적인 세계를 거부할 수도 피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했다는 한강 작가의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
 
 
주인공 정희.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자랐고, 식당을 운영하는 바쁜 엄마를 도와 오빠와 남동생의 도시락을 싸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사랑했던 사람이 병으로 죽고, 집을 떠나고, 불행한 3년의 결혼 생활과 세 번의 유산 경험, 손목에 주저흔을 가지고 있는 여자. 그녀의 인생을 짐작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주인공 인주.
의사였던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이후 엄마는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을 겪다 자살했다. 11살이었던 인주는 외삼촌 동주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았지만 가족력이 있던 병으로 그는 사망한다. 같은 병을 앓던 남동생의 간호를 홀로 감당하며, 결혼과 이혼을 하고 딸 하나를 남겨 둔 채 자살한다. 그녀의 인생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을까?
 
219. 내가 아픈 곳은 달의 뒷면 같은 데. 피 흘리는 곳도, 아무는 곳도, 짓무르고 덧나는 곳도, 썩어가는 곳도 거기. 당신에게도,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달의 뒷면. 비밀스러운 장소. 어쩌면 가장 진실한 부분. 아주 잠깐씩 드러나기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결코 들여다볼 수도 알 수도 없다. 타인의 아픔을 고뇌를 치욕을 사랑을 진실을. 
 
 
 
146. 한 번도 종교를 가져본 적 없지만,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기도해 본 적은 있습니다. 가장 많이, 간절하게 기도한 내용은 죽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를 들어주는 누군가가 정말 존재했다면 난 이미 여러 번 죽었을 겁니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건, 그때마다 내가 그만큼 더 강하게 살아 있길 택했다는 걸 뜻합니다. 이건 말장난이 아닙니다.
 
340. 짐작할 수 있겠니. 나약함이 죄의 시작일 수 있다는 걸. 간절함이 알 속의 죄를 깨어나게도 한다는 걸. 문밖이 낭떠러지인 줄 알면서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어리석음을. 모든 일들의 시작이 자신이었음을. 그러니 자신을 제거하는 것만이 단 하나의 논리적인 길임을 확신하는 순간을. 무의미로 무의미를. 어리석음으로 어리석음을 밀봉하려는 결단을. 
 
인주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정희는 자살이 아니라는 확신으로 그 사실을 증명하고자 일어서고 맞서고 견딘다. 폭력적이고 부조리하며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리라 안간힘을 써본다. 정희 역시 인정할 수 없는 세상이지만 생수와 두부, 계란 한 줄과 봉지 김치, 들고 올 수 있을 만큼의 감귤을 산다. 다시 토하더라도 먹을 것이다. 움직일 것이다.
 
346. 두려움 없이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게 어떤 일입니까?) 거짓으로부터 인주의 아이를 보호하는 거예요.
 
정희의 이 치열함은 무엇일까. 위태롭게 또 일어서는 거대한 힘은 무엇일까.
아마 결국, 사랑일 것이다. 동주에 대한, 인주에 대한, 삶에 대한 사랑.
 
 
 

76. 바람이 분다. 마른 나뭇가지들이 허공을 할퀸다.

146. 얼음을 머금은 바람이 분다. 

328. 인주의 텅 빈 그림을 기억한다...... 바람이 불지 않았다. 어슴푸레한 빛이 영원히 움직이지 않았다.

366. 바람이 불고 있다. 간밤보다 강하고 습해진 바람이다. 거리를 걷는 모든 사람들의 체취가 섞이며 흩어진다. 마른 것과 축축한 것,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 부서지는 것과 영원한 것이 힘차게 뒤섞이며 날아간다.

367. 기억해. 바람이 부니까 뛰지 말까, 그때 생각했었어.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 넘어가고 싶었어. 정말 넘어가고 싶었어.

369. 이런 바람이 불면 말이야. 이만큼의 습기를 품은 바람이, 이만큼의 세기로 불면 말이야........ 혈관 속으로 바람이 밀고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져. 모든 것이 커다란 전체로 느껴져. 언제고 내 다리를........ 단박에 목숨까지 꿰뚫을 수 있는 삶을 지금 살아내고 있다는 게, 무섭도록 분명하게 느껴져.

 
나를 할퀴는 바람, 얼음을 머금은 바람이 부니 밖으로 나가지 않고, 몸을 사리고, 맞서기를 포기하고 싶다.
바람이 불지 않기를, 멈추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한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도 맞서 걸어가고, 뛰어 넘어가고, 바람이 잠시나마 그치기를 기다리며 끝끝내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참 이상도 하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어떤 것은 늘 닿아있다. 전혀 다르지만 또 같다. 소설 속 등장하는 마크로스코 화가의 그림과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노트북 화면으로 찾아보고, 말러의 2번 교향곡을 플레이해 보았다. 
 
서로 다른 색채가 서로 번지고 스며드는 그림, 가파른 협곡에 난 길 끝에 자리한 아름답고 붉은 복사나무 숲, 삶과 죽음 부활을 구현하며 절망을 희망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승화시켰다는 교향곡. 두 개의 다른 어떤 것이 한 화면에, 공간에 존재한다. 그 둘은 독립적인가 싶다가도 스미고 번지고 섞여 마침내 함께 있다.
 
 
 
어제 카라바조와 바로크 시대 그림 전시를 둘러보며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사람들의 표정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진한 슬픔이 배어나는 그 얼굴들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카라마조의 작품인 <도마뱀에 물린 소년>은 어둠과 빛, 장미와 가시, 체리와 도마뱀, 사랑의 쾌락과 고통이 공존한다. 사랑의 관능적인 즐거움에 가득 차 있던 소년이 도마뱀에 손가락을 물리자 순간의 고통으로 얼굴은 일그러지고 오른쪽 눈에는 눈물이 맺힌다.  
 
너무 행복해서 슬프고, 너무 차가워서 뜨겁게 느껴지고, 죽음이 있기에 삶의 의미가 존재하듯이, 바람이 부니 씩씩하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것도 찾아지지 않고, 어떤 것도 완성되지 않을지라도 또 두려움 없이 내가 할 일을 하면서 삶을 건져 올려야 하는 건가 보다.
 
324. 다시 시작하는 게 가능하다면....... 정말 가능하다면 말이야. 뭔가를 더 살리는 게 아니라, 복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부서야 하는 것 같아. 아니, 그건 달라.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부서야 하는 거야.
 
381. 살고 싶다. 포기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마다 가슴과 배가 벌레처럼 필사적으로 꿈틀거렸다. 한 뼘, 또 한 뼘. 폭발하는 소리를 내며 책상이 부서져 내렸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382. 눈을 감은 채 나는 앞으로, 깨끗한 공기가 있는 쪽으로, 차가운 쪽으로 기었다.
 
 
 
인주의 어린 시절, 미시령 절벽에서 버스 사고가 났었다. 동생과 엄마는 빠져나가고 절벽 아래로 기울어지는 버스 안에 혼자 남겨졌던 그녀는 기적적으로 삶으로 돌려보내졌었다.
 
293. 어머니를 이해했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았어. 용서했지만, 용서하고 싶지 않았어. (.......) 그런데, 이상한 게 있어. 그날, 버스가 회전하며 절벽을 향해 기울어가던 그 순간을 생각할 때마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한 빛이 그곳에 흘러넘치고 있었던 것처럼 기억해. 마치 거대한 천사 같은 게 날 막아서 돌려보내고 있었던 것처럼.
 
어쩌면 인주는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삶의 한가운데로 돌려보냈던 그 거대한 힘을 믿고 싶었던 것 아닐까? 다시 시작하고 싶은 강렬한 생명의 힘으로.
 
295. 단칼로 끊어낸 것처럼 죽음과 삶이 갈라지던 순간을 다시 경험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거기서부터 새로 시작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작가가 말한 '생명'이라는 말에 집중하고 그것을 발견하려 애쓰며 소설을 두 번 읽었지만, 소설은 나에게 여전히 희망적이라기보다 우울하고 절망적인 느낌이 들었다. 인주의 삶이, 정희의 삶이, 동주의 삶이, 모든 인물들의 삶이, 우리들의 삶이 말이다.
 
385. 눈두덩을 후벼 파는 안두통, 펴지지 않는 허리, 헝클어진 머리로 차가운 방바닥을 뒹굴었다. 처음으로 문을 열고 나가자 햇빛이 눈을 찔렀다. 다시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 때문에 허리를 접고 걸었다. 보도블록 틈으로 파릇한 싹이 돋은 것을, 가로수 밑동에 물이 오른 것을, 사람들이 봄옷 차림으로 걸어가는 것을 흔들리는 시야로 봤다. 미친 여자처럼 겨울 외투를 껴입은 채 그 눈부신 거리를 걸어 올라갔다......... 봄이 왔어. 너를 잃은 뒤 처음으로 입술을 열고 새어 나온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내 혀를 믿을 수 없었다.
 
386. 두 눈을 홉뜬다. 고개를 비튼다. 빗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울부짖는 사이렌이 멈추지 않는다. 누군가가 부풀어 오른 팔로 물속에서 파란 돌을 건져 올린다. 누군가가 무릎이 짓이겨진 채 뜨거운 배로 바닥을 밀고 간다.
 
내가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삶의 고통과 폭력은 피할 수 없는 길이다. 짓이겨진 삶을 자책하고 절망하는 대신, 삶을 건져 올려, 더운 심장과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이 안쓰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소중한 무언가를 건져 올려 삶을 이어간다. 어지러운 마음과 두통을 감내하며 길을 나선다. 
 
 
 
 
 
 
 

 

 

 

 

2023년 6월 평산책방에서 샀던 책, <책 읽는 사람>을 올해의 마지막 책으로 꺼내 읽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추천한 책들과 그것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실려있다. 그의 독서 목록의 일부일 뿐인 소개된 책들만으로도 참으로 다양한 분야의 책들로 깊고 넓은 독서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추천 도서 중, 내가 읽었던 책 여일곱 권 정도가 정말 반갑게 느껴졌고, 읽고 싶은 책 몇 권은 폰 메모장에 저장해 두었다. 그러나 상당 수의 책들은 내가 읽기에 부담스럽거나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실 소설을 좋아하는 나의 책 읽기는 편식에 가깝다. 게다가 판타지 소설은 거의 읽지 않으니 소설도 가리는 것이다. 나의 책 읽기가 얼마나 빈약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p 10. 일행가운데 시를 좋아하는 국어 선생님이 있어서 평소 산행할 때마다 도종환 시인의 '여백'이란 시를 함께 낭송한 다음 산행을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오랜만에 함께 산행하게 된 우리 부부를 위해 부산 출신 김종해 시인의 '그대 앞에 봄이 있다'라는 시를 한 편 더 준비해 왔습니다. 처음 경험한 일인데 그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시를 함께 낭송했더니 놀랍게도 산행 내내 시가 머릿속에 맴돌아 시와 함께하는 산행이 되었습니다.

 

시와 함께하는 산행. 너무 멋지지 않은가!

 

시 한 편으로 시작하는 하루.

시 한 편으로 시작하는 산책.

시 한 편으로 시작하는 여행.

 

정말 근사하다.

 

 

그들이 산행에 함께했던 시,

김종해 시인의 <그대 앞에 봄이 있다>를 다시 읽어 본다.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 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 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내년에는 다양한 책들을 읽어보리라' 생각할 수 있게 해 준, 연말을 마무리하기에 적절한 책이다.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 좀 잘 들어보세요!   /   괜찮았나요? 오늘은 이 정도로 할게요!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은 각 파트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이렇게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보후밀 흐라발은 이야기꾼이다. 그의 이야기는 재미나고 위트 넘친다. 우스꽝스럽게 그려지는 인물 디테는 그에 걸맞은 주인공이다. 이야기를 쫓아가다 보니 체코의 파란만장한 역사 속을 관통하여 살았던 디테의 삶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체코에 남아 고군분투했던 작가의 인생을 가늠해 보니 마음이 저릿하다.

 

 

독일이 체코를 점령했던 시기, 키가 작고 보잘것없는 웨이터 디테는 돈이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확신하며 백만장자를 꿈꾼다.

 

21. 무엇이 사람들을 움직이며 사람들이 무엇을 믿는지, 몇 푼 안 되는 동전 몇 개를 위해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곧바로 알게 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디테는 닥치는 대로 일하고 벌었다. 운이 따랐던 그는 영국왕을 모셨던 지배인에게 교육을 받기도 하고, 직접 아비시니아 황제를 모셔 황금훈장을 받기도 한다. 독일인 체육교사였던 리사와 사랑하고 결혼까지 하며 주류층에 들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갖는다.

 

198. 웨이터복에 딱딱한 옷깃을 달지 않았어도 내 생애 처음으로 사람이 꼭 체격이 클 필요는 없으며 자신 스스로가 크다고 느끼면 되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제부터 웨이터 조수이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견습 웨이터이기를, 작은 웨이터이기를, 날 때부터 그렇게 운명 지어져 이 삶이 끝날 때까지 작은 존재이기를, 난쟁이 꼬마라고 불리는 것을 그리고 아이란 뜻의 디테란 내 성을 갖고 놀리는 소리를 듣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그러나 전쟁은 아내를 앗아가고, 정신지체를 앓는 아들 지크프리트는 고통일 뿐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디테는 체코 애국자들이 처형당하고 있는 동안 나치 의사들에게 독일 여자와 성교할 능력이 있는지 검사를 받았다는 이유로 감옥에서 반년을 지낸다. 

 

222. 기차역에서 플랫폼을 따라 걷다가 우연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스스로 낯선 사람인 것처럼 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  독일인들이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했을 때 결혼식을 올리고 군가 <대열을 바싹 좁혀라!>를 부르고 있었고, 고향에서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을 때 독일 호텔에서 독일 군인들과 에스에스 대원들의 시중을 들면서 잘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전쟁이 끝나면 프라하로 더 이상 돌아갈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나를, 아니 나 스스로 첫 번째 가로등에서 목을 매다는 모습이 내 눈에 보였고, 나 자신에게 십 년형 이상을 언도했다. 

 

 

출소 후 리사의 우표를 팔아 백만장자가 되고 호텔을 운영하며 인생의 정점을 찍었지만 공산정권이 들어서며 호텔은 국가에 귀속된다. 이후 백만장자들이 수감된 감옥에 자진해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있었지만, 애초에 신분이 달랐던 디테는 다른 호텔 사장들이나 부자들에게 여전히 굴욕감을 느낀다. 모든 건 허상이었을 뿐이었다.


281. 그들은 내 백만, 내 이백만 코루나를 인정하지 않았다. 내가 자신들 사이에 있는 걸 참곤 있었지만, 내가 자신들에게 결코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백만장자들은 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오래전부터 많은 돈을 갖고 있었지만 나는 전쟁으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벼락부자를 자신들 사이에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았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나는 그 신분에 어울리는 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디테는 결국 자신의 삶을 똑바로 마주 보며 내가 원했던 모습이 아니라 나 자신을 그대로 직시한다.

 

286. 여태까지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았으며 오로지 내가 절대로 될 수 없는, 비록 이백만 코루나를 갖고 있었을지라도 될 수 없는 사람인 백만장자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이제 처음으로 비둘기들이 나의 친구이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말씀의 비유라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하면서야 나는 몇 곱의 백만장자가 되었다. 

 

국경지역 삼림작업반에서 만난 외눈박이 문학교수와 빨강머리 아가씨 마르첼라와의 생활은 고되었지만 행복했다. 마르첼라에게서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며 인생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교수와 마르첼라를 떠난 후, 산골 외딴곳에서 조랑말과 염소 셰퍼드 그리고 고양이와 함께 살며 도로를 보수하고 유지하는 일을 하게 된다. 노동의 수고는 거만하거나 오만할 시간이 없도록 겸손함을 가르쳐 주었다.

 

327. 나는 길을 정비하며 돌을 잘게 깨부숴 만든 쇄석으로 길을 메웠다. 그 길은 내 인생과 닮아 있었다. 내가 서 있는 길 뒤로도 앞으로도 잡초와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일을 마치고 나면 그 부분만 내 손이 닿은 흔적이 남았다. 장대비와 장맛비가 퍼붓고 나면 복구해 놓은 길이 모래와 작은 돌들로 다시 덮였지만 나는 화를 내지도 욕을 하지도 내 운명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대신 참을성 있게 다시 일을 시작했다. 

 

 

디테는 인생은 결국 혼자라는 것, 자연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생의 허무를 깨닫는다. 그는 순간순간 자신과의 대화를 하며,  경이롭게 다가오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쓸 미래를 생각한다.

 

330. 무엇보다도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가장 좋아할 수 있어야 한다. 우선 처음에는 아무 말하지 말고 필름을 돌리듯 자신의 과거를 떠올려본다. 그러고 나서 나처럼 자신에게 말을 걸고 조언을 하고 따져보고 질문하고, 또 가만히 마음속에 귀를 기울이다가 무의식 속에 감춰진 것을 꺼내보고 스스로 검사가 되어 자신을 기소도 하고 스스로를 변호도 하면서 인생의 의미에 대해 자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과거에 있었던 삶에 대한 의미가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면서 내가 두들기고 또 두들겨야 하는 이 길이 과연 어떤 길인지, 고독에서 도망치고 싶거나 직면하려면 용기와 힘이 필요한 근본적인 문제들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를 지켜줄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시간이 아직 남아 있는지......

331. 인생의 본질이 사실은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나의 때가 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음, 죽음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은 영원과 불멸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면서 자신과 나누는 대화인 것이다. 이때 자신의 인생 여정의 무의미를 맛보며 어차피 지속되지 못할 아름다운 것들 안에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 바로 그것이 벌써 죽음의 문제에 대한 답의 시작인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맛보고 경험하는 일은 인간을 비통하게 만들지만 또한 아름다움으로 채워주기도 한다.

 

 

 

이야기가 흡족하셨는지요? 이제 이것으로 정말 끝입니다.

 

작가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난다. 책을 읽으며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이 많았다. 디테의 '자신과의 대화법'은 그대로 따라 해보고 싶다. 디테의 말년은 외로웠지만 아름다웠고 혼자인 듯했지만 또 그와 함께한 것들, 그를 찾아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별 볼 일 없었지만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는 정말로 영국왕을 모셨던 지배인의 조수였으며 아비시니아 황제를 모시고 황금훈장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은 지금 우리 주위에도 무수히 일어나고 있다.

뭔가 놀랄만한 일들은 일생 동안 나를 따라다니며 내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눈부시게 빛나는 별빛을 걷어내고, 그 별의 희미한 중심을 볼 수 있게 되기를.

허황된 빛이 아닌 희미한 심장을 볼 수 있기를.

 

이 책은 1971년에 쓰였지만 작가가 출판 금지를 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체코에서는 1989년에야 공식적으로 출판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006년에 작가의 친구인 이리 멘젤 감독에 의해 <나는 영국 왕을 섬겼다>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영화는 이 훌륭한 책을 어떻게 담아냈을지 보고 싶다.

 

 

 

 

 

 

 
 
 
11월 초, 강릉으로 1박 여행을 다녀왔다.
 
강릉 하면 떠오르는 기분 좋은 것 중 하나는, 한 여름 더위속 열리는 '독립영화제'다. 그와 못지않게 강릉을 좋아하는 이유는 독특한 분위기의 수제 맥주 집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책 한 권을 구입하면 맥주 한 잔을 무료로 마실 수 있다. 작가와 책에 대한 아무 정보가 없었고, 심지에 이 책은 비닐에 싸여있어 내용을 볼 수도 없었지만, 분위기에 취해, 예쁜 표지와 메모에 이끌려 그렇게 샀던 책이다. 
 
 
작가는 한 밴드의 리더였던 음악가였고, 현재는 꽤 많은 에세이집을 출간한 에세이스트다.
표지에서 받은 인상대로 책의 질감은 부드럽고 삽입된 사진들은 예뻤다. 책을 읽으면서는 나와 타인을 이해하고 삶을 아름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한 인간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275. 인간에게 있어 타인이란 존재는 거의 절대적이다. 우리를 웃기고 울리고 화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일들이 사실상 타인으로부터 비롯되기에 그렇다. 어떤 인간도 저 스스로 태어나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고 혼자서는 행복할 수도 없으며 삶의 의미를 가지기도 어렵다. 
 
276. 그러니 우리를 행복하게도 하지만 너무 큰 고통까지 주는 이 타인이란 존재들을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그들과 원만하게 어울리며 큰 어려움 없이 이 세상을 갈아갈 수 있을까. 
 
처한 상황과 생각은 조금씩 다르지만 인간 개개인은 저마다 삶을 의미 있게 살고자 고민하고, 타인을 이해하고 협력하려 부단히 애쓰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맘 한 구석이 조금은 따뜻해졌다.
 
예쁜 사진들과 함께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에세이다.
 
 
 
 
 
 
 

 

 

 

 

 

2024년 10월 10일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소식을 감동적으로 마주하고, 12월 10일 시상식을 기다리며 나는 무척이나 설레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희랍어 시간>, <작별하지 않는다>, <흰> 등 그녀의 작품은 읽을 때마다 슬프고 고통스럽다. 4년 전, <채식주의자>를 읽고 썼던 글을 보니 나는 이 작품을 많이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12월 7일 스톡홀름에서 진행된 노벨 문학상 수상자 강연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수수한 얼굴과 차림새, 차분하지만 마음을 울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원고를  읽어나가는 그녀의  강연은 한 편의 서사시를 듣는 듯했고, 어느새 나의 눈가는 젖어있었다.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이지. (수상자 강연 중)
 
그녀가 여덟 살 때 썼던 시의 한 연처럼 그녀의 삶과 작품, 과거와 현재, 사람과 사람은 연결되어 있었다.
 
 
 
기자 회견 중, <채식주의자>에 대한 작가의 언급은, 이 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채식주의자는 질문으로 가득한 소설이며, 제목이 채식주의자인데 주인공은 한 번도 자신을 채식주의자로 명명한 적이 없다."  "신뢰할 수 없는 화자라는 문학적 장치가 이 소설에 있고, 그렇게 신뢰할 수 없는 화자가 이야기할 때 문장마다 아이러니가 발생하기 때문에 그걸 생각한다면 흥미롭게 읽으실 것이다."
 
책을 다시 읽었다.
 
주인공 영혜는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육식을 거부하고 물 외의 어떤 것도 먹으려 하지 않으며 폭력적인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하려고 한다. 

 

 43.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_<채식주의자>

종내 식물이 되었다고 믿는 영혜는 서슬 퍼렇게 도사리고 있는 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도, 완전한 존재가 되지도 못한다. 그녀는 살기 위해 매 순간 죽음에 가까워지는 아이러니 안에 있다.



 
세 편의 연작 소설로 이루어진 채식주의자는 하나의 소설인 듯 연결되어 있다.  <채식주의자>의 화자 영혜의 남편, <몽고반점>의 화자 영혜의 형부, <나무 불꽃>의 화자인 영혜의 언니 인혜는 모두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이다. 그들은 영혜가 거부하려고 했던 것이 결국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생각과 감정대로 영혜를 생각하고 추측하고 판단하고 연민한다. 
 
기이하게도 각 단편의 화자들은 다른 단편에서 별로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영혜를 들여다보는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끌고 나갈 때 남편과 형부는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가 된다. 언니 인혜는 폭력을 당하는 주인공이 된다. 결국 모두는 그렇게 연결되어 있었다.
 
사실상 두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영혜와 인혜 자매는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악몽과 부서짐의 순간들을 통과해 마침내 함께 있다. 이 소설의 세계 속에서 영혜가 끝까지 살아 있기를 바랐으므로 마지막 장면은 앰뷸런스 안이다. 타오르는 초록의 불꽃같은 나무들 사이로 구급차는 달리고, 깨어 있는 언니는 뚫어지게 창밖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이 소설 전체가 그렇게 질문의 상태에 놓여 있다. 응시하고 저항하며. 대답을 기다리며. (수상자 강연 중)
 

행복해지기 위해 죽어가는 영혜, 고통을 끝내려 죽음을 선택하려 했던 인혜. 

그 앰뷸런스 안에서 인혜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결국, 무수한 질문들을 던진 채 질문으로 끝난 이 소설은 여전히 어려운 소설이지만, 또 다른 시각으로 읽을 수 있어 좋았다.

 

 

 

그다음의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는 이 질문들에서 더 나아간다.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삶과 세계를 거부할 수는 없다. 우리는 결국 식물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수상자 강연 중)
 
영혜와 인혜가 세상의 폭력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소설을 끝냈다는 작가의 그다음의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 이 소설에서 작가는 우리의 삶에 생명을 어떻게 증명하고자 했는지 읽어 보려 한다. 
 

첫 소설부터 최근의 소설까지, 어쩌면 내 모든 질문들의 가장 깊은 겹은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것이 내 삶의 가장 오래고 근원적인 배음이었던 것은 아닐까? (수상자 강연 중)

결국 팔딱팔딱 뛰는 가슴에서 가슴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랑은 모든 것을 구원할 수 있는 열쇠일지도 모르겠다.

이토록 폭력적인 세상, 이곳에 구원이 있기를, 또 살아갈 수 있기를,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이기를 바라는 아침이다.

 

 

 

 

 

 

 

 

 

 

 

 

1985년, 아일랜드 한 마을. 추위가 매섭고, 한기가 칼날 같다.

 

실업수당을 받기 위한 긴 줄, 전기 요금을 못내 추운 집에서 외투를 입고 지내는 사람들, 아동수당을 받으려는 여인들, 돌보는 사람들이 떠난 젖소들의 울음, 경기는 꽁꽁 얼어붙었고, 여기저기 문 닫는 회사들과 상점들이 넘쳐나며, 다른 나라로 무작정 떠나는 사람들도 많았다.

 

펄롱은 부자는 아니었지만 석탄, 장작 등을 파는 야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며, 부지런한 아내 아일린과 바르고 장래성을 보이는 다섯 딸과 함께 소박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간다. 

 

20. 가끔 펄롱은 딸들이 사소하지만 필요한 일을 하는 걸 보며--성당에서 무릎 절을 하거나 상점에서 거스름을 받으며 고맙다고 말하는 걸 보면서-- 이 애들이 자기 자식이라는 사실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한 기쁨을 느끼곤 했다. '우린 참 운이 좋지?" 어느 날 밤 펄롱이 침대에 누워 아일린에게 말했다. "힘들게 사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

 

24. 혹독한 시기였지만 그럴수록 펄롱은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딸들이 잘 커서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여학교인 세인트마거릿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도록 뒷바라지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나 또한 두 자녀가 친절한 행동을 하며, 바른 생각으로 열심히 살고 있는 모습에 자랑스러움을 느끼며 그것이 나의 삶에 많은 기쁨을 준다.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뒷바라지하며, 가족과 나의 노년을 대비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살고 있기에 펄롱의 맘이 너무 이해가 되었다.

 

22. 벌써 길에서 딸들한테 눈길을 주는 남자들이 있었다. 펄롱은 마음 한편이 공연히 긴장될 때가 많았다. 왜인지는 몰랐다. 모든 걸 다 잃는 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그러다 문득 그리고 자주, 아들과 딸, 가계 형편, 가족들, 미래에 대한 생각이 한가득 몰려오면 걱정과 염려로 우울해지기도 한다. 삶이란 이런 거지. 다 이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지. 하며 소설을 읽어나가다 작가가 말하는 '사소한 것들'에 놀라고 부끄러워진다.

 

 

 

허드렛일을 했었던 엄마와 윌슨 부인의 집에서 살았던 펄롱은 아버지의 존재를 모른 채 슬픈 시절을 보낸다. 그는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도 주인아주머니와 또 다른 일꾼이었던 네드 아저씨의 친절과 배려로 그 어려운 시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과거의 슬픔은  현재 자족하며 살아가려 부단히 노력하는 펄롱을 종종 우울하게 만들었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은 그를 심란하게 만든다.

 

35. 갑자기 무언가가 목구멍에서 울컥 치밀었다. 마치 이런 밤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일요일 밤에 대체 무엇 대문에 이렇게 심란한 걸까?

 

43-44. 이게 다 무엇 때문일까? 펄롱은 생각했다. 일 그리고 끝없는 걱정. 캄캄할 때 일어나서 작업장으로 출근해 날마다 하루 종일 배달하고 캄캄할 때 집에 돌아와서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가 어둠 속에서 잠에서 깨어 똑같은 것을 또다시 마주하는 것.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도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펄롱은 석탄을 배달하러 수녀원에 갔을 때 허름한 차림새로 마루 바닥을 광내고 있던 젊은 여자와 어린 여자아이들을 마주한다. "아저씨, 우리 좀 도와주시겠어요?"

이상한 낌새가 있었지만 그들에게 손을 내밀지는 못했던 그는 혼란스러웠지만, 아일린은 그런 일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우리 딸들은 건강하게 잘 크니 상관없다며 안심시킨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 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 그래야 계속 살지."

그러나 펄롱은 미스즈 윌슨이 이렇게 생각했다면,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어머니와 그를 밀어냈다면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됐을지 두려웠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석탄을 주문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다시 수녀원으로 배달을 간 펄롱은 광에 갇혀있던 여자 아이를 발견한다. 그녀는 출산한 지 14주 되었고 아기의 행방을 모르는 채 갇혀있었다. 수녀원을 관리하는 선한 목자수녀회는 직업여학교와 세탁소를 함께 경영하고 있던 실세였다. 타락한 여성들을 위한다던 자선 단체는 여자들을 가두고 부리고 학대하고 있었다. 

 

99.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탕 관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 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 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102. 좋은 사람들이 있지. 주고받는 것을 적절하게 맞추어 균형 잡을 줄 알아야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사람들하고 잘 지낼 수 있단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특권임을 알았고, 왜 어떤 집에서 받은 사탕 따위의 선물을 다른 더 가난한 집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렇듯 크리스마스는 사람들한테서 가장 좋은 면과 가장 나쁜 면 둘 다를 끌어냈다.

 

 

 

척지거나 다투지 않고 살아왔던 펄롱은 권력과 힘과 부를 가진 세력과 맞설 용기를 낸다. 분명히 맞닥뜨려야 할 어떤 두려움들을 예견하지만 또 설렘을 간직한다. 그는 수녀원으로 향하고 맨발에 초라한 행색의 아이를 광에서 데리고 나온다.

 

119.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욕심부리지 않고, 살뜰하게 가족을 챙기고, 이웃과 적당히 돕고 베풀며, 단정한 인생을 사는 것도 훌륭한 인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주변이 큰 위기 없이 흘러간다고, 혹은 나에게 어떤 불이익이 있을까 봐 정의롭지 못한 일들을 모른척하고, 손 내미는 사람들을 뿌리치는 것은 이기적이고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이렇게 말하기보다는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걔들은 우리 애들과 같아. 나에게 반드시 닥칠 고난과 궁핍과 갈등이 있겠지만 용기 내볼래. 맞서볼래." 이렇게 말하는 용기를 내보기로.

 

 

 

펄롱은 또 다른 일꾼이었던 네드와 닮았다는 말에 그가 자신의 아버지일 지도 모른다고 깨닫는다. 

 

111.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펄롱으로 하여금 자기가 더 나은 혈통 출신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서, 그 세월 내내 펄롱의 곁에서 변함없이 지켜보았던 네드의 행동이, 바로 나날의 은총이 아니었나. 펄롱의 구두를 닦아주고 구두끈을 매 주고 첫 면도기를 사주고 면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사람이다.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120.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네드와 미시즈 윌슨은 펄롱의 곁에서 그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사람들이었다. 손톱 솔과 비누 한 장, 보온 물주머니, 곰팡내 나는 책 <크리스마스 캐럴>, 얼마든 쓸 수 있었던 물건들, 먹을 수 있던 음식들, 함부로 평가당하지 않았던 일 등,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야말로 한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 사람 되게 하는 "얼마나 위대한 것들"인지....

 

 

 

길을 잃은 펄롱에게 한 노인은 조언한다.

54. 이 길로 가면 어디가 나오는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이 길?"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우리는 어느 길로도 갈 수 있다.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나 하나 챙기며 사는 것도 힘겨운 세상이지만 작은 친절과 어떤 용기는 한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더 평화롭게 만들 수 있다. 걱정과 근심으로 잠이 잘 오지 않는 요즈음,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며 참담하다. 나의 이익보다는 더 나은 선택이 필요한 이때 정치인들도 시민들도 용기를 내야 한다. 

 

 

 

 

 

 

 

 

 

소설이라기엔 에세이, 에세이라기엔 시 같은 느낌의 책.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었다.

 

환부에 바를 흰 연고, 거기 덮을 흰 거즈 같은 무엇인가가 필요했다고.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단어들을 들여다보는 일엔?

 

 

두시간 만에 죽은 내 어머니의 첫아기, 나의 언니의 죽음을 생각하며 사라진 것들과 살아남았지만 상흔을 품고 있는 모든 것들을 애도하고 위로하는 이 책.

 

1944년 바르샤바에서 있었던 독일군의 만행. 무너져 내린 도시엔 잔해들의 흰빛과 검은 흔적의 폐허만이 남았었다. 잔해들 위에 끊임없이 복원되었던 그 도시에서 작가는 책의 3분의 2를 썼다고 한다.

 

 

p 55. 이게 뭔가, 대체 이게 뭔가 생각할 때 더럽게도 하얗게 내리는 눈.

p 58. 부서지는 순간마다 피도는 눈부시게 희다.

p 59.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p 64. 이 차갑고 적대적인 것은? 동시에 연약한 것, 사라지는 것,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이것은?

p 67. 그 소금 산에, 아무리 희게 빛나도 그늘이 서늘한.

 

p 78. 하얗게 웃는다,라는 표현은 (아마) 그녀의 모국어에만 있다. 아득하게, 쓸쓸하게,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으로 웃는 얼굴, 또는 그런 웃음. 너는 하얗게 웃었지. 가령 이렇게 쓰면 너는 조용히 견디며 웃으려 애썼던 어떤 사람이다. 그는 하얗게 웃었어. 이렇게 쓰면 (아마) 그는 자신 안의 무엇인가와 결별하려 애쓰는 어떤 사람이다.

p 80. 사라질 --사라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통과했다 묵묵히.

 

p 109. 그리고 그보다 사소하게, 그녀는 자신의 재건에 빠진 과정이 무엇이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녀의 몸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녀의 넋은 아직 육체에 깃들어 있다. 폭격에 완전히 부서지지 않아 새 건물 앞에 옮겨 세운 벽돌 벽의 일부 --깨끗이 피가 씻겨나간 잔해-- 를 닮은, 이제 더 이상 젊지 않은 육체 속에. 부서져본 적 없는 사람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어 여기까지 걸어왔다. 꿰매지 않은 자리마다 깨끗한 장막을 덧대 가렸다. 결별과 애도는 생략했다. 부서지지 않았다고 믿으면 더 이상 부서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니 몇 가지 일이 그녀에게 남아 있다; 거짓말을 그만둘 것. (눈을 뜨고) 장막을 걷을 것. 기억할 모든 죽음과 넋들에게--자신의 것을 포함해--초를 밝힐 것.

 

 

p 133.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말을 모르던 당신이 검은 눈을 뜨고 들은 말을 내가 입술을 열어 중얼거린다. 백지에 힘껏 눌러쓴다. 그것만이 최선의 작별의 말이라고 믿는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135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어딘가로 숨는다는 건 어차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라는 소설 속 말처럼 그 흰, 모든 흰 것들은 죽음을 되돌릴 수도 상처를 깨끗하게도 할 수도 없다. 하지만 하얀 작별, 흰 애도, 하얀 초의 심지에 불꽃을 켜 두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회복할 수 있도록.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나는 영화감독도, 영화를 만드는 일에 관여하지도, 씨네필도, 평론가도 아닌 영화 보기가 취미일 뿐인 사람이지만, 거침없이 재미있게 읽었다. 어쩌면 나는, 영화를 사랑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그만큼 나의 삶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것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느끼고 배우고 나아간다. 

 

이 소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 혹은 좋아하는 일들로 상처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라 어둡고 우울한 면이 있지만, 결국 미소 짓게 만드는 엔딩으로 따뜻하고 잔잔한 위로를 건넨다.

 

115. 우리는 각자가 원하지 않는 이야기를 가지고 살아간다. 잘하고 싶었는데, 큰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콘티도 열심히 그렸는데, 우리는 왜 우리가 사랑하던 것들을 미워하게 될까.

 

138. 완성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모든 완성된 영화는 기적이야.

 

168. 혜나야. 너 기분 좋아 보이니까 좋다. 그런데 꼭 뭐가 되어야지만 사랑받을 수 있는 건 아니야.

 

168. 자기가 좋아한 것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너무 많았다. 우리가 추구하던 꿈과 기대하던 삶이 전부 무너진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198. 그러나 계속 후회 속에 빠져 멈춰 있을 순 없다. 다음 챕터로 넘어가야 한다. 때로는 오케이가 없어도 가야 한다.

 

205. 영화를 정말로 사랑하니까 영화를 미워하고 싶지 않아서 영화를 하지 않겠다는 승호의 말. 누군가에게는 궤변으로 들릴 말이지만, 내게는 궤변이 아니었다. 영화가 아니어도 좋으니까, 승호가 단지 자신이 뭔가를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217. 어떻게 버티느냐고 물었지. 진정으로 응원해 주고 지켜봐 주는 한 사람만 있으면 돼.

 

217. 고태경의 이 모든 게 애정 때문이었다는 말인가. 애정이라는 건 결국 식어버리는 것 아닌가. 나는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이내 납득했다. 결국, 내가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도 <초록 사과>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229. 작품을 위해 함께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큰 위안이 됐다. 돌이켜보면 뭔가를 도모하고 거기에 몰두할 때가 제일 행복한 것 같아.

 

 

애정, 사랑은 삶을 끌고 가는 원동력이다.

나를 지켜봐 주는 단 한 사람을 위해, 자명종 소리에 눈을 뜬다. 일터로 향한다. 노트북을 켜고 자판을 두드린다.

내가 사랑하는 무언가를 위해, 낡고 비좁은 작업실로 발길을 돌린다. 힘겹게 돌아가는 컴퓨터로 편집을 강행한다. 

그렇게 버텼고, 버티고 버틸 것이다. 결국 어떤 선택을 하던 그것 또한 애정일 것이다.

 

모든 준비생들과 지망생들, 기회만 주어진다면 잘 해낼 사람들이지만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 놓인 누군가가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자신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소설을 썼다. 그건 나에게 누군가 해주었으면 하는 이야기였다. _작가의 말 중

 

 

 

인생에서 꼭 무언가를 이루어야 하는 것도, 무언가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주어진 하루를 애정 어린 시선을 주고받으며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따스한 작가의 마음이 느껴지는, 그리고 재미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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