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 증명',  제목이 독특해서 관심이 갔던 책이다.  역시나 수학적인 내용의 책은 아니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희망,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사랑을 갈구하는 인간의 처절한 이야기.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인정하고 증명하기를 거부하여 기꺼이 미친 자아를 필요로 했던 인간의 사랑이야기다.

 

p.9 지금의 인간적이라는 말과 천 년 후의 인간적이라는 말은 얼마나 다를까...... 천 년 후 사람들은 지금과 완전히 다르리라 믿고 싶다.

 

p.11 내겐 부활과 동정녀의 잉태가 필요하다. 윤리나 과학이 끼어들 여지없는 기적이 필요하다. 천 년 후가 필요하다. 종말 혹은 영생이 필요하다. 미친 자아가 필요하다. 인간이 아닌 상태라도 좋으니, 당신이 필요하다.

 

 

 

가난을 물려받은 구와, 이모의 죽음으로 혼자가 된 담이가 서로 사랑하며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어 나가기엔 세상은 너무 폭력적이다. 서로를 사랑하는 행복은 행복이기에 곧 불행이다.

 

p.97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도 실패는 예정되어 있는 것 같고,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이미 진 것 같았다.   

 

p.84 사람 대접 받겠다고 평생을 싸우느니 그냥 이쯤에서 청설모가 되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기꺼이 그러자고 했다. 사람 말고 다른 것이 되자고 했다.

 

p.157 전쟁이나 질병은 선택 문제가 아니다. 나는, 구의 생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구의 인간다움을 좀먹고 구의 삶을 말라비틀어지게 만드는 돈이 전쟁이나 전염병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사채업자에게 쫓기는 삶을 살던 구는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담은 구의 머리칼 한 줌 버릴 수 없어서, 불에 태우고 땅에 묻을 수 없어서 구의 살을 먹는다. 살아서 인정받지 못했던 구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런 그의 죽음을 증명하기 싫어서.

 

p.174 교통사고와 돈. 그런 것이 죽음의 이유가 될 수 있나, 성숙한 사람은 죽음을 의연히 받아들이는가. 그렇다면 나는 평생 성숙하고 싶지 않다. 나의 죽음이라면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p.20 너를 먹고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을 거야. 우리를 사람취급 안 하던 괴물 같은 놈들이 모조리 늙어 죽고 병들어 죽고 버림받아 죽고 그 주검이 산산이 흩어져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도, 나는 살아 있을 거야. 

(.......) 네가 사라지도록 두고 보진 않을 거야. 살아남을 거야. 살아서 너를 기억할 거야.

 

 

 

소설의 설정이지만 충격적이었던 구와 담이의 사랑이야기는 현실의 폭력성과 맞물려 아련하고 슬프게 다가왔다.

 

p.54 구 대신 들어온 다른 것들이 터무니없이 옅고 가벼워서 구의 밀도를 대신하지 못했다. (......) 너 때문에 나는 만사가 시시해졌는데 너는 사는 게 어떠냐고 물어볼까.

 

p.88 너와 나는 죽을 때까지 함께하겠네. 함께 있지 않더라도 함께 하겠네. 그것을 뭐라도 불러야 할까. 다만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랑에 가장 가까운 감정. 

 

p.68 죽으면 다 끝인 줄 알았는데, 몸은 저기 저렇게 남아 있고 마음은 여태 내게 달라붙어 있다(......) 기억이 나의 미래, 기억은 너, 너는 나의 미래.

 

p.159 행복하자고 같이 있자는 게 아니야. 불행해도 괜찮으니까 같이 있자는 거지.

 

p.185 네가 나를 기억하며 오래도록 살아주기를. 그렇게 오래오래 너를 지켜볼 수 있기를. 살고 살다 늙어버린 몸을 더는 견디지 못해 결국 너마저 죽는 날, 그렇게 되는 날, 그제야 우리 

 

 

이 이야기는 파랗고 검다. 우울하고 어둡다. 

그럼에도, 책 표지 뒷면에 '사랑 후 남겨진 것들에 관한 숭고할 만큼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쓰여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책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