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 작가의 1995~1996년 사이 중단편 소설 9편이 실려있다.
2023년 개정판이 나왔지만, 중고서점에서 구입한 초판본으로 읽었다.
 
p 184. 살아가는 것은, 진지한 일이다. 비록 모양틀 안에서 똑같은 얼음으로 얼려진다 해도 그렇다, 살아가는 것은 엄숙한 일이다.
 
 
 

 

 
 
"더는 남자가 책을 읽고 여자가 뜨개질하는 장면을 그리지는 않을 것이다. 숨 쉬고, 느끼고, 고통받고, 사랑하는, 살아있는 인간을 그릴 것이다. 당신은 그 일상의 성스러움을 이해해야 하며, 이 일상에 대해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처럼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해야 한다."_에드바르 뭉크
 
 
지난 주말 에드바르 뭉크 전시회에 다녀왔다.
<절규>로만 알고 있었던 유명한 화가의 지난한 인생사와, 다양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던 좋은 전시였다.
미술관 한 벽면에 쓰여 있는 글을 읽고 은희경 작가의 위 구절이 떠올랐다.
하루하루 고단하게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의 삶은 엄숙하고 존중받아 마땅하다. 
 
 
 
[타인에게 말 걸기]
 
타인에게 말 걸기는 쉽지 않다. 타인과의 대화는 즐겁던 그렇지 않던 늘 어떤 그늘을 남긴다. 미안함과 억울함, 아쉬움이나 후회 등 다양한 감정으로 인한 번뇌를 피해 갈 수 없다. 누군가와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내 삶을 요동치게 만든다. 이 단편 소설은 단조로운 일상을 원하고 타인과 관계 맺는 것을 최대한 피하는 한 남자와, 타인에게 사랑을 갈구하지만 타인의 불친절과 무관심으로 상처받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p 229. 나는 타인이 내 삶에 개입되는 것 못지않게 내가 타인의 삶에 개입되는 것을 번거롭게 여겨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그에게 편견을 품게 되었다는 뜻일 터인데 나로서는 내게 편견을 품고 있는 사람의 기대에 따른다는 것이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할 일이란 그가 나와 어떻게 다른지를 되도록 빨리 알고 받아들이는 일뿐이다.
 
p 243. 먼 곳의 불빛을 향해서 온몸에 생채기가 난 채 밤새 산길을 더듬어가는 나그네가 있다면 그 순간 그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듯도 싶었다. 죽을힘을 다해서 불빛을 향해 가고 있는 간절한 희망, 그 불빛이 허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떠오르지만 밤길 속에서 불안이란 곧바로 절망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나그네의 표정은 무엇보다 자기를 믿어야만 한다는 안간힘으로 단호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타인에게 걸었던 말과 기대로 절망을 느꼈던 여자는, 남자의 친절하지 않음과 냉정함 때문에 오히려 그에게 말을 건다. 
 
p 249. 그때 산부인과에 따라가 달라고 처음 찾아갔을 때, 왜 하필 너였는 줄 알아? / 왜 그랬는데. / 네가 친절한 사람 같지 않아서야. / ....... / 거절당해도 상처받지 않을 것 같았어. 난 네가 좋아.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냉정함 말야. 그게 너무 편해. 너하고는 뭐가 잘못되더라도 어쩐지 내 잘못은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없기에 타인에게 말 걸기는 어렵다.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 자기 몰입적인 사람들 틈에서 외로운 삶을 살아내고 있는 인간의 삶이 슬프고 아프게 다가왔던 소설이다.
 
p 251. 나쁘게 정해진 일을 피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언제나 내 머릿속에는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말이 떠오르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나는 단조로움을 원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