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구역, 1 구역]

 

재개발이 끝난 단정하고 쾌적한 1 구역. 어떻게 해도 재개발이 될 것 같지 않은 낡고 후진 3 구역. 그 보다 더한 너와 나의 간극과 격차. 너를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고, 만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또다시 너의 연락에 무방비 상태가 되며, 이끌리듯 만나고, 너에 대해서 어쩔 수 없어지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p34. 너는 길고양이를 끔찍이 생각하는 사람이고, 요령 있게 집을 사고팔며 차익을 남길 줄 아는 사람이고, 내게 아무런 경계심 없이 사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이고, 누구나 관심 있어하고 궁금해할 정보를 대가 없이 공유하는 사람이고, 낡고 오래된 것들은 말끔히 부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고, 몇 날 며칠씩 오지 않는 고양이를 기다리는 사람이고.

그러므로 결코 내가 다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해도 너라는 사람을 다 알 수는 없겠구나. 너에 대해 무엇을 상상하고 기대하든 그것은 어김없이 비껴 나고 어긋나고 말겠구나. 

 

 

 

[다른 기억]

 

횡령, 조작, 사기 등의 사유로 파면당한 학교 신문사 주간 교수 임 선생님에 대한 너와 나의 기억은 다르다.

 

p 32. 그 일은 그 일이고 선생님은 선생님이라는 식의 너의 말에 동의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 모든 사실을 다 알면서도 여전히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자신도 없었다. 

 

p 62. 선생님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모른 척할 수 있었더라면, 선생님이 내게 보여준 모습만을 기억했더라면, 시간이든, 마음이든, 감정이든 선생님과 관계된 그 어떤 것도 훼손하거나 망가뜨리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날 너와 함께 좋은 시절의 이야기를 즐겁게 떠들어댈 수 있었더라면. 아니, 네가 끝까지 좋은 사람이길 포기했더라면 뭔가 달라질 수 있었을까.

 

소설 속의 너와 같은 성향을 가진 나는, 아마, 너처럼 선생님을 옹호했을지도 모른다. 그를 함부로 비판하는 누군가를 향해 너무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나를,  또 다른 이들은 답답해했을까? 그들도 내가 타인을 너그럽게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길 그토록 원했을까? 결코 달라지지 않는 우리들은, 서로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나의 은밀한 불만과 걱정을 말하지 못한 채, 그저 불편한 관계를 지속할 뿐이다.

 

 

 

[너라는 생활]

 

p 86. 그러나 한밤에 나란히 누워 잠이 들 무렵에는 이만하면 나쁘지 않고, 어쨌거나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만하자, 헤어지자, 내내 벼르듯 쥐고 있었던 그런 말은 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내일은, 모레는, 더 좋아질 거라는 말을 하게 된다. 이렇게 오 년이 지났구나, 이대로 십 년이 가고 또 십 년이 갈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에 오싹해지면서도 네가 없는 생활은 상상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수없이 놓아버리고 그만두고 포기하고 싶으면서도, 끈질기게 너를 놓으려고 하지 않는 나의 모습을 거듭 확인하는 지금의 생활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정 무렵]

 

p 114. 그러니까 이 순간에는 나를 이곳까지 끌고 온 게 너라는 확신을 지울 수가 없다. 어쩌면 내가 벗어나고자 하는 건 이 낯선 동네가 아니고 바로 너라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실은 그것이 오래전부터 내가 바라온 일이라는 것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 

 

p 116. 함께 지내다 보면 예상하지 못하는 일들이 생겨나고, 그때마다 감수하고 포기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네가 설명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나와 사는 동안 네가 포기한 건 뭘까. 뭘 얼마나 양보했다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너와 함께하는 동안 내가 포기한 것들, 앞으로 감수해야 하는 것들을 가늠해보고 있다. 아니, 지금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수많은 일을 감당해야 한다면, 뭔가를 무릅써야 한다면, 그건 너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오늘은, 내일은, 주말에는, 틀림없이 너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말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함께 어울리며 지낸다는 건, 그 사람뿐 아니라 주변의 많은 것들을 불러들이는 일이다. 익숙지 않은 상황이나 사람들. 나에겐 참을 수 없는 어떤 취향들.... 그럼에도 정말 하고 싶은 말을  끝내 삼킨 채, 익숙하고 당연한 일상의 흐름을 좇아 너와 나의 하루는 또 그렇게 지나간다. 

 

 

 

[동네 사람]

 

주거 문제로 고난을 겪는 레즈비언 커플의 생존은 만만치 않다. 주변의 싸늘한 시선 아래 이방인이 된 너와 나는, 둘의 관계에서도 끊임없는 의심과 불신으로 어긋나고 비껴간다. 결국 평범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오싹한 감정을 느낀다. 

 

p 131. 이건 동네의 문제가 아니고 네 문제일지도 모르지. 네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일지도 모르지. 우리가 함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p 134. 누가 봐도 너와 나는 나들이 나온 사람이 아닌 것 같다. 그럼 우리는 주민인가.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잠시 이 동네에 머무르는 사람들이고, 그러므로 이도 저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일 수 없는 인간은 둘이 되어도 외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둘 사이의 외로움과 고독을 경험한 인간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움츠러들며 소름 끼치는 감정을 느낀다. 필사적으로 외로움의 거미줄을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삶은 잔인하다. 

 

 

 

[우리는]

 

헤어진 지 오 년, 너의 연락에 나는 망설이지만, 결국 우리는 만난다.

 

p 171. 하지만 정말 왜였을까. 그 순간엔 또다시 네가 처한 상황 속에 겁 없이 발을 들여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로 인해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보고, 듣지 않아도 될 것을 듣고,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을 말해야 하는 곤란한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자책을 떨칠 수가 없었다. 너의 무엇이 그토록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나는 왜 늘 너에게서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일까. 네가 원한 건 춥고 어두운 그곳에 고작 몇 시간 함께 머물러주는 것이었는데. 그 밤, 어떤 식으로든 담판을 짓고 어떻게든 해결을 할 거란 네 다짐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이었는데.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할 법한 격려의 말 한마디를 구하는 것이 전부였는데도.

 

p 172. 너와의 관계는 왜 이렇게 계속 이어져온 것일까. 완전히 연락이 끊어지고 그래서 처음부터 모르는 사람처럼 서로의 삶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릴 몇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서로에 대해 편안한 기억만을 나눠 가질 수 있었는데. 나는 왜 겁도 없이 네 연락을 받고, 안부를 듣고, 네 삶에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서는 걸 포기하지 못한 것일까. 

이번에는, 이번에야말로________,

 

 

 

[아는 언니] 

 

오지랖 넓은, 네가 아는 언니는, 나에게 부담스럽다.

 

 

p 190. 그게 호의든, 배려든, 친절이든, 호기심이든 뭐든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고, 모욕을 당한 것처럼 불쾌했다.

 

p 201. 잊지 말고 안부 전해줘. 건강 잘 챙기고. 두 사람 내가 항상 응원하는 거 잊지 말고......... 뭘요?.......

뭘 응원하느냐는 의미였는데 언니는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게 뭐든 바란 적도 없고, 원한 적도 없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p 201. 도대체 우리를 왜 그렇게 특별하게 여기는 건지 따져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어차피 다 끝난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특별했다면 너와 내가 이토록 빠르고 간단하게 헤어질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너와 나는 아는 언니가 말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고, 고작 그 언니 때문에 헤어질 수 있는, 남들과 다를 바 없는, 흔하고 흔해빠진 연인이었다. 

 

 

 

[팔복광장]

 

크리스마스 전, 큰맘 먹고 일찌감치 예약한 고급 레스토랑의 자리는 터무니없이 불쾌한 화장실 앞자리였다. 

직원에게 자리를 바꿔달라는 요구를 하는 나에게, '너는 좋은 게 좋지 않냐'며 나를 말린다.

 

p 216 ~217. 좋은 게 좋다니. 누구에게 좋다는 걸까. 도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그런 걸 따져 묻지는 못했다. 그게 뭐든 네 의도가 선하다는 것을 나 역시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너는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못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생기는 불편과 손해를 감수하는 사람이고, 그건 네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 우리가 미안해할 일은 아니야. 나는 그렇게만 말했다.

원하는 테이블에 앉아 주문한 음식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만족스러운 저녁 시간을 보낼 자격이 우리에게도 있다고, 우리도 그만한 값을 치렀다고, 나는 당연한 요구를 했을 뿐이고 때론 요구하고 주장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그건 미안해야 할 일이 아니고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말은 끝내하지 못했다.

 

너와 나의 다름, 차이, 간극. 

함께 살 집에 내가 가져온 물건과 네가 가져온 물건들이 보이지 않는 경계를 이루며 어울리지 않는다.

산동네에 생긴다는 팔복광장을 두고 네가 상상하는 광장의 모습과 내가 생각하는 그것의 모습은 다르다.

 

p 227. 너와 지내는 동안 나는 우리가 상상하는 광장의 모습이 어느 정도 일치했다고 생각했다. 아니, 서로가 원하는 광장의 모습을 누구보다 서로가 가장 잘 안다고 여겼다. 그래서 우리 사이에 놓인 까마득한 차이와 간격을 전력을 다해 줄여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p.231. 그러니까 너란 사람과 보냈던 시간은 결코 다다를 수 없었던, 그 광장을 기다렸던 삼 년 남짓한 시간만으로도 충분했다고. 우리가 볼 수 없었고 확인할 수 없었던 광장이라는 신기루 같은 미래가 우리가 나눌 수 있는 전부였다고. 실은 그것이 우리에게 일어난 가장 좋은 일이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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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팬텀 스레드>에서 레이놀즈와 알마는 가학과 피학을 오가며 아슬아슬하게 사랑을 지켜나간다. 지나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묘하게 공감이 가기도 했던 영화이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참고 인내하며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들을 참아내지만, 상대가 달라질 거란 희망은 결국 허상이다.

 

이 책 모든 단편들의 화자는 '나'이다. 내가 바라보는 '너'는 답답하고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너'가 바라보는 '나'는 어떨까? '너'의 의견을 무시한 채 흘러가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너'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p 171.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결코 다 알 수 없는 일들. 사실이지만 또 얼마간 사실이 아닌 일들. 차마 다 이야기할 수 없는 각자의 내밀한 사정들. 잘잘못을 가릴 수 없음에도 모두가 죄책감을 떠안아야 했던 시간들. 

 

얼마 전 무주 산골 영화제에서 김혜진 작가의 소설을 영화화 한 <딸에 대하여>를 관람했다. 책이 너무 좋았어서 영화도 보고 싶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작가의 책에서는 하고픈 말을 참아내는 주인공들이 있다. 상대가 상처를 받을까 봐, 오히려 관계가 깨질까 봐 두려워 뾰족한 말들을 안으로 누르고 담는다. 말하지 않고 더는 못 견딜 때, 오히려 푸는 것이 좋다고 생각할 때, 용기를 내어 말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상대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관계가 악화되거나 같은 상황이 반복되겠지.

 

어쩌면, 너도 나에게 하고픈 말이 많은데 참아내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면, '나'의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면, 너를 견디는 것이 조금은 나아질지도 모르겠다. 어느 시절, 그때, 나와 다른 그런 너였기에, 사랑을 시작했을 테니, 우리는 또 하루를 무심한 척 그렇게 지나가 본다. 

 

개인의 문제와 감정에 집중하며,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이야기들이 너무 좋다. 어느 작가의 책들은 주저하지 않고 선택하게 된다. 이 책의 작가가 나에게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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