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연민. self pity. 자기 스스로를 불쌍하고 가엾게 여김.
자기 연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끝없는 추락의 상황을 겪게 되는 주인공 해수는 상처투성이의 길고양이,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서도 자신을 발견하며 동정하고 가여워한다. 끝없는 의미 찾기.
p 18-19. 그녀는 그 불쌍한 고양이를 빌미로 다시금 자기 연민에 빠진다. 그녀는 트럭 아래 웅크린 고양이에게서 자신이 처한 가혹한 현실을 상기하고, 자신의 가여운 처지를 되새긴다.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길고양이에게서 자신의 슬픔과 비애, 비통과 울분을 발견하는 건 얼마나 쉬운지. 철저한 피해자 되기. 자신을 향한 이 연민에는 끝이 없다.
p 45. 그녀는 흔하고 평범한 나무 한 그루에서 조차 고통의 흔적을 발견하려는 스스로가 안쓰럽고 또 얼마간 역겨워진다.
p 96. 보도블록의 좁은 틈을 비집고 나온 푸릇푸릇한 풀들이 보인다. 그녀는 눈에 보이는 온갖 것들에서 작은 고통의 흔적이라도 발견하려는 스스로가, 어떤 위안을 찾아 헤매는 스스로가 끔찍해진다.
길 고양이 순무를 구조하는 과정에서 만난 초등학생 세이. 그녀는 세이가 학교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하는 상황을 목격한다.
꽤 유명한 상담사였던 그녀지만, 부주의하게 했던 말 때문에 만신창이가 된 현재의 상황 탓인지 세이의 문제를 쉽게 알은 채 하고 조언해 주는 것에 조심스럽다. 그러나 조금씩 자신에게 마음을 여는 순무와 세이를 통해, 그녀 또한 자신이 처한 지금의 삶과 화해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이라는 걸 얻게 된다. 결국, 해수는 그녀처럼 상처받고 아프고 여린 존재들과의 관계에서 치유를 받는다. 이상도 하다. 관계에서 상처와 절망을 느끼고, 또 관계에서 치유와 작은 희망이란 걸 건져내니 말이다.
p 182. 아줌마, 근데요. 그럼 그냥 듣기만 할 수 있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요. 그럼. 그냥 듣기만 할 수 있지. 대화는 조금씩 더 깊어지고 넓어진다. 불신과 두려움 같은 것을 밀어내며 스스로 반경을 넓힌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녀는 아이의 마음속에 불이 켜진 것 같다고 느낀다. 두 사람 모두 불이 켜진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느낀다. 아이의 마음은 그녀의 마음과 얼마간 닮아 있는 걸까. 아이의 세계는 그녀의 세계와 얼마나 다른 걸까.
p 87. 어느 순간, 그녀는 자신과 그 작은 생명체 사이에 어떤 가느다란 유대감이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 전부를 건 싸움. 전부를 잃을 수 있는 싸움. 보잘것없는 자신을 지켜 내기 위한 전투. 그러니까 그 밤, 그녀가 목격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순무가 그녀에게 보여 주었던 것은 무엇일까. 아니, 순무에게서 그녀가 보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p 265. 우정, 유대감, 순수한 동지애.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도 새겨져 있다. 아이와 함께 겪은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달라지게 한 걸까. 아이와 보낸 계절이 그녀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준 걸까. 먼 훗날 아이는 이 시절의 일을 어떻게 기억할까. 그녀와 아이가 주고받은 것은 무엇일까.
소설에서 해수가 영화를 보며, 주인공의 모습을 렌즈 삼아 자신을 깊이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나 또한 책과 영화를 보며, 인물들의 사연에 공감과 연민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며 위로받는 경우가 많아 공감이 갔다.
p 200-201. 카메라는 진압할 수 없는 한 사람의 내면. 결코 다다를 수 없는 타인의 시간.
그러므로 그녀 역시 다만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주인공 여자에게서, 여자를 연기하는 저 배우에게서 무엇을 보는 것일까. 여자를 연기하는 저 배우에게서 무엇을 보는 것일까. 무엇을 보려고 하는 것일까.
자기기만. 자기의 양심에 벗어나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일.
자신이 억울하게 오해를 받을 때 마음이 방망이질한다. 견딜 수 없다. 오해를 풀고자 어떤 말과 행동을 끊임없이 하게 된다. 우리는 자기기만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치지 않는 자기변명을 하고 산다.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이 불쌍한 피해자라는 생각이 자신을 괴물로 만들 수 있다. 상황을 객관화하고, 불행의 원인을 찾고 헤어 나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p 245. 이 일로 해수 씨도 타격을 입었겠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테고 해명도 하고 싶겠죠. 자기 입장, 자기 처지. 사람들이 말하려는 건 결국 그런 거잖아요. 난 그런 거, 반성이라고 생각 안 해요.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반성에 더 가깝지 않나요? 이제 와서 어떤 말을 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요? 해수 씨도 감당해야 하는 것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잖아요.
p 245.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여자는 그녀의 말을 들으려고 나온 것이 아니다.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은 모두 자기변명에 불과하다. 그녀가 어떤 말을 하든 그것은 침묵보다 하찮을 것이다. 그 순간, 그녀는 마음속 깊이 가라앉은 말들을 꺼내고 싶은 충동을 누른다. 하지 못했고, 할 수도 없는 그 말들이 철저히 자신의 몫으로 남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것들은 그녀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결코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박정기가 그랬던 것처럼.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녀는 언어로만 이해하던 그 말의 의미를 비로소 아프게 깨닫는다.
p 282.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흔들림이 없다. 그건 그녀가 자신으로부터 한 걸음, 또 한 걸음 최선을 다해 물러서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연민과 자기 비하, 더는 그런 것들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정말 가능할까. 남의 일을 말하듯 스스로에게 대해 냉정을 유지하는 게 가능할까.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김혜진의 다른 책들에서도 말을 참아내는 주인공들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 책의 해수 역시, 말로 먹고사는 상담사이지만, 말로 파멸하고, 말을 참아낸다.
p 144. 그리고 이제 그녀는 저 남자에 관해서라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어떤 평가도,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p 271. 그녀는 억측과 오해 같은 것들이 무섭게 번져 나가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는다. 선인과 악인, 호의와 악의. 그렇게 이름을 붙이고 판단을 내린 뒤, 높다란 경계를 세우는 것만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p 225. 그리고 그녀는 깨닫는다. 자신은 그저 넘쳐 나는 말들에 둘러싸여, 불필요한 말들을 함부로 낭비하는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이 한 말이 언제 탄생하고 어떻게 살다가 어디에서 죽음을 맞이하는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p 224. 언어가 생략된 순무와의 교감이 그녀에게 이상한 안도감을 준다. 수없이 많은 말들로 소란스럽던 세계에서는 느낄 수 없던 감정이다. 헤아림과 공감, 위로와 포용. 그런 것들은 이처럼 완전한 침묵 안에서만 가능해지는 것일까.
자기 연민에서 조금씩 벗어나기로 작정한 해수는, 타인의 이해와 배려를 바라거나, 고소하는 대신 입을 다문다. 그리고 자기 몫의 무게를 감당해 내기로 한다. 그리고 마침내, 상담사로의 역할을 감당해 낼 용기를 내본다. 세이의 말을 경청할 준비를 하며.
p 300. 이처럼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에 기대어 있는 것이라면 자신은 무엇에 기대고 있는 걸까. 반대로 자신에게 기대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렇게 생각할 때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어떤 이름들이, 어떤 순간들이 있다.
p 307. 지난 계절 그녀는 이 방에서 홀로 편지를 썼다. 외부와 단절된 이 폐허 같은 곳에서. 그녀는 어떤 말로, 어떤 언어로, 외부와 대적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행위를 통해 그녀가 배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녀는 승리하지도 패배하지도 않았다. 시간이 환호와 야유와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그녀는 다만 그렇게 한 시절을 지나왔을 뿐이다. 적어도 그녀는 아이에게 그 정도의 이야기는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아이가 원한다면. 어디까지나 아이의 요청이 있다면. 그때까지 그녀는 기다릴 것이다. 최선을 다해 들을 것이다.
영화 <추락의 해부>를 봤다. 한 남자의 추락사를 두고 사고사인지, 자살인지, 타살인지를 밝히는 과정에서 부부 관계의 해부,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추락의 해부가 대사를 통해 적나라하게 전달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영화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남자 삶의 추락 원인은 자기 연민, 피해의식, 자기기만에서 비롯되었다. 잘못된 자기 연민은 스스로를 병들게 하고, 삶을 무시무시한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
우연히, 동시에 경험한 책과 영화는, 자기 연민과 기만, 변명과 침묵 등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게 해 준 좋은 작품들이다.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소설] 타인에게 말걸기_은희경 (0) | 2024.07.05 |
---|---|
[한국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_정세랑 (0) | 2024.06.30 |
[한국 소설] 너라는 생활_김혜진 (2) | 2024.06.19 |
[한국 에세이] 슬픈 세상의 기쁜 말_정혜윤 (0) | 2024.05.31 |
[영미 소설] 설득_제인 오스틴 (1) | 2024.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