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그의 책에 스며있는 분위기가 좋다.
책에 실린 8편의 단편은, 주인공의 경험, 생각, 감정들을 <일인칭 단수> 시점으로 써 내려간 이야기들이다. 책을 읽다가 소설이라기보다는 하루키의 단상이나 에세이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림>
p 45. 프랑스어로 '크렘 드 라 크렘'이라는 말이 있는데, 아나? 크림 중의 크림, 최고로 좋은 것이라는 뜻이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에센스.
p 48. 대체 무슨 일인지 곱씹어보았지. 상처도 받았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멀찌감치 물러나 바라보니 전부 아무래도 상관없는 시시한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어. 인생의 크림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라고. 인생의 크림. 그가 말한다. 내가 말한다.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 설명이 안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이. 그런 때는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커다란 파도 밑을 빠져나갈 때처럼.
<찰리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p 67.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이 영혼 깊숙한 곳의 핵심까지 가 닿는 음악이었다는 것이다. 듣기 전과 들은 후에 몸의 구조가 조금은 달라진 듯 느껴지는 음악--그런 음악이 세상에는 분명히 존재하는 법이다.
<위드 더 비틀즈>
p 79. 그렇게 기억이란 때때로 내게 가장 귀중한 감정적 자산 중 하나가 되었고, 살아가기 위한 실마리가 되기도 했다.
p 83. 그곳에는 음악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곳에 있었던 것은 음악을 포함하면서도 음악을 넘어선, 더욱 커다란 무언가였다. 그리고 그 정경은 순식간에 내 마음속 인화지에 선명히 아로새겨졌다. 아로새겨진 것은 한 시대 한 장소 한순간의, 오직 그곳에만 있는 정신의 풍경이었다.
p 114. 그들의 음악은 그 시절의 우리를 마치 벽지처럼 구석구석 에워싸고 있었다.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p 131. 그렇다 인생은 이기는 때보다 지는 때가 더 많다. 그리고 인생의 진정한 지혜는 어떻게 상대를 이기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잘 지는가 하는 데서 나온다.
p 147. 물론 지는 것보다야 이기는 쪽이 훨씬 좋다.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경기의 승패에 따라 시간의 가치나 무게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시간은 어디까지나 똑같은 시간이다. 일 분은 일 분이고, 한 시간은 한 시간이다. 우리는 누가 뭐라 하든 그것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시간과 잘 타협해서, 최대한 멋진 기억을 뒤에 남기는 것--그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p 148. 나도 소설을 쓰면서 그 소년과 똑같은 기분을 맛볼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사과하고 싶어 진다. '죄송합니다. 저기, 이거 흑맥주인데요."라고. (죄송할 필요 없어요. 전혀.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를 안심시킨다. 아까부터 흑맥주가 오기를 기다렸거든요.)
인생은 진액의 크림 같은 일들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시하고 사소한 무수한 순간들이 존재한다. 과거에 나를 괴롭게 했거나 행복하게 했던 일들도, 지금은 소식조차 알 수 없는 누군가도 아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학창 시절 매일 듣던 그 음악이 여전히 나에게 감동을 주는 것처럼,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의 체온이 나에게 끊임없이 따스함을 건네주는 것처럼. 그 모든 순간들은 또 다른 나를 만들어 준 소중한 것들이다.
깊은 맛의 에일을 선호하는 사람, 시원한 라거를 좋아하는 사람, 혹은 흑맥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온갖 종류의 맥주는 누군가에게 소비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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