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라기엔 에세이, 에세이라기엔 시 같은 느낌의 책.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었다.

 

환부에 바를 흰 연고, 거기 덮을 흰 거즈 같은 무엇인가가 필요했다고.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단어들을 들여다보는 일엔?

 

 

두시간 만에 죽은 내 어머니의 첫아기, 나의 언니의 죽음을 생각하며 사라진 것들과 살아남았지만 상흔을 품고 있는 모든 것들을 애도하고 위로하는 이 책.

 

1944년 바르샤바에서 있었던 독일군의 만행. 무너져 내린 도시엔 잔해들의 흰빛과 검은 흔적의 폐허만이 남았었다. 잔해들 위에 끊임없이 복원되었던 그 도시에서 작가는 책의 3분의 2를 썼다고 한다.

 

 

p 55. 이게 뭔가, 대체 이게 뭔가 생각할 때 더럽게도 하얗게 내리는 눈.

p 58. 부서지는 순간마다 피도는 눈부시게 희다.

p 59.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p 64. 이 차갑고 적대적인 것은? 동시에 연약한 것, 사라지는 것,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이것은?

p 67. 그 소금 산에, 아무리 희게 빛나도 그늘이 서늘한.

 

p 78. 하얗게 웃는다,라는 표현은 (아마) 그녀의 모국어에만 있다. 아득하게, 쓸쓸하게,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으로 웃는 얼굴, 또는 그런 웃음. 너는 하얗게 웃었지. 가령 이렇게 쓰면 너는 조용히 견디며 웃으려 애썼던 어떤 사람이다. 그는 하얗게 웃었어. 이렇게 쓰면 (아마) 그는 자신 안의 무엇인가와 결별하려 애쓰는 어떤 사람이다.

p 80. 사라질 --사라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통과했다 묵묵히.

 

p 109. 그리고 그보다 사소하게, 그녀는 자신의 재건에 빠진 과정이 무엇이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녀의 몸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녀의 넋은 아직 육체에 깃들어 있다. 폭격에 완전히 부서지지 않아 새 건물 앞에 옮겨 세운 벽돌 벽의 일부 --깨끗이 피가 씻겨나간 잔해-- 를 닮은, 이제 더 이상 젊지 않은 육체 속에. 부서져본 적 없는 사람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어 여기까지 걸어왔다. 꿰매지 않은 자리마다 깨끗한 장막을 덧대 가렸다. 결별과 애도는 생략했다. 부서지지 않았다고 믿으면 더 이상 부서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니 몇 가지 일이 그녀에게 남아 있다; 거짓말을 그만둘 것. (눈을 뜨고) 장막을 걷을 것. 기억할 모든 죽음과 넋들에게--자신의 것을 포함해--초를 밝힐 것.

 

 

p 133.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말을 모르던 당신이 검은 눈을 뜨고 들은 말을 내가 입술을 열어 중얼거린다. 백지에 힘껏 눌러쓴다. 그것만이 최선의 작별의 말이라고 믿는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135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어딘가로 숨는다는 건 어차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라는 소설 속 말처럼 그 흰, 모든 흰 것들은 죽음을 되돌릴 수도 상처를 깨끗하게도 할 수도 없다. 하지만 하얀 작별, 흰 애도, 하얀 초의 심지에 불꽃을 켜 두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회복할 수 있도록.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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