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아일랜드 한 마을. 추위가 매섭고, 한기가 칼날 같다.
실업수당을 받기 위한 긴 줄, 전기 요금을 못내 추운 집에서 외투를 입고 지내는 사람들, 아동수당을 받으려는 여인들, 돌보는 사람들이 떠난 젖소들의 울음, 경기는 꽁꽁 얼어붙었고, 여기저기 문 닫는 회사들과 상점들이 넘쳐나며, 다른 나라로 무작정 떠나는 사람들도 많았다.
펄롱은 부자는 아니었지만 석탄, 장작 등을 파는 야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며, 부지런한 아내 아일린과 바르고 장래성을 보이는 다섯 딸과 함께 소박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간다.
20. 가끔 펄롱은 딸들이 사소하지만 필요한 일을 하는 걸 보며--성당에서 무릎 절을 하거나 상점에서 거스름을 받으며 고맙다고 말하는 걸 보면서-- 이 애들이 자기 자식이라는 사실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한 기쁨을 느끼곤 했다. '우린 참 운이 좋지?" 어느 날 밤 펄롱이 침대에 누워 아일린에게 말했다. "힘들게 사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
24. 혹독한 시기였지만 그럴수록 펄롱은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딸들이 잘 커서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여학교인 세인트마거릿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도록 뒷바라지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나 또한 두 자녀가 친절한 행동을 하며, 바른 생각으로 열심히 살고 있는 모습에 자랑스러움을 느끼며 그것이 나의 삶에 많은 기쁨을 준다.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뒷바라지하며, 가족과 나의 노년을 대비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살고 있기에 펄롱의 맘이 너무 이해가 되었다.
22. 벌써 길에서 딸들한테 눈길을 주는 남자들이 있었다. 펄롱은 마음 한편이 공연히 긴장될 때가 많았다. 왜인지는 몰랐다. 모든 걸 다 잃는 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그러다 문득 그리고 자주, 아들과 딸, 가계 형편, 가족들, 미래에 대한 생각이 한가득 몰려오면 걱정과 염려로 우울해지기도 한다. 삶이란 이런 거지. 다 이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지. 하며 소설을 읽어나가다 작가가 말하는 '사소한 것들'에 놀라고 부끄러워진다.
허드렛일을 했었던 엄마와 윌슨 부인의 집에서 살았던 펄롱은 아버지의 존재를 모른 채 슬픈 시절을 보낸다. 그는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도 주인아주머니와 또 다른 일꾼이었던 네드 아저씨의 친절과 배려로 그 어려운 시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과거의 슬픔은 현재 자족하며 살아가려 부단히 노력하는 펄롱을 종종 우울하게 만들었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은 그를 심란하게 만든다.
35. 갑자기 무언가가 목구멍에서 울컥 치밀었다. 마치 이런 밤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일요일 밤에 대체 무엇 대문에 이렇게 심란한 걸까?
43-44. 이게 다 무엇 때문일까? 펄롱은 생각했다. 일 그리고 끝없는 걱정. 캄캄할 때 일어나서 작업장으로 출근해 날마다 하루 종일 배달하고 캄캄할 때 집에 돌아와서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가 어둠 속에서 잠에서 깨어 똑같은 것을 또다시 마주하는 것.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도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펄롱은 석탄을 배달하러 수녀원에 갔을 때 허름한 차림새로 마루 바닥을 광내고 있던 젊은 여자와 어린 여자아이들을 마주한다. "아저씨, 우리 좀 도와주시겠어요?"
이상한 낌새가 있었지만 그들에게 손을 내밀지는 못했던 그는 혼란스러웠지만, 아일린은 그런 일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우리 딸들은 건강하게 잘 크니 상관없다며 안심시킨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 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 그래야 계속 살지."
그러나 펄롱은 미스즈 윌슨이 이렇게 생각했다면,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어머니와 그를 밀어냈다면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됐을지 두려웠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석탄을 주문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다시 수녀원으로 배달을 간 펄롱은 광에 갇혀있던 여자 아이를 발견한다. 그녀는 출산한 지 14주 되었고 아기의 행방을 모르는 채 갇혀있었다. 수녀원을 관리하는 선한 목자수녀회는 직업여학교와 세탁소를 함께 경영하고 있던 실세였다. 타락한 여성들을 위한다던 자선 단체는 여자들을 가두고 부리고 학대하고 있었다.
99.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탕 관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 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 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102. 좋은 사람들이 있지. 주고받는 것을 적절하게 맞추어 균형 잡을 줄 알아야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사람들하고 잘 지낼 수 있단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특권임을 알았고, 왜 어떤 집에서 받은 사탕 따위의 선물을 다른 더 가난한 집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렇듯 크리스마스는 사람들한테서 가장 좋은 면과 가장 나쁜 면 둘 다를 끌어냈다.
척지거나 다투지 않고 살아왔던 펄롱은 권력과 힘과 부를 가진 세력과 맞설 용기를 낸다. 분명히 맞닥뜨려야 할 어떤 두려움들을 예견하지만 또 설렘을 간직한다. 그는 수녀원으로 향하고 맨발에 초라한 행색의 아이를 광에서 데리고 나온다.
119.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욕심부리지 않고, 살뜰하게 가족을 챙기고, 이웃과 적당히 돕고 베풀며, 단정한 인생을 사는 것도 훌륭한 인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주변이 큰 위기 없이 흘러간다고, 혹은 나에게 어떤 불이익이 있을까 봐 정의롭지 못한 일들을 모른척하고, 손 내미는 사람들을 뿌리치는 것은 이기적이고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이렇게 말하기보다는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걔들은 우리 애들과 같아. 나에게 반드시 닥칠 고난과 궁핍과 갈등이 있겠지만 용기 내볼래. 맞서볼래." 이렇게 말하는 용기를 내보기로.
펄롱은 또 다른 일꾼이었던 네드와 닮았다는 말에 그가 자신의 아버지일 지도 모른다고 깨닫는다.
111.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펄롱으로 하여금 자기가 더 나은 혈통 출신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서, 그 세월 내내 펄롱의 곁에서 변함없이 지켜보았던 네드의 행동이, 바로 나날의 은총이 아니었나. 펄롱의 구두를 닦아주고 구두끈을 매 주고 첫 면도기를 사주고 면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사람이다.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120.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네드와 미시즈 윌슨은 펄롱의 곁에서 그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사람들이었다. 손톱 솔과 비누 한 장, 보온 물주머니, 곰팡내 나는 책 <크리스마스 캐럴>, 얼마든 쓸 수 있었던 물건들, 먹을 수 있던 음식들, 함부로 평가당하지 않았던 일 등,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야말로 한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 사람 되게 하는 "얼마나 위대한 것들"인지....
길을 잃은 펄롱에게 한 노인은 조언한다.
54. 이 길로 가면 어디가 나오는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이 길?"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우리는 어느 길로도 갈 수 있다.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나 하나 챙기며 사는 것도 힘겨운 세상이지만 작은 친절과 어떤 용기는 한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더 평화롭게 만들 수 있다. 걱정과 근심으로 잠이 잘 오지 않는 요즈음,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며 참담하다. 나의 이익보다는 더 나은 선택이 필요한 이때 정치인들도 시민들도 용기를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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