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의 스페셜 에디션이다.
한강의 장편 소설 <희랍어 시간> , 단편 소설 <회복하는 인간 > <파란 돌>, 네 편의 시들, 여덟 편의 산문들을 한 권으로 엮은 책. 
 
한강의 작품들을 다시 꺼내 읽게 동기는, 영화 <서울의 봄> 관람이다.
 
'우리가 이토록 폭력과 아름다움이 뒤섞인 세상을 견딜 수 있는가, 껴안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 <채식주의자>.
 
'삶을 살아내야 한다면, 인간의 어떤 지점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으로 시작된, <희랍어 시간>.
 
'인간의 연하고 섬세한 자리를 들여다보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이어진 1980년 광주이야기, <소년이 온다>.
 
올해 나의 독서는 한강의 책들로 마무리다.

 
희랍어 시간

시력을 잃어가는 한 존재,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지 않고 두꺼운 안경과 빛에 의지해 희랍어 강사 생활을 하고 있는 남자.
 

안갯속을 나아가는 것 같을 때가 있어요.
그 도시의 겨울에 종종 찾아오던, 새벽에 호수에서 시가지로 밀려온 안개가 저녁까지 걷히지 않던 날처럼.
벽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들이 안개에 덮여 흔적도 보이지 않는 회색 건물들 사이를, 축축한 석벽에 바싹 몸을 붙이고 천천히 걸어야 하던 밤처럼.
아무도 자전거를 타지 않던 밤, 사람의 자취 없이 무거운 발소리들만 들려오던 밤, 아무리 더 나아가도 싸늘한 집에 다다를 수 없을 것 같던 밤처럼.

 
 
말을 잃은 한 존재,
열일곱 살, 처음으로 말을 잃었던 그녀를 회복시킨 건 불어 단어였다. 이혼 후 양육권을 뺏기고, 또다시 입을 뗄 수 없어, 말을 되찾기 위해 희랍어를 배우는 여자.
 

셀 수 없는 혀와 펜들로 수천 년 동안 너덜너덜해진 언어. 그녀 자신의 혀와 펜으로 평생 동안 너덜너덜하게 만든 언어. 하나의 문장을 시작하려 할 때마다 늙은 심장이 느껴졌다. 누덕누덕 기워진, 바싹 마른, 무표정한 심장. 그럴수록 더 힘껏 단어들을 움켜쥐었다. 한순간 손아귀가 헐거워졌다. 무딘 파편들이 발등에 떨어졌다. 팽팽하게 맞불려 돌던 톱니바퀴가 멈췄다. 끈덕지게 마모된 한 자리가 살점처럼, 숟가락으로 떠낸 두부처럼 움푹 떨어져 나갔다.

 
 
그들과 세계 사이에 놓인 서슬 퍼런 칼날. 고립감, 답답함과 두려움.
희랍어 강사와 학생으로 만난 두 사람은 처음엔 그들의 연약한 부분을 볼 수 없었지만, 그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후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 줄 수 있게 된다. 
 

.........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 있어요.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어요.

 
 

그녀는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인다. 입술을 떼었다가 힘껏 다문다.
그가 내민 손을 그녀의 왼손으로 받친다. 주저하는 오른손의 검지손가락으로 그의 손바닥 위에 쓴다. 

아니요. 첫 버스를 타고 갈게요.

 
 
폭력과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에도 따스함과 아름다움은 여전히 있다.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듯이, 상처와 치유가 반복되듯이,
 
소설의 마지막 장 제목이 '0'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빛의 소멸, 소리의 꺼짐, 공의 상태, 혹은 인간의 가장 연약한 부분. 
 
가느다란 숨소리처럼, 스치는 체온처럼, 조용히 위로가 전해지는 따뜻한 사랑이야기.
 
 

우리가 가진 가장 약하고 연하고 쓸쓸한 것, 바로 우리의 생명을 언젠가 물질의 세계에 반납할 때, 어떤 대가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언젠가 그 순간이 나에게 찾아올 때, 내가 이끌고 온 모든 경험의 기억을 나는 결코 아름다웠다고만은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렇게 남루한 맥락에서 나는 플라톤을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라고. 그 역시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라고. 완전한 것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세상에는.

 


 

 

 



오랜만에 교양 심리학 책 한 권.
[자존감 수업]


 

비난에 대하여

 

사실을 말하거나, 좋은 의도로 한 말도 비난이 될 수 있다. 눈빛과 작은 제스처 혹은 무관심도 누군가에겐 화살이 되어 꽂히기도 한다. 말하는 의도와 수반된 감정은 읽히기 마련이다.

그러니 모든 언어와 태도를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 가족과 타인에게 무심코 던진 말이나 몸짓이 그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간혹 그럴 때가 있을 것이다.

말 한마디,

어떤 눈빛,

나에 대한 사실적 묘사,

무심한 듯한 비교.

별 거 아닌 무언가가 때로는 엄청난 힘으로 나를 지배할 때가.

 

그러나 나를 비난하는 사람은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단지 그 사람의 감정일 뿐이다. 어쩌면 별 의도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그 사람의 성격이나 말투일지도.

 

우리에게 어떤 의견을 제시하거나 평가했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일리 없다. 개인적 의견이고, 언제 변할지 모른다. 비난하는 그들은 이미 스트레스에서 자신을 방어하지 못한 상태다.

 

 

그러니, 타인의 생각은 그들만의 것으로 놔두자.

상대를 인정하는 대범함도 길러보자.

 

 

 

정확한 대사가 기억나진 않지만, 

영화 <쵸콜렛>에서 로쉐(줄리엣 비노쉬)는 가정폭력을 당하고 자신의 초콜릿 가게로 찾아온 조세핀(레나 올린)에게 남편이 전부가 아니니 자신의 삶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때 조세핀은 나의 세상에는 남편이 전부라고 꾸짖듯이 울부짖는다. 그때 로쉐는 맞서지 않는다.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미안해요."라고 사과한다.

 

그 장면이 너무 좋았다. 나의 생각과는 다른 타인의 감정을 인정하고 어루만져 주는 로쉐의 따스함이 닮고 싶었다.

로쉐가 있었기에, 조세핀은 자신을 가두었던 상황에서 벗어나는 모험을 멈추지 않았고, 자신의 삶을 찾게 된다.

 

 

 

 

때론 실패하거나, 어떨 때는 비난받는 나인 듯해 괴로울 수 있지만, 가끔은 우울하고 외롭겠지만,

오늘도 나를 칭찬하고 사랑하기. 

 

그리고 그것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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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문학관 (경기 광명)
기형도 플레이 (연극)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시집)
기형도 전집 
기형도를 잃고 나는 쓰네 (김태연 소설)
 
 
 
기형도 시인의 삶과 문학에 한동안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 여운은 강렬하다.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시고, 생계를 이어나가야 했던 어머니와 누이들, 그리고 시인.
한 누이를 먼 나라로 보낸 후, 찢긴 마음의 상처와 끝이 없던 그리움.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언젠가 쓰러질 거란 예감을 늘 갖고 살았던 시인.
스물아홉, 그의 삶은 끝나고 말았다. 뇌졸중.
 
 
 
그의 시와 소설, 산문을 읽으면 슬픔과 허무가 밀려온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힘으로.
그가 말하는 희망의 노래마저 나를 외로움과 쓸쓸함으로 채운다.
늘 어떤 시인의 시집을 읽을 때면, 몇 가지의 시에 더 애정이 가곤 했지만, 기형도 시인의 모든 시들은 그러했다.
 
연극 기형도 플레이는 한예종 출신 작가들이 기형도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쓴  단편 희곡으로 꾸민 연극이다.
우리가 본 회차는 <빈 집>, <흔해빠진 독서>,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바람의 집>, <조치원> 다섯 편의 플레이였고,
모든 극은 슬픔과 쓸쓸함이 묻어났다.  <조치원>의 박호산, 이창훈 배우의 연기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시인의 친구였던 김태연 작가의 소설에서는, 시인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 좋았다.
그의 성격, 말투, 인간 관계, 사생활, 그가 갔던 식당, 찻집, 탔던 버스 번호마저도. 
시인을 더 이해할 수 있게 해 준 책이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형도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밀란 쿤데라의 단편집, 우스운 사랑의 첫 번 째 이야기, <아무도 웃지 않으리>의 주인공처럼,
소설 <농담> 속, 루드빅의 삶은 농담 한 마디로 유린된다.
 
복수와 회복을 꿈꾸며 버텨온 삶은 결국,
허무와 하강으로 잠식된다.
 
사실은 잊히고, 회복의 가능성은 전무할 뿐,
삶이란 허무 그 자체이다.
 
사랑이 사랑이고, 고통이 고통인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세상은 상상이고 기념비이다.
 
결국,
농담도 우연도 자신이 짊어져야 할 무거운 십자가.
 

그렇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등을) 고쳐볼 수 있다는 가능성데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모든 것은 잊히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말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치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힐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노래들 속에서(이 노래의 유리집 속에서) 행복했다.
거기에서는 슬픔이 가볍지 않고, 웃음이 비웃음이 아니고, 사랑이 우습지 않으며, 증오심이 맥없지 않고, 사람들은 온몸과 마음으로 사랑하며, 행복은 사람들을 춤추게 만들고, 절망은 다뉴브 강으로 뛰어들게 만들며, 그곳에서는 그러니까 사랑이 사랑으로, 고통이 고통으로 머물러 있었고, 아직 가치들이 유린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노래들 속에 나의 출구가 있고, 나의 본원의 표지가, 내가 배반한 나의 집,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 나의 집인 집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깨달았다.

이 나의 집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우리가 노래하는 것들은 모두가 단지 추억이고 기념물이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으로 보존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느꼈다. 나의 집의 바닥이 내 발밑으로 꺼져 내려앉는 것을, 그리고 내가 클라리넷을 입에 문 채 수십 년 수백 년의 심연 속으로, 바닥 없는 심연(사랑이 사랑이고 고통이 고통인 곳)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을, 무언가를 찾고 갈망하는 이 추락이라고 나 자신에게 말하며 놀라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나의 집에, 내 황홀한 현기증에 자신을 내맡겼다.

 
 

내게는 언제나 너무도 현재적이고 생생한 그와 나 사이의 투쟁 위로 모든 것을 잠재우는 위무(위로하고 어루만지어서 달램)의 물결이 파도처럼 넘쳐오는 것을 나는 보았다. 시간의 물결, 그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모든 시대들 사이의 차이들마저 다 씻어가 버리는데, 하물며 보잘것없는 두 개인 사이의 차이는 얼마나 쉽게 씻어가겠는가.

 
 
세월은 앞으로 빠르게 질주한다. 아무리 열심히 과거로 달려봐야, 달려가는 방향과 반대편에 있는 목적지로 서서히 갈 수밖에 없다. 역사는 뒤로 가고, 시대는 바뀌어, 영원한 것은 없으며, 미루어진 복수는 환상으로, 자신만의 종교로, 신화로 바뀌어버리고 만다. 허망한 일이다.
 
농담은 진담이 되고, 진실된 말은 허공에 가볍게 흩어지는 일들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목격하는가. 
밀란 쿤데라의 초기 작인 <농담>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뜨거운 여름, 정동진 독립 영화제를 다녀왔다.

내 기억 속 강릉은 에메랄드 빛 바다, 수제 맥주, 향긋한 커피의 낭만적인 장소다.

이 여름, 휴가여행으로 선택한 강릉 또한 잊지 못할 것이다.  별이 쏟아지는 여름밤, 대형 스크린에 떠오르는 영화들, 현장이 주었던 다정한 분위기가 꿈만 같다.

 

강릉 고래책방에서 구입한 뒤라스의 소설 <연인>.

마음에 두었던 책이었는데 마침 눈에 띄었고, 생각보다 두께가 얇아 놀랐다.

표지에는 영화 <연인>의 주연, 제인마치의 사진이 원서의 뒤라스 사진과 같은 분위기로 연출되어 있다.

 

 

 

마리그리트 뒤라스가 70대에 쓴 <연인>은 그녀의 자전적 소설이다.

1929년 프랑스령 베트남이 배경인 소설은, 전쟁과 식민지, 인종과 계급, 부와 가난 등이 뒤엉킨 상황 속에서, 뒤틀린 가족의 이야기 그리고 중국인 부호 아들과 가난한 프랑스 소녀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뒤라스의 자전적 소설이지만, 영속할 수 없는 기억 그리고 망각으로, 어느 부분이 미화이고 과장인지, 픽션인지 알 수 없지만, 삼십 대의 젊은 중국인과 열다섯  반  프랑스 소녀와의 사랑과 육체관계는 굉장히 파격적이다. 어린 소녀의 욕망과 대담함도 놀라울 따름이다. 

 

 

지금, 이 글에서는 그 젊은 날의 숨겨진 시기, 그 어떤 사실, 감정, 사건 들에 대해서, 그 묻혀 있던 것들을 캐내려 한다. 

 

 

 

소녀의 엄마

_ 삶에 대한 암담한 절망, 어머니는 날마다 그 절망에 시달리며 지냈다.

_ 나는 그에게 내 어린 시절 내내 어머니의 불행이 꿈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꿈은 바로 어머니였다.

_ 그녀는 신중하지 못했고, 주책스러웠고, 무책임했다. 어머니는 늘 그랬다. 어머니는 그저 살아가기만 했다. 

_어머니가 이따금씩 아주 행복해지는 시간, 온 집안을 대 청소하며 모든 것을 잊는 시간이었다. (....) 갑자기 호수, 강가의 들판, 개울, 해변처럼 변해 버린 이 집에서 우리도 행복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모두가,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한다.

_ 어떤 일에서도 끝까지 버텨 내는 기질 말이다. 그녀는 어떤 것도 그냥 내버려 두는 일이 없다. 사촌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고통이나 고역에 대해서마저도 포기한다는 건 상상도 못 한다. 

 

 

 

큰 오빠

_ 내게 전쟁은 큰 오빠와도 같다. 전쟁은 큰오빠처럼 도처에 번지고, 침입하고, 훔치고, 또 감금한다. (....) 악은 바로 거기에, 우리 피부에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

 

 

 

작은오빠

_ 내가 그에 대해 품고 있는 이 무모한 사랑은 나에게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신비로 남아 있다. 왜 내가 따라 죽고 싶을 만큼이나 그를 사랑했는지, 나는 그 이유를 모른다. 내가 이 사랑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은 지 10년이 지났고, 그래서 그에 대해 거의 생각하고 있지 않을 무렵이었다. 나는 영원히 그를 사랑할 것 같았고, 이 사랑에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죽음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_ 내 작은 오빠는 불멸이었다.

 

 

 

가족

_ 우리 가족이 서로에게 품었던 사랑, 또 끔찍한 증오, 파산과 죽음이 뒤엉킨 우리 가족 공동의 이야기.

_ 늘 무리 속에서 고립된 존재들로 있는 그들.

_ 대화라는 단어는 허영이다. 이 집에 가장 잘 어울리는 어휘는 수치와 자만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가족은 삶을 살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근원적인 수치심 속에 빠져있다. 우리 형제들의 이야기 가장 깊숙한 곳에는 우리 세 사람이 사회가 목 졸라 죽인 우리 어머니, 그 선량한 여인의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우리는 어머니를 절망에 빠뜨려 버린 이 사회의 한편에 비켜서 있다. 그토록 다정하고, 그토록 남을 쉽게 믿는 우리 어머니에게 사람들이 저지른 짓들 때문에, 우리는 삶을 증오하고, 우리 자신을 증오하고 있다.

 

 

 

연인

_ 처음부터 우리는 두 사람이 공유하는 미래는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미래에 대해서는 결코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_ 두려움을 넘어 사랑할 힘이 없기 때문에 그는 곧잘 운다. 그의 영웅심. 그것은 바로 나이고, 그의 노예 근성, 그것은 그의 아버지의 재산이다.

_ 그녀를 향한 자신에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해도 그녀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것은 그 자신도 아직 잘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그는 그 사랑을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_ 그렇게 나는 그의 아기가 되었다. 그도 역시 나에게는 또 다른 무엇이 되었다.

 

 

 

그녀의 연인은 그의 아버지 뜻대로 중국인 부호 딸과 결혼하고, 소녀는 프랑스로 떠나기 위해 배를 탄다. 떠나는 배에서 그녀는 육지를 바라보다, 그의 길고 검은 차, 그리고 하얀 양복을 입은 실루엣을 발견한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도 그를 보았다.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은 그렇게 끝이 난다. 

 

대양을 횡단하던 어느 밤, 배의 중앙 갑판 응접실에서 쇼팽의 왈츠가 울려퍼진 순간, 끝난 줄 알았던 사랑이 아프고 슬프게 살아난다.

 

그리고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콜랑의 그 남자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불현듯 예전에 자신이 콜랑의 남자에 대해 가졌던 감정이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런 종류의 사랑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제 그는 모래 속에 스며든 물처럼 이야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이제야, 쇼팽의 음악이 큰 소리로 퍼지는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겨우 다시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작은 오빠가 죽은 후에야 그의 불멸을 기억해 냈듯이.

 

불멸성은, 결코, 불멸성으로 눈에 띄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절대적인 이원성이다. 그것은 세부적인 것에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근원 속에서만 존재한다. 어떤 사람들은 불멸성의 존재를 품을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렇게 하는 줄을 모르고 있다는 조건에서이다. 마찬가지로,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내면에서 그 불멸성의 존재를 간파해 낼 수 있는데, 그것도 똑같은 조건에서, 즉 그들이 그럴 능력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고서이다. 이런 불멸성이 살아 있을 때에만, 삶은 불멸의 것이 된다.

불멸성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소녀는 콜랑의 그 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무모한 용기라도 내어 그녀를 선택해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전쟁은 끝나고 몇 해가 흐르고, 몇 번의 결혼과 몇 번의 이혼에서 아이들을 낳고, 책을 쓰는 일을 하고 있던 어느 날,

파리에 방문한 콜랑의 남자는 그녀에게 전화를 한다.

 

그의 사랑은 예전과 똑같다고. 그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결코 이 사랑을 멈출 수 없을 거라고. 죽는 순간까지 그녀만을 사랑할 거라고.

 

 

 

소설의 아름다운 표현들이 인상적이었다.

서로에게 고통의 씨앗이 되는 가족, 욕망과 사랑, 불멸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 준 책이다.

책을 본 후 다시 영화를 보니,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책을 먼저 읽는 것을 추천한다.

 

 

 

 

 

 

 

 

 

 

 

 

2023년 7월 11일 밀란 쿤데라가 세상을 떠났다.

 

괴테나 베토벤, 헤밍웨이, 셰익스피어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책이나 예술 작품에서 만났을 때 묘한 동경심 같은 것이 있었다.  '내'가 '밀란 쿤데라'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것이 이상하리만큼 비현실적이다.

 

1929년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난 그는, 1948년 체코 공산당에 입당했으나 1950년 당에 반하는 활동으로 추방당하고, 1956년 다시 입당 승인되었으나 1970년 다시 추방당한다. 스탈린의 정치에 회의를 느낀 그는 반 공산주의자로 활동을 하게 되며 1968년 프라하의 봄에 참여한다. 이후, 저서가 압수되고 탄압을 받으며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한다.

그의 작품들에는 시대와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우스꽝스럽게 혹은 진지하게 그려진다.

 

<우스운 사랑>은  "내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투영하기에 어느 것보다 애착이 가는 작품"이라고 애정을 보인 초기 연작집이다.

 

 

 

 

사랑 하나.아무도 웃지 않으리

 

가벼운 농담으로 시작된 한 개인의 파멸이 전체주의의 무거움 속에서 약간은 우스꽝스럽게 그려지고 있다.

나의 거짓말은- 당신이 그렇게 부르고 싶다면 - 바로 내 본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야. 그러한 거짓말을 내가 하는 척하는 게 아냐. 그러한 거짓말 속에서 나는 실제로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거지. 그렇지만 이 세상에는 내가 통찰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일들이 있지. 내가 사랑하고 진지하게 여기는 일들이 있단 말이야.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나는 농담으로 대하지 않아. 그런 것들을 두고 내가 거짓말을 하면, 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거든.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건 당신도 내게 요구할 수 없어. 그런 일은 절대 하지 않을 테니까.

 

 

 

사랑 둘. 영원한 그리움의 황금 사과

 

글자 그대로 우리가 무언가를 믿게 되면, 우리는 그 믿음 때문에 끝내는 불합리성에 도달하게 되지. 어떤 특정한 정책의 진정한 신봉자라면 그 정책의 궤변이 아니라, 그 궤변 뒤에 숨어 있는 실제적인 목표에 주목하지. 정치적인 구호와 궤변은 결국은 우리더러 믿으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야. 오히려 그것들은 공동의 협의된 구실로 이용되는 거야. 그것들을 말 그대로 믿는 바보들은 조만간 그것들의 모순을 발견하고, 봉기를 꾀하기 시작하다가 마침내는 굴욕적으로 이단자나 배신자로 종말을 고하게 되는 거야. 아니, 지나친 믿음은 결코 좋은 결실을 가져다주지 않아. 이것은 정치적 또는 종교적 체제에 해당하는 말일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가씨를 정복하려고 할 때의 예의 그 체제에서도 해당되는 내용이야.

 

결코 손에 잡히지 않는 그린 라이트,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동경, 영원한 그리움의 황금사과!

 

 

 

사랑 셋. 히치하이킹 놀이

 

육체와 영혼을 결코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는 그녀, 사랑하는 사람과 거짓하나 없기를 바라는 진지한 그녀.

그녀는 우울한 질투심으로 히치하이킹 놀이를 시작한다. 

무책임한 놀이 속에서 뻔뻔하고, 자유분방하며 가벼워질 수 있었다. 놀이가 극단적이 될수록 그들은 서로의 경계를 넘게 된다. 장난으로 시작한 놀이가 원래의 삶을 공격한다.

 

그는 그녀의 개성을 특징 지워 주었던 윤곽은 단지 허상에 불과하며, 그러한 허상을 바라보다 희생된 상대가 바로 그 자신임을 깨달았다. 실제로 그가 사랑했던 그 아가씨는 그의 동경과 유추와, 신뢰의 산물에 불과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서야 비로소 그의 여자친구의 진정한 모습이 그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 절망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절망적으로 낯설게, 절망적으로 모호한 모습으로. 그는 그녀를 증오했다.

 

모든 놀이가 끝난 후 "나는 나야, 나는 나야.............. " 하고 흐느끼는 그녀를 향해 청년은 생각한다.

다만 미지의 크기가 또 함께 들어 있을 그녀의 맹세의 슬픈 무의미만을_____________.

 

마약에 취하듯 놀이에 취해 정 반대의 모습을 연기했던 그녀를 오해하며 그들은 멀어진다.

오해일까? 진실일까? 우리의 내면에는 수많은 다른 '나'가 존재한다. 

카멜레온 같은 나, 감정을 내면에 묻은 채 표현하지 않는 나,  모든 다른 나임에도 '나는 나'라고 흐느끼는 우리는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이다.

 

 

 

사랑 넷. 사랑의 심포지엄

 

블투명하고, 우스꽝스럽고, 즉흥적이고 무심한 사람들, 사랑들.......

 

 

 

사랑 다섯. 늙은 주검은 젊은 주검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남자의 가슴속 기념비와 여자의 외부에 서 있는 기념비.

영원하지 못할 그 순간. 그때는 그때일 뿐.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 

늙은 주검은 젊은 주검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사랑 여섯. 20년 후의 하벨 박사

 

그토록 에로틱한 명성을 얻었던 하벨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더 이상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순종적이 되었고 외롭고 서글픈 감정을 느낀다.

그의 아내인 유명한 여배우는 하벨이 그녀를 버리고 떠날까 봐 시기심에 늘 불안하다.

반면 하벨은 그녀의 유명세 덕에 매력 없어진 자신의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었다.

 

파트너의 외모, 지위, 인격 등에 영향을 받는 나. 

사랑의 현재성

사랑이라는 착각

육체적인 쾌락

말의 수집

우스운 사랑

 

 

 

사랑 일곱. 에두아르트와 신


신을 믿지 않는 에두아르트가 신을 믿는 알리스를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한 후 겪는 곤란함과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

형이 그 미친 사람한테 순수한 진실만을, 형이 그 사람을 보고 느낀 것만을 이야기한다면, 형은 결국 미친 사람과 진지한 대화를 하는 꼴이 되고 말고, 결국에는 형도 미칠 거예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도 다 마찬가지예요. 내가 그녀의 면전에 대고 옹고집쟁이처럼 진실을 말했다면, 그건 내가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꼴이 되고 마는 거예요. 그러나 그처럼 진지하지 않은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스스로 진지하지 않게 되는 걸 뜻하지요. 형, 나는 이 모든 미치광이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또 그들 중의 하나가 되지 않으려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어요.

 

알리스와 나눈 사랑의 이야기는 어떤 진지함이나 의미도 없이 우연과 착각으로 짜여진 무가치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그에게 분명해졌다.

 

이 세상의 누구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의 인생은 슬플 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에두아르트는 신을 동경한다. 왜냐하면 신만이 모든 정신분산적인 의무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은 단순하게 존재할 수 있고, 그리고 신만이 (단독자, 유일자, 비존재자로서) 이 비본질적인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존재적인) 세계에 대응할 본질적인 반대세력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사진 속 책은 절판되고, 지금은 <우스운 사랑들>이란 제목으로 바뀌었다.

 

밀란 쿤데라의 입문서라 할 정도로 다른 작품들의 모티브가 되어 보이는 내용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영혼과 육체, 가벼움과 무거움, 농담과 진지함, 인간의 실존에 대한 고뇌의 일관성을 우스꽝스러운 사랑의 에피소드 안에서 우습지만 또 마냥 가볍지 않은 톤으로 그리고 있다.

 

농담(1967)

사랑(1968)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

불멸 (1990)

정체성(1998) 

무의미의 축제(2014)

 

내가 접한 밀란 쿤데라의 책들이다. 

출판된 시기 순으로 다시 읽어보려 한다. 그의 다른 책들도 사이사이에 넣어 볼 생각이다.

 

 

 

 

 

 

 

 

 
 
 
 
독일 배우 마티나 게덱을 보고 싶어 찾아본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제목이 주는 느낌대로 너무 좋았다.
영화를 보고 책을 구입했다. 1/3 정도 읽고,  거의 600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에 눌려 잠시 두었던 책.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해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들여 완독했다.
 
 
 
스위스 베른에 사는 언어학자이자 교사 그레고리우스(제레미 아이언스)는 출근길에 키르헨펠트 다리에서 자살하려고 하던 포르투갈 여성을 돕게 된다.  그녀의 수수께끼 같은 행동, 낯설지만 부드럽고 동화 같은 억양의 포루투칼어, 여성의 코트 주머니에서 발견한 책 <언어의 연금술사>, 그리고 리스본행 열차 티켓....... 이 모든 우연으로 그는 리스본행 열차에 몸을 싣게 된다.
 
그레고리우스는 하루아침에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그냥' 떠나는 것을 감행했다. 그게 과연 가능한가? 그 누구도 아닌 문두스(세계, 우주)라고 불리었던 철저하게 완벽했던 한 인간이? 인생의 57년이 지난 시점에서 말이다.
그는 낯선 리스본에서 <언어의 연금술사>의 저자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과거 흔적을 찾는 여정을 떠난다.
천재였으며, 열정적이었고, 살리자르 독재정권에서 의사로, 레지스탕스로 살았으며 시와 사유를 사랑했던 그의 인생에 깊이 빠져들며, 더불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많은 경험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의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리가 영혼의 고고학자가 되어 이 보물로 눈을 돌리면, 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게 된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잔인함과 자비심과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으로 가득한 감독

 
'스스로의 고고학자'가 되어 숨어있는 나를 파헤치고 발견해 나간다면, 다른 내가 될 수 있을까?
더 이상 원하지 않는 무언가를 그냥 떠나 새로운 경험과 맞닥뜨리면, 나의 삶은 만족스럽게 혹은 진실하게 흘러가는 것일까?
 
나의 의식 표면 아래 숨어있던 무언가가 떨어져 나와 돌연한 떠남을 강행했을 때, 그때 만약, 나를 예기치 않은 곳으로 이끌고, 실망시키고, 실패를 경험하게 하고, 파멸의 길로 이끈다면? 
우리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현 상태에 머물기를 흔쾌히 수락한다.
그러나 이는 떠나고 싶다는 반증일 것이다.
 
 
 
실망에 대한 아마데우의 글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실망이라는 향유

실망은 불행이라고 간주되지만, 이는 분별없는 선입견일 뿐이다. 실망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원하는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으랴? 또한 이런 발견 없이 자기 인식의 근본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그러니 실망이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함을 어떻게 얻을 수 있으랴?
.......

우린 실망을 찾고 추적하며 수집해야 한다.
.......

자신에 대해 정말 잘 알고 싶은 사람은, 쉬지 말고 광신적으로 실망을 수집해야 한다. 실망스러운 경험의 수집이란 그에게 중독과도 같을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중독. 그에게는 실망이 뜨겁게 파괴하는 독이 아니라 서늘하게 긴장을 풀어주는 향유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의 진정한 윤곽이 무엇인지 눈을 뜨게 해주는 향유.

 
 
 
영화의 엔딩은, 강렬했던 리스본에서의 며칠을 보낸 그레고리우스가 베른으로 떠나는 기차역을 배경으로 한다.
리스본에서 만난 여의사 마리아나 에사(마리아나 게덱)와 작별 인사를 하던 중, 그는 아마데우와 그 주변 인물들의 활력 있고 강렬했던 삶을 생각하며 "Where is my life?"라고 하며 살아온 인생을 후회한다.
그럼에도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그에게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Why don't you just stay?"
 
책의 마지막은, 베른으로 돌아온 그레고리우스가 심해진 현기증에 대한 진료를 받기 위해 병원으로 들어가며 끝을 맺는다. 
 
엔딩은 다르지만, 이전과는 다른 경험의 조각을 품고 베른으로 돌아간 그레고리우스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조금은 더 활력 있게, 지루하지 않게, 강렬하게, 충만하게 말이다.
어떤 실망과 실패가 있을지라도_______.
 
책과 영화는 다른 부분들이 꽤나 있다. 영화에는 아마데우의 둘째 여동생도, 그레고리우스의 친구 독시아데스도 등장하지 않는다. 책의 무수한 말과 사유들을 표현하기에 영화는 짧다. 그렇지만 책의 묵직하고 감동적인 부분들을 영화가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화면에서 주인공들의 이미지를  만나고, 리스본의 거리와 스페인 땅 끝 배경을 보는 재미는 더없이 감동적이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책 속의 책 <언어의 연금술사>가 실제 존재하는 책인지 검색해 보았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이 책이 존재한다면 꼭 갖고 싶다. 가능하면 필사해서 나만의 책을 소장하고 싶은 생각도 든다.
TV에서 스치며 봤던, 야경이 아름다웠던 포르투갈의 항구도시 리스본은 꼭 가보고 싶은 곳으로 저장해 두었다.
 
 
 
 
 
 
 
 

 

 

 

 

 

 

전혀 가늠할 수 없었던 부모의 삶.

그들의 이면에 눈을 돌리거나,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의 문턱, 죽음, 그리고 사후의 시간들인 것 같다.

김정현의 <아버지>,  정진영의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두 소설을 생각했다.

 

 

 

아버지의 해방

 

빨치산이었던 '나'(고아리)의 아버지 '고상욱'은 이십 년 가까운 감옥살이를 마친 후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 살아간다.

늙은 혁명가는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면서도, 쇠심줄 보다 질긴 고집으로 '사회주의'니 '민중'이니를 논하며 호기롭다.

현실로 닿을 수 없었던 그의 사상, 연좌제로 고통받은 가족들, 자신을 향한 원망의 목소리를 감내하며 외롭게 살아갔던 아버지. 그렇게 허울뿐인 듯했던 혁명가의 삶이 끝났다.

 

사회주의자 아닌 아버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나는 아버지를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장례식장에 찾아온 기이하고 오랜 인연의 조문객들로 인해 내가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인간적인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자식이자 형제였고, 남자이자 연인이었으며, 친구와 이웃이었고, 한 여자의 남편이었고 나의 아버지였던 그를 말이다. 

 

아버지는 갔어도 어떤 순간의 아버지는 누군가의 시간 속에 각인되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생생하게 살아날 것이다. 나의 시간 속에 존재할 숱한 순간의 아버지가 문득 그리워졌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영정 속 아버지가, 이틀 내 봤던, 아까도 봤던 영정 속 아버지가 전과 달리 그립던 어떤 날들처럼 친밀하게 느껴졌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빨치산의 딸이란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평생 발버둥 쳤던 '나'는 아버지의 진심을,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그가 떠난 것이 사무치게 슬퍼 울음을 터트린다. 고작 사 년 빨치산이었던 아버지의 경력은 이 땅에서 아버지의 평생을 옥죄었다. 

세상은 평등하지 않다. 결코 인간적이지 않다. 삶은 인간에게 너무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아버지의 유골을 손에 쥔 채 나는 울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이상한 인연 둘이 말없이 내 곁을 지켰다. 그들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나를 감쌌다.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해방일지

 

결국 아버지는 죽음으로 인생의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나'에게 그의 삶을 부활시켜 연민과 사랑과 화해와 용서의 기회를 주었다.

나는 결국, 빨치산의 딸이란 수렁에서,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과 미움에서 해방되어 아름다운 한 인간, 나의 아버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죽음이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아버지는 보통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 해방의 기쁨 또한 그만큼 크지 않을까, 다시는 눈 뜰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삶과 죽음. 무엇이 속박이며 무엇이 해방일까.

한 사람의 삶의 무게를 결코 알 수 없다. 그 수많은 속박과 고통, 고독 그 삶의 무게를.

 

최애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주인공들은 제목과 다르게 결국 온전한 해방을 맞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루하루, 하루 몇 초씩이라도 나의 고통스러운 삶의 해방을 위해 애를 쓰며 힘겹게 힘겹게 하루를 몰고 간다. 그렇게 때로는 찬란한 순간이 있음으로 영원의 해방은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

 

'나'의 아버지 고상욱의 삶 한가운데에도 그런 순간과 해방이,

보고 싶은 내 아버지의 삶에도 싱그러웠던 청춘과 맘 가득 품었던 해방일지들이 존재했음을 생각하니 마음이 벅차고 눈시울이 뜨끈해진다. 

 

 

 

 

 

 

 

 

 

 

 

 

 

나는 독일인입니다._전쟁과 역사와 죄의식에 관하여

 

평산 책방에서 산 몇 가지의 책들 중 하나이다.

동화책 같은 그림을 가지고 있는 따뜻한 표지에 쓸쓸함과 외로움이 묻어난다.

부제를 보고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게 된다.

 

 

 

독일어를 전공한 나로서는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은 나라 1위.

독일에 사시는 이모가 어쩌다  한국에 오실 때 가져다 주신 독일제 압력밥솥, 칼과 가위, 믹서기, 얼룩제거 비누 등을 감탄하면서 썼다. '독일은 물건도 잘 만드는구나' 하며.....

 

그러나 독일의 역사는 치욕스럽다. 씻을 수 없는 원죄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미국 이민자인 작가 노라 크루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에 전쟁의 주체였던 독일인으로서 죄의식을 가지며 살아간다. 독일어 억양을 감추고, 유대인을 보면 죄책감이 들고, 독일에 대한 비난들을 들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간다. 

 

그러나 그녀는 폐허를 마주 볼 용기를 내본다. 고향과 가족의 과거를 파헤치며, 두렵지만 현실을 마주하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과거를 덮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고 직시하고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만이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길임을 절감하면서......

 

홀로코스트 관련 영화 <사라의 열쇠>에서, 미국인 기자 줄리아는 1942년 프랑스 유대인 집단 체포사건을 조사하게 되고 프랑스인인 남편 가족과 얽혀있는 그 사건을 파헤치면서 끔찍했던 그날의 흔적들과 피해자 가족이 현재까지 겪고 있는 트라우마를 마주하게 된다. 불편한 과거를 알아가는 여정이 이 책과 닮아있다. 프랑스인들도 그런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던 영화이다.

 

 

 

작가는 독일의 좋은 것들 No.1~No.8까지 소개하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또한 감추지 않는다.

절대 떨어지지 않는 반창고 한자플라스트(Hansaplast), 평온한 숲(Der Wald), 버섯 따기(Das Pilze-sammeln), 유명한 라이츠 바인더(Der Leitz Aktenordner), 보온 물주머니 탕파(Die Warmflasche) , 수 천 종류의 빵 (Das Brot), 소 쓸개로 만든 비누 갈자이페(Die Gallseife), 강력한 우후 접착제(Der Uhu).

 

그렇다. 효과 좋은 제품들 뿐 아니라, 독일은 괴테와 실러의 나라, 수많은 문학작품들을 보유한 나라, 시원한 맥주와 맛있는 소시지를 맛볼 수 있는 나라이다. 

 

 

 

"죄의식 가지지 말아요" (유대인) 월터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한다. 그 말로 그는, 과거 그의 아버지가 우리 할아버지에게 해주었던 것과 똑같은 일을 한다. 그는 나를 위한 증언서에 서명한다.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개인의 속죄가 수백만 명의 고통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 따뜻한 목소리와 관대함 덕분에 나는 어느새 친밀감을 느낀다.

 

식민시대와 냉전시대.

과거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생각해 본다.

 

노라 크루크의 이 책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감동적인 책이다.

 

 

 

 

 

 

 

 

 

 

두 권을 내리읽었다.

 

소를 그린 유명한 작가로만 알고 있던 이중섭.

아름다운 사람....... 사람이란 단어에 마음이 요동친다.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많은 유명인들을 생각해 본다.

그들의 훌륭한 재능과 업적은 개인의 인성과 삶의 태도 그리고 실천하는 삶 등으로 완성된다.

아무리 잘나도 사람됨이 없고 개념 없이 행동한다면 그들의 성과는 하찮게 보인다.

 

 

 

두 권의 책과 몇 개의 방송을 찾아보며 이중섭의 삶을 엿본다.

전쟁, 지독한 가난으로 어머니 그리고 아내와 두 아들과 이별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인 비극.

그림 그리는 것을 너무도 사랑했고 탁월한 재능이 있었지만, 맘껏 후원해 줄 귀인을 만나지 못했던 비운.

 

그림을 팔아 빚을 갚고, 일본에 있는 가족을 만나 오순도순 살며, 예술가로서 인생을 살고 싶었던 그의 정당한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떤 재능과 신념과 성실함과 선함과 사랑도 그를 구원해주지 못했다.

 

마음이 여리고 순수하며, 솔직하고 한결같았던 사람.

일본인 아내 마사코를 귀애하는 절절한 사랑.

하늘나라로 간 첫째 아들, 그리고 두 아들에 대한 끝없는 애정과 사랑.

예술에 대한 열정에 타협이라고는 없었던 사람.

 

책에 실린 그의 그림들은 솔직하다. 사연이 실린 글 같다.

소의 표정과 몸짓, 동그랗게 연결되어 있는 아이들, 정겨운 꽃게와 물고기 그림들, 하나 되어 접촉하고 있는 가족, 유작이 돼버린 작품 <돌아오지 않는 강>의 어두운 외로움과 고독.

 

일본에 있는 아내와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애가 타고 속이 상한다. 

그리움과 사랑으로 견디고, 희망으로 버틴 그의 삶이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어떤 것들 _엘런 긴즈버그

한때 네가 사랑했던 어떤 것들은
영원히 너의 것이 된다.
네가 그것을 떠나보낸다 해도
그것들은 원을 그리며 너에게 돌아온다.
그것들은 너 자신의 일부가 된다.

 

미국의 시인 긴즈버그의 시다.

비트세대를 다룬 영화  <Kill Your Darlings>에서 긴즈버그 역할로 나온 다니엘 래드 클리프의 대사에서는

마지막 부분에 Or they destroy you. 가 포함된다.

 

한때 네가 사랑했던 어떤 것들은 
영원히 너의 것이 된다.
네가 그것을 떠나보낸다 해도
그것들은 원을 그리며 너에게 돌아온다.
그것들은 너 자신의 일부가 된다.

아니면 너를 파괴한다.

 

 

 

이중섭이 사랑했던 어떤 것들.

그것들을 떠나보낼 수도, 헤어 나올 수도 없었던 그 자신의 일부.

아름답기도 슬프기도 한 비극.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의 희망과 기쁨, 슬픔과 고독이 나에게 전해진다.

그의 말이 들리는 듯하다. 

 

 

 

제주 서귀포에 가면 그의 제주시절 거주지와 미술관이 있다. 거주지는 아주 오래전 가 보았지만 거의 기억나질 않는다.

제주의 바람을 맞으며 돌담길 따라 이중섭 길과 미술관도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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