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동네의 스페셜 에디션이다.
한강의 장편 소설 <희랍어 시간> , 단편 소설 <회복하는 인간 > <파란 돌>, 네 편의 시들, 여덟 편의 산문들을 한 권으로 엮은 책.
한강의 작품들을 다시 꺼내 읽게 동기는, 영화 <서울의 봄> 관람이다.
'우리가 이토록 폭력과 아름다움이 뒤섞인 세상을 견딜 수 있는가, 껴안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 <채식주의자>.
'삶을 살아내야 한다면, 인간의 어떤 지점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으로 시작된, <희랍어 시간>.
'인간의 연하고 섬세한 자리를 들여다보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이어진 1980년 광주이야기, <소년이 온다>.
올해 나의 독서는 한강의 책들로 마무리다.
희랍어 시간
시력을 잃어가는 한 존재,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지 않고 두꺼운 안경과 빛에 의지해 희랍어 강사 생활을 하고 있는 남자.
안갯속을 나아가는 것 같을 때가 있어요.
그 도시의 겨울에 종종 찾아오던, 새벽에 호수에서 시가지로 밀려온 안개가 저녁까지 걷히지 않던 날처럼.
벽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들이 안개에 덮여 흔적도 보이지 않는 회색 건물들 사이를, 축축한 석벽에 바싹 몸을 붙이고 천천히 걸어야 하던 밤처럼.
아무도 자전거를 타지 않던 밤, 사람의 자취 없이 무거운 발소리들만 들려오던 밤, 아무리 더 나아가도 싸늘한 집에 다다를 수 없을 것 같던 밤처럼.
말을 잃은 한 존재,
열일곱 살, 처음으로 말을 잃었던 그녀를 회복시킨 건 불어 단어였다. 이혼 후 양육권을 뺏기고, 또다시 입을 뗄 수 없어, 말을 되찾기 위해 희랍어를 배우는 여자.
셀 수 없는 혀와 펜들로 수천 년 동안 너덜너덜해진 언어. 그녀 자신의 혀와 펜으로 평생 동안 너덜너덜하게 만든 언어. 하나의 문장을 시작하려 할 때마다 늙은 심장이 느껴졌다. 누덕누덕 기워진, 바싹 마른, 무표정한 심장. 그럴수록 더 힘껏 단어들을 움켜쥐었다. 한순간 손아귀가 헐거워졌다. 무딘 파편들이 발등에 떨어졌다. 팽팽하게 맞불려 돌던 톱니바퀴가 멈췄다. 끈덕지게 마모된 한 자리가 살점처럼, 숟가락으로 떠낸 두부처럼 움푹 떨어져 나갔다.
그들과 세계 사이에 놓인 서슬 퍼런 칼날. 고립감, 답답함과 두려움.
희랍어 강사와 학생으로 만난 두 사람은 처음엔 그들의 연약한 부분을 볼 수 없었지만, 그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후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 줄 수 있게 된다.
.........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 있어요.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어요.
그녀는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인다. 입술을 떼었다가 힘껏 다문다.
그가 내민 손을 그녀의 왼손으로 받친다. 주저하는 오른손의 검지손가락으로 그의 손바닥 위에 쓴다.
아니요. 첫 버스를 타고 갈게요.
폭력과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에도 따스함과 아름다움은 여전히 있다.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듯이, 상처와 치유가 반복되듯이,
소설의 마지막 장 제목이 '0'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빛의 소멸, 소리의 꺼짐, 공의 상태, 혹은 인간의 가장 연약한 부분.
가느다란 숨소리처럼, 스치는 체온처럼, 조용히 위로가 전해지는 따뜻한 사랑이야기.
우리가 가진 가장 약하고 연하고 쓸쓸한 것, 바로 우리의 생명을 언젠가 물질의 세계에 반납할 때, 어떤 대가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언젠가 그 순간이 나에게 찾아올 때, 내가 이끌고 온 모든 경험의 기억을 나는 결코 아름다웠다고만은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렇게 남루한 맥락에서 나는 플라톤을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라고. 그 역시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라고. 완전한 것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세상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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