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 대한 짧은 글 모음집.

찰스 디킨즈의 글들이다.

 

마이클 슬레이터의 서문을 시작으로, 일곱 개의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담겨있다.

 

디킨즈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들은 용서와 화해, 화합, 친절,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의 힘, 사람들로부터 고립되려 애쓰다 보면 결국 스스로 파괴된다는 사실, 기억과 상상력이 개인의 도덕적 건강에 얼마나 필수적인가 하는 것을 늘 이야기의 중심 주제로 삼았다.(서문)

 

1889년 반 고흐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소설을 읽었는데 " 그 안에 깃든 정신이 너무도 심오하여 모든 사람이 읽고 또 읽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크리스마스 캐럴>에는 분명 미슬토 장식과 푸딩 이상의 것이 있다.(서문)

 

 

크리스마스는 정말 마법 같은 날이다.

집과 건물에 세워 둔 알록달록한 트리들, 어둠이 깔린 거리에 반짝이는 불빛들, 선물 준비로 분주한 상점의 풍경 등, 일 년 중 가장 들뜨는 요즈음이다.

 

 

 

 

여섯 번째 이야기 <늙어가는 우리에게 크리스마스란 무엇일까?> 

자연스레 이 제목에 눈길이 간다.

 

그는 <늙어가는 우리에게 크리스마스란 무엇일까>에서 '크리스마스 정신'을 '적극적으로 유익하게 이용하고 지켜나가며, 기쁜 마음으로 의무를 내려놓고 친절과 관용을 베푸는 것'이라고 말했다._서문

 

어린아이였을 때와, 한창 젊은 시절, 가정을 꾸리고 자녀들과 함께 보낸 크리스마스는 모두 다르다.

늙어가며 맞이하는 크리스마스는 무지개와 같이 희미한 추억을 소환시킨다. 적당히 외롭고 적당히 행복하다.

그것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잃어버린 친구, 잃어버린 아이,  잃어버린 부모, 잃어버린 형제, 자매, 잃어버린 남편이나 아내, 우리는 당신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당신들은 우리의 크리스마스 추억 속에, 그리고 우리의 크리스마스 난롯가에서 소중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영원한 소망의 계절, 영원한 자비의 탄생일에 우리는 그들 모두를 환영할 것이다!

 

오라, 무엇이든! 어서 오라. 과거에 존재했던 것이나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나 우리가 바랐던 것들 모두, 호랑가시나무 아래 너희 자리로 오라!

 

 

 

 

두 번째 이야기 <크리스마스 축제>는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한껏 기대하게 만들고, 다가오는 새해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야말로 축제를 앞둔 기분으로 말이다.

 

우리의 삶은 변함이 없더라도 크리스마스는 즐겁게, 새해는 행복하게 맞아라.

 

크리스마스 가족 파티! 이보다 더 즐거운 날은 아마 없으리라! 크리스마스라는 이름 자체가 마법인 듯하다.

 

크리스마스가 되자 한 해 동안 마음 한 편을 무겁게 했던 불쾌한 감정들은 크리스마스의 따듯한 위력에 아침 햇살에 눈 녹듯 사라져 벼렸다.

 

이처럼 크리스마스 파티는 다가오는 한 해에도 긍정적인 생각을 유지하는 데 지금까지 그 어떤 성인들이 남긴 설교집보다도 큰 역할을 한다.

 

 

 

 

스쿠루지 할아버지로 유명한 <크리스마스 캐럴>.

크리스마스 예찬가 디킨즈의 글은 크리스마스 정신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준다.

 

세상에는 굳이 덕을 보지 않아도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것들이 아주 많아요. 크리스마스도 그중 하나죠. 전 크리스마스가 돌아올 때마다, 그 성스러운 이름과 유래에서 느껴지는 경외심이라든지 그와 관련된 건 무엇이든 다 제쳐두고라도, 참 좋은 때라고 생각해요. 친절과 용서와 자비가 가득한 좋은 때죠. 일 년이라는 많은 날들 중에 남녀 할 것 없이 닫혔던 마음을 활짝 열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자기와는 다른 길을 가는 별종으로 생각하지 않고 무덤으로 함께 가는 길동무인 양 생각하는 때가 유일하게 크리스마스거든요.

 

단 하루, 이 날 만이라도, 모든 사람들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친절, 용서, 자비를 베풀고 그로 인해 웃음과 즐거운 기분으로 가득 찬 하루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또 누가 알겠는가? 한 번의 친절과 자비가 그 사람의 인생을 바꾸게 될지..... 스쿠루지의 인생처럼 말이다. 

 

이따금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며, 그러기에 크리스마스보다 더 좋은 때는 없다. 어차피 크리스마스가 생기게 된 것도 아기 덕분이 아니던가.

 

스쿠루지는 교회에도 가고 거리도 걸어 다니고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도 구경하고 어린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고 걸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다른 집 부엌을 들여다보거나 창문을 올려다보기도 하며, 이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한낱 산책이  ------- 겨우 산책에 불과한 일이------ 이처럼 큰 행복감을 느끼게 해 줄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도 못했다.

 

 

 

 

 

 

 

 

 

 

가을이 깊어지더니 지나간다.

바람 한 번, 비 한 번에 잎들이 맥없이 떨어진다. 나무들은 앙상해지고 낙엽들이 쌓인다.

 

 

황현산 선생의 산문집 중,  

 

11월 예찬

 

그렇더라도 11월은 아름다운 계절이다. 마른 잎사귀들이 떨어지고 나면 감춰져 있던 나무들의 깨끗한 등허리가 드러난다. 꽃 피고 녹음 우거졌던 지난 계절이 오히려 혼란스러웠다고, 어쩌면 음란하게 보이기까지 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앙상해진 나무를 보며 걸었다

늘 같은 자리에서 초록의 잎으로, 여린 꽃으로, 단풍으로  부풀어 있던 나무는 벌거벗어 초라했다.

꽃을 잃은 장미 가지처럼 뾰족한 가시가 돋은 듯, 날카롭고 예민한 본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리에 멈추어 다시 올려다보니 외롭고 쓸쓸해 보이다가, 이내 정직하고 강인한 기운이 느껴진다.

모진 겨울을 부끄럼 없이 온몸으로 이겨내고, 다시 풍성하고 아름다운 머리칼을 갖게 될 나무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 시절의 영화는 사라졌어도 세상을 지탱하는 곧은 형식들은 차가운 바람 속에 남아 있다. 작은 새들의 날갯짓을 볼 수 있는 것도 이때이다. 마른 석류보다 더 작은 새들이 주목의 붉은 열매를 쪼다가 돌배나무의 앙상한 가지로 날아올라간다. 높은 가지에서 관목 숲으로 미끄러지듯 떨어져 내릴 때는 바람에 날리는 낙엽과 구별하기조차 어렵다. 이제 겨울이 오면 저것들은 어디에 몸 붙이고 살아갈까. 그러나 새들은 욕망도 불안도 떨어져 쌓인 나뭇잎들 속에 벗어두고 한 알의 맑은 생명으로만 남은 듯하다.

 

 

 

 

여러 날 조금씩 읽었던 산문집을 마무리하던 중, 가을 또한 지나가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정체성>, <불멸> 이후 이 책을 보았다. 어쩌면 밀란 쿤데라의 유작이 될지 모를 소설, <무의미의 축제>는 그의 생각을 정리한 책이 아닐까? 라는 마음으로 읽었다.

주인공들에게 진한 우정을 느끼는 작가의 시선은 여전히 따뜻했고, 책에 스며있는 그의 사상과 문체, 세련되고 독특한 전개 방식 등 낯설지 않은 느낌이 좋았다. 

 

 

 

 

많은 사람들은 의미 있는 순간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의 선택에 의미를 부여하고 뿌듯해하며, 우연히 생긴 일에도 의미를 선사한다. 

그럼으로써 생기있는 행복감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매사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다 보면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칠 수 있고, 삶이 곤하고 불행할 수도 있다.

하나의 농담에 진지한 의미를 두면 관계나 상황을 무겁게 만들 수 있다.

무엇보다, 의미있는 일과 무의미한 일에 대한 미묘한 경계의 판단은 개인적이기에 타인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다.

 

 

 

 

의미 있는 일에 집중하고 살았다면, 무의미한 일들에 대한 작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외모나 몸매 성격 등의 개별성보다는, 비슷하고 무의미한 배꼽에 매력을 느끼는 획일성을 가진 시대.

알랭이 뤽상부르 공원을 거닐다 느낀 무심하게 고요하고 평온한 행복감.

다르델로의 세련되고 기교 섞인 말보다, 카클리크의 주의를 끌지 않는 보잘것없는 태도에 반하는 여성들.

파티 장소 위를 떠다니는 의미 없는 깃털 하나에 쏠린 사람들의 시선.

 

전립샘 비대증을 가진 칼리닌은 스탈린 앞에서 소변을 참지 못하고 실수했던 보잘것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기의 악마 스탈린은 그에게 특별한 정을 느끼고 칸트가 살던 도시에 유명인사가 아닌 칼리닌의 이름을 붙였다.

 

팬티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괴로움을 견딘다는 것...... 청결의 순교자가 된다는 것...... 생기고, 늘어나고, 밀고 나아가고, 위협하고, 공격하고, 죽이는 소변과 맞서 투쟁 하나는 것...... 이보다 더 비속하고 더 인간적인 영웅적 행위가 존재하겠냐? 나는 우리 거리들에 이름을 장식한 이른바 그 위인이라는 자들은 관심 없어. 그 사람들은 야망, 허영, 거짓말, 잔혹성 덕분에 유명해진 거야. 칼리닌은 모든 인간이 경험한 고통을 기념하여, 자기 자신 외에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은 필사적인 투쟁을 기념하여 오래 기억될 유일한 이름이지.

 

 

 

 

 

시대의 작가는 그의 말, 글 그리고 행동으로 세상이 달라지기를 얼마나 고대하며 살아왔을까?

만고의 노력 끝에도 한심한 세상을 바로잡을 도리가 없다는 것을 작가도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이런 희망 없는 세상을 어떻게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까?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개조할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 

 

"네 성도 마찬가지로 네가 선택한 게 아니야.  네 눈 색깔도, 네가 태어난 시대도, 네 나라도, 네 어머니도. 중요한 건 모든 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권리들이란 그저 아무 쓸데없는 것들에만 관련되어 있어. 그걸 얻겠다고 발버둥 치거나 거창한 인권선언문 같은 걸 쓸 이유가 전혀 없는 것들!"

 

모든 것이 진지하고,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세상, 농담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심지어 역겨운 거짓말로 여겨지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는 삶이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고통받으며 살기보다는, 소소하고 일상적이지만 내가 누릴 수 있는 권리들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다. 

 

 

 

 

"나는 원체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그런 것들,............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살다가 멎는 곳에서 죽는 것이 나의 꿈이라면 꿈이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김희성의 대사다.

그는 무의미한 것들을 사랑하며 인생을 가볍게 살려고 했지만, 결국 시대적 상황과 무거운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이제 나한테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더 강력하고 더 의미심장하게 보여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로맹 가리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의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무의미의 축제>의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이 문장들이 계속 동일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표지 그림은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이다. 

물에 빠진 오필리아의 머리 위로 버드나무, 치마폭에 팬지, 손에 움켜잡은 양귀비, 쐐기풀 등 사실적으로 묘사된 그림은 신비롭고 낭만적이나 오싹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열아홉 살 때 그림의 모델이었던 엘리자베스 시달은, 서른셋의 이른 나이에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고 한다.

그 사연을 알고 보니 더 섬뜩하다.

 

표지 읽기만으로도 이 책이 비극임을 알 수 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민음사의 책에서는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번역되어 조금 생소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단지 '삶과 죽음'에 집중하기보다는, 인간 존재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기에 'To be or not to be'를 '있음과 없음'으로 해석하였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결국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 대한 복수에 실패한다.

선왕을 죽이고 왕좌와 어머니를 차지한 삼촌에게 복수를 결심한 햄릿은 완벽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실행하지 못한다.

그때 실행했더라면, 무고한 사람들과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덴마크가 노르웨이의 포틴 브라스 왕자에게 넘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햄릿이 기회의 순간 망설였기에 최악의 비극이 탄생했다. 그 때문에 햄릿은 우유부단한 인물로 종종 비유된다.

하지만 햄릿을 우유부단하다고 탓하고만 싶지는 않다.

 

복수의 기회는 왕 클로디어스가 형을 독살한 일에 대한 후회로 기도를 드리던 순간이었다. 

그때 죽인다면 온갖 악한 일을 도모한 그의 영혼은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햄릿은 망설였을 것이다.

아서라 칼아, 더 끔찍한 상황을 만나자. 놈이 취해 잠자거나 광란하고 있을 때, 침대에서 상피 붙어 쾌락을 즐길 때, 경기 도중 욕하거나 구원받을 기미가 전혀 없는 행동을 하고 있을 바로 그때, 다리를 걸자.

 

 

또한 자신 앞에 나타난 선왕 유령의 창백한 얼굴을 어찌 간과할 수 있었을까.

한창 죄업을 쌓고 있는 중에 잘렸으니, 성체 받고 기름 바르는 고해성사도 없이, 죄를 청산하지도 못하고 온갖 결함을 내 머리에 인 채 심판대로 보내졌다. 아, 무섭다! 아, 무섭다! 정말 무섭다!

 

 

 

 

햄릿은 견딜 수 없는 현실에 반발하며 무모한 언행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신중하고 순수한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이다.

그는 존재에 대한 고뇌를 끊임없이 하며, 삶에 대한 돌파구를 모색했던 인물이다.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는 건가, 아니면 무기 들고 고해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끝장을 내는 건가. 죽는 건, 자는 것일 뿐이다. 잠 한 번에 육신이 물려받은 가슴앓이와 수천 가지 타고난 갈등이 끝난다 말하면, 그건 간절히 바라야 할 결말이다. 

죽는 건, 자는 것. 자는 건 꿈꾸는 것일지도, 그게 걸림돌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잠 속에서 무슨 꿈이, 우리가 이 삶의 뒤엉킴을 떨쳤을 때 찾아올지 생각하면, 우린 멈출 수밖에. 그게 바로 불행이 오래오래 살아남는 이유로다. 

왜냐면 누가 이 세상의 채찍과 비웃음, 압제자의 잘못, 잘난 자의 불손, 경멸받는 사람의 고통, 법률의 늑장, 관리들의 무례함, 참을성 있는 양반들이 쓸모없는 자들에게 당하는 발길질을 견딜 건가? 단 한 자루 단검이면 자신을 청산할 수 있을진대. 누가 짐을 지고, 지겨운 한 세상을 투덜대며 땀 흘릴까? 

국경에서 그 어떤 나그네도 못 돌아온 미지의 나라, 죽음 후의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 의지력을 교란하고, 우리가 모르는 재난으로 날아가느니, 우리가 아는 재난을 견디게끔 만들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양심 때문에 우리들 모두는 비겁자가 되어버리고, 그럼에 따라 결심의 붉은빛은 창백한 생각으로 병들어 버리고, 천하의 웅대한 계획도 흐림이 끊기면서 행동이란 이름을 잃어버린다. 

 

 

목숨은 하나를 셈보다 길지 않고 반 푼 값어치도 없다. 그와 반대로 영혼은 불멸한다.

죽음으로 육신의 고통을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죽음 이후 미지의 세계는 우리를 두렵게 한다.

또 하나, 복수를 위한 살인은 선인가 악인가?  복수의 양면성 또한 단칼의 휘두름을 머뭇거리게 했을 것이다. 

결국, 신중함인지 우유부단함이지 모를 햄릿의 행동으로 덴마크 왕족 모두는 죽음 저 너머로 가게 된다.

 

 

 

 

희곡으로 읽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은유 안에 담긴 메시지들을 파악하는 것이 어려우면서도 책 읽는 재미를 더했다.

햄릿이 가지고 있는 선과 악, 우유부단함과 단호함, 단순함과 고뇌, 순리와 역리 등의 공존은 '작은 햄릿'인 우리들 안에서도, 극의 다른 등장인물들에게도 발견할 수 있었다.

 

 

 

 

연극 <햄릿>이 서울, 국립 해오름 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거장 배우들과 젊은 배우들의 연기 조화가 궁금한 이 연극은, 매회 기립 박수가 나온다는 기사가 더해져 기대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번 주말로 예매된 연극이, 어떤 감동과 깨달음을 줄지 기다려진다.

 

 

 

 

 

민음사

 

 

 

 

밀란 쿤데라의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불멸>, 두 소설 제목이 주는 느낌은 강렬하게 달랐었다.

그래서인지 <불멸> 속에 등장하는 저자와 그의 친구 아베나리우스 교수의 대화를 읽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 소설의 제목은 뭔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니 그 제목은 이미 써먹지 않았는가."
"그래 써먹었지!  하지만 그때 난 제목을 잘못 달았어. 그 제목은 지금 쓰는 소설에 붙여야 했어."

 

 

<불멸>의 또 다른 제목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다.

 

 

 

 

 

 

불멸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지 않다.
작은 불멸, 말하자면 생전에 알고 지낸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어떤 인물에 대한 추억과 
큰 불멸
, 즉 생전에 몰랐던 이들의 머릿속에도 남는 어떤 인물에 대한 추억은 구분되어야 한다.
사실 어느 날 갑자기 한 사람을, 도무지 사실 같지 않고 있음 직하지 않은, 그러면서도 이론의 여지없이 가능한 그런 엄청난 불멸에 맞닥뜨리게 하는 생애들이 있다. 바로 예술가와 정치가의 생애가 그렇다.

 

 

괴테, 나폴레옹, 베토벤, 랭보, 헤밍웨이........

소설 속에도 등장하는 위 인물들은 불멸의 존재들이다.

 

위 인물들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

포털 검색창에 이름을 치면 끊임없이 나오는 그들의 업적, 성품, 연인들, 일화,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누구의 시선으로 작성되었나? 심지어 카메라와 녹음기가 없을 당시의 삶은 어떻게 전해졌을까? 

 

수많은 사람들의 의견과 해석, 책과 영화 등을 참고로 우리는 그들의 이미지를 갖게 된다.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을 추측하고, 랭보의 '절대적으로 현대적이었던 인생'과 베를렌과의 동성애, 19세에 시 쓰기를 포기했던 사실로 그를 판단한다. 괴테와 베토벤의 산책 중 모자 일화로 괴테는 귀족 신분을 열망했다는 이미지를 피할 수 없게 된다. 헤밍웨이는 또 어떤가. 그의 허영, 노년의 정신질환과 자살은 사람들의 관심을 자극한다.

 

그 위대한 인물들은 후세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원치 않는 날카로운 일격을 당한다.

 

 

헤밍웨이가 말한다. "보세요, 요한, 나 역시 그들의 영원한 구형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신세랍니다. 나의 책을 읽는 대신 그들은 나에 관한 책을 써 댑니다. 내가 여편네들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하고, 아들을 잘 돌보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어느 비평가의 입을 찢어 놓았고, 성실하지 않았으며, 너무 오만했고, 남성우월주의에 사로잡혔다고도 합니다, (.............)" 

"그것이 바로 불멸인 걸 어쩌겠습니까." 하고 괴테가 대답한다. "불멸은 영원한 소송이죠."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어요. 하지만 자신에 불멸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입니다. 일단 불멸의 배에 오르고 나면 영원히 내릴 수가 없지요.

 

 

 

 

 

 

소설 속에는 불멸을 욕망했던 두 여인이 등장한다.

 

베티나와 로라의 그 몸짓을 불멸에 대한 욕망의 몸짓이라 명명하자. 큰 불멸을 갈망하는 베티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현재와 더불어, 현재의 온갖 근심과 더불어 사라지길 거부한다. 나는 나 자신을 초극하여 역사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 역사는 영원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작은 불멸을 희망할 뿐이지만, 로라 역시 같은 것을 원한다. 자기 자신을 초극하고 자신이 겪는 불행한 순간을 초극하여, 자신을 알았던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 머무르기 위해 뭔가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괴테의 연인으로 불멸하고 싶었던 베티나와, 자신을 아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름답게 남고 싶어 했던 로라는 잔인하게, 끊임없는 노력으로 불멸의 기차에 승차하는 데 성공한다. 

 

 

 

 

 

 

반면에, 아녜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는 것이었다. 시선들의 부재를 동경했다.

자신의 영혼, 실재와 굳게 연계되어 있는 얼굴을 보며 혼란에 빠지고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 얼굴이 도대체 뭐가 중요하지?"

내가 선택하지 않은 얼굴, 몸, 귀의 생김새뿐만 아니라, 우연히 아녜스의 삶에 주어진 그녀의 동생 로라를 일생동안 끌고 다녀야 했던 아녜스는 행복하지 않았다.

 

추함의 습격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정도가 되는 날, 그녀는 꽃 장수에게 물망초 한 가지를 살 것이다. 가는 줄기 끝에 작은 꽃이 달린 물망초 한 가지만 사서, 얼굴 앞에 세우고 외출을 할 것이다. 그녀에게 쏠리는 시선이 그 예쁜 푸른 점 외에, 이제 사랑하기를 그만둔 이 세상에서 그녀가 보존하고 싶은 그 최후의 이미지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보지 못하도록 말이다.

 

 

불멸은 고사하고 세상의 작은 시선도 불편했던 아녜스는 자신의 영혼, 자신의 본질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나 실재보다는 겉모습과 평판이 중요한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으며, 작은 두 손, 혹은 물망초 한 송이로 부끄러움을 가리고 자신의 이미지를  바라보고 싶었을 것이다.

왜 인간은 자신이 어쩔 수 없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가? 

 

인생에서 견딜 수 없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로 존재하는 것이다. 
(............)
산다는 것, 거기에는 어떤 행복도 없다. 산다는 것,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고통스러운 자아를 나르는 일일 뿐이다. 하지만 존재, 존재한다는 것은 행복이다.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샘으로, 온 우주가 따뜻한 비처럼 내려와 들어가는 돌 수반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나는, 죽는다면 누구에게 기억되고 싶은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창작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명예에 대한 욕망이 있는 사람들은 역사까지는 아니라도 대중의 기억에 남고 싶을 것 같다. 

나에게 그런 욕망은 없다. 나의 사후에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들,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지인들 정도가 나를 기억할 것이다. 그것도 잠시의 기억 후에 잊힐 것이다. 

 

불멸을 꿈꾸진 않지만, 현세 혹은 사후에 좋은 이미지로 기억되고 싶고 남고 싶은 바람이 없다면 그건 거짓일 거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나를 꾸미고, 자신의 이미지에 대해 염려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미숙함과 연약함이다.

 

그러나 내가 보는 것과는 다른 식으로, 나의 생각과는 다른 모습으로 남들은 나를 바라볼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두려워진다.

 

 

아마 우리는 왜, 그리고 어떤 점에서 우리가 타인들의 신경에 거슬리는지, 우리의 어떤 점이 그들에게 호감을 주며, 어떤 점이 우스꽝스러워 보이는지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 자신의 이미지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큰 미스터리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이미지 뒤에 숨을 수 있고, 우리 이미지 뒤로 영원히 사라져 버릴 수 있으며, 우리 이미지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도 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의 이미지가 아닌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아마 그들이 원했던 모습의 이미지로 남지 못했을 것이다.

대부분 영원히 폭발하지 않으나 지뢰 하나가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날이 오듯이, 하찮은 에피소드 하나가 당신을 무너뜨릴 수 있다. 진지했던 인생 전체를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 

사람들은 이미지를 속이고 이미지에 속는다.

 

말러의 7번 교향곡의 엄청난 완성도는 우리 능력을 넘어선다. 아무리 광적일 정도로 주의 깊은 방청객이라 해도, 그 교향곡에서 포착하는 건 담긴 내용의 100분의 1 정도일지 모른다. 그것도 말러가 보기에 가장 중요하지 않은 100분의 1말이다.

밀란 쿤데라가 고르고 골라 쓴 한 단어, 한 문장, 한 부, 한 편의 소설을 그의 의도대로 독자들은 얼마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100분의 1은 될까?

한 존재의 삶의 깊이와 본질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들의 이미지는 그들이 아니다.

 

그러니 불멸하는 존재조차, 참을 수 없이 가벼울 수밖에.

 

 

 

 

 

 

존재하지 않는 자는 있을 수 없다. 모든 권리를 잃어버린 죽은 자의 사생활은 사적이길 멈춘다. 생전에 썼던 편지, 유품과 사진, 했던 말까지도 이젠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 불멸은 없다. 인간은 멸하는 존재이다. 떠들어 대는 모든 불멸, 즉 영원한 소송이란 한낱 바보짓일 뿐이다.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멸한다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인간 경험인데도, 인간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그에 따라 처신하려 한 적이 없습니다. 사람은 멸하는 존재가 될 줄 몰라요. 죽어 놓고도 죽은 줄 모르지요.

 

 

 

 

 

 

하나의 몸짓으로 탄생했던 소설 속 주인공 아녜스. 그녀의 몸짓은 그녀만의 것이 아니었다.

수영장의 우아한 노부인의 몸짓, 아버지의 아름다운 여비서의 몸짓, 그리고 그녀의 몸짓을 따라 했던 로라의 그것이기도 했다. 결국 폴에게 기억되는 불멸의 몸짓은 로라의 것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기억되는 가장 아름다운 몸짓은 아녜스의 그것이다. 그녀에게 연민을 느낀다.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렸고, 성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예전에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아녜스는 물망초 한 가지를, 물망초 오직 한 송이를 사고 싶어 했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아름다움의 마지막 자취로서, 그것을 두 눈앞에 간직하고 싶어 했다.

 

 

그녀의 아름다움의 마지막 자취 물망초, forget me not, 작고 푸른 꽃 한 송이가 그녀의 여리고 여린 이미지를 대변하는 듯했다. 그녀가 기억되기 원하는 그녀의 실재, 그러나 결코 누구도 알 수 없는 그녀의 영혼, 꽃 한 송이.

 

 

 

 

 

 

소설 속에 저자가 등장하여 주인공들과 관계를 맺고, 세월을 거슬러 역사 속 인물들이 등장하기도 하며, 다른 시대에 살았던 괴테와 헤밍웨이의 만남 등 독특한 구조를 가진 소설이다. 소설은 읽기 쉽지 않았지만 흥미로왔고, 두 번째 읽을 때 조금 고개가 끄덕여졌으나, 역시 많은 부분은 이해하지 못한 채 남아있다.

 

그의 소설을 읽으며 많은 것을 배우고, 사색하게 된다. 

 

 

 

 

 

 

 

 

 

 

 

 

 

 

민음사

 

 

 

 

밀란 쿤데라의 이 책은 결코 쉽지 않지만 재미있다.

테레사, 토마스, 사비나, 프란츠.

추구하는 삶이 다른 네 주인공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또 너무 비슷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존재는 참을 수 없이 가볍다는 제목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까?

인간의 삶은 가벼운 것일까 무거운 것일까?

가벼운 것은 무엇이고 무거운 것은 무엇일까?

 

파르메니데스는 대답했다. 가벼운 것은 양이고 무거운 것은 음이다라고. 그의 대답이 옳았는가? 아니면 틀렸는가? 이것이 문제다. 확실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즉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의 대립 쌍은 모든 대립들 중에서 가장 신비롭고 가장 타의적이라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와 다르게 베토벤에게는 무거움이 명백히 어떤 긍정적인 것이었다. <힘겹게 내린 결심>은 운명의 소리 <그렇게 할 수밖에!>와 연관되어 있다. 무거움, 필연성, 가치는 서로 긴밀히 연관된 세 개념이다. 필연적인 것만이 무겁고, 무게가 있는 것만이 가치가 있다.

 

가벼움과 무거움, 육체와 영혼, 우연과 운명, 무관심과 동정, 비밀스러운 사랑과 공개적인 사랑, 짐과 가벼움, 오락성과 책임......... , 우리의 삶은 하나의 길을 선택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한다.

 

 

 

 

테레사는 토마스에게 온전한 사랑을 요구하며 그의 외도를 괴로워했지만, 때때로 가벼운 것으로의 동경을 느꼈다.

 

토마스는 여러 여인들과의 관계를 갖으며 가벼운 인생을 즐겼지만, 운명처럼 나타난 테레사를 사랑하며 동정과 책임감을 느낀다.

 

프란츠는 진실에서 살았다. 그러나 사비나를 사랑하게 되며 아내를 속인다. 결국 아무것도 비밀로 하지 않을 것을 추구했던 프란츠는 사비나와의 관계를 털어놓고 온전한 사랑을 꿈꾸었다. 그러나 공개적이 된 사랑은 무거운 짐이 되어 사비나는 그를 떠나게 된다. 무거운 것을 요구하는 남성과 가벼운 것을 원했던 여성의 끝은 이별이다. 영화 <클로저>의 두 주인공 댄과 앨리스처럼 말이다.

 

인간의 삶은 단 한 번 뿐이라는 것으로서, 바로 이 때문에 우리들 결단에서 어떤 것이 좋고, 어떤 것이 나쁜가를 우리는 결코 확정 지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단 한 번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내린 서로 다른 결단들을 서로 비교할 수 있도록 제2, 제3, 제4의 삶이 우리에게 선사된 경우는 없다. 

 

토마스가 테레사에게 연락처를 주지 않았다면, 테레사가 프라하로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프란츠가 사비나와의 관계를 비밀로 했다면, 사비나가 프란츠를 떠나지 않았다면.............

사람이 추적하는 목적은 언제나 베일에 가려 있고,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언제나 전혀 미지의 것이기에 우리는 아무것도 확정 지을 수 없다.

 

 

 

 

한 번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보헤미아의 역사는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역사도 그렇다. 보헤미아의 역사와 유럽의 역사는 불행하게도 인류의 무경험에 의해 그려진 두 개의 스케치다. 역사란 개별적인 인간의 삶과 똑같이 가벼운 존재다. 그것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휘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먼지처럼 날아가버릴 인간의 삶은 얼마나 가벼운가. 그러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감추고 우리는 또한 얼마나 무겁게 살고 있는가. 책을 읽은 후 오래도록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해 생각했지만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가벼운 인생을 살고자 하면 무거운 것들로의 동경이 생긴다. 무겁게 되고자 하면 가벼움을 갈망하는 현기증을 느끼게 된다.

가벼움과 무거움은 한 발자국 차이이다.

 

사비나는 진실을 커튼 뒤에 숨기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을 적으로 여겼다.

아름다운 가면, 아름다운 거짓, 완벽해 보이는 모순들, 죽음을 가리는 병풍, 거짓과 위선, 진실을 감추는 언론들과 같이 저속한 것, 즉 키취를 말이다.

 

평생 동안 그녀는 자기의 적은 키취라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자신 속에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모순되게도 사랑하는 어머니와 현명한 아버지가 이끄는 행복한 가정의 이미지를 늘 가지고 살았다.

실제로 그녀의 가정과는 모순된 이미지를 말이다.

 

지극히 가벼운 것을 추구했던 사비나의 인생 역시 무거운 것으로 눌려있다. 오히려 그 무게를 부정하고 배반하며 가볍게 가볍게 되려고 했던 그 처절함이 무겁게 느껴진다.

 

 

 

 

캄보디아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서 남는 것은 무엇인가? 
아시아의 아기 하나를 품에 껴안고 있는 미국 여배우의 큰 사진 하나. 

토마스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
하나의 비문. <그는 지상에서 천국을 바랐다>는 비문. 

베토벤에게서 남은 것이 무엇인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텁수룩한 머리를 한 무뚝뚝한 남자. <그렇게 할 수밖에!>라고 저음으로 말하는 남자. 

프란츠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 
하나의 비문. <긴 미로 끝에 되돌아가다>라고 새긴 비문. 

기타 등등. 사람들이 우리를 망각하기 전에 우리는 키취로 바뀐다.
키취는 존재와 망각 간에 갈아타는 정거장이다.

 

한 존재의 죽음으로 그의 인생 전체는 부정된다.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떤 선의를 베풀었고, 어떤 악행을 했는지 사람들은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없다. 그저 하나의 이미지로 포장한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를 자신의 구미에 맞게 판단하고 전달하고 보도한다. 거짓되고 사실이 아닌 것을 아무렇게나 저속하게 말이다. 

아름답게 포장되던, 우스꽝스럽거나 비열하게 포장되던, 거짓인 것들은 모두 끔찍하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너무 가벼운 존재들이 되어버린다.

존재의 가벼움은 참을 수 없이 화가 나고 슬프고 허무하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맴돌지 않고 직선으로 진행된다. 이것이 왜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가 하는 이유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반복을 갈구하는 소망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함께 나란히 앉아 있던 그때처럼,  지금 그녀는 그때와 똑같은 행복을, 독특한 슬픔을 체험했다. 이 슬픔은 <우리는 종착역에 도착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는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은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먼지처럼 사라질 허무하고 가벼운 인생이지만, 삶의 고단함과 부조리함 슬픔과 고통은 또 피해 갈 수 없다.

그러니 파르메니데스의 견해대로 대기보다 더 가벼워질 존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하루하루 피할 수 없는 가치와 무게 그리고 운명을 베토벤 처럼 이겨내는 수밖에 말이다. 

 

존재는 참을 수 없이 가볍지만, 그것이 또한 무거움을 견디게 한다. 

 

 

 

 

 

여전히 철학적이고 어려운 이 책은 밀란 쿤데라의 또 다른 소설 <불멸>의 내용을 궁금하게 한다.

'불멸'이란 제목은 '존재의 가벼움'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상당한 분량에 어려운 책이지만 도전해 보려고 한다.

 

 

 

 

 

 

 

 

 

 

 

 

 

 

 

 

민음사 책의 표지는 호퍼의 그림이다.

추운 겨울, 장갑 한쪽을 낀 채로 자동판매기 식당에 홀로 앉아 차를 마시는 여인.

우아하게 차려입은 창백한 여인의 얼굴에 개츠비의 상실과 외로움이 겹쳐진다.

 

The Great Gatsby.

그의 이름 앞 '위대한'이란 수식어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는 왜 위대했는가.

 

 

 

 

결코 희망적이지 않은 세상을 살기 위해서 사람들은 희망과 이상을 품고 살아야 한다. 아이러니하다.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하루를 견디고, 그렇게 될 거라는 이상을 꿈꾸며 또 하루를 버틴다.

그것마저 없다면 사람들의 삶은 절망적일 것이다.

 

개츠비에게 삶의 의미와 질서를 부여해주는 것은 바로 사랑하는 여인, 데이지를 얻기 위한 노력이었다.

상류사회 출신인 데이지는 아름다운 외모와 상냥한 성격을 가진 인기 많은 아가씨였지만, 개츠비는 태생도 재산과 명예도 보잘것없었다. 결국 데이지는 소문난 갑부이자 스포츠 선수 출신인 톰과 결혼하며 안정된 삶을 선택한다.

 

데이지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개츠비는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수년간의 험한 세월을 보내고 어마어마한 갑부로 데이지와 재회하게 되기까지 그의 스토리는 과히 신화적이다.

그의 큰 성공에는 영리함, 성실한 태도, 열정 등이 있었지만, 밀수입 등 사기행각으로 엄청난 부를 얻게 된다.

 

개츠비는 위대한가 그렇지 않은가.

그가 은밀한 거래를 하지 않았다면 서슴없이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렇다면, 그는 대단한 부를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금수저로 태어나 엄청난 부를 누리는 톰과 데이지는 위대한가 그렇지 않은가.

데이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안에서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끝없는 매력, 그 딸랑거리는 소리, 그 심벌즈 같은 노랫소리........... 하얀 궁전 속 저 높은 곳에 공주님이, 그 황금의 아가씨가...........

 

영화 기생충에서 기우의 엄마가 했던 말이 계속 맴돈다.

 

"부잔데 착한 게 아니라, 부자니까 착한 거지." "솔직히, 이 돈이 나한테 다 있었어봐. 나는 더 착하지. 착해."

............ " 다리미야, 다리미. 돈이 다리미라고. 구김살을 좌~악 펴줘."

 

데이지의 인기 비결은 모나지 않은 성격과 특유의 따뜻함 그리고 아름다운 외모와 몸가짐이었다.

그녀가 끼니 걱정을 하는 집안의 딸이었다면 이 모든 것이 가능했을까? 

 

톰이 개츠비처럼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 홀로 삶을 개척하고 살았다면, 그의 무례하고 남을 깔보는 성격과 건장한 체격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을까? 그의 바람기는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데이지와 톰은 부와 화려함의 가면을 쓰고 그들의 결점을 감추고 있었다. 아니, 다른 사람들조차 그 가면에 현혹되어 그들의 본질을 알아보지 못했다.

 

톰과 데이지, 그들은 경솔한 인간이었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부숴버리고 난 뒤 돈이나 엄청난 무관심 또는 자기들을 한데 묶어 주는 것이 무엇이든 그 뒤로 물러나서는 자기들이 만들어 낸 쓰레기를 다른 사람들이 말끔히 치우도록 했던 것이다.

 

개츠비는 부가 가둬 보호해 주는 젊음과 신비, 그 많은 옷이 풍기는 신선함, 그리고 힘겹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데이지가 안전하고 자랑스럽게 은처럼 빛을 내뿜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이다.

 

 

 

 

개츠비는 삶의 가능성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과 희망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다. 스스로 이상을 만들고 창조적인 열정으로 그 환상을 부풀여 빛나게 했다. 그 거대한 환상의 힘이 그를 몰았다. 평범한 사람들이 아무리 희망을 품고 노력하며 살아간들 개츠비처럼 그 이상에 가까이 가진 못했을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다. 

 

만 건너 그녀 집 맞은편에 화려한 집을 얻고, 그녀 집 앞 부둣가에 밝게 빛나는 그린 라이트를 바라보며 얼마나 가슴이 벅차올랐을까. 밤마다 성대한 파티를 열어 그녀를 기다리며 얼마나 기대감에 부풀었을까.

그러나 개츠비의 낭만적 이상이었던 꿈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상실만이 남게 된다. 그의 젊은 시절은 잡을 수 없는 하나의 꿈에 바쳐진 채 스러져간다. 현실은 이상과 달랐다. 무모한 개츠비다.

 

그 인간들은 썩어빠진 무리예요. 당신 한 사람이 그 빌어먹을 인간들을 모두 합쳐 놓은 것만큼이나 훌륭합니다.

 

이 책의 화자이자 개츠비의 유일한 친구였던 닉은 따스한 말 한마디를 건넨다. 이 말은 나에게도 그랬듯이, 개츠비에게도 조금의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완벽한 삶을 꿈꿨던 젊음의 열정과 대단한 도전은 해가 지나면서 서서히 뒤로 물러나다 여려지고 흐려지다 결국 사라진다.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에서 주인공들은 전철의 큰 창으로 지나치는 "오늘 당신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라는 한 교회 건물에 걸린 광고판을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피곤한 하루의 시작과 지친 하루의 끝에 바라보는 이 메시지는 과히 희망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현실에서 희망은 우리를 피해 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또 별로 문제 될 것은 없다. 그러니 또 좋은 일을 기대하고, Have a nice day! 를 외칠 수밖에.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다. 그것은 우리를 피해 갔지만 별로 문제 될 것은 없다.

 

 

 

 

이 책은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에서 있었던, 눈부신 경제 성장 그리고 그와 함께 독버섯처럼 자라난 도덕적 타락과 부패로 방황하던 시대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미국 동부 사람들은 부와 세련된 교양미를 갖추고 있지만 도덕적 윤리적으로 문란한 행동을 일삼았다. 반대로 중서부 사람들은 비록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할망정 도덕적 순수성과 청교도적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다.

전쟁 후, 돈과 쾌락을 좇아 동부로 이주했던 서부 사람들과 더 부유해진 동부 사람들의 혼란 속에 이 책의 비극은 놓여있다.

 

 

 

 

이제 나는 이 이야기가 결국 서부의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감격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내 젊은 날의 귀행 열차, 서리가 내린 어두운 밤의 가로등과 썰매 종소리, 불 켜진 창문의 불빛에 크리스마스를 장식하는 할리 나무 화환의 그림자가 눈 위에 비치는 곳 말이다. 그곳이 바로 나의 중서부 지방이다.

 

닉은 개츠비의 죽음 후 중서부로 돌아온다.

 

껍데기만 남은 덧없는 순간, 잿빛으로 덮인 거리들, 부와 화려함 뒤에 숨은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무리들을 피해서 말이다. 

흔들리는 밤거리의 불빛들, 고급 옷으로 가득 찬 옷장, 넘쳐나는 음식들로 우리의 삶과 행복은 채워지지 않는다. 남들에게만 찾아가는 행운도 잡을 수 없는 그린 라이트다. 허황되고 의미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다정한 말과 따뜻한 눈길, 오후에 마시는 차 한잔, 여유로운 주말의 나른함, 알림 소리를 내며 뜨는 반가운 문자 메시지, 새로 바꾼 선풍기의 부드러운 바람, 맛있게 차려진 저녁 식사, 산책길에 만난 작은 꽃 한 송이가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이다.

 

 

오늘도 Have a nice day!

 

 

 

 

 

 

 

 

 

 

 

마음 산책

 

 

딸이 선물해 준 최은영 작가의 짧은 소설집, <애쓰지 않아도>.

 

 

 

작가의 손글씨가 넉넉한 사랑으로 부풀려진 하트와 함께 적혀있다.

 

 

미라는 현주를 만나고 나서야 사랑은 엄연히 드러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랑은 애써 증거를 찾아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노동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심연 깊은 곳으로 내려가 네발로 기면서 어둠 속에서 두려워하는 일도,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어렵게 받을 수 있는 보상도 아니었다. 사랑은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_무급휴가

 

 

 

과거의 나를 돌아볼 때가 있다.

미숙했고, 혼란스러웠던 나의 모습. 후회와 아쉬움 가득한 나의 지난날. 

 

나의 과거와 함께 자연스레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좋아하고 미워했으며, 선망하고 질투했고, 사랑하며 서운해했던 모든 관계들.

 

무수한 세월을 보낸 이제는 모든 이들에게 연민의 감정이 더 크다.

서툴렀던 나, 그리고 관계를 맺었던 모두는 다 그렇게 서투른 시절이었음을.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고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한다.

 

예전의 나였다면 나이브하고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속으로 비웃었을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듣던 순간 나는 데비의 그 말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_데비챙

 

 

 

진심은 관계에서 전해지기 쉽지 않다. 

순간의 감정적인 말, 나의 심리 상태, 상대의 기분과 상황, 지나친 배려조차도 뒤섞여 찰나의 오해를 만든다. 시간이 쌓이며 골이 깊어진다. 진심은 사람들의 마음을 관통하지 않는다. 

 

왜 좋은 마음이 언제나 좋은 결과가 될 수 없는지 연희는 초조한 슬픔을 느꼈다. _문동

 

어쩌면 송문 또한 송문으로 살아온 송문의 마음을 영영 배울 수 없을지도 몰랐다. 자기 마음을 배울 수 없고, 그렇기에 제대로 알 수도 없는 채로 살아간다. _우리가 배울 수 없는 것들

 

 

 

우리는 자신만의 성정과 경험과 생각을 가진 섬이다. 외로운 섬 하나하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가까운 가족조차도 그들의 생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런 누군가를 얻기 위해 온갖 말과 행동을 하며 애쓸 필요도 없다. 

 

사람의 마음은 좀처럼 지치 지를 않나 봐요. 자꾸만 노력하려 하고, 다가가려 해요. 나에게도 그 마음이 살아 있어요.
_손 편지

 

엄마에게는 감동이었을 그때가 내게는 지우고 싶은 순간이었다는 걸 엄마는 끝내 이해할 수 없겠지. 나는 상기되어 이야기하는 엄마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_호시절

 

현주의 사랑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자유롭고 편안했을까. 내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_무급휴가

 

영원히 용서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유나에 대한 나의 마음은 그게 어떤 모습이든 늘 과하고 넘친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는 이제 애쓰지 않아도 유나를 별다른 감정 없이 기억할 수 있다. _애쓰지 않아도

 

 

 

We can love completely without complete understanding.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아름다운 대사처럼, 한 존재를 온전히 이해할 순 없지만 그저 받아들이고 사랑하면 된다.

사랑은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것이기에, 애쓰지 않아도 우리는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최은영 작가의 책은 여전히, 나의 깊이 숨어있는 감정을 꺼내 위로를 준다. 

 

 

 

 

 

 

 

 

생각의 나무

 

 

 

 

 

바다의 기별.

김훈의 에세이 모음집이다.

 

제목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바다로부터 오는 소식.

 

그러나 책을 읽은 후 그것은, 닿을 수 없는 모든 것들에 대한 처절함이다.

 

 

바다는 멀어서 보이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바다의 기별이 그 물가에 와닿는다.

 

 

 

닿을 수 없는 '너'

연기나 바람 같은 '생명'

찾을 수 없는 '행복'

잡아 둘 수 없는 '시간'

허공에 울려 퍼지는 '해금 소리'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들을 향한 필사적인 '손짓'

잃어버린 '고향'

소통이 단절된 '민주주의'

 

작은 물줄기에 희망을 가져 보기도 하지만, 바다는 끝내 닿을 수 없다.

바다의 기별은 그렇게 우리를 설레게 하다 결국 비참하게 만든다.

 

내 살아 있는 몸 앞에서 '너'는 그렇게 가깝고 또 멀었으며, 그렇게 절박하고 또 모호했으며 희미한 저쪽에서 뚜렷했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과 모든, 참혹한 결핍들을 모조리 사랑이라고 부른다.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닿을 수 없는 것들은 슬픈 눈물로 맺히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의 흔적을 새기지만, 또한 우리가 살아가도록 만든다.

 

 

 

'아이다호'

넓은 평야 사이 좁은 이차선 도로, 그 끝에 닿아있는 산과 하늘은 지평선을 이룬다.

황량한 길 가운데 서있는 리버 피닉스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던 영화.

 

결코 닿을 수 없는 무언가를 찾으러 이 도시 저 도시로 길을 떠나보지만, 끝에 도달할 수 없었던 마이크(리버 피닉스).

희미하게 남아있는 초록빛의 집, 하얀 옷을 입은 엄마의 기별은 그에게 좋은 어떤 것을 기대하게 만들지만 결국, 외로움과 처절함만이 남을 뿐이다.  

 

가질 수 없었던 평범한 가족,

누릴 수 없었던 안정적인 생활,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한 친구 스캇,

끝내 닿을 수 없는 엄마,

 

그럼에도 Have a nice day! 를 외치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희망이 있지만 또 뜬 구름 잡듯 떠돌아다니는 방랑자와도 같다.

 

강을 거슬러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연어의 회귀본능처럼 마이크는 어느새 아이다호, 그 길 위에 서있다.

 

 

바다의 기별은 슬픈 사랑이다.

 

 

 

 

 

 

 

 

 

 

 

 

이 책은 어린이들과 청소년뿐 아니라 어른들을 위한 동화이기도 하다. 

예쁜 편지지처럼 중간중간 들어가 있는 삽화 덕에 동화를 읽는 느낌이 더해졌다.

 

고아인 제루샤 애벗(주디)이 키다리 아저씨의 도움으로 대학 생활을 할 수 있게 되고, 불우했던 과거를 딛고 당당히 작가로 성공하는 이야기를 편지 형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존재를 '키다리 아저씨'라 할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다.

 

사춘기 시절, 소설의 주인공이 고아임에도 그녀를 부러워했던 나의 모습이 생각난다. 나에게도 키다리 아저씨가 있다면 하고 말이다.

 

탁월한 재능이 있지만 환경의 거미줄에 걸려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그 능력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다면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재능을 알아보고 대단한 지원을 해주는 후견인을 만날 행운이 주어진다면 모두 성공하고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을까? 그것 또한 장담할 수 없다.

 

주디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긍정적인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재능은 태도에 의해 빛이 났고, 키다리 아저씨의 안목과 지원이 더해져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주디는 받기만 하지 않았다. 자립하려 끊임없이 노력했고, 자립의 상황이 되었을 때 보답하기 시작했다.

 

 

 

 

정작 중요한 건 엄청난 즐거움보다는 작은 것에서 즐거움을 찾아내는 자세랍니다. 전 행복해지는 진짜 비결을 알아냈어요. 바로 현재를 사는 거예요. 과거에 얽매여 평생을 후회하며 산다거나 미래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최대의 행복을 찾아내는 사실을 똑똑히 인식할 거예요. 순간순간을 즐기고, 즐기는 동안은 제가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인식할 거예요. 사람들은 대부분 인생을 산다기보다는 경주하고 있을 뿐이에요. 지평선 멀리에 있는 목표에 도달하려고 무던히 애를 쓰죠. 한참 헉헉대며 달려가느라 아름답고 평화로운 전원풍경엔 눈길 한 번 못 주고 말이에요.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이 늙고 지쳤으며 목표에 도달하고 안 하고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죠. 전 위대한 작가가 못 되더라도 길가에 앉아 작은 행복을 쌓아 올리기로 마음먹었어요.

 

 

 

 

시간이 흘러 어렴풋이 돌아보니 고아원 시절도 다정하게 느껴집니다. 처음 대학에 들어왔을 때는 다른 아이들이 누린 정상적인 어린 시절을 빼앗겼다는 생각에 분한 마음이 들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전혀 안 그래요. 고아원 생활이 남들과 다른 특별한 경험으로 생각되거든요. 그런 과거가 있었기에 한 걸음 물러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게 된걸요. 어른이 된 지금, 전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 자란 사람들에게서 절대 찾아볼 수 없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답니다. 전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여자아이들을 많이 알아요. 그 애들은 익숙해진 나머지 행복을 느끼는 감각이 무뎌져 버렸지만, 전 매 순간 제가 행복하다는 사실을 온전히 느낀답니다. 그리고 아무리 속상한 일이 생겨도 그 사실을 잊지 않을 거예요. 그 일을 재미있는 경험이라 여기고,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내가 어떤 하늘을 이고 있든, 나에게는 모든 운명과 맞설 용기가 있다'는 말처럼. 

 

 

 

 

행복은 내 안에 있다. 

어떤 경험, 어떤 상황, 어떤 사람들과 만나던 그것들에서 기쁨을 느껴야 한다. 하늘과 계절, 숲과 바람, 나무와 새, 꽃과 나비, 책과 음악, 불 밝힌 작은 카페나 벤치 하나에서도 즐거움을 찾는 것이 인생이다.

 

 

지친 일상에 따뜻한 온기와 휴식을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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