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그림은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이다. 

물에 빠진 오필리아의 머리 위로 버드나무, 치마폭에 팬지, 손에 움켜잡은 양귀비, 쐐기풀 등 사실적으로 묘사된 그림은 신비롭고 낭만적이나 오싹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열아홉 살 때 그림의 모델이었던 엘리자베스 시달은, 서른셋의 이른 나이에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고 한다.

그 사연을 알고 보니 더 섬뜩하다.

 

표지 읽기만으로도 이 책이 비극임을 알 수 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민음사의 책에서는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번역되어 조금 생소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단지 '삶과 죽음'에 집중하기보다는, 인간 존재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기에 'To be or not to be'를 '있음과 없음'으로 해석하였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결국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 대한 복수에 실패한다.

선왕을 죽이고 왕좌와 어머니를 차지한 삼촌에게 복수를 결심한 햄릿은 완벽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실행하지 못한다.

그때 실행했더라면, 무고한 사람들과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덴마크가 노르웨이의 포틴 브라스 왕자에게 넘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햄릿이 기회의 순간 망설였기에 최악의 비극이 탄생했다. 그 때문에 햄릿은 우유부단한 인물로 종종 비유된다.

하지만 햄릿을 우유부단하다고 탓하고만 싶지는 않다.

 

복수의 기회는 왕 클로디어스가 형을 독살한 일에 대한 후회로 기도를 드리던 순간이었다. 

그때 죽인다면 온갖 악한 일을 도모한 그의 영혼은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햄릿은 망설였을 것이다.

아서라 칼아, 더 끔찍한 상황을 만나자. 놈이 취해 잠자거나 광란하고 있을 때, 침대에서 상피 붙어 쾌락을 즐길 때, 경기 도중 욕하거나 구원받을 기미가 전혀 없는 행동을 하고 있을 바로 그때, 다리를 걸자.

 

 

또한 자신 앞에 나타난 선왕 유령의 창백한 얼굴을 어찌 간과할 수 있었을까.

한창 죄업을 쌓고 있는 중에 잘렸으니, 성체 받고 기름 바르는 고해성사도 없이, 죄를 청산하지도 못하고 온갖 결함을 내 머리에 인 채 심판대로 보내졌다. 아, 무섭다! 아, 무섭다! 정말 무섭다!

 

 

 

 

햄릿은 견딜 수 없는 현실에 반발하며 무모한 언행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신중하고 순수한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이다.

그는 존재에 대한 고뇌를 끊임없이 하며, 삶에 대한 돌파구를 모색했던 인물이다.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는 건가, 아니면 무기 들고 고해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끝장을 내는 건가. 죽는 건, 자는 것일 뿐이다. 잠 한 번에 육신이 물려받은 가슴앓이와 수천 가지 타고난 갈등이 끝난다 말하면, 그건 간절히 바라야 할 결말이다. 

죽는 건, 자는 것. 자는 건 꿈꾸는 것일지도, 그게 걸림돌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잠 속에서 무슨 꿈이, 우리가 이 삶의 뒤엉킴을 떨쳤을 때 찾아올지 생각하면, 우린 멈출 수밖에. 그게 바로 불행이 오래오래 살아남는 이유로다. 

왜냐면 누가 이 세상의 채찍과 비웃음, 압제자의 잘못, 잘난 자의 불손, 경멸받는 사람의 고통, 법률의 늑장, 관리들의 무례함, 참을성 있는 양반들이 쓸모없는 자들에게 당하는 발길질을 견딜 건가? 단 한 자루 단검이면 자신을 청산할 수 있을진대. 누가 짐을 지고, 지겨운 한 세상을 투덜대며 땀 흘릴까? 

국경에서 그 어떤 나그네도 못 돌아온 미지의 나라, 죽음 후의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 의지력을 교란하고, 우리가 모르는 재난으로 날아가느니, 우리가 아는 재난을 견디게끔 만들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양심 때문에 우리들 모두는 비겁자가 되어버리고, 그럼에 따라 결심의 붉은빛은 창백한 생각으로 병들어 버리고, 천하의 웅대한 계획도 흐림이 끊기면서 행동이란 이름을 잃어버린다. 

 

 

목숨은 하나를 셈보다 길지 않고 반 푼 값어치도 없다. 그와 반대로 영혼은 불멸한다.

죽음으로 육신의 고통을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죽음 이후 미지의 세계는 우리를 두렵게 한다.

또 하나, 복수를 위한 살인은 선인가 악인가?  복수의 양면성 또한 단칼의 휘두름을 머뭇거리게 했을 것이다. 

결국, 신중함인지 우유부단함이지 모를 햄릿의 행동으로 덴마크 왕족 모두는 죽음 저 너머로 가게 된다.

 

 

 

 

희곡으로 읽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은유 안에 담긴 메시지들을 파악하는 것이 어려우면서도 책 읽는 재미를 더했다.

햄릿이 가지고 있는 선과 악, 우유부단함과 단호함, 단순함과 고뇌, 순리와 역리 등의 공존은 '작은 햄릿'인 우리들 안에서도, 극의 다른 등장인물들에게도 발견할 수 있었다.

 

 

 

 

연극 <햄릿>이 서울, 국립 해오름 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거장 배우들과 젊은 배우들의 연기 조화가 궁금한 이 연극은, 매회 기립 박수가 나온다는 기사가 더해져 기대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번 주말로 예매된 연극이, 어떤 감동과 깨달음을 줄지 기다려진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