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정체성>, <불멸> 이후 이 책을 보았다. 어쩌면 밀란 쿤데라의 유작이 될지 모를 소설, <무의미의 축제>는 그의 생각을 정리한 책이 아닐까? 라는 마음으로 읽었다.
주인공들에게 진한 우정을 느끼는 작가의 시선은 여전히 따뜻했고, 책에 스며있는 그의 사상과 문체, 세련되고 독특한 전개 방식 등 낯설지 않은 느낌이 좋았다.
많은 사람들은 의미 있는 순간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의 선택에 의미를 부여하고 뿌듯해하며, 우연히 생긴 일에도 의미를 선사한다.
그럼으로써 생기있는 행복감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매사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다 보면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칠 수 있고, 삶이 곤하고 불행할 수도 있다.
하나의 농담에 진지한 의미를 두면 관계나 상황을 무겁게 만들 수 있다.
무엇보다, 의미있는 일과 무의미한 일에 대한 미묘한 경계의 판단은 개인적이기에 타인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다.
의미 있는 일에 집중하고 살았다면, 무의미한 일들에 대한 작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외모나 몸매 성격 등의 개별성보다는, 비슷하고 무의미한 배꼽에 매력을 느끼는 획일성을 가진 시대.
알랭이 뤽상부르 공원을 거닐다 느낀 무심하게 고요하고 평온한 행복감.
다르델로의 세련되고 기교 섞인 말보다, 카클리크의 주의를 끌지 않는 보잘것없는 태도에 반하는 여성들.
파티 장소 위를 떠다니는 의미 없는 깃털 하나에 쏠린 사람들의 시선.
전립샘 비대증을 가진 칼리닌은 스탈린 앞에서 소변을 참지 못하고 실수했던 보잘것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기의 악마 스탈린은 그에게 특별한 정을 느끼고 칸트가 살던 도시에 유명인사가 아닌 칼리닌의 이름을 붙였다.
팬티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괴로움을 견딘다는 것...... 청결의 순교자가 된다는 것...... 생기고, 늘어나고, 밀고 나아가고, 위협하고, 공격하고, 죽이는 소변과 맞서 투쟁 하나는 것...... 이보다 더 비속하고 더 인간적인 영웅적 행위가 존재하겠냐? 나는 우리 거리들에 이름을 장식한 이른바 그 위인이라는 자들은 관심 없어. 그 사람들은 야망, 허영, 거짓말, 잔혹성 덕분에 유명해진 거야. 칼리닌은 모든 인간이 경험한 고통을 기념하여, 자기 자신 외에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은 필사적인 투쟁을 기념하여 오래 기억될 유일한 이름이지.
시대의 작가는 그의 말, 글 그리고 행동으로 세상이 달라지기를 얼마나 고대하며 살아왔을까?
만고의 노력 끝에도 한심한 세상을 바로잡을 도리가 없다는 것을 작가도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이런 희망 없는 세상을 어떻게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까?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개조할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
"네 성도 마찬가지로 네가 선택한 게 아니야. 네 눈 색깔도, 네가 태어난 시대도, 네 나라도, 네 어머니도. 중요한 건 모든 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권리들이란 그저 아무 쓸데없는 것들에만 관련되어 있어. 그걸 얻겠다고 발버둥 치거나 거창한 인권선언문 같은 걸 쓸 이유가 전혀 없는 것들!"
모든 것이 진지하고,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세상, 농담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심지어 역겨운 거짓말로 여겨지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는 삶이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고통받으며 살기보다는, 소소하고 일상적이지만 내가 누릴 수 있는 권리들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다.
"나는 원체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그런 것들,............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살다가 멎는 곳에서 죽는 것이 나의 꿈이라면 꿈이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김희성의 대사다.
그는 무의미한 것들을 사랑하며 인생을 가볍게 살려고 했지만, 결국 시대적 상황과 무거운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이제 나한테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더 강력하고 더 의미심장하게 보여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로맹 가리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의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무의미의 축제>의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이 문장들이 계속 동일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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