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밀란 쿤데라의 이 책은 결코 쉽지 않지만 재미있다.

테레사, 토마스, 사비나, 프란츠.

추구하는 삶이 다른 네 주인공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또 너무 비슷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존재는 참을 수 없이 가볍다는 제목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까?

인간의 삶은 가벼운 것일까 무거운 것일까?

가벼운 것은 무엇이고 무거운 것은 무엇일까?

 

파르메니데스는 대답했다. 가벼운 것은 양이고 무거운 것은 음이다라고. 그의 대답이 옳았는가? 아니면 틀렸는가? 이것이 문제다. 확실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즉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의 대립 쌍은 모든 대립들 중에서 가장 신비롭고 가장 타의적이라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와 다르게 베토벤에게는 무거움이 명백히 어떤 긍정적인 것이었다. <힘겹게 내린 결심>은 운명의 소리 <그렇게 할 수밖에!>와 연관되어 있다. 무거움, 필연성, 가치는 서로 긴밀히 연관된 세 개념이다. 필연적인 것만이 무겁고, 무게가 있는 것만이 가치가 있다.

 

가벼움과 무거움, 육체와 영혼, 우연과 운명, 무관심과 동정, 비밀스러운 사랑과 공개적인 사랑, 짐과 가벼움, 오락성과 책임......... , 우리의 삶은 하나의 길을 선택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한다.

 

 

 

 

테레사는 토마스에게 온전한 사랑을 요구하며 그의 외도를 괴로워했지만, 때때로 가벼운 것으로의 동경을 느꼈다.

 

토마스는 여러 여인들과의 관계를 갖으며 가벼운 인생을 즐겼지만, 운명처럼 나타난 테레사를 사랑하며 동정과 책임감을 느낀다.

 

프란츠는 진실에서 살았다. 그러나 사비나를 사랑하게 되며 아내를 속인다. 결국 아무것도 비밀로 하지 않을 것을 추구했던 프란츠는 사비나와의 관계를 털어놓고 온전한 사랑을 꿈꾸었다. 그러나 공개적이 된 사랑은 무거운 짐이 되어 사비나는 그를 떠나게 된다. 무거운 것을 요구하는 남성과 가벼운 것을 원했던 여성의 끝은 이별이다. 영화 <클로저>의 두 주인공 댄과 앨리스처럼 말이다.

 

인간의 삶은 단 한 번 뿐이라는 것으로서, 바로 이 때문에 우리들 결단에서 어떤 것이 좋고, 어떤 것이 나쁜가를 우리는 결코 확정 지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단 한 번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내린 서로 다른 결단들을 서로 비교할 수 있도록 제2, 제3, 제4의 삶이 우리에게 선사된 경우는 없다. 

 

토마스가 테레사에게 연락처를 주지 않았다면, 테레사가 프라하로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프란츠가 사비나와의 관계를 비밀로 했다면, 사비나가 프란츠를 떠나지 않았다면.............

사람이 추적하는 목적은 언제나 베일에 가려 있고,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언제나 전혀 미지의 것이기에 우리는 아무것도 확정 지을 수 없다.

 

 

 

 

한 번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보헤미아의 역사는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역사도 그렇다. 보헤미아의 역사와 유럽의 역사는 불행하게도 인류의 무경험에 의해 그려진 두 개의 스케치다. 역사란 개별적인 인간의 삶과 똑같이 가벼운 존재다. 그것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휘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먼지처럼 날아가버릴 인간의 삶은 얼마나 가벼운가. 그러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감추고 우리는 또한 얼마나 무겁게 살고 있는가. 책을 읽은 후 오래도록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해 생각했지만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가벼운 인생을 살고자 하면 무거운 것들로의 동경이 생긴다. 무겁게 되고자 하면 가벼움을 갈망하는 현기증을 느끼게 된다.

가벼움과 무거움은 한 발자국 차이이다.

 

사비나는 진실을 커튼 뒤에 숨기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을 적으로 여겼다.

아름다운 가면, 아름다운 거짓, 완벽해 보이는 모순들, 죽음을 가리는 병풍, 거짓과 위선, 진실을 감추는 언론들과 같이 저속한 것, 즉 키취를 말이다.

 

평생 동안 그녀는 자기의 적은 키취라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자신 속에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모순되게도 사랑하는 어머니와 현명한 아버지가 이끄는 행복한 가정의 이미지를 늘 가지고 살았다.

실제로 그녀의 가정과는 모순된 이미지를 말이다.

 

지극히 가벼운 것을 추구했던 사비나의 인생 역시 무거운 것으로 눌려있다. 오히려 그 무게를 부정하고 배반하며 가볍게 가볍게 되려고 했던 그 처절함이 무겁게 느껴진다.

 

 

 

 

캄보디아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서 남는 것은 무엇인가? 
아시아의 아기 하나를 품에 껴안고 있는 미국 여배우의 큰 사진 하나. 

토마스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
하나의 비문. <그는 지상에서 천국을 바랐다>는 비문. 

베토벤에게서 남은 것이 무엇인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텁수룩한 머리를 한 무뚝뚝한 남자. <그렇게 할 수밖에!>라고 저음으로 말하는 남자. 

프란츠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 
하나의 비문. <긴 미로 끝에 되돌아가다>라고 새긴 비문. 

기타 등등. 사람들이 우리를 망각하기 전에 우리는 키취로 바뀐다.
키취는 존재와 망각 간에 갈아타는 정거장이다.

 

한 존재의 죽음으로 그의 인생 전체는 부정된다.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떤 선의를 베풀었고, 어떤 악행을 했는지 사람들은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없다. 그저 하나의 이미지로 포장한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를 자신의 구미에 맞게 판단하고 전달하고 보도한다. 거짓되고 사실이 아닌 것을 아무렇게나 저속하게 말이다. 

아름답게 포장되던, 우스꽝스럽거나 비열하게 포장되던, 거짓인 것들은 모두 끔찍하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너무 가벼운 존재들이 되어버린다.

존재의 가벼움은 참을 수 없이 화가 나고 슬프고 허무하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맴돌지 않고 직선으로 진행된다. 이것이 왜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가 하는 이유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반복을 갈구하는 소망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함께 나란히 앉아 있던 그때처럼,  지금 그녀는 그때와 똑같은 행복을, 독특한 슬픔을 체험했다. 이 슬픔은 <우리는 종착역에 도착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는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은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먼지처럼 사라질 허무하고 가벼운 인생이지만, 삶의 고단함과 부조리함 슬픔과 고통은 또 피해 갈 수 없다.

그러니 파르메니데스의 견해대로 대기보다 더 가벼워질 존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하루하루 피할 수 없는 가치와 무게 그리고 운명을 베토벤 처럼 이겨내는 수밖에 말이다. 

 

존재는 참을 수 없이 가볍지만, 그것이 또한 무거움을 견디게 한다. 

 

 

 

 

 

여전히 철학적이고 어려운 이 책은 밀란 쿤데라의 또 다른 소설 <불멸>의 내용을 궁금하게 한다.

'불멸'이란 제목은 '존재의 가벼움'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상당한 분량에 어려운 책이지만 도전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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