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책의 표지는 호퍼의 그림이다.
추운 겨울, 장갑 한쪽을 낀 채로 자동판매기 식당에 홀로 앉아 차를 마시는 여인.
우아하게 차려입은 창백한 여인의 얼굴에 개츠비의 상실과 외로움이 겹쳐진다.
The Great Gatsby.
그의 이름 앞 '위대한'이란 수식어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는 왜 위대했는가.
결코 희망적이지 않은 세상을 살기 위해서 사람들은 희망과 이상을 품고 살아야 한다. 아이러니하다.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하루를 견디고, 그렇게 될 거라는 이상을 꿈꾸며 또 하루를 버틴다.
그것마저 없다면 사람들의 삶은 절망적일 것이다.
개츠비에게 삶의 의미와 질서를 부여해주는 것은 바로 사랑하는 여인, 데이지를 얻기 위한 노력이었다.
상류사회 출신인 데이지는 아름다운 외모와 상냥한 성격을 가진 인기 많은 아가씨였지만, 개츠비는 태생도 재산과 명예도 보잘것없었다. 결국 데이지는 소문난 갑부이자 스포츠 선수 출신인 톰과 결혼하며 안정된 삶을 선택한다.
데이지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개츠비는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수년간의 험한 세월을 보내고 어마어마한 갑부로 데이지와 재회하게 되기까지 그의 스토리는 과히 신화적이다.
그의 큰 성공에는 영리함, 성실한 태도, 열정 등이 있었지만, 밀수입 등 사기행각으로 엄청난 부를 얻게 된다.
개츠비는 위대한가 그렇지 않은가.
그가 은밀한 거래를 하지 않았다면 서슴없이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렇다면, 그는 대단한 부를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금수저로 태어나 엄청난 부를 누리는 톰과 데이지는 위대한가 그렇지 않은가.
데이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안에서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끝없는 매력, 그 딸랑거리는 소리, 그 심벌즈 같은 노랫소리........... 하얀 궁전 속 저 높은 곳에 공주님이, 그 황금의 아가씨가...........
영화 기생충에서 기우의 엄마가 했던 말이 계속 맴돈다.
"부잔데 착한 게 아니라, 부자니까 착한 거지." "솔직히, 이 돈이 나한테 다 있었어봐. 나는 더 착하지. 착해."
............ " 다리미야, 다리미. 돈이 다리미라고. 구김살을 좌~악 펴줘."
데이지의 인기 비결은 모나지 않은 성격과 특유의 따뜻함 그리고 아름다운 외모와 몸가짐이었다.
그녀가 끼니 걱정을 하는 집안의 딸이었다면 이 모든 것이 가능했을까?
톰이 개츠비처럼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 홀로 삶을 개척하고 살았다면, 그의 무례하고 남을 깔보는 성격과 건장한 체격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을까? 그의 바람기는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데이지와 톰은 부와 화려함의 가면을 쓰고 그들의 결점을 감추고 있었다. 아니, 다른 사람들조차 그 가면에 현혹되어 그들의 본질을 알아보지 못했다.
톰과 데이지, 그들은 경솔한 인간이었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부숴버리고 난 뒤 돈이나 엄청난 무관심 또는 자기들을 한데 묶어 주는 것이 무엇이든 그 뒤로 물러나서는 자기들이 만들어 낸 쓰레기를 다른 사람들이 말끔히 치우도록 했던 것이다.
개츠비는 부가 가둬 보호해 주는 젊음과 신비, 그 많은 옷이 풍기는 신선함, 그리고 힘겹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데이지가 안전하고 자랑스럽게 은처럼 빛을 내뿜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이다.
개츠비는 삶의 가능성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과 희망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다. 스스로 이상을 만들고 창조적인 열정으로 그 환상을 부풀여 빛나게 했다. 그 거대한 환상의 힘이 그를 몰았다. 평범한 사람들이 아무리 희망을 품고 노력하며 살아간들 개츠비처럼 그 이상에 가까이 가진 못했을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다.
만 건너 그녀 집 맞은편에 화려한 집을 얻고, 그녀 집 앞 부둣가에 밝게 빛나는 그린 라이트를 바라보며 얼마나 가슴이 벅차올랐을까. 밤마다 성대한 파티를 열어 그녀를 기다리며 얼마나 기대감에 부풀었을까.
그러나 개츠비의 낭만적 이상이었던 꿈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상실만이 남게 된다. 그의 젊은 시절은 잡을 수 없는 하나의 꿈에 바쳐진 채 스러져간다. 현실은 이상과 달랐다. 무모한 개츠비다.
그 인간들은 썩어빠진 무리예요. 당신 한 사람이 그 빌어먹을 인간들을 모두 합쳐 놓은 것만큼이나 훌륭합니다.
이 책의 화자이자 개츠비의 유일한 친구였던 닉은 따스한 말 한마디를 건넨다. 이 말은 나에게도 그랬듯이, 개츠비에게도 조금의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완벽한 삶을 꿈꿨던 젊음의 열정과 대단한 도전은 해가 지나면서 서서히 뒤로 물러나다 여려지고 흐려지다 결국 사라진다.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에서 주인공들은 전철의 큰 창으로 지나치는 "오늘 당신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라는 한 교회 건물에 걸린 광고판을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피곤한 하루의 시작과 지친 하루의 끝에 바라보는 이 메시지는 과히 희망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현실에서 희망은 우리를 피해 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또 별로 문제 될 것은 없다. 그러니 또 좋은 일을 기대하고, Have a nice day! 를 외칠 수밖에.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다. 그것은 우리를 피해 갔지만 별로 문제 될 것은 없다.
이 책은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에서 있었던, 눈부신 경제 성장 그리고 그와 함께 독버섯처럼 자라난 도덕적 타락과 부패로 방황하던 시대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미국 동부 사람들은 부와 세련된 교양미를 갖추고 있지만 도덕적 윤리적으로 문란한 행동을 일삼았다. 반대로 중서부 사람들은 비록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할망정 도덕적 순수성과 청교도적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다.
전쟁 후, 돈과 쾌락을 좇아 동부로 이주했던 서부 사람들과 더 부유해진 동부 사람들의 혼란 속에 이 책의 비극은 놓여있다.
이제 나는 이 이야기가 결국 서부의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감격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내 젊은 날의 귀행 열차, 서리가 내린 어두운 밤의 가로등과 썰매 종소리, 불 켜진 창문의 불빛에 크리스마스를 장식하는 할리 나무 화환의 그림자가 눈 위에 비치는 곳 말이다. 그곳이 바로 나의 중서부 지방이다.
닉은 개츠비의 죽음 후 중서부로 돌아온다.
껍데기만 남은 덧없는 순간, 잿빛으로 덮인 거리들, 부와 화려함 뒤에 숨은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무리들을 피해서 말이다.
흔들리는 밤거리의 불빛들, 고급 옷으로 가득 찬 옷장, 넘쳐나는 음식들로 우리의 삶과 행복은 채워지지 않는다. 남들에게만 찾아가는 행운도 잡을 수 없는 그린 라이트다. 허황되고 의미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다정한 말과 따뜻한 눈길, 오후에 마시는 차 한잔, 여유로운 주말의 나른함, 알림 소리를 내며 뜨는 반가운 문자 메시지, 새로 바꾼 선풍기의 부드러운 바람, 맛있게 차려진 저녁 식사, 산책길에 만난 작은 꽃 한 송이가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이다.
오늘도 Have a nice day!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유럽 소설] 불멸_밀란쿤데라 (0) | 2022.07.19 |
---|---|
[동유럽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_밀란 쿤데라 (0) | 2022.06.24 |
[한국 단편소설] 애쓰지 않아도_최은영 (0) | 2022.05.30 |
[한국 에세이] 바다의 기별_김훈 (0) | 2022.04.27 |
[영미소설] 키다리 아저씨_존 웹스터 (0) | 2022.0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