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그냥 사는 것'인 줄 알았던 나에게, 삶에 큰 의미를 부여해 준 책이다.

 

"있잖아, 당신은 베카의 남편이 자기 몰두적이고, 스스로에게만 관심이 있다고 걱정하지. 이 말은 해야겠어. 루시, 당신도 똑같아."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작은 못이 가슴팍을 밀고 들어오는 것처럼 육체적인 통증을 느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오, 윌리엄!>의 표현대로, 사람은 자신만 모를 뿐 자기 몰두적이고 스스로에게만 관심이 있다. 

 

그러나 삶은 자신 이상의 어떤 앎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된 태평양 전쟁 전범에 대한 진실, 얼마 전 다녀온 4.3 영화제, 세월호 10주기를 맞아 세상에 나온 영상들, 이태원 참사로 소중한 가족을 잃은 한 가정의 이야기, 음악으로 세상에 목소리를 내는 예술가 등이 나의 삶의 지도에 들어왔고, 나는 또 어제와 조금은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두려움 없이 살기 위해서라도 세계에 대한 앎이 바뀌어야 한다. 세상을 이전과는 다르게 알아야 한다. 알았던 것을 잊어버려야 한다. 다행히 어떤 앎은 지도다. 새로운 앎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새로운 삶을 살게 한다.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을 알게 되어야 가능성이 태어난다._앎의 발명

 

 

 

 

씨랜드 화재 참사, 춘천에 자원봉사를 간 인하대 발명동아리 아이디어 뱅크 학생들, 성수 대교와 삼풍 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참사,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등 수많은 참사 참사들.

 

사건 후에도 여전히 정의롭지 못하고, 달라지지 않는 세상을 보며 유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사랑하는 이들을 살려내지 못한 것이 한이라서, 그 슬픔과 고독을 온몸으로 이겨내며,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위해 각자의 방법으로 여전히 애쓰고 있다.

나는 유족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웠다. 유족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구해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삶도 죽음도 무의미하다는 그 무의미와 싸우며, 자신의 아픈 가슴속 생각 중 가장 좋은 것을 내주면서 변화의 일부분이 되려고 하는 것이 유족들의 사랑이다._사랑의 발명

 

 

 

 

작가는 그리스 모넴바시아에서 어떤 꿈에서도 볼 수 없었던,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보며 감탄하고 기쁨을 느낀다. 경이로움을 발견한 것이다.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과 기쁨을 느꼈던 작가의 이야기를 읽고, 최근 나에게 일어난 일을 경이롭다 말하고 싶어졌다.

 

늦은 봄, 삼청동 길을 걷다 한옥 카페로 들어섰다. 작은 마당이 내다보이는 처마 밑 자리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맑은 하늘 아래 알록달록한 나무와 꽃들을 내다보는 풍경은 비현실적이었다.

고급스러운 그릇에 정성스레 담은 단호박 팥빙수를 한 입 떠먹으니 달지 않고 맛있다. 다기 잔에 담긴 한차의 쌉쌀한 향과 맛도 최고다. 그때였다. 희고 큰 나비 두 마리가 아담한 정원을 유유히 날아다니는 것 아닌가. 그 아름답던 풍경을 나는 경이로움의 발명이라 부르겠다.

 

나를 변하게 하는 것은 고백도 아니고 내면의 응시도 아닌, 다른 사람, 다른 생명, 다른 이야기다. 내가 자꾸만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그날 밤의 경이로움과 같은, 세상에 숨겨진 경이로움과 마주치는 그 우연을 기대해서다._경이로움의 발견

 

 

 

 

내 안에 매몰되지 않기를, 자기 몰두적이고 스스로에게만 관심 갖지 않기를, 나를 변하게 하는 다른 사람, 다른 생명, 다른 경이로움을 발견하고 알고 살아가기를, 그전에 하던 일을 더 이상 않기도 하며, 새로운 일을 하기도 하며 용기 있게 살기를.

이런 것이야 말로 자신만의 삶이 아닐까.

 

인간은 수없이 많은 방식으로 기쁠 수 있고, 이 말은 수없이 많은 방식으로 힘을 낼 수 있다는 뜻이고, 나는 기쁨을 맛볼 준비가 되어 있다. 즉 기쁨을 위해 살자고 생각하게 된다.

"오늘 뭐 하세요?,

"놀라고 기뻐합니다."_관계의 발명

 

 

 

 

 

 

 

 

 

 

 

소설이란 추체험의 기록.
있을 수 있는 인간관계에 대한 도식.
구제받지 못한 상태에 대한 연민.
모순에 대한 예민한 반응.
혼란한 삶의 모습 그 자체.
나는 판단하지도 분노하지도 않겠다.
그것은 하느님이 하실 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의미 없는 삶에 의미의 조명을 비춰 보는 일일 뿐.

1980년. 작가의 말

 

 

민음사에서 출판된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1960년대 이후 근대화 되어가는 서울을 배경으로 근대인의 일상과 탈일상을 그려내고 있다. 9편의 단편과 1편의 중편, 총 10편의 소설 중 1964년 사상계에 발표한 <무진기행>에 대해서......

 

 

 

무진기행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무진(霧津), 안개 나루, 짙은 안개가 늘 껴 있는 항구도시. 이곳은 가상의 도시다.

일상에서 벗어나 안개와 바다로 나타나는 비일상의 이상 세계.

비밀스러운 장소. 

 

주어진 삶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며 치열하게 살다,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비밀스러운 장소는 어디일까?

일상 회복을 위한 휴식, 잠시 떠나는 여행, 일탈을 위한 개개인의 행위들.

현실을 완전히 피해 파라다이스행을 할 순 없지만, 잠시나마 도피할 무언가에 기대는 것은 필요하다.

 

주인공 윤희중은 서울에서의 일상을 피해 잠시 무진으로 내려온다.

무진은 그에게 낭만적인 도시라기보다는, 어둡던 청년 시절이 떠오르는 장소이다. 그럼에도 그는 무진을 '긴장을 풀어 버릴 수 있는, 아니 풀어 버릴 수밖에 없는 곳'이라 생각한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하지 않았던 엉뚱한 생각을, 나는 무진에서는 아무런 부끄럼 없이, 거침없이 해내곤 했던 것이다. 아니 무진에서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쩌고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생각들이 나의 밖에서 제멋대로 이루어진 뒤 나의 머릿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듯했었다. 

 

무진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은 모두 속물들이라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이 하는 모든 행위는 무위와 똑같은 무게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장난이라고.

 

그는 무진에서 후배이자 순수함을 지닌 국어 교사 '박', 동기이자 세무서장이 된 속물적 인간 '조', 그리고 무진을 떠나 서울로 가고자 하는 열망을 숨기지 않는 음악 교사 '인숙'을 만난다. 그들 모두에게서 비치는 희중의 다중적인 모습은 씁쓸하다.

그는 무진을 벗어나고 싶었던 과거를 마주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에서 일탈을 감행할 무모한 용기가 생긴다. 

 

 

 

아내의 전보가 무진에 와서 내가 한 모든 행동과 사고를 내게 점점 명료하게 드러내 보여 주었다.
모든 것이 선입견 때문이었다. 결국 아내의 전보는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흔히 여행자들에게 주어지는 그 자유 때문이라고 아내의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잊힐 수 있다고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가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결국, 아내의 전보는 새벽잠을 깨우는 자명종의 요란함처럼 그를 깨운다.

종내 머물 수 없는 무진, 결코 지속되지 않을 일탈을 떠나 그는 서울행 버스를 탄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순수했던 청년, 무진의 안개를 떠나고 싶어 했던 시절이 있었던 희중은 이제, 서울 한 제약회사 전무이사로 승진을 앞두고 있다. 그가 느꼈을 부끄러움이란 무엇일까. 무진에서의 일탈일까. 세속적인 명예와 이익을 좇는 속물적 인간으로 돌아감일까. 자기 성찰에서 나오는 부끄러움. 부끄러움을 느끼는 인간은 성숙할 수 있다. 

 

무진기행은 귀향 소설이 아닌, 귀경 소설이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세계를 인정하는 역유피아 소설인 것이다.

서울과 무진 두 공간은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의미를 가진 곳으로 어느 곳에서도 나는 '나'를 상실할 위기에 처해있다. (서울의 우울_김미현)

 

 

처음에 무진은 내가 생각하는 비밀스러운 치유의 장소, 성장의 장소로 생각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소설을 다 읽은 지금은 세계의 본질과 이면을 직시하며, 자학을 통해 극기를 이루고, 환멸을 체험한 후에야 비로소 성장하는 김승옥식 성장을 이해할 것 같다.

 

김승옥은 자아의 파괴를 통해 자아의 발전을 도모하는 작가이고, 이분법적 시각이 아닌 이중적 시각에서 자아의 양면성에 주목하는 입체적 작가이다.

 

스스로가 주체이자 객체이고,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모순과 역설 속에서 김승옥 소설의 인물들은 근대와 대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근대를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를 행해 화살을 쏜다. 독하고 숭고하다.

(서울의 우울_김미현)

 

 

 

 

 
 


총 일곱 편의 단편들 중  표제 소설인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나와 대학 강사, <몫>은 한 대학의 교지 편집부에서 만난 인연들, <일 년>은 정규직인 나와 인턴사원, <이모에게>에서는 이모와 조카, <답신>은 나와 언니 그리고 조카, <파종>은 나와 오빠 그리고 그녀의 딸,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은 나와 두 딸과 손자 등, 소설 하나하나 모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최은영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 사람 사이의 관계가 정말 많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수많은 인연과 관계 맺음이 사랑과 우정, 행복감을 주지만, 서운함과 외로움,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녀의 소설들을 읽으며 나의 감정을 확인하기도,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기도 한다. 
 
2009년 용산 참사, 1996년 고대생 집단 폭력, 대학원 교수의 성희롱 사건, 맞아 죽은 여자들의 역사, 살기 위해 남편을 죽여야 했던 여자들,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 등 사회문제들이 드러난 이 책은, 국가, 사회, 제도가 한 인간과 그 관계에 무한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조용히 말하고 있다.
 
경쟁과 차별, 부조리가 가득하고, 생각과 가치관이 다른 세상에 서 있는 자체로 인생은 고달프다. 포기하고 싶도록 말이다. 그럼에도 순간순간 날아오는 돌멩이들을 맞으며 버틸 수 있는 것은, 아주 희미한 빛, 한줄기 따스한 햇볕이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 그런 을 좇고 싶었는지 모른다.  _<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다희와 주고받던 이야기들 속에서만 제 모습을 드러내던 마음이 있었으니까, 아무리 누추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서로를 마주 볼 때면 더는 누추한 채로만 남지 않았으니까, 그때, 둘의 이야기들은 서로를 비췄다. 다희에게도 그 시간이 조금이나마 이 되어주었기를 그녀는 잠잠히 바랐다._<일 년>

없어지지 않으면 좋겠어...... 바라지 않아도 그 흔적은 사라지지 않을 거야. 그녀는 속으로 말했다. 푸른 무청이 가득한 텃밭을 그리면서. 그곳으로 찾아올 햇볕과 비와 바람과 작은 벌레들을 기다리면서._<파종>

그들에게 별빛은 신의 눈빛이거나 더는 만날 수 없는 사랑하는 존재들의 시선이었다. 밤 비행을 할 때면, 검은 하늘을 날아가고 있을 때면 나는 종종 멀리서 나를 바라보는 이모를 느낀다._<이모에게>

 
 
영화 <밀양, Secret Sunshine>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물 고인 작은 웅덩이, 아무렇게나 내팽겨진 물건들, 머리카락이 뒤엉키는 땅 위로 따스한 햇볕이 비친다. 불행과 상처로 가득한 신애(전도연)는 그 비밀스러운 빛, 희미한 빛 때문에 또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이 지나가고, 무엇이 그대로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녀가 당신의 에 기댈 수 있도록, 당신은 정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_<몫>

니는 영원히 널 사랑할 거야. 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결국 찢어버릴 편지를 쓰는 마음이라는 것도 세상에는 존재하는구나.(....) 나는 너와 함께했던 시간을, 그리고 함께 할 수 없었던 시간조차도 마음 아프지만 고마워할 수 있었어._<답신>

작고 연약한 순간이 아직은 자신을 떠나지 않았음을 바라보면서._<사라지지 않는>

 
 
친정 식구들과 이번 명절 식사 후, 서점에서 책 하나씩 고르라는 언니의 말에 최은영 작가의 책을 집어 들었다.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나와는 성격이 많이 다른 언니와 어린 시절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속 깊은 이야기를 하고 지내는 다정한 사이가 아니었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았던 우리 집에서 맏이로 살아온 그녀에 대해 난 잘 알지 못한다. 
출가 후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가족행사가 있을 때마다 만나 좋은 시간을 보내지만 그것도 잠깐 뿐이다.
 

내 마음 안에서 나는 판관이었으니까, 그게 내 직업이었으니까. 나는 언니를 내 마음의 피고인석에 자주 앉혔어. 언니를 내려다보며 언니의 죄를 묻고 언니를 내 마음에서 버리고자 했지. 그게 내가 나를 버리는 일이라는 걸 모르는 채로. 그때 내 마음에서 나는 옳고 언니는 그르고, 나는 맞고 언니는 틀리고, 나는 알고 언니는 모르고, 나는 할 수 있고 언니는 할 수 없고, 나는 용감하고 언니는 비겁하고, 나는 독립적이고 언니는 의존적이고, 나는 떳떳하고 언니는 비굴하고, 나는 배려하고 언니는 이기적이고, 나는 언니를 지켰고 언니는 나를 버렸지. 모든 것이 분명해서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믿었어. 하지만 긴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그중 어느 하나도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아. _<답신>

 
우리는 타인을 알 수 없다. 내가 판관이 되어 생각하는 상대방은 진실일 수 없다. 진심을 알지 못하는 채, 나는 언니를, 언니는 나를 얼마나 오해하고 있을까? 
 
이 책은 나의 언니가 사준 책이라 더 소중하다.
내년 설 연휴, 엄마와 언니 나 그리고 나의 예쁜 딸, 네 여자들의 일본 여행을 위해 통장을 개설했다.
 
 
 
 
 
 
 
 

 

 

 

 

 

이 책에는, 헬무트 디틀이 감독한 독일 영화 <로시니, 1997>의 시나리오가 실려 있다.

(헬무트 디틀, 파트리크 쥐스킨트 공동 각본)

등장인물들 정리가 잘 되지 않아 영화를 보려 했지만, 현재 볼 수 있는 플랫폼이 없는 듯하다.

책에 실린 영화 속 장면의 흑백 사진들로 위안을 삼는다.

 

 

 

1. 친구여, 영화는 전쟁이다! (시나리오 쓰기의 몇 가지 어려움에 대하여)

 

2. 영화 속의 장면들

 

3.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

 

4. 멜로드라마란 무엇인가? (헤루트 카라세크와 헬무트 디틀의 대담 발췌)

 

 

 

완성된 영화만 봐 왔던 관객들은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 배역 결정, 촬영과 편집까지 겪는 일련의 많은 어려움들을 알 길이 없다. 그저 추측만 할 뿐, 아니면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시나리오 쓰기의 어려움에 대한 쥐스킨트의 글을 읽으며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 단계에서는 아무리 좋은 영화들도 시시해 보이고, 아무리 엄청난 아이디어도 소화할 수 있을 것 같고, 어떤 요구라도 다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시나리오 작가라면 누구나 다 이 단계를 거친다. 이것은 시나리오 쓰기에 있어 일종의 통과 의례로서, 앞으로 닥쳐 올 난관에 대한 공포를 약화시키는 신경 안정제 같은 역할을 한다. 

 

시나리오 작업의 다음 단계는 <이야기를 조심할 것>이라는 구호하에 진행되었다. 그때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 것, 즉 설명적 요소를 극도로 제한함으로써 각각의 이야기들이 너무 일찍 다른 이야기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는 것, 그러면서도 관객의 흥미를 어느 정도 유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영화는 산문에서 기대하는 책과 독자 사이의 리듬의 일치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영화 자체의 내적인 리듬과 관객의 리듬의 일치를 요구한다. 이 말은 영화의 경우 두 가지 맥박이 두 시간 동안 거의 비슷하게 뛰어야 한다는 뜻이다.

 

오스카 라이터의 말을 다시 한번 인용하면, <친구여, 영화는 전쟁이다.> 시나리오는 총알이 하나밖에 들어 있지 않은 탄창에 비교할 수 있다.

 

영화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은 아마 이것일 것이다. 영화는 흘러간다. 

 

 

 

 

부제목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는 볼트 본드라 체크의 장편시에서 인용했다고 한다.

그 시는 한때 불타오르던 열정과 사랑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것에 대한 노래입니다. 그것이 위대함은 아니라는 거지요. 그리고 마지막에서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문제는 만족스럽게 끝이 난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전날 밤 그렇게 대단해 보였던 우정이나 사랑, 혹은 일이 다음 날이 되면 실은 별게 아니하는 사실을 깨닫데 되는 거지요.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적어도 만족스럽게 끝이 납니다. 아주 끔찍했던 경험조차도 말입니다.

 

 

우리에게 전부인 듯 느꼈던 어떤 것들도 삶의 긴 호흡에서 보면 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인생무상.

영화 속 인물, 크리크니츠의 목소리에서도 메시지는 전달된다. 

"고뇌와 사랑의 거대한 산맥에서 남은 것은 우스꽝스러움뿐, 위대함은 모두 사라지고, 이리저리 흩날리는 모래뿐이라네. 가장 저질스러운 코미디처럼."

오래된 악취? 뜻대로 되는 일은 없는 법.
그리고 누가 누구와 잠을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는 만족스럽게 해결된다.

 

 

지금 나의 마음속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갉아먹는 것은 무엇인가. 

뜨거운 열정이나 욕정도 언젠가 사라진다.

 

빛은 발하고,

허기나 갈증은 달래진다.

 

사라져 버리는 것들.

무뎌지고 또 만족스럽게 되는 삶.

 

슬프고 잔인하지만 그것이 필요하기도 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독특한 구성이 흥미를 끌었고, 쥐스킨트의 조금은 다른 모습도 느낄 수 있었던 책이다.

 

 

 

 

 

 

 

 
 

 
 
 
신선한 소설 한 편을 봤다.
 
여자 아이돌 '제로캐럿'의 이야기.
다섯 멤버로 데뷔했다가, 3년 차에 두 명이 탈퇴하고, 새로운 멤버 한 명이 들어와 네 명으로 활동하던 중, 두 명의 멤버가 계약 연장을 하지 않으면서, 마침내 해체되는 걸그룹.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멤버는 떠났지만, 덕질을 멈추지 않는 팬 '파인캐럿'이 쓴 팬픽 일곱 편이 소설 사이사이 무지개 색 프레임 안에 삽입되어 있다. 마치 나뭇잎소설처럼.
 
 

그들은 손에 닿지 않는 먼 곳에 있었고, 그래서 나는 내가 보고 싶은 방식대로 그들을 봤다. 현실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랑을 거부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내 사랑을 거부한 적은 없었다. 거부당하지 않는 사랑, 그 사랑이 부족하거나 과하다 말하지 않고 언제나 고맙다고 답해주는 사람. 그런 사랑이, 그런 사람이, 내 삶에 들어와 있는 게 좋았다. 그런 사랑과 사람이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도록, 져버리지 않도록, 그렇게 팬질이라는 걸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그 마음을 함께 나눈 사람들. <책의 마지막, 천희란 작가의 발문 중>

 

팬픽을 쓰고 읽는 사람들은 그러한 공감의 지대에 함께 머물며 다른 방식으로는 얻을 수 없는 동질감과 소속감을 느낀다. <책의 마지막, 천희란 작가의 발문 중>

 
 
 
딸아이의 어린 시절, '빅뱅', 'B1A4' 등 보이 그룹 덕질하던 모습을 지켜봤던 나 역시, 아이돌 그룹을 향한 팬들의 열정적인 사랑과, 각 멤버들에 대한 팬 사랑의 온도 차이, 멤버들을 주인공으로 쓴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팬픽'이라는 용어는 처음 알았다. 
 
 
고달픈 현실에서 피난처가 필요한 사람들, 거부당하지 않는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 끈끈한 소속감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인생을 변주한다.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 그것은 놀라운 일인 것 같다.
 
 
 
 
 
 
 
 

 
 

 
 

 


파트리트 쥐스킨트의 장편소설, <향수>.
잔혹 동화같기도 한 이 책의 부제는,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이다.
작가의 기발한 아이디어와 탁월한 문장력으로 읽는 내내 긴장감과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18세기, 악취가 심한 프랑스의 한 지역, 생선 도마 아래에서 태어난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
그의 엄마는 수차례의 영아 살인죄로 참수형을 당하고, 그르누이는 열악한 보호 아래 여기저기 떠돌이 신세를 지게 된다.
악취 속에서 태어난 그는 놀라운 후각을 가진 천재였다. 그러나 막상 자신은 그 어떤 인간의 냄새도 갖지 못한다.
애당초 괴물로 태어난 그는, 반항심과 사악함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삶을 지속시킨다.
 
냄새를 맡고 분별하는 능력이 남달랐던 그르누이는, 향수 제조자 발디니 밑에서 향수 제조법을 배우는 것을 시작으로 온갖 것들로부터 향을 채취하는 법을 익힌다. 결국, 자신에게 냄새가 없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후, 아름다운 인간의 향을 채취하기 위해 25명의 소녀를 희생시킨다.
마지막 소녀의 향을 채취한 후 목격자가 발생했고, 범인으로 잡힌 그는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죽어갈 운명이었다.

처형장에 도착한 그르누이가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근사한 옷을 입은 그에게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아름다운 향이 퍼져나가고 광장을 가득 메운다. 그렇다. 그는 <위대한 그르누이>였다.

 

그 이상한 일은 바로 처형장과 그 주변 언덕에 구름처럼 모여 있던 만여 명의 사람이 한순간에 갑자기 푸른 옷을 입고 마차에서 막 내려서는 작은 남자는 절대 살이마일 리가 없다는 확고한 믿음에 사로잡힌 일이었다. 

 
 
심지어 주교마저도 마치 신이 내려온 것 같은 종교적 황홀감을 맛보며 그르누이에게 빠져 들었다.
 

그는 수녀들에게는 구세주의 헌신이었고, 사탄의 추종자들에게는 빛나는 어둠의 신이었으며, 계몽주의자들에게는 가장 이성적인 존재로 보였다. 처녀들에게는 동화 속 왕자였으며, 또 남자들에게는 그들이 꿈꾸는 이상적 자화상이었다. 그들은 모두 그의 손길이 자신들의 가장 예민한 곳, 가장 민감한 성감대를 어루만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서는 인간에 대한 역겨움이 되살아나 승리를 느끼지 못했다. 그 향기로 인해 타인들은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가 도둑질한 향기, 그가 연출한 분위기만 진실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자신은 사랑이 아니라 언제나 증오 속에서만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마을을 떠난다. 이후, 그르누이가 일하던 향수 공장장 도미니크 드뤼오가 체포되어 14시간의 고문 끝에 교수형 당한다.
 


향수.
젊었을 때는 호기심으로 몇 번, 지금은 가끔 필요에 의해 사용하고 있는 향수. 싸구려 향수는 조잡한 향에 냄새가 금세 날아가 버리지만, 값이 나가는 향수는 시간이 지나면서 향이 바뀌고 마지막에는 에센스 향이 은은히 남는다. 나의 불쾌한 냄새를 감추려 향을 사용하지만 일시적이다. 좋은 향이 나는 사람이 인상적이지만, 글쎄.

쥐스킨트의 단편 <승부>에서, 도전자 젊은이의 후광에 판단력을 잃은 체스의 고수와 구경꾼들처럼, 외적인 조건만으로 사람을 쉽게 판단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처형장에 모인 무수한 사람들의 이상한 행동들을 보라.

 

그르누이는 어쩌면 평범한 인간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결점을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인간, 자신의 역린을 숨기고 있는 존재들.

사람들은 그것을 숨기거나 극복하고자 고군분투하며 살지만 쉽지 않다. 자신을 감추고 포장하면 타인을 어느 정도 설득할 수 있겠지만, 나 자신의 만족과 행복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질 수 있다. 

 

자신이 몸에 신의 향유를 바르기만 한다면.......
마음만 먹으면 못 할 일이 없다. 그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의 손에 그 힘이 들어 있다. 이것은 돈이나 테러, 혹은 죽음보다 더 큰 힘을 갖고 있다. 이것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이끌어 내는 힘이 있다. 아무도 그걸 거역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딱 한 군데 있으니, 그곳이 바로 그르누이 자신이다. 그는 이 사랑의 향기를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그는 이 향수를 통해 세상에 신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향수를 느낄 수가 없으니 그걸 바르고도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면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일까? 그는 세상과 자신 그리고 향수를 비웃었다.

 

 

천재적인 재능을 계발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악한 일들도 서슴지 않았던 그르누이는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헛된 희망,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을 품고 사는 인간들의 삶은 고독하고 불행하다. 

 

소설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원작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고, 후각의 시각화를 표현하기 쉽지 않아 보였지만, 영화도 좋았다.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것이 더 좋을 듯 하다.

 

 

 

 

 

 

 

 

 
 
<그러니까 시는>
 
우리가 절망의 아교로 밤하늘에 붙인 별
그래, 죽은 아이들 얼굴
우수수 떨어졌다
어머니의 심장에, 단 하나의 검은 섬에

그러니까 시는
제법 볼륨이 있는 분노, 그게 나다!
수백 겹의 종이호랑이가
레몬 한 조각에 젖는다
성냥개비들, 불꽃 한 점에 날뛴다
 
그러니까 시는
시여 네가 좋다
너와 함께 있으면
나는 나를 안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시는 
여기 있다
 
유리빌딩 그림자와
노란 타워크레인에서 추락하는 그림자 사이에
도서관에 놓인 시들어가는 스킨답서스 잎들
읽다가 덮은 책들 사이에
빛나는 기요틴처럼 닫힌 면접장 문틈에
 
잘려 나간 그림자에 뒤덮여서
돋아나는 버섯의 부드러운 얼굴
 
그러니까 시는 
돌들의 동그란 무릎,
죽어가는 사람 옆에 고요히 모여 앉은
 
한밤중 쏟아지는 
폐병쟁이 별들의 기침
언어의 벌집에서 붕붕 대는 침묵의 말벌들
 
이 슬픔의 앙상한 다리는 어느 꽃술 위에 내려앉았나
 
내 속에 매달린 
영원히 익지 않는 검은 열매 하나
 


그러니까 시인은,
그녀의 언어로 절망과 분노, 위로와 애도, 저항과 사랑을 말한다. 
 
시집의 2부에서는,
2014, 4.16일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한 단원고 학생 유예은과 그의 가족을 위한 시 몇 편을 만날 수 있다.
<그날 이후>, <천칭자리 위에서 스무 살이 된 예은에게>, <아빠>를 읽으면 마음이 저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시를 통해 딸의 목소리를, 엄마 아빠의 목소리를 들었을 그들은 아마 한바탕 울음을 쏟아낸 후, 또 그렇게 위로받고 나아갈 힘을 얻었을 것이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경험할 때 온전한 존재가 되려는 힘이 강해지기 때문에, 삶이 부서진 어떤 사람에게 예술적 자극은 곧 치유적 자극이 된다는 것. 그렇다면 아름다움(예술)은 인간을 해결하는 사랑의 작업이 되고, 그렇게 치유되면서 우리는 해결되지 않는 분쟁과 다시 맞설 힘을 얻게 된다._해설(신형철)

 
 
표제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는 시 <청혼> 1연의 시작이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도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시 한 편을 외우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다.
소설이던 수필이던 오늘 밑줄 치며 감동받아도, 또 다음 날이면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말대로, 문학의 건망증에 굴복하기보다는, 벗어나려 애써야 한다.
허둥지둥 글 속에 빠져 들지 말고, 분명하고 비판적인 의식으로 그 위에 군림해서 발췌하고 메모하고 기억력 훈련을 쌓아야 한다. 결국, 나의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좋아하는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얇지만 대단한 책, <깊이에의 강요>를 다시 읽었다.
세 편의 단편 소설 <깊이에의 강요>, <승부>, <장인 뮈사르의 유언>과, 한 편의 짧은 에세이 <문학의 건망증>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승부>에 관하여.
 
체스의 고수, 쟝.
일흔 살가량의 적잖이 비열하고 왜소한 남자, 손에는 검버섯, 텁수룩한 모습에 담배꽁초를 푹푹 빨아 내뿜는 노인.
 
그의 도전자,
매력적인 외모, 창백하고 냉담한 표정, 침착하고 자신감 있는 분위기의 검은 머리 젊은이.
 
열 명이 넘은 구경꾼들,
쟝에게 번번이 체스를 진 그들은 노인에게 시기심과 악의를 가지고 있었고, 처음 보는 젊은이가 승자가 되기를  바라며 게임을 지켜본다.
 
체스게임이 진행될수록, 구경꾼들은 과감하고 독창적인 패를 내놓는 젊은이를 향한 무한한 신뢰를 갖게 된다. 젊은이의 게임 방식은 자살하듯이 모험적이며 어처구니 없었지만, 대중은 뭔가에 홀린 듯, 그를 아름답다고 느끼며 승리를 거머쥘 거라 의심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게임은 쟝의 승리로 끝난다.
젊은이는 자신의 킹을 손으로 쓰러뜨리고, 무례하게 자리를 떠난다. 
 
명백하게도 일치감치 승리를 할 수 있었던 쟝은 무언가에 홀린 듯, 도전자의 천재성, 자신감, 젊음에서 오는 후광을 이기지 못하고 게임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이 멋진 남자에게 참패를 당하고 챔피언의 자리에 대한 부담을 덜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 남자의 자신감, 천재성, 그리고 젊음에서 오는 후광을 그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뿐이 아니다. 아주 솔직하게 말하면,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낯선 이에게 감탄했으며, 심지어는 그가 승리해서 가능한 인상적이고 천재적인 방법으로 몇 년 전부터 기다리고 기다려 온 참패를 마침내 자신, 쟝에게 안겨 주기를 바랐었다고 고백해야 했다. 그러면 마침내 그는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모든 사람을 물리쳐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났을 것이며, 마침내 구경하고 있던 악의에 찬 군상들, 이 시기심 넘치는 패거리들에게 만족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평온을 찾았을 것이다. 마침내.......

 
 
게임에 이기고도 실제로는 패배했다는 것을 깨달은 쟝은, 마침내 체스를 영영 그만두게 된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승부에서 두 명의 체스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삶의 축소판이다. 삶과 사회의 규칙을 곧이곧대로 준수해 어느 정도의 것은 얻었지만, 현재의 나를 지키기 위해 늘 전전긍긍하는 늙은 체스의 고수 쟝. 인습을 과감하게 무시하고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서 정열적으로 용기 있게 돌진하는 젊은 도전자. 그리고 쟝처럼 확실하게 무엇을 이룬 것도 아니면서, 젊은 도전자처럼 과감하게 뛰어들 수 있는 뱃심도 없는 나머지 구경꾼들. 그들은 마음 한구석에 젊은 도전자와 같은 욕망을 지니고는 있지만 실행에 옮길 용기가 없어 욕망을 억누르고 살아가는 소시민들이다.

 
 
 
나에게는, 도전자인 젊은이의 모습이 용기 있거나 멋져 보이기보다 무모하고 허세에 차 보였다.
그는 실력과 경험보다는, 젊음과 패기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은 얼마나 쉽게 선입견과 편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노화로 자신감을 잃고, 변화를 두려워하며, 열등감에 잠식되어 있었던 쟝에게는 연민의 감정이 들었다.
젊음은 아름답고 귀하다. 그렇다고 늙음이 추하거나 함부로 대해야 할 것은 아니다.
 
온유와 친절, 인정과 포용의 따뜻함을 간직한 채, 세월을 통과해 온 경험으로 두려움에 맞서고, 당당함과 자존감을 잃지 않은 노인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연약함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삶과 인간이라는 주제, 잡힐 듯 사실적인 묘사, 긴장감과 재미를 잃지 않는 작가의 글이 너무도 좋다.
 
 
 
 
 

 

 

 

 

 

 

 

최승자 시인.

그녀의 산문집을 먼저 만났다.

 

비록 일부겠지만, 시인이 살아온 삶을 알고 책을 보니 그녀의 글을 쉽게 읽을 수 없었다.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확실한 죽음을 노래하는 그녀의 글들은 우울하고 아프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벌써 쓸쓸함을 안다. 깨고 나면 달콤했던 예전의 쓸쓸함이 아니고 쓸쓸함은 이제 내 머릿골 속에서 중력을 갖는다. 

 

 

누군가의 20대는 무모하고 철없을 것이고, 누군가의 그것은 찬란할 것이다.

또 어떤 이의 20대는 세상의 거대한 타의의 보이지 않는 폭력과 맞서기 위해, 싸워가면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시대와 개인사의 가위눌림 같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시인은 온 힘으로 저항하고 비명을 지른다.

시집 <이 시대의 사랑>부터 읽어보려 한다.

 

 

 

 

 

 
 

 
 
 


8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된 소설은 <새 이야기>로 시작해, <침묵의 사자>로 끝난다.

동화 같은 제목이 책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고 있어 느낌이 좋았다.

 

소설의 끝자락에 실린 해설들 중 몇몇은 몇 장 읽다 그만두는 경우도 있지만, 또 어떤 해설들은 보물 창고 같다.
이 책에 실린 박혜진 문학평론가의 해설은, 마치 9번째 소설인 듯 읽었다. 소설을 다시 읽어보고 싶게 만든 해설이다.
 

타인의 마음을 생각한다는 건 우리를 인간답게 하지만, 그 인간다움으로 인해 우리는 자주 상처받고 낙담한다는 것을 아는 탓이었다.

먼저 좋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사랑은 하는 사람의 것이지 받는 사람의 것은 아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도 사랑을 시작하고 더 이상 받아줄 사람이 없는 곳에서도 사랑을 계속할 수 있다.

한 번의 만남이 어긋난다고 해도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마음, 기어이 진심을 읽어내려는 에너지는  먼저 좋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상처받은 대가로 얻는 것이다.

각자가 변하면서 관계에도 변화가 생긴다. 변화는 가장 먼저 익숙했던 것들의 상실로 찾아온다. 그것이 상실이 아니라 변화 그 자체임을 알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실패하는 여덟 편의 소설을 통해 작가 김화진이 쓴 것은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지치지 않는 열정일 것이다.

해설 (마음이론)_박혜진

 
 

 

새 이야기
진아는 천희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그는 일본에 여자친구가 있었고, 결국 일본으로 떠난다.

이별 선물로 파가 심긴 화분을 받은 진아는 파를 정성스레 키운다.

파의 끝부분을 잘라 매일 매운 음식을 만들어 먹다가 결국 위장염에 걸리는 진아.

새가 된 천희는 그녀에게 찾아오고, 천희가 남긴 파는 미련이 된다.

 


나주에 대하여

사고로 규희를 잃고, 전 여자 친구인 나주의 SNS 계정을 엿보며 그를 그리워하고 흔적을 찾는 김단.

규희를 닮은 나주의 모습에서 그를 느끼고, 두근거리는 심장과 열에 달아오른 두 빰으로 나주를 탐색한다.
그렇게라도 규희를 잊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애쓰는 사람.

 

 


내 곁에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는 끈질기게도 나를 떠나지 않고 끊임없이 재생된다.

존재하지 않아도 남아있는 것들.

상실했지만 여전히 품고 있는 것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10년 전 물에 빠져 죽은 장남, 준페이의 기일에 모인 가족의 1박 2일을 그린 영화이다. 세월이 지나도 그를 잊지 못하는 가족 구성원들은 마음 한편에 그를 묻은 슬픔이 다른 방식으로 표출된다. 엄마(키키 키린)에게 노란 나비가 되어 찾아오는 준페이는 마치 새나 파로 변한 천희, 나주의 몸을 빌린 규희처럼 느껴졌다. 

 

삶에 상실은 언제나 존재한다.

먼저 사랑하고, 공감하고, 타인의 감정을 읽으려 지나치게 애쓰는 사람들은 그 상실로 겪는 고통의 무게가 더 클지도 모른다. 언제나 조금씩 어긋나는 인생은 예측할 수도, 그러니 피할 수도 없다.

걸어도 걸어도 잊히지 않는 상실을 등에 메고, 손에 들고, 마음에 품은 채 그저 살아가는 수밖에.

그렇게 또 걷다 보면, 또 다른 근육의 모양이 생기는 나를 마주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못생긴 마음들을 솔직하게 회피하지 않고 쓸 때, 이상하게 행복하다는 소설가의 말처럼,

내 안의 못난 나, 뾰족한 나, 감추고 싶은 나를, 생각과 말로, 행동으로 표출하는 소설 속 주인공들을 보며 이상하게 나 또한 위로와 치유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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