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죽음. 

 

부모에겐 자랑거리였고, 능력 있는 항소법원 판사로 동료들에게 사랑받았고, 크고 작은 다툼이 있었지만 가정의 평화를 깨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이반 일리치.

그의 죽음을 마주하며 동료들은 자리 이동이나 승진을 생각하고, 아내는 재산과 연금문제로 혈안이 되어있다.

자신들은 죽음과는 멀리 있다는 듯, 한 사람의 죽음이 다른 이들에게는 감정의 동요도, 연민도, 삶을 성찰하는 기회도 주지 못한다. 그저 번거로운 일이 생겼을 뿐.

 

반면, 이반 일리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치병으로 통증이 시작된 후,  삶과 죽음,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며,  희망의 사다리를 오르락거리다 절망의 늪으로 추락하며 절절한 외로움과 고독을 홀로 감내한다.

 

 

 

[정면으로 다가오는 죽음]

 

이반 일리치는 정신을 가다듬고 어떻게든 통증에 대한 생각 자체를 떨쳐내려고 했지만 통증은 결코 떠나지 않았다. 죽음은 전혀 비켜나지 않고 정면으로 버티고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더욱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죽음이란 놈이 다른 어떤 일도 하지 못하도록 자꾸만 그를 끌어당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저 죽음만을 바라보도록, 피하지 않고 똑바로 죽음을 응시하도록, 모든 일을 손에서 내려놓고 그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게만 했다.

 

죽음은 그 어떤 것이라도 뚫고 들어왔기 때문에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시 죽음이 꽃나무 뒤편에서 또렷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서재로 돌아가 자리에 누워 다시 혼자 죽음과 대면해야 했다. 죽음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죽음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젖어들 뿐이었다.

 

 

 

[외로움과 고독]

 

오랜 기간 병마에 시달리던 중 어떤 때에는, 사실대로 고백하기 좀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이반 일리치는 누군가 자신을 어린아이 대하듯이 그렇게 가엾게 여기며 보살펴주기를 가장 간절히 소원했다. 어린애를 어루만지고 달래듯이 다정하게 쓰다듬어주고 입을 맞추고 자기를 위해 울어주기를 그는 바랐다.

 

뾰뜨르가 방을 나가고 혼자 남은 이반 일리치는 계속 끙끙 앓았다. 그건 꼭 통증 때문만이 아니라 혼자라는 끔찍한 외로움의 절절한 표현이었다.

 

늘 모든 게 이런 식이었다. 희망이 한 방울 반짝이는가 싶다가도 이내 절망의 파도에 묻혀버리고 이어지는 통증과 통증, 괴로움과 괴로움, 모든 게 그대로였다. 

 

희망을 북돋아주는 의사의 말에 한결 고양되었던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여전히 똑같은 그림들, 커튼과 벽지, 조그만 약병들, 그리고 여전히 고통에 괴로운 육신, 이반 일리치는 다시 끙끙 앓기 시작했다. 주사가 처방되었고 그는 의식을 잃었다.

 

그는 다리를 내려놓고 팔을 베고 옆으로 누웠다. 자신이 너무나 불쌍했다. 그는 게라심이 옆방으로 물러나기를 기다렸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어린애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한없는 무력감과 끔찍한 고독이, 사람들과 하느님의 냉혹함이, 그리고 하느님의 부재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과거의 추억과 후회]

 

어린 시절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리고 현재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기뻤던 일들은 더욱더 덧없고 의심스러운 것으로 변했다......... 그렇게 세월이 더 지날수록 좋았던 기억은 점점 더 사라져 갔다.

 

'갈수록 고통이 심해지듯이 내 삶의 모든 것은 더욱더 나빠져만 갔군.' 멀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그곳, 인생의 초기에는 환한 빛이 한 줄기 반짝이고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빛은 광채를 잃고 어두워져만 갔다. 그나마 그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결혼...... 너무나 절망적이고 환멸뿐이었다. 아내의 입 냄새, 애욕과 위선! 그리고 죽은 것만 같은 공직 생활과 돈 걱정들, 그렇게 일 년이 가고 이년이 가고 십 년이 가고 이십 년이 갔다. 언제나 똑같은 생활이었다. 하루를 살면 하루 더 죽어가는 그런 삶이었다. 한 걸음씩 산을 오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한 걸음씩 산을 내려가고 있었던 거야. 세상 사람들은 내가 산을 오른다고 보았지만 내 발밑에서는 서서히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었던 거야...... 그래 결국 이렇게 됐지. 죽는 일만 남은 것이다!

 

 

 

[삶과 죽음의 성찰]

 

그런데 왜? 왜 이렇게 된 것이지? 그럴 리가 없다. 삶이 이렇게 무의미하고 역겨운 것일 수는 없는 것이다. 삶이 그렇게 무의미하고 역겨운 것이라면 왜 이렇게 죽어야 하고 죽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해야 한단 말이냐? 아니다, 뭔가 그게 아니다.  '어쩌면 내가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찾아들었다. '난 정해진 대로 그대로 다 했는데 어떻게 잘못될 수가 있단 말인가?'

 

그의 정신적 고통은 전날 밤, 광대뼈가 불거진, 게라심의 졸음 가득한 선량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떠오른, 만약에 정말로 내가 살아온 모든 삶이, 내 생각과 행동이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런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지? 하는 의심이 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만일 정말 그렇다면',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망쳐놓았다는 생각만 가지고, 그걸 바로잡을 기회도 없이 인생에서 사라져 버린다면, 그럼 어떻게 하지?'  그는 똑바로 누워 완전히 새로운 시각에서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날 아침 시종과 아내, 그리고 딸과 의사를 차례로 만나게 되었을 때 그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날 밤 깨달은 끔찍한 진실을 그에게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그는 그들에게서 바로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삶의 방식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죽어가던 이반 일리치는 구멍 속으로 굴러 떨어졌고 빛을 보았다. 동시에 그는 그의 삶이 모두 제대로 된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아직은 그걸 바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문했다. '그게' 뭐지? 그리고 조용히 귀를 기울이다가 입을 다물었다. 바로 그때 누군가 그의 손을 잡고 입 맞추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눈을 뜨고 아들을 보았다. 아들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아내도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입을 크게 벌린 채 코와 빰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절망적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내도 불쌍했다. '그래 내가 모두를 괴롭히고 있구나'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모두 참 안 됐어. 하지만 내가 죽으면 훨씬 나을 거야.'

 

 

 

[죽음과 평화]

 

그는 아내에게 눈으로 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데리고 나가....... 불쌍해 당신도......." 
그는 '쁘로스찌'(용서해 줘)라고 한마디 더 덧붙이고 싶었지만 '쁘로뿌스찌'(보내줘)라고 말하고 말았다. 

 

그러자 돌연 모든 것이 환해지며 지금까지 그를 괴롭히며 마음속에 갇혀 있던 것이 일순간 밖으로, 두 방향으로, 열 방행으로, 온갖 방향으로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가족들이 모두 안쓰럽게 여겨지고 모두의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해주고 싶었다. 이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신도 벗어나고 가족들도 다 벗어나게 해주어야 했다. 

 

'아, 이렇게 기쁠 수가!'
이 모든 것은 한순간의 일이었고 이 한순간의 의미는 이제 흔들리지 않았다.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더 이상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 그는 숨을 길게 들이마시다가 그대로 멈추고 온몸을 쭉 뻗고 숨을 거두었다.

 

 

 

 

 

이 책을 읽으며 소설 <아버지(김정현)>를 생각했다.

췌장암으로 죽어가는 한 아버지의 절절한 외로움과 고독이 너무 마음 아팠던 책. 작년 2월 친정아빠가 떠난 후 그가 그리워 읽었던 책이다. 두 책 주인공 성격은 다르지만, 한 가정의 가장, 한 인간이 느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삶에 대한 후회와 남아있는 자들에 대한 연민들이 닿아있다.

 

영화 <The Last Word,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의 주인공 해리엇처럼 이반 일리치에게도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가족과 화해하며, 오만과 욕심으로 잊고 살았던 작지만 가슴 따뜻한 일들을 하고, 사랑으로 인생을 마무리할 시간이 주어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영화의 마지막에서 사랑하는 이들의 행복한 모습을 바라보며, 붉은빛의 스카프를 어깨에 두른 채, 음악의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며, 잠을 자듯 떠난 그녀의 죽음 앞에서 난 눈시울이 붉어졌다. 죽음의 춤을 추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 우아해 보였기 때문일까?

 

이반 일리치가 죽음의 순간 느꼈던 깨달음, 아들의 사랑, 가족들에 대한 연민은 삶의 노고에 대한 보상치고 지독히도 가혹하게 찰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인물의 감정을 놀랍도록 세밀하고 날카롭게 표현하는 톨스토이의 작품들은 그래서인지 더 가슴에 와닿는다.

책 <아버지>와 셜리 맥클레인 주연 영화를 다시 챙겨봐야겠다.

 

 

 

 

 

 

 

 

 

 

 

그(자크 레니에)는 테라스로 나와 다시 고독에 잠겼다.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에서, 쿠바에서 전투를 치른 다음 페루 해변으로 몸을 피한 마흔일곱의 남자.

세상에 대해 알만큼 알았고, 삶에 대해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그는, 세상 끝 해변에서 홀로 카페를 운영한다.

 

자연은 사람을 배신하는 일이 거의 없으므로, 다만 아름다운 자연에서 위안을 구할 뿐.

 

이 해변의 모래 위에는 죽어있는 수많은 새들과, 죽음을 기다리며 퍼득거리는 새들로 가득하다.

새들이 왜 먼바다의 섬들을 떠나 라마에서 북쪽으로 십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이 해변에 와서 죽는지 아무도 그에게 설명해주지 못했다. 
새들에게는 이곳이 믿는 이들이 영혼을 반환하러 간다는 인도의 성지 바라나시 같은 곳일 수도 있었다.

 

자크는 세상을 피해 살고자, 새들은 먼바다의 섬을 떠나 죽고자 이 해변을 찾는다.

어쨌든..... 한 가지 설명은 있을 것이다.

 

 

 

 

 

그는 사연을 알 순 없지만 바다에 빠져 죽으려던 한 여인을 발견하고 구해준다. 그리고 작고 여린 그녀로 인해  잠시 행복의 가능성을 느낀다.

 

그녀가 흐느꼈다. 그가 대책 없는 어리석음이라고 스스로 이름 붙인 그 무엇에 다시 점령당하고 만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고, 자신의 손 안에서 모든 것이 부서지는 걸 목격하는 일에 습관이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이런 식이었으므로 속수무책이었다. 그의 내부에 무언가가 체념을 거부하고 줄곧 희망이라는 미끼를 물고 싶어 했다.

 

인생은 허무의 연속이고, 행복은 잡을 수 없는 것이란 걸 알지만,  인간은 순간 느끼는 삶에 대한 욕망과 희망에 또다시 속는다. 그 결과는 더 깊은 허무만 남을 뿐.

 

그들은 떠나갔다.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여자는 모래 언덕 꼭대기에서 걸음을 멈추고 잠시 주저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제 그곳에 없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카페는 비어있었다.

 

그녀는 남편과 떠나고, 그는 어디로 간 걸까? 

모래 위에서 마지막 발버둥을 치던 새들처럼 힘겨운 삶을 이어가던 그 또한 고요한 평안으로 돌아간 걸까?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로마>에서 가정부 클레오는 죽은 척하는 페페를 따라 하며 잠시 일을 멈추고 평상에 누워 말한다. "죽어있는 것도 괜찮다" 

 

Maybe I'm not leaving. Maybe I'm going home. <영화_ 가타카>

 

고통과 허무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무모하고 대책 없는 헛된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의 나약함 그리고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짧지만 여운이 남는 소설이다.

 

 

 

 

 

 

 

 

 

 

 

 

 책을 읽으며 알랭 드 보통의 <불안>과, 최애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생각났다.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처럼 좋은 시와 책, 영화, 음악과 그림을 소개받을 수 있는 책은 마른대지에 단비와 같다. 나의 지적인 호기심을 채워준다. 이 책 역시 그렇다.

 

허무, nothingness, 세상의 진리나 인생 따위가 공허하고 무의미함을 이르는 말.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할 수는 있는 걸까?...... 그냥 함께 살 수밖에.

이 책은 인생의 허무를 인정하고 나의 관점을 바꾸어 인생을 더 잘 살 수 있도록 조언해 주는 책이다.

(이 점에서 알랭 드 보통의 <불안>과 흡사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 오오 봄이여 /
<김수영의 봄 밤 중>

 

 

 

 인생은 허무의 물결로 가득하다. 아쉽게 끝나버리는 봄, 잡을 수 없는 찰나, 영속할 수 없는 인생, 불멸코자 찍은 사진과 영상도 시간의 횡포에 발해지고 희미해진다.

숲과 강과 호수 뷰를 자랑하는 100억 아파트에 사는 부자도,  비탈진 좁은 골목 월세 살이하는 가난한 자도, 노인도 아이도, 덕이 충만한 자도 비열한 기회주의 자도 모두 허무로 돌아간다. 다행히 죽음은 허망하지만 평등하다. 

우연이 지배하는 인생을 어쩔 순 없지만, 닥칠 죽음은 '대상화'하여 나만의 축제로 만들 수 있다.

 

여기에 유한한 인생을 올바르게 마치기 위해 명심할 교훈이 있네. 그것은 바로 죽음의 춤. 누구나 이 춤을 배워야 하네.
<생이노상 수도원 벽화에 적힌 대화 시>

 

 

 

 우리는 노동한다. 생계와 관련 있는 일이던 권태를 견디기 위한 일이던. 그 사소한 일에 숨어있는 선하고 아름다운 의도들을 발견해 보자. 찻잔 하나를 디자인하며 아름다움을 위해 공들이고, 맛있는 식사를 준비하며 사람들의 건강과 미소를 생각하고, 아이들에게 가르쳐 줄 노래 하나를 고르며 즐거워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하루의 나날들을 지내다 보면 우울과 절망이 닥쳐오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구름이 흘러가듯이 기다리자. 애타도록 서두르지는 말자. 

 

패턴은 일상의 행동에 작은 전구를 일정한 간격으로 달아놓는 일이기에, 삶은 패턴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빛나게 된다. 이 반복과 패턴이 자아내는 아름다움과 리듬은 뭔가 지금 제대로 작동 중이라는 암묵적인 신호를 보낸다.

 

 

 

 허무의 물결에서 살아남기 위해 죽음과 시간에 대한 관점을 달리해 보자.

죽음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가듯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우리는 태어나기 이전 상태에 대해 슬퍼한 적이 없다.  죽음으로 인한 부재도 어찌 보면 같은 상태 아닐까?

나의 중심을 외부에 두지 않고 탄력 있는 마음에 둔다면 관점을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다. 거대한 산의 진면목을 알려면 먼 곳에서 산을 조망해야 한다.

 

승리는 승리고, 패배는 패배다. 하나의 패배를 인정했다고 해서 모든 패배를 인정할 필요는 없다. 하나의 패배도 모든 면에서 패배인 것은 아니다. 모든 관점에서 다 패배인 경우는 없다. 어떤 패배를 해도 인생 전체가 패배로 변하는 경우는 없다. 현실을 여러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마음의 탄력을 갖는 것이 진정한 정신승리다.

 

 

 

 저자는 목적은 결국 삶을 배신하기 마련이므로 오랫동안 목적 없는 삶을 원해왔다고 한다. 산책을 좋아하는 이유 또한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 또한 산책과 여행을 즐긴다. 

MBTI / J 100%인 남편 덕에 가을까지 여행 계획이 꽉 차있다. 

직장에서 돌아온 후, 소박하지만 맛있는 저녁식사를 마주할 때 우리는 '우행시'(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라고 말하곤 한다. 

외식을 하는 날엔 행복하기 그지없다. 새로운 음식을 먹고 새로운 장소를 가는 것에 나는 요즘 열광한다.

인생을 즐긴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하나 이상의 음식을 먹을 때는 과정의 서사를 즐겨야 한다. 코스요리에서는 횡적인 기승전결을 누리고, 한상차림에서는 거대한 화폭을 감상하는 자세를 갖춘다.

 

 

무릇 천지간의 사물은 각기 주인이 있소. 진정 나의 소유가 아니라면 터럭 하나라도 취해서는 아니 되오. 오직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 사이의 밝은 달은 귀가 취하면 소리가 되고, 눈이 마주하면 풍경이 되오. 그것들은 취하여도 금함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소. 이것이야말로 조물주의 무진장이니, 나와 그대가 함께 즐길 바이외다. <소식, 적벽부 중>

 

 

 

 

 

 

 

 

 

 

 

 

 

 

 

"불안은 현대의 야망의 하녀다."

인간은 걱정과 불안 없이 살 수 없고, 쓸데없는 걱정조차 만들어 불안해한다. 

 

저자는 불안의 원인을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으로 설명하고,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의 견지에서 해법을 제시한다.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심, 더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욕망, 자녀들에 대한 기대, 남보다 우월하고자 하는 이기심, 이 모든 욕심과 욕망은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게다가 전혀 인간적이지 않은 세상의 부조리함 속에서 확실한 것 하나 없고,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는 판단을 교란시키고 극기야 인간의 존엄마저 잃게 만든다.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철학

 

나를 부유하게 하는 것은 사회에서 내가 차지하는 자리가 아니라 나의 판단이다._에픽테토스 <어록>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며 자학하는 습관을 버리고 그들의 의견이 과연 귀를 기울일 만한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사랑을 구하는 사람들의 정신에 존경할 만한 구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도 있다.

 

모든 질책은 그것이 과녁을 적중하는 만큼만 피해를 줄 수 있다. 자신이 어떤 질책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만만하게 그런 질책을 경멸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한다._쇼펜하우어

 

 

 

예술

 

소설가는 사회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는 표준 렌즈, 즉 부와 권력을 확대해 보여주는 렌즈를 인격의 특질을 확대해 보여주는 도덕적 렌즈로 바꾼다. 도덕적 렌즈로 보면 높고 강한 사람은 작아지며, 잊혀 뒤로 물러나 있던 인물이 오히려 크게 보일 수 있다. 소설의 세계에서 덕의 움직임은 물질적 부와 아무 관계가 없다.

 

 

 

정치

 

사회의 목소리 큰 사람들이 선험적 진리로 여기는 견해들이 사실은 상대적인 것이고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정치적 의식이 깨어난다.

 

억압적 상황은 영원한 고통을 겪으라는 자연의 심판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변화 가능한 어떤 사회 세력들 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죄책감과 수치감은 이해로, 지위의 더 평등한 분배 방식에 대한 탐구로 바뀔 수도 있다.

 

 

 

기독교

 

기독교적인 죽음의 경고 memento mori의 훌륭한 전통 안에 자리 잡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죽음에 대한 생각 때문에 세속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을, 휘스트와 저녁 파티보다 진실과 사랑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해골 앞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억압적인 의견도 위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폐허는 우리의 노력을, 완전과 완성이라는 이미지를 버리라고 한다. 폐허는 우리가 시간에 도전할 수 없다는 사실, 우리는 파괴의 힘이 장난감일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기독교 도덕가들은 불안을 달래려면 낙관적인 사람들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모든 것이 최악으로 흘러간다고 강조하는 것이 최선이라도 생각했다.

 

따라서 지위에 대한 우리의 하찮은 걱정을 천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우리 자신의 미미함을 바라보며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된다.

 

 

 

보헤미아

 

주류 문화와 갈등하면서도 자신 있게 살아가려면 우리의 직접적인 환경에서 작동하는 가치 체계, 우리가 사교적으로 어울리는 사람들, 우리가 읽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보헤미안들의 통찰이다. 

 

가장 넓은, 가장 포괄적인 말로 보헤미아의 기여를 요약하자면 그들이 대안적인 삶의 방식 추구에 정통성을 부여했다고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존중하는 하위문화의 경계를 정하고 의미를 규정했는데, 이곳에서는 부르주아 주류가 과소평가하고 간과하는 가치들이 적절한 권위와 위엄을 부여받았다.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리고 매 순간 노력해야 한다.

성공과 행복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가득하고 너그러운 사람이다.

죽음 앞에서 모두는 평등하다.

 

영화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 The Last World>에서 해리엇은 80세에 자신의 부고기사를 미리 쓰기 위해 사망기사 전문기자인 앤을 고용한다. 잘 나가는 광고 에이전시 보스였지만 까칠하고 배려라곤 없었던 그녀는 죽음 앞에서 그녀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가족들의 사랑도, 동료들의 칭찬도 받을 수 없었던 그녀. 누군가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적이 없었던 그녀는 남은 기간 인생을 다시 살며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코미디 영화라 무겁지 않게 재미있게 봤지만 인생의 마지막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영화였다.

 

 

 

욕망의 하녀가 되어 매 순간 불안한 삶을 살 것인가? 사랑하며 하루하루를 채워 나갈 것인가? 

 

메멘토 모리.

나의 죽음을 기억하자.

 

 

 

 

 

 

 

 

 

 

 

 

<딸에 대하여>

 

민음사의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 중 한 권.

 

이 책은 요양 보호사로 일하는 노년에 이른 한 여인과, 그녀의 딸 이야기이다.

아직 나이 든 서러움을 사무치게는 느끼지 못했을 작가는 이 책에서 나이 들어감에 대한 서글픈 감정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낸다.

 

세대마다 중년의 기준이 달라지겠지만, 중년의 나이인 나는 남편과 자주 데이트를 한다.

서울 도심을 걷고, 꽃이 유명하다는 곳은 애써 찾아다닌다. 맛집과 근사한 카페는 열심히 검색하여 잊지 않고 들린다. 그러나 어느 곳을 가도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낯설고 이질감이 느껴지는 존재일 것이다. 

 

나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누구든 언제든 나를 향해 너무나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내보일 것만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천천히 시간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젊었을 때는 선을 긋도 담을 쌓고 그래서 영원히 못 볼 것 같은 부류의 사람들도 이토록 쉽게 만날 수 있게 된다. 모두 별다를 게 없는 늙은이가 되는 탓이겠지. 그런 늙은이들을 받아 주는 곳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탓이겠지.

 

심장을 떨리게 하는 수치심과 모멸감. 내가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종이를 반으로 접고 또 반으로 접듯이. 그러다 불현듯 이 애들은 내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되겠지. 그건 내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 내가 서 있을 자리가 사라지는 거다. 그렇게 나는 없는 사람처럼 되겠지. 아니다. 이 애들은 그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홀로 딸을 키우며 어렵게 뒷바라지한다. 그 덕에 공부 꽤나 한 딸에게 바라는 것은 평범하게 사는 것. 

그러나 딸은 안정된 직장이 아닌 대학 강사로 떠돌이 생활을 하며, 웬만한 남자와 결혼은 고사하고 동성 친구와 엄마의 집으로 들어와 신세를 지게 된다. 

딸은 동성연애를 한다는 이유로 부당 해고 당한 동료를 도와 시위 현장에 드나든다. 엄마는 그런 평범하지 않은 딸을 바라보며 끔찍한 고통을 느낀다.

 

 

내가 아닌 것을 감당하는 고통

 

딸애가 말하지 않지만 내가 아는 것들, 내가 모른 척하는 것들, 그런 것들이 딸애와 나 사이로 고요히, 시퍼렇게 흐르는 것을 난 매일 본다.

 

이대로 딸애를 계속 당기기만 하면 결국 이 팽팽하고 위태로운 끈이 끊어지고 말겠구나. 이대로 딸을 잃고 말겠구나. 그러나 그게 이해를 뜻하는 건 아니다. 동의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내가 쥐고 있던 끈을 느슨하게 푼 것뿐이다. 딸애가 조금 더 멀리까지 움직일 수 있도록 양보한 것뿐이다. 기대를 버리고, 욕심을 버리고, 또 무언가를 버리고 계속 버리면서 물러선 것뿐이다.

 

나는 빛깔과 무늬를 달리하며 스스로 떠오르고 저무는 감정을 바라보느라 말을 잃는다. 딸애에게 걸었던 기대와 욕심, 가능성과 희망, 그런 것들은 버리고 또 버려도 또다시 남아서 나를 괴롭힌다. 내가 얼마나 앙상해지고 공허해져야 그것들은 마침내 나를 놓아줄까.

 

가시 같은 것, 못 같은 것. 나는 내내 그런 걸 키우고 품어 왔는지 모른다. 그런 것들이 외부로부터, 누군가로부터, 나를 지켜 줄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불러오는 건 이토록 끔찍한 통증이다.

 

누군가를 보살피는 것의 수고로움. 내가 아닌 누군가를 돌보는 것의 지난함. 실은 나는 아름답고 고결해 보이는 이런 일의 끔찍함과 가혹함을 딸애와 그 애에게 알려 주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 애들이 다만 책에서 읽거나, 누군가에게 전해 듣는 게 아니라 직접 경험하게 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요양 보호사다.

그녀가 간호하는 젠이란 여성은 젊은 시절 이민자 자녀들을 돌보고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화려했던 과거는 늙어 치매가 걸린 젠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가족 하나 없는 그녀의 마지막은 더 끔찍하고 허무하다. 주기만 했던 모든 것이 결국 되돌아오진 않는다.

 

어쩌자고 이 여자는 이렇게 오래 살아있는 걸까. 이런 순간 삶이라는 게 얼마나 혹독한지 비로소 알 것 같다. 하나의 산을 넘으면 또 하나의 산이 나타나고 또 다음 산이 나타나고. 어떤 기대감에 산을 넘고 마침내는 체념하면서 산을 넘고, 그럼에도 삶은 결코 너그러워지는 법이 없다. 관용이나 아량을 기대할 수 없는 상대. 그러니까 결국은 지게 될 싸움. 져야만 끝나는 싸움.

 

그게 뭐든. 언제나 받는 사람은 모르는 법이다. 그건 다만 짐작이나 상상으로는 알 수가 없는 거니까. 자신이 받는 게 무엇인지, 그걸 얻기 위해 누군가가 맞바꾼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그 돈이 어떤 빛깔을 띠고 무슨 냄새를 풍기며 얼마나 무거워지는지 결코 알 수 없다.

 

그 말을 하는 동안 나는 젠이 아니라 나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니라 딸애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건 세상의 일이 아니고 바로 내 일이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나의 일이다. 

 

누군가에겐 특별할 것 없는 일상. 누구나 누려야 할 마땅한 소소하고 평범한 순간. 그런 순간은 늘 너무 이르거나 늦게 도착한다.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치거나 기다리다가 포기하게 만든다.

 

 

 

 

 

 

이 책을 읽으며 늙어감과 내가 아닌 것들을 감당하는 고통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리고 삶 한가운데 버려져 꾸역꾸역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과 혹독한 시대에 대해서.

 

끝이 없는 노동. 아무도 날 이런 고된 노동에서 구해 줄 수 없구나 하는 깨달음.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 그러니까 내가 염려하는 건 언제나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어떤 식으로든 살아 있는 동안엔 끝나지 않는 이런 막막함을 견뎌 내야 한다.

 

어쩌면 이건 늙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시대의  문제일지도 모르지.

 

이 애들은 삶 한가운데에 있다. 환상도 꿈도 아닌 단단한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다. 내가 그런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이 애들은 무시무시하고 혹독한 삶 한가운데에 살아 있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흐리고 우울하다. 서글프고 아프다.

그럼에도 한 줄기 새어 들어오는 빛, 선선한 바람,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무언가를 느낀다.

 

나와 딸애. 내가 데려온 젠과, 딸애가 데려온 그 애가 머무르는 집 안에 선선한 바람이 새어 든다. 종일 내가 한 것은 젠의 곁에서 다시금 저녁이 오기를 기다린 것뿐이다. 고요한 저녁이 오고 거짓말처럼 아무 일도 없이 하루가 지난다.

 

그러나 이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끊임없이 싸우고 견뎌야 하는 일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건 아득한 내일이 아니다. 마주 서 있는 지금이다. 나는 오늘 주어진 일들을 생각하고 오직 그 모든 일들을 무사히 마무리하겠다는 생각만 한다. 그런 식으로 길고 긴 내일들을 지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볼 뿐이다.

 

 

 

 

 

 

 

 

 

 

 

 

 

그리스어로 귀환은 <노스토스 nostos>이다. 그리스어로 <알고스 algos>는 괴로움을 뜻한다. 노스토스와 알고스의 합성어인 <노스탈지> 즉 향수란, 돌아가고자 하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서 비롯된 괴로움이다.

 

이렇듯 어원상으로 볼 때 향수는 무지의 상태에서 비롯된 고통으로 나타난다. 너는 멀리 떨어져 있고 나는 네가 어찌 되었는가를 알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 고통, 내 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고 나는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는 고통 말이다.

 

 

 

 

책의 주인공 이레나와 조제프는 1968년 소련 침공 이후 프랑스와 덴마크로 망명해, 자국민의 비난과 타국민의 눈초리를 받으며 21년 세월을 어렵게 살게 된다. 

 

낮은 버림받은 조국의 아름다움으로 빛났으며 밤은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두려움으로 빛났다. 낮은 그녀에게 자신이 잃어버렸던 낙원을 보여주었으며 밤은 자신이 도망쳐 나온 지옥을 보여 주었다.

 

1989년 동유럽 공산정권 붕괴 후,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니냐는 주변의 압박을 받으며 그들은 체코를 방문하게 되지만 다시 찾은 고향은 불편하고 낯설 뿐이다. 

 

그녀가 외국에서 무얼 했는지에 대해 철저하게 무관심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이 여자들은 그녀에게서 이십 년 간의 삶을 잘라내었다. 그리고 이제 질문 공세를 통해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다시 꿰매려고 했다. 마치 그녀의 팔뚝을 잘라 내고는 손을 막바로 팔꿈치에 갖다 붙이려는 듯이, 마치 그녀의 장딴지를 잘라내고 발을 무릎에 붙이려는 듯이.

 

특히 조제프는 외국에서 사랑에 빠졌으며, 사랑은 현재 순간의 고양이다. 현재에 대한 그의 집착은 기억들을 쫓아냈으며 기억의 개입으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었다. 그의 기억은 여전히 적의를 품고 있었으나, 무시되고 격리된 기억은 그에 대한 힘을 잃어버렸다.

 

 

 

 

영화 <단지 세상의 끝>에서 루이는 12년간 고향과 가족을 떠나 살았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 죽음을 알리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그의 귀향은 예상한 것과는 달랐다. 따뜻한 분위기를 기대했을 루이는 서로 다른 기억과 감정의 어긋남에 결국 죽음을 알리지 못한 채 도망치듯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 귀향 3시간 만에 귀환이다.

 

학교, 직장, 결혼 등의 이유로 타지에서 생활해 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게 마련이다.

늘 걷던 길의 풍경들, 집 안에 깔려있던 냄새, 친구들과의 추억, 가족의 얼굴과 표정, 함께 먹던 음식들........

그러나 먼 시간을 보내고 마주한 나의 가족, 동네, 고국은 예상이나 기대와 다르게 낯설거나 불편하고 실망스러울 수 있다.

기억의 편린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낭만적인 연출을 선호하는 우리의 추억은 현실과는 다를 수 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율리시스는 칼립소 여신과 안락한 삶을 살았지만 결국 자신을 기다리는 페넬로페에게로 귀환한다.  20년의 세월은 그 둘의 상황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까? 율리시스는 또다시 칼립소를 향한 향수를 느꼈을까?

 

결국, 향수는 지금 부재하는 어떤 것을 지독히도 그리워하고 갈망하는 가상의 빛, 헛된 희망이나 바람일지 모르겠다.

채워지지 않는 현재, 그리고 인생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인간들의 고달픔과 나약함이 서글프다.

 

 

 

 

'사랑은 현재 순간의 고양이'라는 조제프의 표현이 강렬히 남는다.

 

 

 

 

 

 

 

 

 

 

 

 

 

 

 

영화 빅피시를 보았다.

개인적으로 판타지 영화를 즐기지 않기에 계속 미루던 영화였다.

판다지이지만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였고 감동적이었다. 에드워드의 장례식 장면이 연출될 때 울컥하며 코끝이 시렸다.

한 사람의 인생이 판타지와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고,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우리 삶.

 

 

 

은희경의 소설  [태연한 인생]은 잘 읽혔지만 이해는 어려웠다. 오랜 시간 머문 책이다.

태연한 인생 따위는 없을지도 모른다.

통속적이고 패턴을 따라 사는 인생도, 강한 욕망을 추구하며 틀을 벗어나는 인생도, 거짓 해피엔딩과 헛된 희망에 대한 고통과 고독 그리고 상실을 피할 수 없다.

 

어머니가 적국에 부역하는 포로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이데올로기의 딜레마 속에 살았다면, 아버지는 남의 나라에 태어난 소년이었다. 그곳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을 원하며 그것을 상실이라고 불렀다. 가장 아름다운 매혹을 보아버린 뒤 그들이 보는 모든 것은 상실이라는 이름의 풍경이었다. 아버지가 태어난 곳은 상실의 시대였던 것이다.

 

 

 

영화 빅피시에서 윌은 이야기를 과장하고 허풍 떠는 아버지에 질려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낸다. 아버지의 병환 소식에 다시 마주한 아버지. 우연히 그의 과거를 하나 둘 알게 되고 허풍이라 생각했던 이야기가 전부 거짓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어머니와 자신에 대한 사랑만 변치 않을 뿐, 아버지의 인생은 계획한 대로 흘러가는 인생이 아니었다. 우연과 모험과 도전과 사랑과 인내로 판다지와 같은 삶이 연출된 것이다. 

 

용의 주도한 계획을 세우는 동안 일어나는 뜻밖의 일들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이며, 운명이란 주어진 운명에서 도망치려 할 때 바로 그 도망침을 통해 실현된다.

 

 

 

타인이란 영원히 오해하게 돼 있는 존재이지만 서로의 오해를 존중하는 순간 연민 안에서 연대할 수 있었다. 고독끼리의 친근과 오해의 연대 속에 류의 삶은 흘러갔다. 류는 어둠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었다.

 

 

판타지와 같은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의 연속, 그것이 삶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어쩌면 태연한 인생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은희경 작가의 이 책을 읽으며 밀란 쿤데라의 소설들이 많이 생각났다. 

다시 그의 책을 꺼내 읽어야겠다.

 

 

 

 

 

 

 

 

 

 

 

 

 

 

'가장 중요한 체코의 현대 작가' , '체코 소설의 슬픈 왕'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보흐밀 흐라발.

체코 한 병원에서 추락사했다는 그의 죽음은 자살인지 실족인지 아직도 미스터리라 한다. 83세의 나이였음에도 그런 논란이 있다는 이유는 아마, 그의 작품 속 자살하는 인물이나 혹은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들이 그처럼 느껴져서일까? 

 

전쟁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동물처럼 하찮은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어제 퇴근길에 무언가에 밟혀 죽은 작은 새 한 마리를 보았다. 수분이 빠져나간 몸은 너무 작고 가벼워 보였다. 눈길을 주지 않으려 곁을 피해 달아나듯 지나쳤다. 전쟁은 인간을 쓰레기처럼 버려진 새와 다름없게 만든다.

 

그의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 은 엉뚱하고 우스꽝스러운 주인공 한탸의 1인칭 주인공 시점 이야기다.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의 인물들 역시, 영향력 있는 누구도 영웅도 아닌 평범하고 인간적이며 우스꽝스러운 존재들이다. 폭우처럼 피할 수 없었던 끔찍한 전쟁과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의 부조화로 인해 그의 소설은 더 할 말을 잃게 한다.

 

 

들판에 쌓인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눈 입자 하나하나에 아주 작은 시계 초침이라도 매달려 째깍대는 것처럼, 눈은 환한 햇빛을 받으며 영롱한 빛깔로 반짝이고 있었다.

 

밀로시는 아름다운 세상에 닥친 전쟁의 상황 속에서 불안하게 살아간다. 사방에서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듯한 시계 초침소리를 듣는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여인과의 잠자리에서 자신의 그것이 제구실을 하지 못한 것에 낙담하며 자신의 손목을 그을 정도로 무모하고, 애인을 만족시키고자 다른 여성을 상대로 연습하며 그것이 성공하자 세상을 다 갖은것 마냥 기뻐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엄중히 감시받는 독일의 열차를 폭파시키는 영웅적 행동을 하게 된다.

 

천만에요, 이렇게 편안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아! 저도 이제 남잡니다. 후비치카 씨처럼 그런 남자가 됐다니까요. 너무 멋진 일이라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그동안 제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모든 짐을 벗어 버린 느낌입니다. 나는 책상 위에서 긴 가위를 집어 들어, 날을 벌렸다 철컥! 소리 나게 닫았다. "이렇게 제 과거를 싹둑 잘라 버렸습니다. 나는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폭탄 투하 거사를 앞두고 있는 인물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라면 이런 일은 진지하고 결의에 찬 인물이 조금 더 무겁게 일을 벌여야 한다. 그야말로 영웅의 탄생이다. 그러나 밀로시의 가벼움은 독자의 삶에 더 친근하게 다가와 가슴을 먹먹하고 슬프게 만든다.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폭파하는 열차 안에 타고 있던 독일인들은 또 어떤가.

 

우는 소리와 모습은 제각각이었지만, 본질적으로 자기들에게 벌어진 일을 한탄하는 인간의 울음이라는 점에서는 똑같았다.

 

화약과 병력등을 실은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에 폭탄을 성공적으로 던진 밀로시는 마지막 칸에 타고 있던 독일 병사와 총구를 겨누게 된다.

 

그러나 이 네 잎 클로버는 아무에게도 행운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그 역시 한 인간이었다. 나처럼, 혹은 후비치카 씨처럼 말이다. 특별하게 잘난 것도, 특별한 지위도 없는 그저 평범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를 쏘고, 서로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곳 말고 다른 곳에서 평범한 사람으로 만났더라면, 우리는 서로를 좋아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 [그을린 사랑]은 레바논 내전을 다룬 전쟁영화다. 이 영화의 결말은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전쟁이 평범한 한 인간의 삶에 간섭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불편하고 참담한 마음이었다.

인간의 욕심으로 발생하는 만행은 아무것도 모르고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너무나 많은 고통을 준다. 그들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말이다. 지금도 전쟁은 진행 중이고, 긴장감으로 불안에 떨고 있는 많은 나라들이 있다.

분쟁을 일으키는 윗대가리들은 배부르고 할 일 없으면 집구석에 처박혀있을 것이지!

 

의식을 잃어버리기 직전, 그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죽은 병사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귀에 대고, 특급 우편열차장이 드레스덴에서 싣고 온 그 불쌍한 독일인들한테 했던 말을 되풀이해서 말했다.

"집구석에 궁둥이나 붙이고 얌전히 앉아들 있을 일이지!"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주인공 진희는 엄마의 자살, 집 떠난 아버지, 하숙집을 하는 할머니의 손에 자라면서 일찍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 간혹 지나치게 성숙해 보이는 어린이들이 있다. 연기를 하는 듯 눈매가 심상치 않고 예의 바르며 눈치가 빨라 놀라는 경우가 있다. 진희는 어린 시절의 상처와 그녀에게 처한 환경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자아를 둘로 분리한다.

 

내가 내 삶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나 자신을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시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본다.  '보여지는 나'에게 내 삶을 이끌어가게 하면서 '바라보는 나'가 그것을 보도록 만든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강요를 당하고 수모를 받는 것은 '보여지는 나' 이므로 '바라보는' 진짜 나는 상처를 덜 받는다. 이렇게 나를 두 개로 분리시킴으로써 나는 사람들의 눈에 노출되지 않고 나 자신으로 그대로 지켜지는 것이다.

 

 

진희의 이 분리법은 세상에서 상처를 덜 받고 자신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게 도와준다.

삶에 대한 통찰이 가능한 진희는 사람들은 허세와 위선으로 가득하며, 세상은 철저하게 부조리하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사람들의 약점을 잘 알고 그것을 이용해 자신을 지키기도 한다.

 

 

운명적이었다고 생각해 온 사랑이 흔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사랑에 대한 냉소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사랑에 빠지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얼마든지 다시 사랑에 빠지며, 자기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유지의 감각과 신랄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집착 없이 그 사랑에 열중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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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냉소에 의해 불붙여지며 그 냉소의 원인이 된 배신에 의해 완성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냉소적인 사람은 삶에 성실하다. 삶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언제나 자기 삶에 불평을 품으며 불성실하다. 

 

 

짙게 노을이 내려 깔리고 염소 한 마리와 아름다운 멜로디를 연주하던 키가 큰 남자. '하모니카와 염소'의 실루엣으로 시작된 그녀의 첫사랑은 오랜 기간 그녀의 마음을 애달프게 했다.

그러나 그 실루엣은 허석의 것이 아니었다. 그저 더러운 낯빛의 구부정한 아저씨일 뿐임을 알았을 때 그녀는 도망치며 운다. 삶에게 조롱당한 것이 분해서만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환상이 남아있는 그녀로부터 그 물기를 다 배설시키기 위해서.......

 

그녀가 깨달은 사랑은, 삶은 완벽하지 않다.

삶은 장난기와 악의로 가득 차 있다. 불완전하고 엉망진창이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삶에 대한 환상을 온전히 비운 사람만이 불평 없이 하루하루 최선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삶이란 언제나 양면적이다. 사랑을 받을 때의 기쁨이 그 사랑을 잃을 때의 슬픔을 의미하는 것이듯이. 그러니 상처받지 않고 평정 속에서 살아가려면 언제나 이면을 보고자 하는 긴장을 잃어서는 안 된다.
삶은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냉소적인 12살 진희의 삶에 대한 통찰은 씁쓸하다.

<오! 윌리엄>의 주인공 루시 바턴이 인생을 통과하며 삶을 깨달아가는 과정과는 사뭇 다르다.

웃고 울며, 행복과 불행을 맛보고, 좌절과 성취를 느끼며 사랑하는 가족과 하루하루 소란스럽게 지내는 그것과는 말이다.

 

진희의 인생을 응원하고 싶다. 삶의 간계를 꿰뚫어 보기에 건조하고 냉소적일 수 있지만, 그래도 조금은 더 많이 웃고 따뜻한 감정을 느끼며 행복하기를 말이다.

 

새의 선물은 진희의 성장 없는 성장 과정을 통하여 한편으로는 한국사회에 깃들어 있는 절망의 징후를 표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용기와 결단의 부족으로 부조리한 현실세계를 냉소할 뿐인 진희를 냉소하는 중충적 주제 방식이 돋보이는 소설이며, 가차 없는 시선과 인간적인 다감을 가장 조화롭게 결합시킨 소설이라 할 수 있다. _류보선(문학평론가)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의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그녀의 작품이기에 '이건 읽어야 해' 생각했다.

<쇼코의 미소> 최은영 작가의 책처럼 말이다.

역시나 좋다. 사람에 대한 연민과 따스한 가족애, 삶에 대한 통찰은 페이지마다 가슴을 울린다.

 

 

 

사랑받지 못하며 불우하게 자란 루시 바턴은 늘 어린 시절의 경험과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작가로 성공을 거둔 이후에도 자신의 출생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것이 버겁고 어색하기만 하다.

 

내가 정말로 거기 존재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내가 그 자리로부터 제거된 것처럼, 모든 것이 조금 멀리 있는 듯 느껴졌다.

 

 

 

첫 번째 남편 윌리엄은 그런 그녀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존재로 다가와 세상을 보는 다른 창을 열어준다.

 

요점은 결코 자신을 떠나지 않는 문화적인 빈 지점이 있다는 말이고, 다만 그것은 하나의 작은 점이 아니라 거대하고 텅 빈 캔버스여서, 그게 삶을 아주 무서운 것으로 만든다는 사실이다. 윌리엄은 그런 나를 세상으로 안내한 듯하다. 그러니까 내가 최대한 안내될 수 있는 만큼, 그가 내게 그걸 해주었다. 그리고 캐서린도.

 

 

 

그러나, 무수한 세월을 보내며 루시가 윌리엄에게 느끼는 감정도 변한다.

권위가 있었던 그,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존재였던 그 역시도 연약한 한 인간일 뿐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 그는 권위를 잃었어.

 

우리는 타인을 결코 알 수 없다. 그들의 경험과 생각을 짐작할 수 있다는 말은 오만일 뿐이다.

삶의 고통스러웠던 수많은 밤을 위로해 주었던 무언가가, 내가 생각했던 그 불빛이 아니라 신화와 같은 것이었다면?  배신감과 절망을 느낄 것인가? 그럼에도 그 무언가가 없었다면 절망의 시기를 무사히 통과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루시에게 윌리엄은 그런 불빛과 같았고, 다만 그녀는 삶이 뭔가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평생 마음속에 품고 다닌 헨젤과 그레텔의 모습. 그것은 사라졌다. 나는 더 이상 헨젤을 안내자로 여기며 바라보는 꼬마가 아니었다. 윌리엄은 그저-아주 단순히-더는 내게 안전하다는 느낌을 주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 윌리엄!"

그 사실과 마주한 루시는 이렇게 소리친다.

  

끔찍했던 과거를 극복한 듯 보였던 윌리엄의 어머니 캐서린도,

권위를 가졌던 윌리엄도,

책임을 기꺼이 떠맡는 큰 딸 크리시도,

사랑스러운 둘째 딸 베카도,

자신을 투명인간처럼 느꼈던 루시도,

 

모두 서로서로에게 신화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오, 캐서린! 오, 윌리엄!  오, 크리시! 오, 베카! 

오, 루시! 

 

 

 

이 책에서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또 하나는 루시와 두 딸들의 관계와 사랑이다.

 

성인이 되어 집을 떠나 가끔씩 집에 오는 나의 자녀들. 만날 때의 반가움과 헤어질 때의 아쉬움.

지나가는 중년의 사람들을 바라보다, 젊음을 잃어버린 나의 자녀들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그러다 이내 슬퍼졌다.

나의 감정을 그녀가 세심하게 묘사해 준 듯한 글들이 마음에 와닿는다.

 

하지만 헤어질 때 나는 늘 그렇듯 딸들에게 키스했고, 아이들과 헤어질 때는 매번 정말 마음이 아프다. 이번에는 심장이 약간 더 많이 아팠다.

 

딸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순간, 나는, 슬픔을 느꼈다. 우리는 평소처럼 포옹했고,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선지 캐서린이 살아있다면 지금 몇 살일지 문득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나 늙은 그녀를 떠올리니 마음속에서 입이 벌어졌다. 그리고 아주 슬퍼했는데, 우리 아이들의 아주 늙은 모습을 상상할 때 느껴지는 슬픔과 비슷했다. 생기와 활력이 넘치던 얼굴이 종잇장처럼 파리하게 변하고 팔다리는 뻣뻣해져 그들의 시간이 끝난다는 생각. 그리고 우리는 그 곁에서 아이들을 도울 수 없다는 생각-(상상하기 어렵지만 그 일은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각자 어린 시절의 경험이 다르기에 다른 길을 걷는다. 도무지 선택이란 걸 제대로 할 수 없고, 그저 뭔가를 쫓아갈 뿐이다. 그 길에 위로가 되는 누군가를 또 무언가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그 또한 완전치 않은 것일 뿐. 그저 그렇게 허술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오 모든 이여, 오 드넓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소중한 모든 이여,
그런 의미는 아닌가?

우리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도!
우리가 알고 있는 아주, 아주 작은 부분을 빼면. 

하지만 우리는 모두 신화이며, 신비롭다. 우리는 모두 미스터리다.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이다.

아마도 이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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