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주인공 진희는 엄마의 자살, 집 떠난 아버지, 하숙집을 하는 할머니의 손에 자라면서 일찍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 간혹 지나치게 성숙해 보이는 어린이들이 있다. 연기를 하는 듯 눈매가 심상치 않고 예의 바르며 눈치가 빨라 놀라는 경우가 있다. 진희는 어린 시절의 상처와 그녀에게 처한 환경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자아를 둘로 분리한다.
내가 내 삶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나 자신을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시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본다. '보여지는 나'에게 내 삶을 이끌어가게 하면서 '바라보는 나'가 그것을 보도록 만든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강요를 당하고 수모를 받는 것은 '보여지는 나' 이므로 '바라보는' 진짜 나는 상처를 덜 받는다. 이렇게 나를 두 개로 분리시킴으로써 나는 사람들의 눈에 노출되지 않고 나 자신으로 그대로 지켜지는 것이다.
진희의 이 분리법은 세상에서 상처를 덜 받고 자신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게 도와준다.
삶에 대한 통찰이 가능한 진희는 사람들은 허세와 위선으로 가득하며, 세상은 철저하게 부조리하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사람들의 약점을 잘 알고 그것을 이용해 자신을 지키기도 한다.
운명적이었다고 생각해 온 사랑이 흔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사랑에 대한 냉소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사랑에 빠지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얼마든지 다시 사랑에 빠지며, 자기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유지의 감각과 신랄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집착 없이 그 사랑에 열중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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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냉소에 의해 불붙여지며 그 냉소의 원인이 된 배신에 의해 완성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냉소적인 사람은 삶에 성실하다. 삶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언제나 자기 삶에 불평을 품으며 불성실하다.
짙게 노을이 내려 깔리고 염소 한 마리와 아름다운 멜로디를 연주하던 키가 큰 남자. '하모니카와 염소'의 실루엣으로 시작된 그녀의 첫사랑은 오랜 기간 그녀의 마음을 애달프게 했다.
그러나 그 실루엣은 허석의 것이 아니었다. 그저 더러운 낯빛의 구부정한 아저씨일 뿐임을 알았을 때 그녀는 도망치며 운다. 삶에게 조롱당한 것이 분해서만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환상이 남아있는 그녀로부터 그 물기를 다 배설시키기 위해서.......
그녀가 깨달은 사랑은, 삶은 완벽하지 않다.
삶은 장난기와 악의로 가득 차 있다. 불완전하고 엉망진창이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삶에 대한 환상을 온전히 비운 사람만이 불평 없이 하루하루 최선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삶이란 언제나 양면적이다. 사랑을 받을 때의 기쁨이 그 사랑을 잃을 때의 슬픔을 의미하는 것이듯이. 그러니 상처받지 않고 평정 속에서 살아가려면 언제나 이면을 보고자 하는 긴장을 잃어서는 안 된다.
삶은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냉소적인 12살 진희의 삶에 대한 통찰은 씁쓸하다.
<오! 윌리엄>의 주인공 루시 바턴이 인생을 통과하며 삶을 깨달아가는 과정과는 사뭇 다르다.
웃고 울며, 행복과 불행을 맛보고, 좌절과 성취를 느끼며 사랑하는 가족과 하루하루 소란스럽게 지내는 그것과는 말이다.
진희의 인생을 응원하고 싶다. 삶의 간계를 꿰뚫어 보기에 건조하고 냉소적일 수 있지만, 그래도 조금은 더 많이 웃고 따뜻한 감정을 느끼며 행복하기를 말이다.
새의 선물은 진희의 성장 없는 성장 과정을 통하여 한편으로는 한국사회에 깃들어 있는 절망의 징후를 표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용기와 결단의 부족으로 부조리한 현실세계를 냉소할 뿐인 진희를 냉소하는 중충적 주제 방식이 돋보이는 소설이며, 가차 없는 시선과 인간적인 다감을 가장 조화롭게 결합시킨 소설이라 할 수 있다. _류보선(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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