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으며 알랭 드 보통의 <불안>과, 최애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생각났다.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처럼 좋은 시와 책, 영화, 음악과 그림을 소개받을 수 있는 책은 마른대지에 단비와 같다. 나의 지적인 호기심을 채워준다. 이 책 역시 그렇다.
허무, nothingness, 세상의 진리나 인생 따위가 공허하고 무의미함을 이르는 말.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할 수는 있는 걸까?...... 그냥 함께 살 수밖에.
이 책은 인생의 허무를 인정하고 나의 관점을 바꾸어 인생을 더 잘 살 수 있도록 조언해 주는 책이다.
(이 점에서 알랭 드 보통의 <불안>과 흡사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 오오 봄이여 /
<김수영의 봄 밤 중>
인생은 허무의 물결로 가득하다. 아쉽게 끝나버리는 봄, 잡을 수 없는 찰나, 영속할 수 없는 인생, 불멸코자 찍은 사진과 영상도 시간의 횡포에 발해지고 희미해진다.
숲과 강과 호수 뷰를 자랑하는 100억 아파트에 사는 부자도, 비탈진 좁은 골목 월세 살이하는 가난한 자도, 노인도 아이도, 덕이 충만한 자도 비열한 기회주의 자도 모두 허무로 돌아간다. 다행히 죽음은 허망하지만 평등하다.
우연이 지배하는 인생을 어쩔 순 없지만, 닥칠 죽음은 '대상화'하여 나만의 축제로 만들 수 있다.
여기에 유한한 인생을 올바르게 마치기 위해 명심할 교훈이 있네. 그것은 바로 죽음의 춤. 누구나 이 춤을 배워야 하네.
<생이노상 수도원 벽화에 적힌 대화 시>
우리는 노동한다. 생계와 관련 있는 일이던 권태를 견디기 위한 일이던. 그 사소한 일에 숨어있는 선하고 아름다운 의도들을 발견해 보자. 찻잔 하나를 디자인하며 아름다움을 위해 공들이고, 맛있는 식사를 준비하며 사람들의 건강과 미소를 생각하고, 아이들에게 가르쳐 줄 노래 하나를 고르며 즐거워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하루의 나날들을 지내다 보면 우울과 절망이 닥쳐오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구름이 흘러가듯이 기다리자. 애타도록 서두르지는 말자.
패턴은 일상의 행동에 작은 전구를 일정한 간격으로 달아놓는 일이기에, 삶은 패턴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빛나게 된다. 이 반복과 패턴이 자아내는 아름다움과 리듬은 뭔가 지금 제대로 작동 중이라는 암묵적인 신호를 보낸다.
허무의 물결에서 살아남기 위해 죽음과 시간에 대한 관점을 달리해 보자.
죽음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가듯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우리는 태어나기 이전 상태에 대해 슬퍼한 적이 없다. 죽음으로 인한 부재도 어찌 보면 같은 상태 아닐까?
나의 중심을 외부에 두지 않고 탄력 있는 마음에 둔다면 관점을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다. 거대한 산의 진면목을 알려면 먼 곳에서 산을 조망해야 한다.
승리는 승리고, 패배는 패배다. 하나의 패배를 인정했다고 해서 모든 패배를 인정할 필요는 없다. 하나의 패배도 모든 면에서 패배인 것은 아니다. 모든 관점에서 다 패배인 경우는 없다. 어떤 패배를 해도 인생 전체가 패배로 변하는 경우는 없다. 현실을 여러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마음의 탄력을 갖는 것이 진정한 정신승리다.
저자는 목적은 결국 삶을 배신하기 마련이므로 오랫동안 목적 없는 삶을 원해왔다고 한다. 산책을 좋아하는 이유 또한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 또한 산책과 여행을 즐긴다.
MBTI / J 100%인 남편 덕에 가을까지 여행 계획이 꽉 차있다.
직장에서 돌아온 후, 소박하지만 맛있는 저녁식사를 마주할 때 우리는 '우행시'(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라고 말하곤 한다.
외식을 하는 날엔 행복하기 그지없다. 새로운 음식을 먹고 새로운 장소를 가는 것에 나는 요즘 열광한다.
인생을 즐긴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하나 이상의 음식을 먹을 때는 과정의 서사를 즐겨야 한다. 코스요리에서는 횡적인 기승전결을 누리고, 한상차림에서는 거대한 화폭을 감상하는 자세를 갖춘다.
무릇 천지간의 사물은 각기 주인이 있소. 진정 나의 소유가 아니라면 터럭 하나라도 취해서는 아니 되오. 오직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 사이의 밝은 달은 귀가 취하면 소리가 되고, 눈이 마주하면 풍경이 되오. 그것들은 취하여도 금함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소. 이것이야말로 조물주의 무진장이니, 나와 그대가 함께 즐길 바이외다. <소식, 적벽부 중>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러시아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_레프 톨스토이 (2) | 2023.06.14 |
---|---|
[프랑스 소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_로맹 가리 (0) | 2023.06.02 |
[외국 에세이] 불안_알랭 드 보통 (0) | 2023.05.17 |
[한국 소설] 딸에 대하여_김혜진 (2) | 2023.04.21 |
[동유럽 소설] 향수_밀란 쿤데라 (0) | 2023.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