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 대하여>

 

민음사의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 중 한 권.

 

이 책은 요양 보호사로 일하는 노년에 이른 한 여인과, 그녀의 딸 이야기이다.

아직 나이 든 서러움을 사무치게는 느끼지 못했을 작가는 이 책에서 나이 들어감에 대한 서글픈 감정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낸다.

 

세대마다 중년의 기준이 달라지겠지만, 중년의 나이인 나는 남편과 자주 데이트를 한다.

서울 도심을 걷고, 꽃이 유명하다는 곳은 애써 찾아다닌다. 맛집과 근사한 카페는 열심히 검색하여 잊지 않고 들린다. 그러나 어느 곳을 가도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낯설고 이질감이 느껴지는 존재일 것이다. 

 

나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누구든 언제든 나를 향해 너무나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내보일 것만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천천히 시간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젊었을 때는 선을 긋도 담을 쌓고 그래서 영원히 못 볼 것 같은 부류의 사람들도 이토록 쉽게 만날 수 있게 된다. 모두 별다를 게 없는 늙은이가 되는 탓이겠지. 그런 늙은이들을 받아 주는 곳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탓이겠지.

 

심장을 떨리게 하는 수치심과 모멸감. 내가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종이를 반으로 접고 또 반으로 접듯이. 그러다 불현듯 이 애들은 내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되겠지. 그건 내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 내가 서 있을 자리가 사라지는 거다. 그렇게 나는 없는 사람처럼 되겠지. 아니다. 이 애들은 그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홀로 딸을 키우며 어렵게 뒷바라지한다. 그 덕에 공부 꽤나 한 딸에게 바라는 것은 평범하게 사는 것. 

그러나 딸은 안정된 직장이 아닌 대학 강사로 떠돌이 생활을 하며, 웬만한 남자와 결혼은 고사하고 동성 친구와 엄마의 집으로 들어와 신세를 지게 된다. 

딸은 동성연애를 한다는 이유로 부당 해고 당한 동료를 도와 시위 현장에 드나든다. 엄마는 그런 평범하지 않은 딸을 바라보며 끔찍한 고통을 느낀다.

 

 

내가 아닌 것을 감당하는 고통

 

딸애가 말하지 않지만 내가 아는 것들, 내가 모른 척하는 것들, 그런 것들이 딸애와 나 사이로 고요히, 시퍼렇게 흐르는 것을 난 매일 본다.

 

이대로 딸애를 계속 당기기만 하면 결국 이 팽팽하고 위태로운 끈이 끊어지고 말겠구나. 이대로 딸을 잃고 말겠구나. 그러나 그게 이해를 뜻하는 건 아니다. 동의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내가 쥐고 있던 끈을 느슨하게 푼 것뿐이다. 딸애가 조금 더 멀리까지 움직일 수 있도록 양보한 것뿐이다. 기대를 버리고, 욕심을 버리고, 또 무언가를 버리고 계속 버리면서 물러선 것뿐이다.

 

나는 빛깔과 무늬를 달리하며 스스로 떠오르고 저무는 감정을 바라보느라 말을 잃는다. 딸애에게 걸었던 기대와 욕심, 가능성과 희망, 그런 것들은 버리고 또 버려도 또다시 남아서 나를 괴롭힌다. 내가 얼마나 앙상해지고 공허해져야 그것들은 마침내 나를 놓아줄까.

 

가시 같은 것, 못 같은 것. 나는 내내 그런 걸 키우고 품어 왔는지 모른다. 그런 것들이 외부로부터, 누군가로부터, 나를 지켜 줄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불러오는 건 이토록 끔찍한 통증이다.

 

누군가를 보살피는 것의 수고로움. 내가 아닌 누군가를 돌보는 것의 지난함. 실은 나는 아름답고 고결해 보이는 이런 일의 끔찍함과 가혹함을 딸애와 그 애에게 알려 주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 애들이 다만 책에서 읽거나, 누군가에게 전해 듣는 게 아니라 직접 경험하게 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요양 보호사다.

그녀가 간호하는 젠이란 여성은 젊은 시절 이민자 자녀들을 돌보고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화려했던 과거는 늙어 치매가 걸린 젠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가족 하나 없는 그녀의 마지막은 더 끔찍하고 허무하다. 주기만 했던 모든 것이 결국 되돌아오진 않는다.

 

어쩌자고 이 여자는 이렇게 오래 살아있는 걸까. 이런 순간 삶이라는 게 얼마나 혹독한지 비로소 알 것 같다. 하나의 산을 넘으면 또 하나의 산이 나타나고 또 다음 산이 나타나고. 어떤 기대감에 산을 넘고 마침내는 체념하면서 산을 넘고, 그럼에도 삶은 결코 너그러워지는 법이 없다. 관용이나 아량을 기대할 수 없는 상대. 그러니까 결국은 지게 될 싸움. 져야만 끝나는 싸움.

 

그게 뭐든. 언제나 받는 사람은 모르는 법이다. 그건 다만 짐작이나 상상으로는 알 수가 없는 거니까. 자신이 받는 게 무엇인지, 그걸 얻기 위해 누군가가 맞바꾼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그 돈이 어떤 빛깔을 띠고 무슨 냄새를 풍기며 얼마나 무거워지는지 결코 알 수 없다.

 

그 말을 하는 동안 나는 젠이 아니라 나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니라 딸애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건 세상의 일이 아니고 바로 내 일이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나의 일이다. 

 

누군가에겐 특별할 것 없는 일상. 누구나 누려야 할 마땅한 소소하고 평범한 순간. 그런 순간은 늘 너무 이르거나 늦게 도착한다.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치거나 기다리다가 포기하게 만든다.

 

 

 

 

 

 

이 책을 읽으며 늙어감과 내가 아닌 것들을 감당하는 고통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리고 삶 한가운데 버려져 꾸역꾸역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과 혹독한 시대에 대해서.

 

끝이 없는 노동. 아무도 날 이런 고된 노동에서 구해 줄 수 없구나 하는 깨달음.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 그러니까 내가 염려하는 건 언제나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어떤 식으로든 살아 있는 동안엔 끝나지 않는 이런 막막함을 견뎌 내야 한다.

 

어쩌면 이건 늙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시대의  문제일지도 모르지.

 

이 애들은 삶 한가운데에 있다. 환상도 꿈도 아닌 단단한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다. 내가 그런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이 애들은 무시무시하고 혹독한 삶 한가운데에 살아 있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흐리고 우울하다. 서글프고 아프다.

그럼에도 한 줄기 새어 들어오는 빛, 선선한 바람,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무언가를 느낀다.

 

나와 딸애. 내가 데려온 젠과, 딸애가 데려온 그 애가 머무르는 집 안에 선선한 바람이 새어 든다. 종일 내가 한 것은 젠의 곁에서 다시금 저녁이 오기를 기다린 것뿐이다. 고요한 저녁이 오고 거짓말처럼 아무 일도 없이 하루가 지난다.

 

그러나 이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끊임없이 싸우고 견뎌야 하는 일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건 아득한 내일이 아니다. 마주 서 있는 지금이다. 나는 오늘 주어진 일들을 생각하고 오직 그 모든 일들을 무사히 마무리하겠다는 생각만 한다. 그런 식으로 길고 긴 내일들을 지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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