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직 사이트에 이력서를 저장한 후, 자신을 어필하는 한 줄 문구를 고민해 본 경험은 대부분 있을 것이다.
성실하고 꼼꼼함, 밝고 친절함, 친화적인 사람, 믿음직하고 끈기 있음, 센스 있고 적응력 최고 등등 업무 직종에 적합할 듯한 자신에 대한 광고를 걸어놓는다.
에릭슨의 발달 이론에 따르면 청소년기(12-18세)에 정체감과 역할 혼미의 과정을 겪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는데, 타고난 성정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환경, 현실과의 상호 작용, 성공과 실패 등의 경험을 겪으며 한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이 확립된다.
개인이 청소년기에 확립한 정체성은 하나의 브랜드 광고 문구처럼 나를 잘 드러내 줄 수 있을까?
사람 잘 안 변한다는 말처럼 한 번 확립된 정체성은 바뀌지 않는 단단한 그 무엇일까?
나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준 책이다.
밀란 쿤데라의 책은 표지 그림이 말해주듯,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두 주인공 샹탈과 장 마르크의 이야기이다.
성년기의 문턱을 넘어설 무렵 샹탈은 '장미 향, 팽창하고 정복하는 향기'가 되어 남자들의 인기를 차지하고 싶다는 막연하고 서정적인 꿈이 있었다. 그러나 결혼 후 아이의 죽음과 이혼의 과정을 거치고 연하인 장 마르크와 동거를 하면서 꿈은 잠들어 버렸다.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아."어느 날 느낀 샹탈의 좌절감.
연인인 장 마르크는 그녀의 우울과 열패감을 안타까워하며 의기소침해진 그녀를 회복시켜 줄 의도로 익명의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나는 당신을 스파이처럼 따라다닙니다. 당신은 너무, 너무 아름답습니다."
샹탈은 처음에는 불쾌한 감정이 들었지만, 정중함과 진실함이 느껴지는 지속적인 편지로 삶에 생기마저 돌게 된다.
반대로 장 마르크는 자신임을 속이고 보낸 편지가 연인을 흥분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질투심을 느끼면서도 이 일을 당분간 지속하게 된다.
결혼 생활 동안 맘에 들지 않았던 시댁살이에도 착하고 고분고분했던 샹탈, 아이의 죽음 후 자유의 몸이 되어 시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을 쏟아부었던 그녀, 직장에서의 차갑고 사무적인 그녀, 장 마르크와 있을 때의 그녀, 익명의 편지에 반응하며 달라진 그녀는 모두 달랐다. 순종? 위선? 무관심? 절도? 그 무엇이건 말이다.
당신이 내가 상상하는 사람이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어.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내가 착각을 했다는 생각. (장 마르크)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의 모습은 조금씩 달라진다. 우리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그에 맞는 가면을 갈아 쓰며 살아가고 있다.
어떤 얼굴, 어떤 마음, 어떤 상황의 모습이 진짜 나인지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면서 말이다.
내겐 두 얼굴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두 얼굴을 갖는 것에서 어떤 재미를 찾는 법을 터득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두 얼굴을 갖는 것은 쉽지 않아. 노력을 요하고 규율을 요구하는 거야!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싫건 좋건 간에 내겐 잘하고 싶은 야심이 있다는 것을 알아줘. 직장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하기도 하지만, 완벽하게 일을 하면서 동시에 그 일을 경멸하는 게 아주 어렵지. (샹탈)
요즘처럼 SNS가 관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시대에서 정체성의 혼란은 더 심해 보인다.
우리는 저마다 ID라는 가면을 한 개씩 혹은 더 많이 가지고 있다.
면전에서 하지 못할 욕설이나 비방글, 쉽게 드러내기 어려운 정치적인 성향, 심지어 누군가에게 따뜻한 칭찬글을 쓸 용기도 생기게 된다.
대면에서의 가면은 나를 감추는 가면, 비대면에서 익명의 가면은 나를 드러내는 가면 같아 보인다.
결국 샹탈은 편지를 보낸 주인이 장마르크임을 알게 되고 그가 자신을 염탐해 떠날 구실을 찾고 있었다고 오해하게 된다. 연상인 샹탈은 연애의 약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을 빼고 난다면 경제력과 능력을 쥐고 있는 샹탈이 우세했다. 그녀는 그를 떠날 결심을 하고 무작정 런던행 기차를 탄다.
샹탈은 기차역에서 우연히 직장 동료들을 만나 합류하게 되고, 장 마르크는 그녀를 찾기 위해 헤매다 같은 열차를 타게 된다.
(기차 안에서) 그녀는 명랑했고 그것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그녀에게서 본 적 없는 생동감에 가득 찬 그녀의 몸짓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하는 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위아래로 정열적으로 움직이는 그녀 손이 보였다. 이 손이 그녀 손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손이었다. 샹탈이 그를 배신했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그건 별개다. 그녀는 더 이상 그를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곳으로, 다시 만난다 해도 그녀를 바라볼 수 없는 다른 생으로 가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을 떠난 그녀의 모습이 명랑한 것에 대한 질투와 속상함 등으로 엉망이 된 장 마르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인생의 전부와도 같았다.
당신을 알고부터 모든 게 달라졌어. 내 하찮은 일이 예전보다 흥미로워진 것은 아니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우리 대화 소재로 삼았기 때문이지.
샹탈은 자신의 희극적 상상에 몰입했고, 반면 장 마르크는 자기와 세계가 맺고 있는 유일한 감정적 관계가 그녀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한 후부터 상탈의 죽음은 항상 그의 곁에 있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어디서부터가 꿈인지, 누구의 꿈인지 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결국 그 소란스러운 소용돌이 끝에서 그들은 서로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을 거야. 쉴 새 없이 당신을 바라보겠어. 내 눈이 깜박거리면 두려워. 내 시선이 꺼진 그 순간 당신 대신 뱀, 쥐, 다른 어떤 남자가 끼어들까 하는 두려움. 그냥 당신을 보기만 할 거야.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 놓을 거야. 매일 밤마다.
이춘수의 시 <꽃>이 생각났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로 너는 나에게로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남편에게 장난처럼 "당신의 정체성이 뭐야?"라고 물으니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하고 장난으로 받아친다.
정체성은 어쩌면 타인이 정의해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는 그 사람에게 어떠어떠한 이미지로 다르게 기억되기 때문이다.
오래전 아이들에게 읽어 주었던 영어동화책 A Color of His Own(By Leo Lionni)의 내용은 정체성에 대한 해답을 쥐고 있는 듯하다.
모든 동물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색이 있다.
그러나 카멜레온은 그들이 가는 곳마다 색이 변한다. 노랑, 보라, 줄무늬로.......
자신의 고유한 색을 갖고 싶어 했던 카멜레온은 초록 나뭇잎 위에 계속 머물렀다.
가을이 오자 나뭇잎은 노랑으로 바뀌었고 카멜레온도 변했다. 다시 그 잎은 빨강으로 변하고 카멜레온도 그랬다.
겨울이 되자 떨어지는 잎과 함께 카멜레온도 떨어졌다.
우울한 겨울을 보내고 봄이 되자 그는 다른 카멜레온을 만나게 되었다.
"Won't we ever have a color of our own?" (우리 자신의 색을 가질 순 없을까?}
"I'm afraid not" (유감이지만 가질 순 없을 거야)
"But, why don't we stay together?" (그렇지만 우리 함께 지내면 어떨까?)
지혜로운 카멜레온의 제안으로 둘은 함께 머물며 어디를 가든 언제나 같은 색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의 고유한 색이 생긴 것이다.
And they lived happily ever after.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행복했다.)
광고란 삶의 단순한 물건을 시로 변형한다는 거야. 그 덕분에 일상성이 노래하기 시작했다나.
샹탈의 상사가 했다는 이 말은, "단순했던 존재의 이름을 불러주고 사랑을 주면, 생기 있고 명랑한 사람이 되어 현재를 즐기는 행복감을 맛볼 수 있을 거야"라고 들렸다.
우리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함께 할 누군가가 있을 때 나는 소중한 사람이 되며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현재 나의 곁에 누가 있는지 돌아보자.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닌 고유한 색을 지닌 나 자신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무채색 화면 사이로 흐르는 잔잔한 피아노의 선율과 삶의 소리들이 유난히 큰 소리로 다가왔다.
기차소리, 발걸음 소리, 문 닫는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소리,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 자전거 페달 돌리는 소리, 휘파람 소리..............
누군지 알 수 없는 내레이터의 음성은 소설을 그대로 읽어주는 느낌이 들었다. 원작과 영화는 일치했다.
토니 다키타니
그가 태어나고 사흘 만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난다.
미국식 이름 때문에 어려서부터 놀림을 받으며 세상에 마음의 문을 닫았고, 트럼펫 연주자였던 아버지의 잦은 연주여행으로 혼자일 때가 많았다.
그는 그런 사실을 특별히 괴롭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혼자 있는 건 그에게 있어서는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굳이 말하자면 인생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일종의 전제 조건이라고까지 생각하기도 했다.
습관으로 고독에 익숙해진 토니 다키타니.
소설의 주인공이기에 특별한 인물처럼 보였지만 한참을 생각해보니 나의 모습, 우리의 모습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그나마 상황이 나쁘지 않아 보인다. 성공한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어 부와 명성을 얻게 된다.
외롭고 고독해 보이지만 나름대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있었고, 본인의 선택대로 그저 그런 인간관계를 맺고 지냈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와 현실적인 레벨을 넘어서는 인간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로서는 아무리 해도 할 수 없었다.
깊이 있는 인간관계가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 또한 알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사무실에 온 거래처 직원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다섯 번째 만남에서 그녀에게 청혼을 하지만 오래된 남자 친구가 있는 그녀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다.
그녀의 결정을 기다리며 토니는 처음으로 고독이라는 것을 느낀다.
고독이 돌연 알 수 없는 무거운 압력으로 그를 짓누르며 고뇌에 빠지게 했다. 고독이란 감옥과 같은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날마다 자신을 둘러싼 벽의 두꺼움과 차가움을 절망적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만약 그녀가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면 난 이대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공기처럼 따라다녔던 고독을 잊고 지냈던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이후 고독했음을, 많은 것을 잃으며 살아왔음을 깨닫게 된다.
그녀와 결혼을 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며 고독은 막을 내린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갑작스러운 그녀의 교통사고로 그는 또다시 고독한 방에 갇히게 된다.
이따금 그는 그 방에 들어가, 무엇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멍하니 있곤 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방바닥에 주저앉아 물끄러미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죽은 사람의 그림자의, 그 그림자가 있었다. 하지만 달이 가고 해가 지나감에 따라 그는 차츰 예전에 그곳에 있었던 것들을 떠올릴 수 없게 되어갔다.
기억은 흔들리는 안개처럼 서서히 그 모습을 바꾸어가며, 모습이 바뀔 때마다 조금씩 희미해져 갔다. 그것은 그림자의 그림자의, 또 그 그림자의 그림자가 되었다. 그리고 손에 만져지듯 느껴지는 것이라곤 예전에 존재했던 것이 뒤에 남기고 간 상실감뿐이었다.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의 그림자의 그림자, 그 그림자의 그림자, 또 그 그림자의 그림자.............
시간이 흐르며 기억은 안개가 서서히 걷히듯 희미해져 갔다.
토니의 아버지는 고독을 잊기 위해 떠돌이 트럼펫 연주자가 되었을까.
토니의 아내는 고독을 잊기 위해 수많은 고급옷과 구두를 사들였을까.
죽은 아내의 옷을 입고 근무를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던 그녀는 한 번도 입어 보지 못한 명품 옷들을 입어보며 자신의 인생이 초라하고 고독했다는 것을 깨닫고 울음을 터트렸을까.
그가 아내를 만나며 느끼고, 아내를 잃고 느꼈던 고독처럼...........
우리는 '고독이 밀려왔다'라는 표현을 흔히 사용하지만, 고독은 어쩌다가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독이 가끔 밀려오는 것이 아니고, 고독하지 않다는 착각의 시간들이 가끔 밀려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텅 빈(사실은 고독으로 가득 찬) 푸른 방에 제아무리 살림살이를 들여놔도 그 방의 빈틈들을 완전히 채울 수는 없으리라.
우리도 그 시절을 지나쳐 왔지만 그들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기억이 나지도 않거니와 세상이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어린이가 '피어 보지도 못했다'는 표현이 있었다. 글을 쓴 분의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나는 틀린 비유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삶은 그런 게 아니다. 삶의 순간순간은 새싹이 나고 봉우리가 맺치고 꽃이 피고 시드는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지나고 보면 그런 단계를 가졌을지 몰라도, 살아 있는 한 모든 순간은 똑같은 가치를 가진다. 내 말은 다섯 살 어린이도 나와 같은 한 명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p.163)
위의 글을 읽는 순간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메시지라는 느낌이 들었다.
살아 있는 한 모든 순간이 똑같은 가치를 지니듯, 어린이도 청소년도 어른도 모두 동일한 인격체라는 것.
다수자던 소수자던 누구 하나 소홀히 대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 모두를 존중하고 대접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각자의 세상에는 비밀스럽게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있다.
아동을 놀리기 좋은 상대로 바라보고, 울리고 싶어 하며, 감상하며 즐거워하는 태도를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TV 프로그램에서 조차도 말이다.
어른들은 어린이들이 안전하고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보듬어주고 교육하고 지켜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을 나보다 약하고 부족하며 한 수 아래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어른은 미숙하다.
나 역시도 매일의 삶 속에서 어린이들을 만난다.
한 존재 한 존재를 얼마나 존중하며 대하고 바라봤는지, 나는 미숙한 어른이 아니었는지 반성하게 된다.
그들만의 세계를 존중하고 느긋한 어른이 되도록 기다려주며 나 또한 성숙한 사람이 되어가야겠다.
책 말미에 <내가 바라는 어린이날>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참신하다.
어린이들에게는 서운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어린이날이 어린이의 소원을 들어주는 날에 그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어린이가 '해방된 존재'가 맞는지 점검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방된 사람들답게 자유로운지, 안전한지, 평등한지, 권리를 알고 있으며 보장받고 있는지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점검하고 잘못된 것을 고쳐 나가는 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어린이날은 지금보다 훨씬 거창한 하루가 되어야 한다. (p.239)
찬란함과 미숙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십 대와 이십 대. 민감하고 순수한 그들은 관계를 맺기도 상처 받기도 쉬워 보인다.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에는 내가 지나온 미성년의 시간이 스며있다. 쉽게 다루어지고, 함부로 이용될 수 있는 어린 몸과 마음에 대해 나는 이 글들을 쓰며 오래 생각했다. _<작가의 말> 중
표지 제목 <무해한 사람>이라는 제목의 소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다섯 번째 이야기「고백」에서 미주가 생각했던 진희의 정의였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그러나 표제는 책을 읽는 내내 나의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던 말이었다.
진희가 엎드려 자고 있을 때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볼펜을 이리저리 돌릴 때 미주는 자신이 진희를 안다고 생각했다.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진희와 함께할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 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그때가 미주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미주의 행복은 진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_ <고백>
나는 무해한 사람인가?
나에겐 누가 무해한 사람인가?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 노력한다. 누군가에게 무해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나 자신을 장렬히 희생하기도 한다. 그러한 노력 없이 원만한 관계가 유지되기란 어렵다.
그러나, 나에게 무해한 그 누군가의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 보기란 쉽지 않다.
상대의 고민과 인내의 시간들, 공허함과 가슴 아린 아픔을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만약, 적나라하게 알게 된다면 그 희생을 밟고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
수이는 단 한 번도 자기 상처를 과시한 적이 없었다. 자기 상처로 누군가를 조종하는 일이 가장 역겹다고 믿는 사람처럼 그런 가능성 자체를 차단했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려 했고, 그게 무엇이든 모든 것을 삼켜내려 했다. 그런 수이가 소리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울고 있었다. _ <그 여름>
어쩌면 여자도 울고 싶었는지 모른다. 혜인에게 기대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행동들이 혜인과 자신 사이를 망쳐버릴까 봐, 혜인을 떠나게 할까 봐 자제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명랑한 사람이고, 나는 심각하지 않은 사람이고, 나는 가벼운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어야지 버림받지 않고 관계를 맺어갈 수 있다고 배우며 자라왔는지도 모른다. 더 이상 웃음으로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순간이 되었을 때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_ <손길>
사소한 하나의 눈빛, 표정, 말, 행동으로도 관계는 뒤틀려버릴 수 있다.
크게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어쩌다 한 그 사소함이 상대에게 큰 상처를 줄 수가 있다.
단 한번 긴장의 끈을 놓았을 때, 관계의 절단을 초래한다면 그건 가혹하다. 가슴 아프다.
나는 언제나 사람들이 내게 실망을 줬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실망을 준 나 자신이었다. 나를 사랑할 준비가 된 사람조차 등을 돌리게 한 나의 메마름이었다. _ <모래로 지은 집>
그녀의 소설은 마음을 울린다. 아주 미세하고 예민한 관계의 감정들을 건드린다.
그녀의 첫 소설집, <쇼코의 미소>를 읽고 관계의 외로움과 슬픔에 대해 공감하고 눈시울이 붉어졌었다.
십 대 이십 대는 아니지만 이 책도 다르지 않았다.
지금도 주희는 예전처럼 이 관계를 돌보려 하고 있었다. 하기 힘든 말을 애써서 겨우겨우 이어나가면서. 그런데도 윤희는 그 마음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_ <지나가는 밤>
나에게 무해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중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희생을 인지하는 것이 나의 달콤한 행복을 앗아가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소설들의 결말은 결코 해피 엔딩이 아니다. <쇼코의 미소>의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헤어짐으로 끝난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아마 인간에 대한 연민일 것이다.
참아내는 것이 사람들의 윤리라면 인생은 참 쓰디쓴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언제나 알아서 잘하고 동생 잘 챙긴다고 칭찬을 받았던 누나도 하민처럼 외로웠을까. 누구에게도 걱정을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그녀도 애를 썼을까. 그렇게 태어난 사람은 없는 거잖아._ <아치다에서>
나에게 전혀 무해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내가 전혀 무해한 사람이 되어 줄 수 있을까?
나의 희생과 다른 이의 희생이 얼마나 넘쳐야 그게 가능할까?
다른 이의 희생을 담보로 행복해지고 싶지도, 나의 희생을 감수한 채 다른 이의 행복을 마냥 지지해 주고 싶지도 않은 미묘한 감정들......... 우리는 어쩌면 그 경계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가끔 TV 채널을 돌리다 보면 볼 수 있었던 얼굴. 타일러 라쉬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제대로 본 적은 없다. 방송인 정도로만 생각했던 그의 환경 관련 출판 소식이 생소했다.
검색해 보니 현재 WWF(세계 자연 기금)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고,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다. 미국 시골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어려서부터 피부염증, 알레르기, 천식 등을 앓으며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된다. 온갖 종류의 나무와 꽃, 동물의 털과 깃털, 특정 음식 등을 멀리해야 했던 그가 오히려 자연의 소중함을 더 느끼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따뜻한 물이 나오는 집, 계절에 상관없이 쾌적한 쇼핑몰, 에어컨 바람이 시원한 사무실... . 우리가 갇혀 있는 작은 상자들은 편하지만, 그 상자를 감싸고 있는 것은 자연이고 지구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갇힌 작은 상자가 편하고 쾌적하기 때문에, 지금 지구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잘 보지 못하는 듯하다.
<두 번째 지구는 없다_타일러 라쉬>
그는 우리의 무지를 안타까워 한다.
지구가 줄 수 있는 양 이상으로 소비하고 있는 현실과, 집이 물에 잠기거나, 불타 사라지거나, 전염병에 노출되어 죽게 될 위기를 직시해야 한다.
역사를 왜곡하고 감추려하는 일본에 분노하듯이 환경 문제도 역사 문제와 마찬가지로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환경파괴를 일삼는 기업들에 관해서는 제재나 처벌을 요구해야 한다.
개인적인 노력도 중요하지만 사회, 기업, 국가, 전 세계가 하나가 되어야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임은 자명하다.
자연은 국경없는 우리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방송인의 책은 이해하기 쉽고 잘 읽혔다.
단 하나 뿐인 지구의 위험천만한 현실을 다시 한번 직시할 수 있었다. 진정 두 번째 지구는 없다.
그의 개인적인 실천은 이 책에도 담겨있다.
콩기름 잉크와 FSC인증 재생지 사용, 종이 손실을 최소화한 판형과 디자인의 간소화, 띠지 생략 등은 치열한 노력끝에 얻은 결과이다.
두껍고 어려운 용어 투성이의 환경 책이 꺼려진다면, 타일러 라쉬의 작은 책으로 시작해도 좋겠다.
청소년 성장소설인 이 책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과 함께 거론되기도 한다.
막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한 주인공 찰리와 고등학교 친구들의 생활을 보면 담배와 술, 마약, 성관계, 동성애, 왕따 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미국에서 이 책에 대한 도서 검열은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2개 학군에서는 금서로 정해졌다고 하니 아무리 문화 차이가 있더라도 일반적인 상황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미국 고등학생과 대학생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책과 영화의 행보로 보자면 덮거나 피해 갈 수 없는 문제들임에는 확실해 보인다.
Wallflower
벽 틈에서 자라는 꽃.
비격식으로는 무도회에서 파트너가 없어 벽 쪽에서 보고 있는 여자를 지칭하는 말.
일반적으로는 집단에서 소외된 사람을 가리킬 때 쓴다.
어쩌면 왕따.
주인공 찰리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집단생활에 소극적이며 잘 어울리지 못하는 인물이다.
하나뿐이었던 친구의 자살, 사랑하던 이모의 죽음과, 어린 시절 자신도 모르는 채 당한 성폭력은 그를 더욱더 안으로 숨게 만드는 트라우마였다. 월플라워에 불과했던 그의 혜택 (The perks)은 무엇이었을까?
이름 모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는 편지를 통해 생활과 생각 고민 등을 나누며 우울하고 아슬아슬한 시기를 버텨간다. 또한 찰리의 곁에는 친구 샘과 패트릭, 빌 선생님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다.
친구들의 공감과 우정, 선생님의 안목과 칭찬,가족의 묵묵한 지지와 사랑은 그를 세상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자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네가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또 누군가에게 기댈 어깨가 돼준다는 건 훌륭한 일이야. 하지만 기댈 어깨가 필요한 게 아니라 어깨를 둘러줄 팔이 필요할 때는 어떻게 할 건데? 구석에 가만히 앉아 너의 인생보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앞세우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돼. 그렇게 해선 안된다고. 너도 어떤 행동을 해야 해."
_샘의 말 중
"난 너를 위해 죽을 수는 있지만 너를 위해 살진 않을 거야." 그 말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이고, 그 후에는 타인들과 인생을 공유하기 위해 선택해야 한다는 뜻인 거 같아. 어쩌면 그런 태도가 사람들로 하여금 '참여'하도록 만드는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아. 분명하게는 모르겠어. 내 경우에도 잠깐 동안이라도 '샘을 위해'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거든. 다시 말해, 샘도 내가 그렇게 사는 걸 원치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한 일일 것 같아. 어쨌든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
_찰리의 편지 중
'참여'와 '행동'이라는 단어가 책을 읽는 내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월플라워였던 찰리는 본인의 생각을 표현하며 행동하고 참여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소외된 삶으로 많은 진통을 겪었지만 결국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깨달으며 견고하게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그래서 <The perks of being a wallflower> 였을까.
그런 걸 보면 현재의 우리가 되는 데에는 아주 많은 원인들이 있는 것 같아. 우리들은 그런 원인들에 대해 대부분 전혀 알 수가 없을 거야. 하지만 비록 우리들이 어디에서 태어날 것인가를 선택할 능력은 없다 해도, 태어난 곳에서부터 어디로 갈 것인가를 선택할 수는 있어. 우린 어떤 행동을 선택할 수도 있어. 그리고 우리의 행동에 대해 만족하도록 노력할 수도 있어.
_찰리의 편지 중
하지만 내가 눈물을 흘렸던 건 얼굴 위로 부딪쳐오는 바람을 맞으며 터널 속에 서 있는 것이 바로 나라는 걸 갑자기 깨달았기 때문이었어. 시내를 보든 안 보든 아무런 문제가 되질 않았어. 그것에 대해선 생각도 하질 않았어. 내가 그 터널 속에 서 있었기 때문이야. 내가 그곳에 존재하고 있는 거지. 그것만으로도 영원함을 느끼기엔 충분했거든
_찰리의 편지 중
내가 머무는 곳이 내 자리. 내가 존재하는 곳이 제자리.
이도우 님의 책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에서 나의 마음을 두드린 구절.
나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이 말을 요즘 반복해서 되뇌고 있던 중이었다.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제대로 바라보기. 그곳에 머물러 그 일들을 느끼기. 그리고 그 일들에 있어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기............ 내가 그곳에 존재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같은 제목의 영화를 먼저 보았다. 책을 읽으니 작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의 깊이가 더해진다.
로건 레먼, 엠마 왓슨, 에즈라 밀러 세 배우의 연기도 좋았다. 그중 패트릭 역, 에즈라 밀러의 개성 있는 외모와 연기는 단연 인상적이었다.
성장의 과정을 겪고 있는 모든 청소년들이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며 삶의 순간순간의 선택에서 최선을 다하기를.
매끈한 고무 느낌이 나는 책 표지의 그립감과 은은한 파스텔톤 색감의 삽화. 별과 섞여 고요히 내리는 눈과 하얀 옷을 입은 나무.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지붕과 들판. 두툼한 겉옷을 입고 다정히 같은 곳을 내려다보는 연인의 모습.
분명 추운 겨울인데 따뜻한 느낌이 든다.
이 책을 읽은 느낌은 표지와 다르지 않았다.
기록적이었던 매서운 한파는 슬그머니 찾아온 봄기운에 자리를 내어준다.
유난스럽게 고통스럽고 아팠던 상처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희미해지고 새 살이 돋아난다.
추위와 고통의 절정의 순간에도 가슴 벅차게 따스했던 느낌이 들어 안심하고 읽을 수 있었던 책이다.
작년,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보다 다시 꺼내 본 지금 더 좋은 느낌이 든다.
시골 낡은 기와집을 개조해 '굿나잇 책방'이라는 독립서점을 만들어 운영하는 은섭.
서울 미대입시학원에서 일하다 이모가 운영하는 '호두 하우스'라는 펜션으로 돌아온 해원.
그녀가 '굿나잇 책방' 매니저로 일하게 되면서 두 사람의 오래된 인연(해원은 알지 못했지만)은 다시 다음 이야기를 채우게 된다.
나의 미래의 로망 북카페와 닮은 독립서점, 소란스럽지 않은 소박한 시골의 풍경, 따뜻하고 검소하며 정의로운 캐릭터 은섭 등등 모든 설정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삶의 고단함에 대한 위로와 치유를 얻기 위해 시골로 온 해원은, 더 큰 상처를 가슴에 새긴 채 다시 서울로 떠나게 되지만,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은섭의 사랑과 이웃들의 따스한 온기는 또다시 그녀의 발걸음을 옮기게 만든다.
* 해원
두 사람은 나를 돌보고 키웠어도 내가 둘 사이에 낄 수 없게 이상한 소외감을 느꼈던 건, 둘이 나를 보호하려던 마음들이 너무 컸기 때문이라는 걸 이제 알겠어. 그럴 필요 없었는데. 내게도 함께 아파할 권리를 주었더라면 좋았을걸.
사람들을 알 수 없다.
그 속내가 어떤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의도가 선하더라도 드러난 사실은 우리를 분노케 할 가능성이 높다.
해원의 이모가 그날의 비밀을 끝까지 말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이미 지난 일이니.
아니, 해원의 엄마가 처음부터 사실을 말했으면 어땠을까? 솔직하게.
어떤 상황이여도 해원은 상처 받고 아픈 세월을 지나야 했겠지만, 진실을 마주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 은섭
그 말에 숨은 다른 뜻은 없어. 그 말 그대로라고. 그 말 그대로야. 항상 너한테는.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사실대로 정직하게 말할 수 없는 상황들도 있다. 해원의 엄마와 이모의 상황을 그려보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배려라는 이유로, 상처 받을까 걱정돼서, 너무 많은 생각 탓에 참고, 돌려 말하고, 다르게 행동한다.
결과가 어떨지, 올바른 판단인지 확신도 없이. 사랑하는 대상에게 '아파할 권리'를 주고 싶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희생과 고통은 이쪽도 마찬가지다.
# 은섭
한 때는 살아가는 일이 자리를 찾는 과정이라고 여긴 적이 있었다. 평화롭게 안착할 세상의 어느 한 지점. 내가 단추라면 딸깍 하고 끼워질 제자리를 찾고 싶었다. 내가 존재해도 괜찮은, 누구도 방해하지 않고 방해도 받지 않는, 어쩌면 거부당하지 않을 곳. 그걸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어디든 내가 머무는 곳이 내 자리라는 것, 내가 나 자신으로 살아간다면 스스로가 하나의 공간과 위치가 된다는 것. 내가 존재하는 곳이 바로 제자리라고 여기게 되었다.
내가 머무는 곳이 내 자리. 내가 존재하는 곳이 제자리.
이 말은 나에게 많은 위로를 주었다.
* 해원
꽃들은 무심하고, 의미는 그들이 알 바가 아니었다. 그저 계절 따라 피었다 지고 사람들만 울고 웃는다.
다른 이들이 불편해하면 어쩌나, 내가 불편하면 어쩌나 하며 불안과 걱정으로 나의 감정을 숨기고 피하고 표현하지 않는 순간, 나뿐 아니라 오히려 타인들도 불편해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도.
#은섭
사람들은 말과 표정이 일치하니 않으니까, 말을 듣지 말고 표정을 읽어야 한다고 그는 자주 되뇌었다. 하지만 그 역시 절반만 옳았다. 사람들은 표정 또한 자유롭게 바꾸고 지어내면서 살아간다. 그러니 애초에 읽으려 들지 않는 게 나을 때가 있다. 보여주는 걸 보고, 들려주는 걸 들으며, 흘려보내면 그만.
딸깍하고 끼워지는 인생은 없다. 그 완전하고 평화로운 상황은 인생의 끝일지라도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너무 애쓸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은섭
인생은 그리 길지 않고 미리 애쓰지 않아도 어차피 우리는 떠나. 그러니 그때까지는 부디 행복하기를.
은섭의 굿나잇책방 블로그 비공개 글을 엿보는 재미가 있었다. 사물의 꽃말 사전 아이디어도 굿이다. 쇼트 쇼트 스토리 라는 나뭇잎 소설에 매력을 느끼기도 했다. 진짜 사람을 알아볼 늑대 눈썹 이야기와, 눈물 차 이야기의 동화같은 순수함도 좋았다.
작가의 또 다른 책의 인물 '이건'을 떠올려 보았다. 시크한 츤데레 건도 매력 있지만, 은섭의 따뜻함과 솔직함에 더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 한결같음과 묵묵한 사랑에.
얼마 전 읽은 책 <나를 견디는 시간>의 작가가 읽으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소개해 준 책 중 하나이다.
누군가의 위로를 받은 일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모르겠다. 나의 깊숙한 고민들을 거짓 없이 말하기가 쉽지 않다.
진정성 있는 따뜻한 위로를 받고 싶었는지 이 책이 읽고 싶어졌다.
총 10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모음집이다.
혜성
스타의 눈
나의 주인, 당신
뉴욕의 밤
포기
귀고리
플라자 호텔
방콕
알링턴 국립묘지
어젯밤
책 제목으로 선정된 단편은 마지막 부분에 있어 먼저 읽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아껴두기로 하고 순서대로 책을 읽었다.
한 여인이 등을 드러내고 유혹하는 듯한 눈빛의 책 커버, 그리고 책의 내용은 예상했던 내용이나 위로와는 조금 다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인간의 본능과 나약함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감정과 욕망이 이성을 짓누르는 연약한 사람들의 모습들.
현재를 살지 못하고 싱그러웠던 젊은 나날들을 그리워하며 세월의 흐름에 빛을 잃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래서 슬프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과 상황에 대한 지겨움과 환멸로, 행복했던 지난날을 비밀스럽게 꺼내 추억하는 한 남자. (혜성)
,
그때는 그게 삶의 시작이었는지, 아니면 삶을 망치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사랑했고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스타의 눈)
그녀는 자유로워 보였다. 다른 여자, 젊은 여자처럼 보였다. 바닷가 흙먼지 나는 벌판에서 보는 그런 여자, 비키니를 입고 맨발로 감자를 훔치는 그런 여자. (나의 주인, 당신)
열정적인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채 암으로 죽어가는 한 여인의 후회와 눈물. (뉴욕의 밤)
사랑하는 아내가 있음에도 동성의 시인과 관계를 갖으며 즐거움을 추구했던 한 남자의 포기. (포기)
단란한 가정과 단정한 아내가 있음에도 아름다운 여인에게 사랑을 느끼는 한 남자. (귀고리)
그는 그의 인생 한가운데 거대한 방을 가득 채웠던 사랑을 생각했고, 다시는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지만, 길 위에서 그는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플라자 호텔)
행복은 다른 걸 갖는 게 아니라 언제나 똑같은 걸 갖는 데 있다는 걸 난 그때 몰랐어. 지금 여기 있는 거, 태양과 별과 지구와 바다와 모든 거, 내가 당신에게 품은 감정을 포함해서 말이야. 그날 아침 허드슨 스트리트에서, 창가에서 다리를 올리고 햇빛 속에 앉아 얘기를 했고, 행복했어. 난 그걸 알고 있었어. 우린 사랑에 빠져 있었어. 그 순간 나는 삶에서 바라는 모든 걸 갖고 있었어. (방콕)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는 과오를 가진 한 남자의 짝사랑의 슬픔 (알링턴 국립묘지)
어떤 기억은 갖고 가고 싶다고, 마리트는 생각했다. 월터를 만나기 전 어렸을 때의 기억. 집, 이 집이 아니고 그녀의 어린 시절, 침대가 있던 원래 집. 그 오래전 겨울 눈보라를 바라보던 층계참에 난 창문, 허리를 굽혀 굿나잇 키스를 하던 아버지, 램프의 불빛에 손목을 비추며 팔찌를 차던 엄마.
그 집뿐이었다. 나머지는 그리 강렬하지 않았다. 삶을 꼭 닮은 장황한 소설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다 어느 날 아침 돌연 끝나버리는. 핏자국을 남기고. (어젯밤)
누군가를 광적으로 사랑했던 행복한 시절은 지속되지 못한다. 화려한 젊음도 지속될 수 없다.
그러나 그 시절 그 찰나의 감정은 하늘의 아름다운 빛들만 골라 보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런 추억들이 비밀스레 삶을 지켜가는 동력 중의 하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으로 굳어진 단란한 가족과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살아내는 그런 그런 삶도 '사는 척'은 아닐 것이다.
매일매일 절정을 맛볼 수는 없다.
단편 <어젯밤>의 충격적인 결말은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관계의 상실을 단번에 가져다준다.
Last night, 어젯밤, 마지막 밤!
어쩌면 전부였던 어떤 것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고,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무겁던 생각들이 단번에 비워버릴 수 있는 쓰잘데 없는 사건일 수 있다. 지나고 보면 별일 아닌 일에 우리는 너무 많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때 설터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어요. "나뭇잎을 들어 올려 햇빛에 비추어 보면 잎맥이 보이는데 그는 다른 건 다 버리고 그 잎맥 같은 글을 쓰고 싶다고" 어쩌면 이 말이 설터의 스타일을 가장 시적으로 잘 요약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들어 올려 인생을 관통하는, 가장 연약하면서도 본질적인 사실을 설터처럼 그려내는 작가를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_ 옮긴이(박상미)의 말 중
처음 접해보는 설터의 책은 적잖은 충격을 줄 정도로 독특한 작품들이었고 간결한 문체와 표현들이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