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identity.
나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을까?
구직 사이트에 이력서를 저장한 후, 자신을 어필하는 한 줄 문구를 고민해 본 경험은 대부분 있을 것이다.
성실하고 꼼꼼함, 밝고 친절함, 친화적인 사람, 믿음직하고 끈기 있음, 센스 있고 적응력 최고 등등 업무 직종에 적합할 듯한 자신에 대한 광고를 걸어놓는다.
에릭슨의 발달 이론에 따르면 청소년기(12-18세)에 정체감과 역할 혼미의 과정을 겪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는데, 타고난 성정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환경, 현실과의 상호 작용, 성공과 실패 등의 경험을 겪으며 한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이 확립된다.
개인이 청소년기에 확립한 정체성은 하나의 브랜드 광고 문구처럼 나를 잘 드러내 줄 수 있을까?
사람 잘 안 변한다는 말처럼 한 번 확립된 정체성은 바뀌지 않는 단단한 그 무엇일까?
나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준 책이다.
밀란 쿤데라의 책은 표지 그림이 말해주듯,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두 주인공 샹탈과 장 마르크의 이야기이다.
성년기의 문턱을 넘어설 무렵 샹탈은 '장미 향, 팽창하고 정복하는 향기'가 되어 남자들의 인기를 차지하고 싶다는 막연하고 서정적인 꿈이 있었다. 그러나 결혼 후 아이의 죽음과 이혼의 과정을 거치고 연하인 장 마르크와 동거를 하면서 꿈은 잠들어 버렸다.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아." 어느 날 느낀 샹탈의 좌절감.
연인인 장 마르크는 그녀의 우울과 열패감을 안타까워하며 의기소침해진 그녀를 회복시켜 줄 의도로 익명의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나는 당신을 스파이처럼 따라다닙니다. 당신은 너무, 너무 아름답습니다."
샹탈은 처음에는 불쾌한 감정이 들었지만, 정중함과 진실함이 느껴지는 지속적인 편지로 삶에 생기마저 돌게 된다.
반대로 장 마르크는 자신임을 속이고 보낸 편지가 연인을 흥분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질투심을 느끼면서도 이 일을 당분간 지속하게 된다.
결혼 생활 동안 맘에 들지 않았던 시댁살이에도 착하고 고분고분했던 샹탈, 아이의 죽음 후 자유의 몸이 되어 시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을 쏟아부었던 그녀, 직장에서의 차갑고 사무적인 그녀, 장 마르크와 있을 때의 그녀, 익명의 편지에 반응하며 달라진 그녀는 모두 달랐다. 순종? 위선? 무관심? 절도? 그 무엇이건 말이다.
당신이 내가 상상하는 사람이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어.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내가 착각을 했다는 생각. (장 마르크)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의 모습은 조금씩 달라진다. 우리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그에 맞는 가면을 갈아 쓰며 살아가고 있다.
어떤 얼굴, 어떤 마음, 어떤 상황의 모습이 진짜 나인지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면서 말이다.
내겐 두 얼굴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두 얼굴을 갖는 것에서 어떤 재미를 찾는 법을 터득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두 얼굴을 갖는 것은 쉽지 않아. 노력을 요하고 규율을 요구하는 거야!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싫건 좋건 간에 내겐 잘하고 싶은 야심이 있다는 것을 알아줘. 직장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하기도 하지만, 완벽하게 일을 하면서 동시에 그 일을 경멸하는 게 아주 어렵지. (샹탈)
요즘처럼 SNS가 관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시대에서 정체성의 혼란은 더 심해 보인다.
우리는 저마다 ID라는 가면을 한 개씩 혹은 더 많이 가지고 있다.
면전에서 하지 못할 욕설이나 비방글, 쉽게 드러내기 어려운 정치적인 성향, 심지어 누군가에게 따뜻한 칭찬글을 쓸 용기도 생기게 된다.
대면에서의 가면은 나를 감추는 가면, 비대면에서 익명의 가면은 나를 드러내는 가면 같아 보인다.
결국 샹탈은 편지를 보낸 주인이 장마르크임을 알게 되고 그가 자신을 염탐해 떠날 구실을 찾고 있었다고 오해하게 된다. 연상인 샹탈은 연애의 약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을 빼고 난다면 경제력과 능력을 쥐고 있는 샹탈이 우세했다. 그녀는 그를 떠날 결심을 하고 무작정 런던행 기차를 탄다.
샹탈은 기차역에서 우연히 직장 동료들을 만나 합류하게 되고, 장 마르크는 그녀를 찾기 위해 헤매다 같은 열차를 타게 된다.
(기차 안에서) 그녀는 명랑했고 그것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그녀에게서 본 적 없는 생동감에 가득 찬 그녀의 몸짓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하는 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위아래로 정열적으로 움직이는 그녀 손이 보였다. 이 손이 그녀 손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손이었다. 샹탈이 그를 배신했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그건 별개다. 그녀는 더 이상 그를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곳으로, 다시 만난다 해도 그녀를 바라볼 수 없는 다른 생으로 가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을 떠난 그녀의 모습이 명랑한 것에 대한 질투와 속상함 등으로 엉망이 된 장 마르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인생의 전부와도 같았다.
당신을 알고부터 모든 게 달라졌어. 내 하찮은 일이 예전보다 흥미로워진 것은 아니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우리 대화 소재로 삼았기 때문이지.
샹탈은 자신의 희극적 상상에 몰입했고, 반면 장 마르크는 자기와 세계가 맺고 있는 유일한 감정적 관계가 그녀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한 후부터 상탈의 죽음은 항상 그의 곁에 있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어디서부터가 꿈인지, 누구의 꿈인지 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결국 그 소란스러운 소용돌이 끝에서 그들은 서로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을 거야. 쉴 새 없이 당신을 바라보겠어.
내 눈이 깜박거리면 두려워. 내 시선이 꺼진 그 순간 당신 대신 뱀, 쥐, 다른 어떤 남자가 끼어들까 하는 두려움.
그냥 당신을 보기만 할 거야.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 놓을 거야. 매일 밤마다.
이춘수의 시 <꽃>이 생각났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로 너는 나에게로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남편에게 장난처럼 "당신의 정체성이 뭐야?"라고 물으니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하고 장난으로 받아친다.
정체성은 어쩌면 타인이 정의해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는 그 사람에게 어떠어떠한 이미지로 다르게 기억되기 때문이다.
오래전 아이들에게 읽어 주었던 영어동화책 A Color of His Own(By Leo Lionni)의 내용은 정체성에 대한 해답을 쥐고 있는 듯하다.
모든 동물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색이 있다.
그러나 카멜레온은 그들이 가는 곳마다 색이 변한다. 노랑, 보라, 줄무늬로.......
자신의 고유한 색을 갖고 싶어 했던 카멜레온은 초록 나뭇잎 위에 계속 머물렀다.
가을이 오자 나뭇잎은 노랑으로 바뀌었고 카멜레온도 변했다. 다시 그 잎은 빨강으로 변하고 카멜레온도 그랬다.
겨울이 되자 떨어지는 잎과 함께 카멜레온도 떨어졌다.
우울한 겨울을 보내고 봄이 되자 그는 다른 카멜레온을 만나게 되었다.
"Won't we ever have a color of our own?" (우리 자신의 색을 가질 순 없을까?}
"I'm afraid not" (유감이지만 가질 순 없을 거야)
"But, why don't we stay together?" (그렇지만 우리 함께 지내면 어떨까?)
지혜로운 카멜레온의 제안으로 둘은 함께 머물며 어디를 가든 언제나 같은 색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의 고유한 색이 생긴 것이다.
And they lived happily ever after.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행복했다.)
광고란 삶의 단순한 물건을 시로 변형한다는 거야. 그 덕분에 일상성이 노래하기 시작했다나.
샹탈의 상사가 했다는 이 말은, "단순했던 존재의 이름을 불러주고 사랑을 주면, 생기 있고 명랑한 사람이 되어 현재를 즐기는 행복감을 맛볼 수 있을 거야"라고 들렸다.
우리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함께 할 누군가가 있을 때 나는 소중한 사람이 되며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현재 나의 곁에 누가 있는지 돌아보자.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닌 고유한 색을 지닌 나 자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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