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책, <쇼코의 미소>의 저자. 그녀의 소설이다.
장편인 줄 알았는데 중단편 소설 모음집이었다.
그 여름
601, 602
지나가는 밤
모래로 지은 집
고백
손길
아치다에서
총 일곱 편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어리고 젊다.
찬란함과 미숙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십 대와 이십 대. 민감하고 순수한 그들은 관계를 맺기도 상처 받기도 쉬워 보인다.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에는 내가 지나온 미성년의 시간이 스며있다. 쉽게 다루어지고, 함부로 이용될 수 있는 어린 몸과 마음에 대해 나는 이 글들을 쓰며 오래 생각했다. _<작가의 말> 중
표지 제목 <무해한 사람>이라는 제목의 소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다섯 번째 이야기「고백」에서 미주가 생각했던 진희의 정의였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그러나 표제는 책을 읽는 내내 나의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던 말이었다.
진희가 엎드려 자고 있을 때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볼펜을 이리저리 돌릴 때 미주는 자신이 진희를 안다고 생각했다.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진희와 함께할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 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그때가 미주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미주의 행복은 진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_ <고백>
나는 무해한 사람인가?
나에겐 누가 무해한 사람인가?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 노력한다. 누군가에게 무해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나 자신을 장렬히 희생하기도 한다. 그러한 노력 없이 원만한 관계가 유지되기란 어렵다.
그러나, 나에게 무해한 그 누군가의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 보기란 쉽지 않다.
상대의 고민과 인내의 시간들, 공허함과 가슴 아린 아픔을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만약, 적나라하게 알게 된다면 그 희생을 밟고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
수이는 단 한 번도 자기 상처를 과시한 적이 없었다. 자기 상처로 누군가를 조종하는 일이 가장 역겹다고 믿는 사람처럼 그런 가능성 자체를 차단했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려 했고, 그게 무엇이든 모든 것을 삼켜내려 했다. 그런 수이가 소리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울고 있었다. _ <그 여름>
어쩌면 여자도 울고 싶었는지 모른다. 혜인에게 기대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행동들이 혜인과 자신 사이를 망쳐버릴까 봐, 혜인을 떠나게 할까 봐 자제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명랑한 사람이고, 나는 심각하지 않은 사람이고, 나는 가벼운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어야지 버림받지 않고 관계를 맺어갈 수 있다고 배우며 자라왔는지도 모른다. 더 이상 웃음으로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순간이 되었을 때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_ <손길>
사소한 하나의 눈빛, 표정, 말, 행동으로도 관계는 뒤틀려버릴 수 있다.
크게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어쩌다 한 그 사소함이 상대에게 큰 상처를 줄 수가 있다.
단 한번 긴장의 끈을 놓았을 때, 관계의 절단을 초래한다면 그건 가혹하다. 가슴 아프다.
나는 언제나 사람들이 내게 실망을 줬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실망을 준 나 자신이었다. 나를 사랑할 준비가 된 사람조차 등을 돌리게 한 나의 메마름이었다. _ <모래로 지은 집>
그녀의 소설은 마음을 울린다. 아주 미세하고 예민한 관계의 감정들을 건드린다.
그녀의 첫 소설집, <쇼코의 미소>를 읽고 관계의 외로움과 슬픔에 대해 공감하고 눈시울이 붉어졌었다.
십 대 이십 대는 아니지만 이 책도 다르지 않았다.
지금도 주희는 예전처럼 이 관계를 돌보려 하고 있었다. 하기 힘든 말을 애써서 겨우겨우 이어나가면서. 그런데도 윤희는 그 마음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_ <지나가는 밤>
나에게 무해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중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희생을 인지하는 것이 나의 달콤한 행복을 앗아가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소설들의 결말은 결코 해피 엔딩이 아니다. <쇼코의 미소>의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헤어짐으로 끝난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아마 인간에 대한 연민일 것이다.
참아내는 것이 사람들의 윤리라면 인생은 참 쓰디쓴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언제나 알아서 잘하고 동생 잘 챙긴다고 칭찬을 받았던 누나도 하민처럼 외로웠을까. 누구에게도 걱정을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그녀도 애를 썼을까. 그렇게 태어난 사람은 없는 거잖아._ <아치다에서>
나에게 전혀 무해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내가 전혀 무해한 사람이 되어 줄 수 있을까?
나의 희생과 다른 이의 희생이 얼마나 넘쳐야 그게 가능할까?
다른 이의 희생을 담보로 행복해지고 싶지도, 나의 희생을 감수한 채 다른 이의 행복을 마냥 지지해 주고 싶지도 않은 미묘한 감정들......... 우리는 어쩌면 그 경계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노란 표지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들 모두 슬프고 애련하다.
"따뜻한 온도에서 가슴이 무너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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