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 서가에서 로맹 가리의 책을 발견하고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일러스트, 자기 앞의 생>이다.
마누엘레 피오르의 따뜻한 색감의 그림이 더해진 이 아름다운 책은 청소년 코너에서 만날 수 있었다.
먼저 말해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의 칠 층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모모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소설의 첫 문장에서 소외되고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임을 짐작할 수 있다. 흑인, 유태인, 아랍인들이 모여 사는 프랑스 한 구역에 자리 잡은 로자 아줌마와 모하메드(모모)의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그녀가 냉정하다고들 했지만, 세상에 그녀를 돌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혼자 육십오 년 동안 온갖 풍상을 견디어 왔으니 때로는 그녀를 용서해줘야 한다.
유태인인 로자 아줌마는 젊어서는 몸으로 벌어먹고 살았고, 전쟁 중 아우슈비츠를 경험하고 살아 돌아왔다.
그 후 양육권을 박탈당한 창녀들의 아이를 돌봐주며 생계를 유지해 간다.
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히틀러에 대한 공포심으로 자신만의 지하 대피소를 비밀스럽게 가지고 있는 그녀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왔음이 분명하다.
암만 생각해도 이상한 건, 인간 안에 붙박이장처럼 눈물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원래 울게 돼 있는 것이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인간을 만드신 분은 체면 같은 게 없음이 분명하다.
아랍인 모모는 세 살 때 로자 아줌마 집에 왔다. 돈을 받고 자신을 돌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커다란 슬픔을 느끼게 된다. 의지할 곳 없었던 두 사람은 소란스러운 삶을 살면서도 끈끈한 정과 사랑으로 삶을 이어나간다.
로자 아줌마가 늙고 병들어 칠 층 계단을 더 이상 오르내리지 못하게 되자, 아이들은 입양되거나 하나 둘 떠나고 그녀 곁에는 모모만 남게 된다.
조물주가 세상 모든 것을 다 잘 만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조물주는 아무에게나 무슨 일이든 일어나게 하는가 하면,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기도 한다. 꽃이며 새를 만들기도 하지만 이젠 칠 층에서 내려가지도 못하는 유태인 노파를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세상과 생을 고통 없이 디자인할 수 있었을 거란 한탄은 책 곳곳에서 모모의 표현으로 드러난다.
오지 않을 엄마, 똥오줌 못 가리는 로자 아줌마를 떠나지 못했던 열네 살 모모의 외로움과 고독, 생에 대한 불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 구경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그들 모두가 실제 인간이 아니라 기계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고통받지 않고 늙지도 않고 불행에 빠지지도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네 인간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 그것은 정말 별세계였다. 나는 너무 행복해서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손 닿은 곳에 있을 때 바로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모모는 화려한 백화점 진열장에 마련된 서커스 모형을 보며 즐거워하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영원한 행복은 인간에게 없고, 행복은 순간이며 이내 생은 고통으로 돌아갈 거라는 것을 너무 빨리 알아버린 모모가 한없이 슬프다.
그럼에도 모모와 로자 아줌마를 도왔던 이웃들이 있었다. 그들 역시 힘없는 사람들이었지만 말이다. 양탄자 행상을 하는 하밀 할아버지는 모모에게 글도 생각도 인생도 가르쳐주셨던 분이었다.
하밀 할아버지는 빅토르 위고도 읽었고 그 나이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경험이 많았는데, 내게 웃으며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오래 산 경험에서 나온 말이란다. 하밀 할아버지는 위대한 분이었다. 다만 주변 상황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
하밀 할아버지 역시 자연의 공격을 받아 눈은 흐려지고, 치매에 걸리고, 오줌을 누러 가는데 부축을 받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늘 손에 쥐고 있었던 그는 위대한 사람이다.
그녀는 유태인 대 학살 전인 열다섯 살 적 사진을 한 장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사진의 주인공이 오늘날의 로자 아줌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로자 아줌마가 열다섯 살의 사진 속 주인공이었다는 사실 역시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열다섯 살 때의 로자 아줌마는 아름다운 다갈색 머리를 하고 마치 앞날이 행복하기만 하리라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열다섯 살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를 비교하다 보면 속이 상해서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생이 그녀를 파괴한 것이다.
나이가 들고 아이들이 독립할 즈음이 되니 나의 노후는 어떨까 생각하게 된다. 지금 그 시기를 겪는 나의 부모님들에 대한 생각도 고통스럽다. 생이 나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짓밟고 있다.
한 가지 말해둘 게 있다.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내 생각일 뿐이지만,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는 가능한 안락사가 왜 노인에게는 금지되어 있는지 말이다. 나는 식물인간으로 세계기록을 세운 미국인이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더 심한 고행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십자가에 십칠 년여를 매달려 있었던 셈이니까. 더 이상 살아갈 능력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의 목구멍에 억지로 생을 처넣는 것보다 더 구역질 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유시민의의 책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는 행복한 삶은 잘 사는 것이고, 잘 사는 것은 잘 죽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이다.
"내가 바라는 끝을 줘요"
조조 모예스의 소설 <미 비포 유>에서 교통사고로 사지마비가 된 주인공 월이 했던 말이다. 인간은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존엄성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줌마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 사람이에요. 의사들을 즐겁게 해 주자고 아줌마를 식물처럼 살게 해서 세계 챔피언이 되게 할 생각은 없어요. 내가 불쌍한 사람들 얘기를 쓸 때는 누굴 죽이지 않고도 하고 싶은 얘기를 모두 다 쓸 거예요. 그건 누굴 죽기는 것과 같은 힘이 있대요. 선생님이 인정머리 없는 늙은 유태인이 아니고 심장이 제 자리에 붙어 있는 진짜 유태인이라면, 좋은 일 한번 해주세요. 로자 아줌마를 고통스러운 생에서 구해주세요. 생이란 것은 아줌마를 엉덩이로 걷어차버렸어요. 그놈의 알지도 못하는 하느님 아버지란 작자 때문이에요. 그 작자는 어찌나 잘 숨어 있는지 낯짝도 잘 안 보여요. 그 낯짝을 재현시키는 것조차도 안 된대요. 붙잡히지 않으려고 마피아들을 풀어서 막잖아요.......... 로자 아줌마를 도와주지 않는 더럽고 멍청한 의사들은 비난받아야 해요. 그건 범죄라고요.......
모모는 로자아줌마를 병원에 들여보내 식물처럼 생명을 연장하는 대신, 그녀의 비밀 장소인 지하실로 데려간다.
히틀러를 피해, 대학살을 피해, 동정심 없는 이 세상을 피해 말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숨을 거두게 된다.
그녀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지만 모모는 숨을 쉬지 않아도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있어 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도 살 수 있나요? (.......) 제가 어릴 때 할아버지가 그러셨잖아요,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그의 얼굴이 속에서부터 환하게 밝아졌다. 그래, 그래, 정말이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던 것 같다.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 더 두고 봐야 알 것이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고, 계속 그녀가 그리울 것이다.
(............)
사랑해야 한다.
시체와 함께 지하실에서 여러 날을 보낸 모모는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구급차에 실려간다. 그의 주머니에 친절한 나단 아줌마의 연락처가 남아 있었기에 그는 다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정말 특별하다.
한 편의 그림동화 같기도, 청소년 성장 소설 같기도, 철학 도서 같기도, 장편의 대하드라마 같기도 하다.
로맹 가리란 이름을 감추고 가명 에밀 아자르로 책을 내야 했던 사연과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그의 인생이 스며들어서일까.
삶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내 앞에는 주어진 삶.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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