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일곱 살, 그때 나는 보잉 747기 좌석에 앉아 있었다.
함부르크 공항에 막 도착한 비행기 안에서 비틀즈의 <Norwegian wood>가 흘러나오고, 그것과 함께 떠오른 와타나베의 옛 추억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1969년 가을, 나는 곧 스무 살이 될 참이었다.
기성세대가 이끌어낸 눈부신 성장과 새로운 세대가 불러일으킨 저항문화가 공존했던 1960년대 말 일본.
사상의 대립과 혼란 속에 살아가고 있었던 많은 젊은이들은 소란함에 발을 담그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다지 진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뭘 보고 뭘 느끼고 뭘 생각해도, 결국 모든 것이 부메랑처럼 나 자신에게로 돌아오고 마는 나이였다. (........) 주변 풍경에 관심을 기울일 마음의 여유 같은 건 아예 없었다.
그 시절이 지난 후, 전부인 것 같았던 것들은 상실되어 조각난 파편들로 잊히고 풍경만이 기억된다. 소름 끼치게 공허하고 슬프다.
나는 고개를 들고 북해 상공을 덮은 검은 구름을 바라보며 지금까지 살아오는 과정에서 잃어버렸던 많은 것에 대해 생각했다. 잃어버린 시간, 죽거나 떠나간 사람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추억.
가장 사랑했던 친구 기즈키의 자살 이후, 와타나베와 기즈키의 여자 친구였던 나오코는 위태로운 삶을 이어간다.
토요일 신주쿠의 번화한 밤, 술에 취해 흔들리는 정체 모를 분위기처럼 허공을 떠돌며 방황하는 젊은 나날들이 이어진다.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 죽음은 나라는 존재 속에 이미 갖추어졌고, 그런 사실은 아무리 애를 써도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 열일곱 살 5월의 어느 날 밤에 기즈키를 잡아챈 죽음은, 바로 그때 나를 잡아채기도 한 것이다.
존재의 뒤틀림. 다리미로 펴 반반해진 천처럼 구김살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성격과 경험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모두 뒤틀림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달프고 불행하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경험을 공유한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혼란 속에서 서로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와타나베는 요양원에 있는 나오코에게 편지를 쓰고, 찾아가기도 하며 함께 극복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바람을 이루지 못한다.
죽음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잠겨 있다. 그것은 분명 진실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죽음을 키워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나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결국 그녀의 죽음은 극도의 아픔과 방황의 끝으로 그를 몰아세웠지만, 살아있는 자는 어찌 되었던 또 살아가야만 했다.
고뇌하지 마요. 가만 내버려 두어도 흘러가야 할 곳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갈 것이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에게 상처를 주어야 할 때는 상처를 주게 되는 법이니, 좀 잘난 체를 할게요. 와타나베도 인생의 그런 모습을 이제 슬슬 배울 때가 되었어요. 당신은 때로 인생을 너무 자기 방식에만 맞추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정신 병원에 들어가는 게 싫다면 마음을 조금 열고 그냥 흐름에 몸을 맡겨요. 나처럼 무력하고 불완전한 여자도 때로는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멋진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거든요. 정말이에요, 이거! 그러니 더 많이 많이 행복해져요. 행복해지려고 노력해요.
나오코의 요양원 룸메였던 레이코의 편지는 마음을 울린다.
상처를 안고 흐르는 세월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함.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이라는 존재에 내재된 일이며 결코 바꿀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상처를 딛고 행복을 찾아 살아갈 수 있는 끈질긴 강인함도 있음을 깨닫는다.
'봄날의 곰'처럼 다가온 미도리라는 소녀. 그녀 역시 삶의 뒤틀림이 있었지만 생명력이 넘치는 발랄한 소녀였다.
그는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서 애타게 미도리를 불렀다.
567 페이지의 긴 장편을 두 번 읽으니 꽤 오랜 시간이 지나갔다.
우울한 내용, 일반적이지 않은 성문화가 뒤섞인 글이 조금은 불편하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소설 전체에 나오코가 비틀즈의 <Norwegian wood>을 들으면서 느꼈던 춥고, 외롭고, 깊은 숲 속을 홀로 헤매는 듯한 느낌이 잘 스며있었다.
슬프지만 이 곡을 좋아했던 나오코, 그리고 묵묵히 혼자 모든 것을 참아내고 있었던 와타나베처럼 격동의 시기, 혼란스러운 청년들의 방황을 사무치게 느낄 수 있었던 소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제목 <노르웨이의 숲>과, 비틀즈의 노래 제목과 가사 <Norwegian wood>는 해석의 차이로 의견이 분분하다. 원곡의 wood가 가구인지, 나무인지, 숲인지 모호하지만, 난해성으로 소설의 느낌을 더 드러내는 제목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는 건 젊은이들 뿐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잃어가며 살고 있다. 사람도, 기억도, 추억도, 기쁨도 슬픔도......
엊그제 조카의 결혼식이 있었다.
청담동의 화려한 웨딩홀, 눈부신 신부와 신랑, 곳곳에 화려하고 아름답게 장식된 꽃들, 많은 하객들과 일류 호텔 부럽지 않게 서빙되어 나오는 음식들.....,
나무랄 데 하나 없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마음껏 축하를 해주었다.
그러나 기쁨 뒤에 남는 허전함과 상실감은 무엇이었을까?
곱고 우아한 한복을 입은 신랑 신부의 엄마나 단정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아빠가 아님에도 말이다.
이야기 도중, 울컥 울음에 목이 메인 부모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웃음 뒤에 남는 허무와 상실도 있으니, 울음 뒤 남는 상실은 또 얼마나 감당하기 어려울까?
죽음이 삶의 대극이 아니 듯, 기쁨과 슬픔도 연속성을 가지고 이어진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과 죽음, 상실과 회복을 온몸으로 겪으며 우리는 또 오늘 하루를 살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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