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시공사>

 

 


 

매끈한 고무 느낌이 나는 책 표지의 그립감과 은은한 파스텔톤 색감의 삽화. 별과 섞여 고요히 내리는 눈과 하얀 옷을 입은 나무.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지붕과 들판. 두툼한 겉옷을 입고 다정히 같은 곳을 내려다보는 연인의 모습.

분명 추운 겨울인데 따뜻한 느낌이 든다. 

 

이 책을 읽은 느낌은 표지와 다르지 않았다. 

 

기록적이었던 매서운 한파는 슬그머니 찾아온 봄기운에 자리를 내어준다.

유난스럽게 고통스럽고 아팠던 상처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희미해지고 새 살이 돋아난다.

추위와 고통의 절정의 순간에도 가슴 벅차게 따스했던 느낌이 들어 안심하고 읽을 수 있었던 책이다.

작년,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보다 다시 꺼내 본 지금 더 좋은 느낌이 든다.

 

 

 

시골 낡은 기와집을 개조해 '굿나잇 책방'이라는 독립서점을 만들어 운영하는 은섭.

서울 미대입시학원에서 일하다 이모가 운영하는 '호두 하우스'라는 펜션으로 돌아온 해원.

그녀가 '굿나잇 책방' 매니저로 일하게 되면서 두 사람의 오래된 인연(해원은 알지 못했지만)은 다시 다음 이야기를 채우게 된다. 

 

나의 미래의 로망 북카페와 닮은 독립서점, 소란스럽지 않은 소박한 시골의 풍경, 따뜻하고 검소하며 정의로운 캐릭터 은섭 등등 모든 설정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삶의 고단함에 대한 위로와 치유를 얻기 위해 시골로 온 해원은, 더 큰 상처를 가슴에 새긴 채 다시 서울로 떠나게 되지만,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은섭의 사랑과 이웃들의 따스한 온기는 또다시 그녀의 발걸음을 옮기게 만든다.

 

 

 

* 해원

두 사람은 나를 돌보고 키웠어도 내가 둘 사이에 낄 수 없게 이상한 소외감을 느꼈던 건, 둘이 나를 보호하려던 마음들이 너무 컸기 때문이라는 걸 이제 알겠어. 그럴 필요 없었는데. 내게도 함께 아파할 권리를 주었더라면 좋았을걸. 

 

 

사람들을 알 수 없다.

그 속내가 어떤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의도가 선하더라도 드러난 사실은 우리를 분노케 할 가능성이 높다. 

해원의 이모가 그날의 비밀을 끝까지 말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이미 지난 일이니.

아니, 해원의 엄마가 처음부터 사실을 말했으면 어땠을까? 솔직하게.

어떤 상황이여도 해원은 상처 받고 아픈 세월을 지나야 했겠지만, 진실을 마주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 은섭 

그 말에 숨은 다른 뜻은 없어. 그 말 그대로라고. 그 말 그대로야. 항상 너한테는.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사실대로 정직하게 말할 수 없는 상황들도 있다. 해원의 엄마와 이모의 상황을 그려보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배려라는 이유로, 상처 받을까 걱정돼서, 너무 많은 생각 탓에 참고, 돌려 말하고, 다르게 행동한다. 

결과가 어떨지, 올바른 판단인지 확신도 없이. 사랑하는 대상에게 '아파할 권리'를 주고 싶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희생과 고통은 이쪽도 마찬가지다.

 

 

 

# 은섭 

한 때는 살아가는 일이 자리를 찾는 과정이라고 여긴 적이 있었다. 평화롭게 안착할 세상의 어느 한 지점. 내가 단추라면 딸깍 하고 끼워질 제자리를 찾고 싶었다. 내가 존재해도 괜찮은, 누구도 방해하지 않고 방해도 받지 않는, 어쩌면 거부당하지 않을 곳. 그걸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어디든 내가 머무는 곳이 내 자리라는 것, 내가 나 자신으로 살아간다면 스스로가 하나의 공간과 위치가 된다는 것. 내가 존재하는 곳이 바로 제자리라고 여기게 되었다. 

 

 

내가 머무는 곳이 내 자리. 내가 존재하는 곳이 제자리. 

이 말은 나에게 많은 위로를 주었다.

 

 

 

* 해원 

꽃들은 무심하고, 의미는 그들이 알 바가 아니었다. 그저 계절 따라 피었다 지고 사람들만 울고 웃는다.

 

 

다른 이들이 불편해하면 어쩌나, 내가 불편하면 어쩌나 하며 불안과 걱정으로 나의 감정을 숨기고 피하고 표현하지 않는 순간, 나뿐 아니라 오히려 타인들도 불편해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도.

 

 

 

#은섭 

사람들은 말과 표정이 일치하니 않으니까, 말을 듣지 말고 표정을 읽어야 한다고 그는 자주 되뇌었다. 하지만 그 역시 절반만 옳았다. 사람들은 표정 또한 자유롭게 바꾸고 지어내면서 살아간다. 그러니 애초에 읽으려 들지 않는 게 나을 때가 있다. 보여주는 걸 보고, 들려주는 걸 들으며, 흘려보내면 그만.

 

 

딸깍하고 끼워지는 인생은 없다. 그 완전하고 평화로운 상황은 인생의 끝일지라도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너무 애쓸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은섭

인생은 그리 길지 않고 미리 애쓰지 않아도 어차피 우리는 떠나. 그러니 그때까지는 부디 행복하기를.

 

 

 

은섭의 굿나잇책방 블로그 비공개 글을 엿보는 재미가 있었다. 사물의 꽃말 사전 아이디어도 굿이다.  쇼트 쇼트 스토리 라는 나뭇잎 소설에 매력을 느끼기도 했다. 진짜 사람을 알아볼 늑대 눈썹 이야기와, 눈물 차 이야기의 동화같은 순수함도 좋았다.

 

작가의 또 다른 책의 인물 '이건'을 떠올려 보았다. 시크한 츤데레 건도 매력 있지만, 은섭의 따뜻함과 솔직함에 더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 한결같음과 묵묵한 사랑에.

 

두 사람 중 선택한다면 말이다. 행복한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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