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제임스 설터
제임스 설터의 어젯밤.
얼마 전 읽은 책 <나를 견디는 시간>의 작가가 읽으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소개해 준 책 중 하나이다.
누군가의 위로를 받은 일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모르겠다. 나의 깊숙한 고민들을 거짓 없이 말하기가 쉽지 않다.
진정성 있는 따뜻한 위로를 받고 싶었는지 이 책이 읽고 싶어졌다.
총 10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모음집이다.
혜성
스타의 눈
나의 주인, 당신
뉴욕의 밤
포기
귀고리
플라자 호텔
방콕
알링턴 국립묘지
어젯밤
책 제목으로 선정된 단편은 마지막 부분에 있어 먼저 읽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아껴두기로 하고 순서대로 책을 읽었다.
한 여인이 등을 드러내고 유혹하는 듯한 눈빛의 책 커버, 그리고 책의 내용은 예상했던 내용이나 위로와는 조금 다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인간의 본능과 나약함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감정과 욕망이 이성을 짓누르는 연약한 사람들의 모습들.
현재를 살지 못하고 싱그러웠던 젊은 나날들을 그리워하며 세월의 흐름에 빛을 잃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래서 슬프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과 상황에 대한 지겨움과 환멸로, 행복했던 지난날을 비밀스럽게 꺼내 추억하는 한 남자. (혜성)
,
그때는 그게 삶의 시작이었는지, 아니면 삶을 망치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사랑했고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스타의 눈)
그녀는 자유로워 보였다. 다른 여자, 젊은 여자처럼 보였다. 바닷가 흙먼지 나는 벌판에서 보는 그런 여자, 비키니를 입고 맨발로 감자를 훔치는 그런 여자. (나의 주인, 당신)
열정적인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채 암으로 죽어가는 한 여인의 후회와 눈물. (뉴욕의 밤)
사랑하는 아내가 있음에도 동성의 시인과 관계를 갖으며 즐거움을 추구했던 한 남자의 포기. (포기)
단란한 가정과 단정한 아내가 있음에도 아름다운 여인에게 사랑을 느끼는 한 남자. (귀고리)
그는 그의 인생 한가운데 거대한 방을 가득 채웠던 사랑을 생각했고, 다시는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지만, 길 위에서 그는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플라자 호텔)
행복은 다른 걸 갖는 게 아니라 언제나 똑같은 걸 갖는 데 있다는 걸 난 그때 몰랐어. 지금 여기 있는 거, 태양과 별과 지구와 바다와 모든 거, 내가 당신에게 품은 감정을 포함해서 말이야. 그날 아침 허드슨 스트리트에서, 창가에서 다리를 올리고 햇빛 속에 앉아 얘기를 했고, 행복했어. 난 그걸 알고 있었어. 우린 사랑에 빠져 있었어. 그 순간 나는 삶에서 바라는 모든 걸 갖고 있었어. (방콕)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는 과오를 가진 한 남자의 짝사랑의 슬픔 (알링턴 국립묘지)
어떤 기억은 갖고 가고 싶다고, 마리트는 생각했다. 월터를 만나기 전 어렸을 때의 기억. 집, 이 집이 아니고 그녀의 어린 시절, 침대가 있던 원래 집. 그 오래전 겨울 눈보라를 바라보던 층계참에 난 창문, 허리를 굽혀 굿나잇 키스를 하던 아버지, 램프의 불빛에 손목을 비추며 팔찌를 차던 엄마.
그 집뿐이었다. 나머지는 그리 강렬하지 않았다. 삶을 꼭 닮은 장황한 소설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다 어느 날 아침 돌연 끝나버리는. 핏자국을 남기고. (어젯밤)
누군가를 광적으로 사랑했던 행복한 시절은 지속되지 못한다. 화려한 젊음도 지속될 수 없다.
그러나 그 시절 그 찰나의 감정은 하늘의 아름다운 빛들만 골라 보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런 추억들이 비밀스레 삶을 지켜가는 동력 중의 하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으로 굳어진 단란한 가족과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살아내는 그런 그런 삶도 '사는 척'은 아닐 것이다.
매일매일 절정을 맛볼 수는 없다.
단편 <어젯밤>의 충격적인 결말은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관계의 상실을 단번에 가져다준다.
Last night, 어젯밤, 마지막 밤!
어쩌면 전부였던 어떤 것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고,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무겁던 생각들이 단번에 비워버릴 수 있는 쓰잘데 없는 사건일 수 있다. 지나고 보면 별일 아닌 일에 우리는 너무 많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때 설터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어요. "나뭇잎을 들어 올려 햇빛에 비추어 보면 잎맥이 보이는데 그는 다른 건 다 버리고 그 잎맥 같은 글을 쓰고 싶다고"
어쩌면 이 말이 설터의 스타일을 가장 시적으로 잘 요약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들어 올려 인생을 관통하는, 가장 연약하면서도 본질적인 사실을 설터처럼 그려내는 작가를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_ 옮긴이(박상미)의 말 중
처음 접해보는 설터의 책은 적잖은 충격을 줄 정도로 독특한 작품들이었고 간결한 문체와 표현들이 인상적이었다.
사랑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은 지금은 이 책이 주는 위로가 무엇인지 알것같다.
설터의 또 다른 책 <가벼운 나날들>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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