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의 문장들
림태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하는 길. 남편이 <그리움의 문장들>에 나온 글이라며 소개해 준 가족의 정의.
끝까지 읽다 보니 맘 한편이 짠해지며 눈가가 촉촉해진다.
가족의 정의
욕실 헤어드라이어의 줄이 꼬여 있을 때 플러그를 빼 풀어두는 것. 내가 설거지를 하지 못하더라도 밥그릇에 남은 밥풀이 말라 달라붙지 않도록 물을 개수대에 놓아두는 것. 머리를 감고 수건을 두르고 나올 때 수건걸이에 새 수건을 꺼내 걸어두고 나오는 것. 치약이 떨어지고 화장지가 떨어지면 새것을 꺼내 바꿔두고 나오는 것. 화장실 휴지통이 가득 부풀어 있을 때 엄마를 부르기 전에 새 비닐봉지를 먼저 부르는 것. 세탁기 정도는 스스로 돌릴 줄 아는 것. 벗어놓은 양말과 빨랫감들이 방바닥이 아니라 세탁바구니 안에 얌전히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 수챗 구멍을 막고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담아 고인 비누 물이 잘 빠져나가게 해 주는 것. 방바닥에 벗어놓은 옷가지들이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려 있거나 옷장 속에 들어가 있을 때 그게 신데렐라가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 누군가의 식사량이나 웃음의 양이 줄었을 때 그것을 알아채는 것. 웃음이 줄어든 대신 근심과 외로움의 양이 늘지 않도록 마음의 눈금을 세심히 살펴주는 것. 아프게 말하고 몰라주는 말을 하는 때가 있더라도,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끝까지 믿어주는 것. 다투었더라도 마주 앉아 밥을 나누고 서로의 물 잔에 물을 채워주는 것. 빗소리 뒤에 숨어서 한숨을 내쉬는 엄마가 보이거나 자주 창밖의 석양을 내다보는 아빠의 등이 보일 때, 그분들의 인생을 헐어내며 내가 살아왔다는 걸 고요히 생각해 보는 것. 세상이 용서하지 않는 죄일지라도 기꺼이 용서하고 안아주는 곳. 끝까지 내편이 되어주는 곳. '우리'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곳. 나를 넘어 세상으로 가는 길이 시작된 곳. 신이 다 돌볼 수 없어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곳. 하나가 없으면 전부가 없는 곳.
<그리움의 문장들_림태주>
상대가 알아주지 않아도 서로를 배려하는 사소한 행동들을 하며, 의견 차이와 서운함을 느끼더라도 끝까지 너를 믿겠다는 약속을 지켜내는 것, 가족이라면 그래야 하는 것이다.
좋을 때만 행복하고 궂을 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가족이 아니다. 행복하고 슬픈 두 지점을 넘나들며 생기는 많은 순간들이 아마 그리움 생산의 가장 큰 재료 들일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에 가족의 정의가 삽입되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그리움_ <Daum 사전>
1. 어떤 대상을 좋아하거나 곁에 두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애타는 마음.
2. 과거의 경험이나 추억을 그리는 애틋한 마음.
사전적 정의로 빠르게 생각해보니, 1번 애타는 마음은 떠나간 사람들, 2번 애틋한 마음은 가족이 먼저 떠 오른다.
사람으로 한정 짓지 않고 생각해 보면, 1번은 간절했던 꿈이나 동경하는 것들, 2번은 행복했던 지난날의 순간들이 필름처럼 지나간다.
그리움을 볼 수는 없지만 냄새 맡을 수는 있다. 그리운 것들은 모두 냄새로 온다. 아기 냄새, 엄마 냄새, 겨울바람 냄새, 설탕 냄새, 생선 냄새, 고양이 털 냄새, 자운영꽃 냄새, 비 냄새, 유자 냄새, 재스민 냄새, 사람 냄새. 그렇게 실제적이고, 생생하고, 곁에 있다. 나는 그것들을 느끼고, 내 사랑은 모두 그리운 것들의 고유한 냄새로 온다.
<그리움의 문장들_림태주>
저자가 수집한 그리움에 대한 글을 읽어보니, 그리움이란 늘 내 곁에서 나를 채우는 그 어떤 것임을 새삼 느낀다.
때론 아프기도, 때론 기쁘기도 한 아련하고도 애틋한 것들.
세월을 살 수록 그리움의 무게는 더해진다. 아쉬운 것도 추억할 것도 겹겹이 쌓여간다.
꽤 오래전, 친정아버지 생신날 아침, 장문의 문자를 아빠에게 보냈다.
죄송한 마음, 감사한 마음, 사랑의 메시지를 담아서.......
잠시 후 울린 폰 알람은 나를 길거리에 주저앉아 울게 만들었다.
"고맙다. OO이가 태어나던 날을 잊을 수가 없구나. 아빠는 너무 행복했다. 오늘은 마음껏 그때를 그리워하며 추억하련다..... 나도 사랑한다."
유난히 예민했던 나의 첫 아이. 그 아이가 태어나던 날의 감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나의 아빠.
한동안 딸의 직장생활을 위해 고된 육아로 고통받았을 나의 부모님. 행복했지만 힘들었을 그때를 '오늘은 맘껏 그리워하겠다'는 말이 왜 그리 슬펐는지 모르겠다.
당신을 향한 그리움이라서 아껴서 그리워합니다. <그리움의 문장들_림태주>
두해 전 여든 고개를 넘기신 아버지.
아껴두었던 지난날의 추억과 그리움을 이제는 맘껏 꺼내 특별한 하루하루를 만들어 가시라고 마음을 전해 본다.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표현들로 진한 그리움을 전한 작가의 편지와 엽서 덕에 나의 그리움 목록도 풍성해졌다.
생각해보니, 그리움을 의식적으로 밀어내려고 한 적도 있는 것 같다.
슬퍼지기 싫어, 우울해지기 싫어, 혹은 삶이 바쁘다는 핑계와 감성적으로 되는 상황을 피하려.
비가 오는 날, 우울한 날, 낭만적인 장소에서만 거하게 날을 잡고 깊숙한 그리움을 꺼낼 노력을 했던 것도 같다.
고 이영훈 님의 아름다운 가사 <옛사랑>의 한 구절처럼,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 거야
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난 대로 내버려 두듯이
떠오르는 그리움의 생각들을 멈추려 노력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움의 문장들을 기록해 봐도 좋을 것 같다.
이 책의 저자처럼 말이다.
살아가며 많은 추억을 쌓고 순간들에 소박한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 그리움의 부자가 되는 것.
추억할 것이 많은 사람의 노후는 더 따뜻하고 행복할 것 같으니 말이다.
그리움의 힘을 끝까지 믿으라는 것. 그 사람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면 그는 아직 지지 않은 사람이고, 충분히 살아갈 힘이 있다는 증거라는 것
<그리움의 문장들_림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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