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의 밤
정유정
얼마 전 방구석 1열에 소개된 영화의 원작이기도 한 <7년의 밤>
영화를 먼저 볼까 고민하다 책을 먼저 들었다.
현수의 사실
한 때 야구선수, 포지션 포수. 현재는 댐 보안팀장.
마티즈가 갑옷처럼 느껴질 정도의 거구. 강력한 팔의 힘.
상습적인 술꾼. 면허정지 상태에서 음주운전 중 달려 나오는 여자아이를 차로 친 후 질식사 시킴. 호수에 사체 유기.
물에 빠져가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댐 수문을 열어 저지대 사람들의 수많은 목숨을 하루아침에 앗아간 주인공.
교도소 수감 7년 만에 사형집행을 선고받은 남자.
이 모든 것이 사실이다. 당신은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그 남자에 대해서.
일말의 연민이라도 느낄 수 있겠는가?
현수의 진실
사실에 감추인 이 남자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왜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가?
월남전에서 한 쪽 팔을 잃은 아버지의 폭력으로 불행하게 자라온 소년.
아버지의 신발을 우물에 던지며 그의 죽음을 바랐던 아이. 실제로 그 우물에 빠져 생을 마감한 아버지.
어린 시절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현수.
2군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야구 경력.
신혼여행길 교통사고 부상으로 1군으로의 진출에 실패하고 인생을 걸었던 야구를 접어야 했던 남자.
집 한 채 없는 초라한 현실과 무능력한 남편이라는 타이틀. 그를 피 말리게 괴롭히는 아내의 잔소리.
문득문득 나타나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술.
그리고 자신과 같은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되는 그의 전부였던 아들 서원.
한 순간의 실수로 오영제라는 남자의 딸을 죽이게 된다.
오영제는 상습적으로 아내와 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이코 패스.
딸이 그의 폭행을 피해 도망가던 중 현수의 차에 치이게 되고,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놀라 아이의 입을 틀어막으며 의도치 않게 살해를 저지르게 된다.
자기 세계가 파괴되었을 때 보이는 미치광이와 같은 영제의 칼날로부터 아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남자.
물론, 불행한 과거의 트라우마가, '실수로'라는 타이틀이, 아들에 대한 사랑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오영제라는 인물의 신들린 복수가 아니었다면 그는 마을 전체를 물지옥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아내 영주의 죽음도 없었을 것이고, 아들 서원은 7년 동안 떠돌아다니며 고통스럽게 살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사형을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까.
"물론, 자살도 생각했네. 매일, 매 순간. 실행하지 않은 건,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구원이기 때문이었어.
종교를 거부한 것도 비숫한 이유고. 내겐 신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게 할 자유가 있네.
내가 기다리는 건 구원이 아니라 운명이 나를 놓아주는 때야.
삶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지는 순간......... "
_<7년의 밤> 중
영화 <밀양>에서 자신의 아들을 살해 후 복역하고 있는 범인이, 신께 이미 용서를 받았다며 평화로운 얼굴로 자신 앞에 앉은 모습을 본 여자(전도연 분)는 종교에 대한 배신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거의 미쳐버리게 된다.
신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게 할 자유. 구원을 바랄 수 없는 처지.
현수는 <밀양>의 뻔뻔한 살인자와 달리 자신이 저지른 사실에 대한 죗값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7년의 밤을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이 소설은 '그러나'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순간의 실수로 인해 파멸의 질주를 멈출 수 없었던 한 사내의 이야기이자, 누구에게나 있는 자기만의 지옥에 관한 이야기이며, 물러설 곳 없는 벼랑 끝에서 자신의 생을 걸어 지켜낸 '무엇'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_<작가의 말 중>
승환이 알고자 했던 사실과 진실
사건를 소설로 담은 승환은 사실과 사실 사이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알아내려 애쓴 인물이며 부자의 충실한 조력가이다.
그러나 현수가 저지른 사실은 팩트다.
그 사이에 숨겨진 진실들 따위가 이 사실을 뒤집을 수도, 상황을 역전시킬 수도, 현수의 사형집행을 되돌릴 수도 없다.
이 부분이 마음이 아팠다.
하인리히 뵐의 소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에서 주인공이 기자를 권총으로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의 진실 따위는 그녀를 구제하지 못했다.
신문기사와 TV 보도의 모든 사실들은 그녀를 빠져나올 수 없는 회오리 속으로 끌어당겼다.
사실과 진실 사이에는 바로 이 '그러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야기되지 않은, 혹은 이야기할 수 없는 '이면 세계' 불편하고 혼란스럽지만 우리가 한사코 들여다봐야 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모두 '그러나'를 피해 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겠다.
_<작가의 말 중>
사실과 진실 사이.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사이를 들여다보는 것은 어렵고 불편하고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듣고 있는 것, 보고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사실과 진실 사이의 그 깊숙한 이면을 들여다 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꽤 긴 장편이지만 두 번을 내리읽었다.
한 번 읽고는 영화도 챙겨봤다.
원작의 내용을 담기에 영화 러닝타임으로는 한계가 있어 보였다.
결말의 내용도 조금 다르다.
그러나 책과 영화가 말하고 있는 메시지와 무거움은 어느 정도 일치해 보였다.
책과 영화 모두 여운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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