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레

 

 

 

영국 펭귄 출판사가 창립 70주년을 기념하며 만든 70권의 작품 선집 중 70번 째의 책이다.

카뮈, 카프카, 피츠제럴드 등 쟁쟁한 작가들의 작품 가운데 마지막이 알랭 드 보통의 책이라니 대단하다.

 

그의 책 중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과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으며 위로를 받고, 기발한 발상에 신선한 느낌도 가졌었다. 특히 그의 박식함과 유머에 놀라며 재미있게 책을 읽은 기억이다.

 

이 책은 작고 얇지만 아홉 편의 에세이나 실려있다. 이전 여러 작품들의 조각을 선별해 새롭게 엮은 책이다.

소제목 <진정성>에서는 소설 속 주인공 클로이가 나와서 반갑기도 했다.

 

 

 

원제는 <On Seeing and Noticing>.

<동물원에 가기>는 절판되고 제목과 표지를 바꿔 나온 책이 <슬픔이 주는 기쁨>이다.

 

아홉 편의 에세이 중 시작이 <슬픔이 주는 기쁨>이다.

이 편에서는 에드워드 호퍼의 고독한 그림들을 소개받았다.

 

 

자동판매기 식당 (에드워드 호퍼,1927)

호퍼의 [자동판매기 식당]이다.

우리가 슬플 때 슬픈 음악을 듣고, 슬픈 책을 읽고, 슬픈 영화를 보며 한바탕 울음을 털어내면 위로를 받는다.

외로울 때 기차역이나 카페에 앉아 홀로 있는 사람들을 보며 위로를 받는다. 아이러니하다.

이처럼 호퍼의 그림 안에 느껴지는 빛의 고독은 우리를 위로해 준다.

 

 

 

 

다섯 번째가 <동물원에 가기>이다.

 

사실, 나는 어린이도 아닌데 동물원 가끔 한 번씩 간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자주 갔던 곳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재미있다. 우리에 갇힌 동물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동물원 폐지 의견도 공감하지만 동물들의 모습과 행동을 관찰하는 것이 흥미롭다. 

얼마 전 동물원에 갔을 때 동물행동 풍부화라는 푯말을 발견했다. 

 

"동물원 동물에게 자연과 유사한 환경을 만들어주어 자연스러운 동물의 행동을 보여주도록 하는 동물 복지 프로그램입니다."

 

동물원 측에서 먹이에 정성을 들이고 인지, 감각, 사회성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적절한 환경을 마련해 주고 있었다.

 

 

동물원은 동물을 인간처럼 보이게 하는 동시에 인간을 동물처럼 보이게 하여 마음을 어지럽힌다. "원숭이는 인간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다." 비슷한 점이 몇 가지나 보이는가?" 물론 너무 많이 보여 마음이 편치 않을 정도다.  

 

1842년 5월 빅토리아 여왕은 레전드 파크 동물원을 방문한 뒤, 일기에 캘커타에서 온 새 오랑우탄 이야기를 적어 놓았다. "아주 멋지다. 차도 만들어 마신다. 하지만 고통스럽게도 또 불쾌하게도 그는 인간적이다."

 

 

 

 

수천 킬로그램의 무게가 나가는 하마, 크고 튼튼한 뒷다리를 가진 캥거루, 가지 위에서 노래하는 앵무새, 활짝 핀 목련 아래 우아하게 휴식을 취하는 얼룩말 모습 위로 사람을 입혀보면 묘하게 어울린다.

 

 

 

 

이번 동물원 방문에서는 독수리가 인상적이었다.

3m에 달하는 날개를 펼쳐 날갯짓 하나 없이 기류를 타는 독수리의 크기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한 참을 넋 놓고 바라보다 구역을 빠져나오며 본 독수리의 뒷모습은 다리까지 망토를 걸친 사람의 모습이었다.

누가 동물이고 사람인지 모를 일이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는 할 일 없이 자신들을 구경하러 온 보잘것없는 존재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희귀종이 되고 우세한 동물들이 살아남아, 인간을 우리에 가두어 놓고 풍선들고 나들이 올 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기괴한 짓들이 기본적으로 단순한 동물적 욕구-- 먹이, 서식지,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후손의 생산 등을 향한 욕구-- 의 복잡한 표현이라고 보게 되면 마음이 편해지기도 한다. 이러다 레전드 파크 동물원의 1년 자유입장권을 끊을지도 모르겠다.

 

 

 

"인간도 사랑을 추구하고, 장래 파트너가 될 사람과 카페에서 잡담을 나누고, 아기를 가지고, 두더지나 개미와 비슷한 선택의 과정을 겪으며 그런 생명체보다 별로 더 행복하지도 않다."-쇼펜하우어

 

인생에 많은 것을 기대하고 행복 사냥에 목숨을 걸기엔 우리의 육체는 너무 나약하고 삶은 짧다.

겸허하게 욕심을 내려놓고 살아가야 한다. 

 

 

 

그의 작품이 궁금하다면, 이 책으로 입문이 딱이다. 부담 없이 그의 핵심을 알아챌 수 있다.

 

 

 

 

 

 

 

 

 

 

문학동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읽어야 한다는 약간의 의무감으로 얼마간의 시간을 보낸 후 드디어 책과 마주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그녀의 친필 사인이 있었다. 마치 뽑기에서 행운권이 당첨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작별하지 않는다.

무엇과 작별하지 않는 걸까?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 뻔뻔스럽게 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그녀의 소설 <소년이 온다>는 학살로 인해 죽어간 자들,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과 아픔을 절절하게 그려내고 있는 또 하나의 기록 소설이다. 여러 개의 사적인 작별 후, 유서를 준비하고 있던 경하는 작가의 분신처럼 이야기의 시작을 알린다.

 

인선은 제주 사건으로 가족을 잃고 아슬아슬하게 살아왔던 엄마의 죽음 후, 엄마의 끔찍했던 시절과 가족의 유골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사실을 알게 된다. 경하와 인선은 믿을 수 없는 이 사건에 대한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연대를 느끼게 된다. 광주와 다르지 않은 잔인한 역사에 대한.

 

 

 

 

제주 4.3 사건.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이어진 7년 이상의 길고도 긴 지옥 같은 세월이었다.

동서로 긴 타원형의 섬, 한라산을 포함해 해안선 5km 안쪽 해당지 통행자들을 폭도로 몰아 이유 불문하고 사살했다.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 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 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이 섬에서 했던 그대로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휴전된 것뿐이었으니까. 휴전선 너머에 여전히 적이 있었으니까. 낙인찍힌 유족들도, 입을 떼는 순간 적의 편으로 낙인찍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침묵했으니까. 골짜기와 광산과 활주로 아래에서 구슬 무더기와 구멍 뚫린 조그만 두개골들이 발굴될 때까지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고, 아직도 뼈와 뼈들이 뒤섞인 채 묻혀 있어.

 

 

 

 

책의 공간적 배경은 눈과 추위 그리고 어둠이다.

 

눈(雪)

가벼운 눈에도 무게가 있다. 육각형의 결정이 있다. 따스함과 보드라움이 있다.

 

물이 순환한다면,

과거 학살당했던 사람들의 차가운 얼굴 위에 내려 녹지 않던 눈이, 경하와 인선의 머리와 얼굴 위에 떨어져 녹아내리고,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손등에 살포시 내려앉는 눈과 다르다는 법이 없다. 

 

바람과 해류도 순환한다면,

베트남에 있는 한국군 성폭력 생존자의 집 마당에 쏟아지는 비와, 열여섯 나이 눈 덮인 만주 벌판을 통과해 독립군 캠프로 돌아가던 중 동상으로 발가락 네 개를 잃어버린 치매 노인의 시선에 흩날리는 눈과, 제주의 우듬지에서 빛을 받아 반짝이는 눈 그리고 서울 천변에 내리는 눈이 그때의 그 눈이 아니라는 법이 없다.

 

 

 

 

섬을 떠나 있던 십오 년 동안 아버지가 저 건너편을 지켜봤다고 그날 엄마는 말했어. 어떤 밤에는 환하게 달이 뜨고, 그 빛을 받는 동백 잎들이 반들반들 윤이 났다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게 아니다. 제주, 광주, 서울, 대한민국 그리고 온 세계는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순환하는 바람처럼 눈처럼 비처럼, 지구 상에서 벌어졌던 일들,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한 개인의 얼굴에도 불고 내리고 때리고 쌓인다. 

 

몰라서도, 간과해서도, 잊어서도, 체념해서도 안 되는 사실들이 있다. 알아야 하고, 알려야 하고, 함께 아파해야 하고, 반성해야 하고, 사과해야 하고,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다.

 

제목 <작별하지 않는다>는 이 사건을, 이 만행을, 무고하게 희생된 자들의 아픔을 잊지 않겠다, 잊지 말자는 결의에 찬 호소로 들렸다.

 

 

 

 

책상 한 구석, 4월 16일에 노란 리본이 인쇄되어 있는 달력을 본다.

벚꽃 소식에 들렸던 현충원, 김대중 대통령 묘 입구 비석에 새겨진 문구를 생각한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고, 통일에의 희망이 무지개같이 피어오르는 나라를 만들 것입니다."

 

 

 

부디, 우리 모두 그 무언가와 작별하지 않기를............

 

 

 

 

 

 

 

 

 

 

은행나무

 

 

 

 

 

이 소설은 '행복'에 대한 이야기다. 완전한 행복에 이르고자 불행의 요소를 제거하려 '노력'한 어느 나르시시스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_<작가의 말 중>

 

나르시시스트, 자기애성 성격장애.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자신의 부와 명예, 권력을 손에 쥐고 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다.

재산을 불리기 위해 위해 범법을 일삼는 기업들, 명예를 얻기 위해 학력을 위조하는 유명인들, 권력을 얻어 보겠다고 타인의 생을 파탄 내는 정치인들................. 

 

내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잘못된 욕심이 끔찍하고 비상식적인 세상을 만들고 있다.

 

자기애와 자존감은 살아가며 꼭 필요하다.

그것을 지키기 위한 한 개인의 고통스러운 투쟁 또한 시시각각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중요한 만큼, 타인의 행복과 안전 또한 보장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주인공 신유나의 행복 공식은 뺄셈이었다.

 

아니 행복은 덧셈이 아니야, (........) 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거. 
(.........) 나는 그러려고 노력하며 살아왔어.

 

아내의 대학시절 남자와 유학 시절 남자와 아버지와 전남편, 그리고 노아, 행복은 가족의 무결로부터 출발한다고 믿는 아내의 신념. (.........)
남자 넷은 어떤 이유로든 아내를 불행하게 만든 사람들이었다. 변심, 해고, 이혼, 그 어떤 이유로든 간에.

 

그녀의 완전한 행복을 향한 노력에 타인은 없었다. 다른 사람의 의견도, 행복도, 목숨도 중요하지 않았다.

행복이 뺄셈이라면,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거라면 답은 정해져 있을 것이다.

유나의 마지막 선택은 결국 답을 알아냈기 때문이었을까?

 

 

 

 

남편 최은호의 행복은 아내와는 달랐다. 찰나의 행복을 덧셈해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 더도 덜도 아닌 딱 그만큼만 행복하게 사는 것이 그의 행복이었다.

 

행복한 순간은 하나씩 더해가면, 그 인생은 결국 행복한 거 아닌가.

 

알아서 기는 게 최선이었다. 눈먼 밀월이 끝났음을 인정하나, 두 번째 결혼만큼은 망치고 싶지 않은 쪽이. 
실패가 인생의 패턴이 될까 봐 두려운 인간이. 언제나 모든 일에서 가장 쉬운 길을 택하는 자가.

 

 

 

 

두 인물 모두 행복을 손에 쥐는 데에는 실패했다.

행복은 덧셈도 뺄셈도 아니었다. 행복은 수학 문제지에 답을 내어 적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행복해?" 

아내는 무표정하게 대답한다. 

"아니 나는 참 운이 없어."

 

운이 좋은 사람은 행복을 차지할 수 있을까. 완벽하게?

운이 따르던 그렇지 않던, 소설의 제목 같은 완전한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한 순간은 찰나이고 고통은 이내 밀려온다. 완전한 행복을 이루며 살 수 없다는 걸 하루하루 살아가며 알게 된다. 

 

그렇다고 인생은 불행의 연속도 아니다. 인생의 줄에는 행복과 불행이 연달아 지나간다.

슬퍼서 아름다운 순간, 아름다워서 고통스러운 순간, 행복인지 불행인지 모를 감정도 혼란스럽게 우리 마음에 내려온다. 

 

그러니 욕심내지 말기를............ 나의 행복을 위해 타인을 내리치는 행동들을..........

 

 

 

정유정의 소설을 읽으며, 상황을 머릿속에서 그려내는 나를 발견한다.

유머러스하고 과장되기도 한 표현들, 지극히 사실적인 묘사의 글을 읽으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래서인지 몰입감 최고다. 흥미롭게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정말 아무런 이유 없이 펑펑 울고 싶을 때가 있다. 난 이것이 메마른 가슴을 적시고 싶어 하는 욕망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설에 앞선 '작가의 말'부터 울음은 밀려왔다.

세월이 갈수록 울음이, 설움이, 슬픔이 고여간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이름, 아버지.

이 책은 가족에게 한없는 사랑의 마음으로 희생하며 살지만, 고독과 외로움으로 스러져가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췌장암.

췌장의 위치가 숨겨져 있어 발견도 치료도 어려운 병. 

 

지금껏 소박하고 성실한 삶이 전부였던 정수는 길어야 5개월, 사형 집행일을 선고받는다.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절실한 외로움에 더 견딜 수 없었다.

 

죽음이라는 그 자체보다 오래지 않아 그렇게 영원히 혼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남은 얼마간도 어쩌면 영원한 외로움에 대한 연습 일지 모른다는 사실이 지금의 답답함과 혼란함, 그리고 두려움과 무력감의 실체였다.

 

 

 

우리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 보지만 상황이, 가난이, 능력이, 성정이, 불운이, 꿈꾸었던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한다.

사람답게 사랑하며 살아가려 애를 쓰지만 저마다의 사연으로 내 생각대로 관계가 맺어지지 않는다.

 

정수 역시 하루도 허투루 살지 않았지만 결국, 처참한 처지에서 혼자 두려움에 떨며 외로워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아내, 자식, 형제, 친구, 직장동료, 과거, 이름.......... 심지어는 자신까지, 가졌다는 그 모든 것이 결국은 멍에였다. 그 실타래처럼 엮인 작은 멍에 하나하나가 모두 고뇌와 미련의 시작이었고 화두였다. 후회스러웠다.

 

소중하지만 짧고 허망한 삶 가운데, 자신을 위해 살지 못하고 멍에를 이고 살아가는 아버지들의 생은 가엾고 초라하다.

마약과 같은 진통제와 몽롱한 잠으로 고통을 견뎌내면서도 정수는 아내와 자식들 걱정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린다.

 

 

 

인생에는 분명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그 무엇이 있어. 그게 서푼짜리 자존심이 됐든 알량한 오기가 됐든, 그거나마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네 인생이 너무 가엾지 않겠는가? 

 

정수는 결국 의사인 친구 남박사에게 살인 교사를 간절히 호소한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함이 아닌, 더 이상 가족을 괴롭힐 수 없다는 간절함으로.

 

 

 

그의 진심을 오해하고 그를 외면해왔던 시간들을 후회하며 아내 영신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결국 사랑은 용기였다. 사랑을 얻는 용기만큼 사랑을 보내는 용기도 필요했다. 그것이 영원한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 가슴이 트였다. 이제는 보낼 수 있었다. 혼자인 것도 두렵지 않고 고독도 무섭지 않았다. 진정한 사랑이 영원히 있는데 그런 고독이나 두려움이 무슨 두려움이 될 것인가.

 

영신의 생각처럼 죽은 자나 살아남은 자 모두 영원한 사랑을 정말 얻을 수 있는 걸까?

얼마전 사랑하는 아빠와 작별한 나는, 진정한 사랑이 영원히 있음을 느끼며 정말 고독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걸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 나오는 구절이 생각났다.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노르웨이의 숲>

 

 

 

 

결국 인간은 함께하던 그 누구를 잃어버리는 순간부터 평생을 짊어져야 할 고독의 무게를 느끼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쓸쓸하고 외로운, 죽음마저도 고독한 아버지라는 이름의 무게.

 

그를 보내고 난 슬픔은 치유되지 않는다. 세월이 무수히 지나면 잊힐까?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이 올까? 또 다른 슬픔이 다가왔을 때 그것은 겹이 되어 더욱 진해질 것만 같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또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그렇게 소박하게 사는 것, 그렇게 호흡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 그것을 해야 한다.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노들 서가에서 발견한 이 책은 제목만 보고 홀린 듯 꼭 봐야겠단 생각을 했었다.

밀리의 서재에 검색해 보니 행운처럼 책의 표지가 떴다.

 

 

 

 

1. 끝

 

대필작가로 생계를 이어가던 범우는 자서전을 대필해 주었던 HT기업 나 회장의 도움으로 홍보실에 스카우트된다.

그는 입사 전 건강검진 과정에서 대장암 4기 판정을 받고 나락으로 떨어진다. 

 

갑작스러운 대장암 판정은 세월에 묻어두고 살았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다시 소환했다.

 

 

무능력하고 술에 찌든 남편, 극심한 생활고, 말썽을 피우다 가출한 동생은 그렇게도 엄마를 고통스럽게 했었다.

냉탕과 온탕을 오갔던 엄마는 그 스트레스를 범우에게 매질하며 풀었고, 그런 엄마를 그는 원망하며 살았다.

 

엄마의 자살 이후, 그는 그 잔인했던 이별을 잊으려 안간힘을 썼다. 살기 위해서.

 

슬픔을 느낄 새도, 위로를 받을 새도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남은 사람들의 일상을 제자리로 돌리기 위해 빠르게 어머니의 흔적을 지워야 했다.

 

어머니를 향한 연민보다 원망이 커질수록 괴로움이 크기도 줄어들었다.

 

 

 

 

2. 기억

 

HT 나 회장은 범우에게 회사에 입사해 치료에 필요한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그는 AI 음성 인식 기술을 연구하는 곳에서 경선의 도움을 받아 엄마를 AI로 구현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경선은 AI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과 자연적으로 소통하고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것이라도 말했다. 이는 인간의 인지, 감정, 기억, 학습 등을 담당하는 두뇌 신경망을 기술로 구현했을 때 가능해진다.

 

그러기 위해서 엄마에 대한 다양하고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해야 했다. 

엄마에 대한 기억을 더듬을수록 그녀에 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진한 후회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3. 기록

 

범우는 어머니가 자살한 옛 집, 오래된 벽장 안에서 엄마의 일기를 꺼내 읽게 된다. 그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엄마의 젊은 시절과 마주한다.

 

좋아하는 남자가 있어 마음 태웠고, 무능력한 아버지와의 결혼을 후회하며 살았지만 그를 사랑하며 기다렸고,  몸이 불편했을 때조차 시어머니의 병시중을 들어야 했었고, 예쁜 옷을 입고 싶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했던 평범한 사람이었고, 돈이 없어 첫 아이를 인큐베이터에 넣어 보지도 못하고 떠나보낸 후 한없이 괴로워했었던 엄마.

자신에게 모질게 굴었지만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있던 일기장.

 

 

나는 어머니가 그런 당연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여자라는 사실을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

 

나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된 어머니의 진심 앞에서 눈물을 쏟아냈다. 눈물이 일기장 위로 떨어져 번졌다.

 

기댈 언덕이 모두 사라진 어머니는 홀로 시들어갔을 것이다. 가족 누구도 어머니가 시들어가는 줄 몰랐다. 나는 끝까지 방관자였다.

 

가진 건 많지 않아도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가정을 꾸미는 것. 일기에 드러난 어머니의 희망은 소박했다.

 

 

세상을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고 싶었던 어머니는 결국 자신만을 위한 결정을 하게 된다. 죽음으로 고통에서의 해방을 꿈꾸었던 것이다.

 

 

 

 

4. 고백

 

범우는 어머니를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는 아버지의 출장지로 발길을 돌린다.

 

남산에서 처음 만난 엄마에게 한눈에 반해 구애했던 아버지.

아무 대책 없이 동거를 시작했지만, 아빠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았다. 자신만을 믿고 따라온 어머니를 배려하지 못한 아버지는 무책임했다.

 

그러나 아버지 또한 철없고 무지했던 시절을 후회하며 엄마가 죽은 공간에서 홀로 세월을 이겨내고 있었다.

범우의 대장암 소식에 그의 마음은 무너진다.

 

 

 

 

5. 증언

 

범우는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찾아 이모와 막내 외삼촌이 계신 곳으로 떠난다.

 

사 남매 중 가장 똑똑하고 영리했던 엄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수재, 그림을 잘 그려 전국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았던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그에게 충격적인 사실로 다가왔다.

그러나 경제활동을 돕기 바랐던 부모님의 강경함은 엄마에게 초졸이라는 초라한 학력만 허락했다. 그녀는 결국 집을 나와 서울로 달아나듯 떠난다.

 

엄마의 초등학교에서 발견한 그녀의 우승 트로피를 안고 범우는 무너진다.

" 엄마.........., 참 잘했어요............ 정말 잘했어요..............."

 

 

 

 

6. 시작

 

어머니의 기일, 산소에서 범우는 비욘드 앱을 실행한다.

AI로 구현된 엄마와 범우는 각자 외롭게 보냈던 그 시간들을 서로 어루만져 주고 아픈 곳을 쓰다듬어 준다.

 

그는 삶의 끝에서 삶의 시작을 꿈꾸게 된다. 소설 밖에서 그는 대장암 치료를 적극적으로 하며 삶을 향해 몸부림치지 않을까?

 

 

"만남만큼 중요한 게 이별이야. 이별을 소홀히 하지 마" 

내가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 떠난 여정은 과거의 어머니와 제대로 이별하는 동시에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저는 그 당연한 것을 모르고 살았어요. 죽은 사람의 흔적을 뒤늦게 끌어모으며 그리워하는 일보다, 산 사람과 직접 만나 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오해를 푸는 게 훨씬 쉬운 일이더라고요. 그걸 이제야 깨달았어요.

 

 

 

 


 

 

나의 부모님의 어린 시절, 십 대와 이십 대의 젊은 나날들, 결혼과 출산 육아로 먹고살기 바빴을 삼사십 대.

나는 그때 그분들의 삶에 대해 시간을 들여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나의 큰 아이가 태어나고 오십 대 초반에 딸을 위해 손자를 돌봐야 할 상황이 되셨던 엄마. 

그때부터 부모님에 대한 나의 기억은 두 아이의 할머니, 할아버지 모습으로 강하게 기억되었다. 

 

어머니의 삶과 마음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이에 아예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어머니는 지극히 당연한 현존재- 즉 과거가 없이 오로지 현재적으로만 나에게 의미를 갖는 존재 - 로 여기는 인간들이 우리 시대의 자식들이 아닐지. _ 장경렬 (작품 해석)

 

 

우리들이 아무런 의문도 없이 너무도 당연한 우리네들의 현재적 삶의 일부로 여기는 어머니를, 사랑한다는 간단한 말조차 마음 따뜻하게 해드리지 못하는 못난 자식들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고 끌어안는 우리들의 어머니에 대해 새롭게 깊이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정진영의 작품인 것이다. _ 장경렬 (작품 해석)

 

 

 

 

이 책을 읽는 중,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와 이별했다.

이 책 때문일까?

나에게 남아있는 아빠에 대한 기억과, 장례 과정에서 들은 수많은 이야기들은 나를 몇 배로 힘들게 한다.

그의 인생의 낭만과 따뜻함, 외로움과 슬픔 모두가 그립다. 

 

나도 나의 아버지에게 말하고 싶다.

 

"아빠.......... , 참 잘했어요........... 정말 잘 살았어요.......... 사랑해요............."

 

 

 

 

 

 

 

 

 

 

밝은 세상

 

 

기욤 뮈소의  <사랑하기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읽을 수 있는 재미난 소설을 찾는 분들께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몰입감 최고, 이야기의 반전, 감동과 사랑이 있는 소설이다.

 

플래시 백.

주인공들의 회상 장면들은 마치 영화 시나리오처럼 느껴져 흥미를 더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의 상처가 있다. 

자기 파괴의 충동은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상처받은 영혼을 시시때때로 괴롭힌다.

 

소설이나 영화의 소재로 사용되는 어두운 세계의 이야기, 우리와 관계없어 보이는 이야기들도, 이 지구 상 어딘가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광주 인화학교의 장애아동 성폭행 사건을 고발한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는 실제 사건보다, 같은 제목의 영화는 소설보다 수위가 낮게 표현되었다고 하니, 현실은 상상 못 할 일이다.

 

세상은 점점 야만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복수와 용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위탁가정에서 어렵게 삶을 이어가고 있던 커서는 이름도 모르는 마약 딜러들에 의해 삶을 파괴당했다.

단지 공부를 하고 싶었던 사려 깊은 소년은 몸 절반 이상의 화상으로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2년여의 시간을 보낸다.

병원에서 퇴원 후, 처절한 복수를 실행한 커서는, 이후 성공적인 정신과 의사가 되어 많은 이들을 도우며 살게 된다.

 

그러나 그의 안에 머무는 상처와, 복수에 대한 죄책감은 그의 영혼을 고통 속에 살아가게 한다. 형사의 눈을 피해 살아가는 장발장처럼 말이다.

그의 친구 마크에게 말했던 신념 '아무리 절박해도 우리가 가진 이상과 가치만큼은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돼'라는 말을 그 자신이 저버렸던 것이다.

 

복수를 꿈꾸던 또 다른 소녀 에비.

엄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의사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던 가난한 소녀.

 

커너의 고통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마크는, 복수로 엄마가 살아 돌아오지도, 그녀의 괴로움을 없애지도 못할 것이며 인생이 망가질 수도 있다고 간곡히 이야기한다. 

 

용서하라는 것이지 무조건 잊으라는 뜻은 아니야. 죄 자체를 없었던 일로 하자는 뜻도 아니야. 복수는 증오심을 키울 뿐이지만 용서는 널 자유롭게 해 줄 거야.

 

용서하는 건 너 자신을 위해서야, 에비.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그렇다면 용서가 정답일까?

 

인화학교에서 벌어진 그 끔찍한 사건을 용서할 수 있을까?

이유 없는 폭행으로 피해자를 신체장애인으로 만들고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용서해야 할까?

달리는 자동차로 나의 가족을 죽게 만들고 뺑소니를 감행한 사람을 실수로 벌어진 일이라고 용서할 수 있을까? 

돈과 명예에 눈이 멀어 부조리한 일을 일삼으며 약자들을 짓밟는 사람들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피해자들 누구라도 마음속으로 그들을 죽이는 처절한 복수를 수없이 실행할 것이다. 실제로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들 누가 돌을 던지며 비난할 것인가.

 

그러나 두 사람을 불태워 죽인 커너의 복수는 결코 그를 편안하게 만들지 못했다. 동기가 어떠했던 올바른 방법이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가해자들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았다면, 복수는 개인적으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인 도움을 받기엔 세상의 법과 질서가 돈 있고 빽 있고 명예 있는 사람들 편이다.

 

 

 

그러니 용서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에비의 복수를 대신해 주겠다며 총을 꺼내 든 커너.

 

커너는 이제 자신의 운명이 에비의 두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 분쯤 지났을까. 에비가 난간에 기대 서있는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한마디 말도 없이 살짝 커너의 손에서 권총을 빼앗아갔다. 그의 인생에 깊은 상처를 남긴 사건의 마지막 증거물을........

 

에비는 총을 허드슨 강에 힘껏 던짐으로 자신을 구함과 동시에, 커너 역시 살릴 수 있었다.

에비를 새로운 삶으로 이끌었던 건 바로 커너의 사랑 덕분이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책을 읽은 후, 이 제목은 내용과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은 듯했다. 제목에 대해 생각하며 다시 읽어보니 나름대로의 해석이 생긴다.

 

딸을 잃은 마크와 니콜, 무절제한 삶을 살았던 재력가의 딸 앨리슨, 의사 커서 그리고 에비.

그들 모두 용서와 사랑의 힘으로 과거의 삶을 딛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용서와 화해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하고, 소중한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삶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의 사랑 덕분에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을 할 힘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 덕분에, 사랑을 위해서 말이다.

 

 

 

잘 살아라 그게 최고의 복수다. - 탈무드

 

 

 

 

 

 

 

 

 

 

문학동네

 

 

 

 

 

지난해, 최은영 작가의 장편을 한 서점에서 발견하고 꼭 읽어야지 했었다. 집 책꽂이에서 꺼낸 책도, 중고서점을 헤매다 구한 책도, 도서관 바코드가 붙은 책도 아닌 새 책으로 만나게 되어 너무 좋았다.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 마음이 아리다. 눈시울이 붉어진다. 나의 감정을 묘하게 휘감아 울리는 감동이 있다.

판타지도 로맨스도 추리극도 자극적인 내용도 아닌데, 읽는 내내 빠져들었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을 겪으며 현재까지 이어져 온 100년의 세월 속에서 고조할머니, 증조할머니,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나에게까지 이어지는 그 서사는 눈물겹게 애틋하고 슬프다.

 

나의 경우 고조할머니와 증조할머니의 낡은 흑백사진을 본 적도, 이야기를 들은 기억도 나질 않는다.

어린 시절 강화도에 가면 걸어서 채 오분이 되지 않던 거리에 위아래로 사시는 두 할머니 댁을 마음대로 드나들었다.

작고 조용하고 모든 일을 천천히 하셨던 윗집 친할머니와, 씩씩하게 한복집을 운영하시며 유쾌하셨던 그러나 어렸던 나에게도 친손주만 예뻐한다는 느낌을 강렬하게 주셨던 아랫집 외할머니.

 

지금은 뵐 수 없는 두 분과 많은 추억을 간직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희령을 여름 냄새로 기억한다. 

 

열 살, 희령 바닷가 근처 할머니 댁에 며칠 머물렀던 지연.

엄마와 할머니 사이가 좋지 않아 연락이 끊기고, 그녀의 결혼식장에도 올 수 없었던 할머니를 잊고 살았다.

서른두 살, 이혼 후, 생채기 난 마음을 부여잡고 현실을 피해 희령으로 온 지연은 우연히 할머니를 재회하고, 의지할 곳 없었던 그녀는 할머니에게 조심스럽게 마음을 열게 된다.

 

나는 우리 사이의 난감함, 어색함, 어려움이 나쁘지 않았고 그런 감정들의 바닥에 깔린 엷디 엷은 우애가 신기했다.

 

 

 

 

할머니로부터 듣게 된 이야기들로 이 책은 채워진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어려운 시대를 지나오며 삶을 이어온 사람들의 고단함이 안타깝다. 남성은 남성대로, 여성은 여성대로 말이다. 백정의 자녀이기 때문에 당했던 멸시,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받았던 박해, 전쟁으로 무참히 희생된 사람들, 먹고살기 위해 피난길에 나선 사람들, 일본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에 희생된 사람들,................

 

그리고 하찮은 존재로 여겨졌던 여성들에 대한 인식은 억압된 여성들의 울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나 역시 여전히 그런 잔재들이 남아 있는 시기에 결혼을 했고 아픈 시간들이 없진 않았다.

 

남편은 나의 고통에 관심이 없어. 그녀는 생각했다. 일말의 관심조차 없어. 그런데 왜 그랬을까. 왜 내가 군인들에게 잡혀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말했던 걸까. 그것이 그녀의 평생의 의문이었다.  
허영심의 힘이 얼마나 센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할머니는 기대하고 실망하는 대신 그 안에 주저앉아 포기하는 편을 선택했다. 그 편이 훨씬 더 쉬웠기 때문이었다. 남편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리고 체념하고 나니 그런 삶도 견딜 만했다.

 

'맞서다 두 대, 세 대 맞을 거, 이기지도 못할 거, 그냥 한 대 맞고 끝내면 되는 거야.' 나는 그 말을 하던 엄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 '너를 괴롭힌다고 똑같이 굴면 너도 똑같은 사람 되는 거야.' '그냥 너 하나 죽이고 살면 돼.' 패배감에 젖은 그 말들. 어차피 맞서 싸워봤자 승산도 없을 거라고 미리 접어버리는 마음. 나는 그런 마음을 얼마나 경멸했었나.

 

증조할머니 삼천이, 할머니 영옥, 엄마 미숙 그리고 나 지연에 이르기까지 나의 감정을 표현하고 권리를 주장하며 존엄한 삶을 누리지 못한 채, 한계를 넘어서면서 까지 인내했던 세월은 대물림되고 있었다. 

누구의 잘못인지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을 원망하면서..........

 

그런 생각을 강요하는 엄마가 나는 미웠다. 그런 식의 굴욕적인 삶을 원하지 않는다고 저항했다. 하지만 왜 분노의 방향은 늘 엄마를 향해 있었을까. 엄마가 그런 굴종을 선택하도록 만든 사람들에게로는 왜 향하지 않았을까. 내가 엄마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났다면, 나는 정말 엄마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내 생각처럼 당당할 수 있었을까. 나는 엄마의 자리에 나를 놓아봤고 그 질문에 분명히 답할 수 없었다. 

 

 

 

 

시대에 굴복하던 예전과 달리 지연은 그 부당함을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내가 나를 속이는 것만큼 쉬운 일이 있었을까. 이혼 후 내가 겪었던 고통스러운 시간은 남편의 기만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에게 대한 나의 기만의 결과이기도 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돌이켜보니, 그중 나를 더 아프게 한 건 나에 대한 나의 기만이었다.

 

나는 누구에게 거짓말을 했나. 나에게, 내 인생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알고 싶지 않아서, 느끼고 싶지 않아서. 어둠은 거기에 있었다.

 

 

 

 

할머니에게 느꼈던 따뜻한 감정과는 다르게, 지연과 그녀의 엄마 미선 사이에는 건조함이 느껴진다.

눈물을 쏟으며 보는 영화나 연극처럼 모녀간의 관계는 끈끈한 무엇이 있다. 그러나 그것도 철이 들어 부모를 이해할 수 있을 때, 부모는 아무런 욕심 없이 자식의 존재를 온전히 사랑할 때 생기는 것이 아닐까?

무수한 세월을 함께 지내며 느끼는 서운함, 미움, 분노 등은 사랑의 마음을 가린다.

 

나는 엄마를 알지 못했다. 명희 아줌마보다 더, 할머니보다 더, 그리고 어쩌면........... 아빠보다 더.

 

"나는 미선이가 겪은 일을 몰라. 미선이 말고는 누구도 모를 거야. 그런데 그 애에게 그렇게 함부로 말했으니.........."

 

비가시권의 우주가 얼마나 큰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한 사람의 삶 안에도 측량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할 테니까.

 

사람은 저마다 다르다. 그 한 사람의 역사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들의 비밀을, 상처를, 아픔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할머니에게 벌을 주듯이 희령을 떠난 엄마. 

그녀의 태도에 상처받은 할머니의 마음 그리고 분노한 할머니가 지연의 엄마에게 어떤 공격성을 드러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이상한 일이야. 누군가에게는 아픈 상처를 준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게."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쪽만을 보여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서 우리는 짐작으로 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

 

장 그리니에의 <섬> 중에서

 

 

소중한 책 <섬>에 나오는 이 구절은 사람들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각자의 마음 깊이 숨겨진 보석을 나는 볼 수 없기에, 그들을 더 존중하며 연민을 느끼게 해 준다. 

할머니와 지연도 알지 못했던 미숙의 상처와 눈물을 보려고 노력하며 그녀를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지연은 상처를 잊기 위해 오히려 그녀의 고통을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했다. 더 큰 슬픔을 마주하며 그녀는 차즘 회복할 수 있게 된다.

 

별거 아닌 듯한 그 마음이 때로는 사람을 살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깨에 기대는 사람도,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도. 구름 사이로 햇빛이 한 자락 내려오듯이 내게도 다시 그런 마음이 내려왔다는 생각을 했고, 안도했다.

 

삶의 회복과 치유는 크고 거창한 것에서 오지 않는다.

나를 귀애하는 누군가의 마음, 나를 바라보는 햇살 같은 미소, 내 이름을 불러주며 잘했다 칭찬해주는 한마디, 함께 있으면 전해오는 그 따스함,..............

나를 향해 내려오는 햇빛 한 자락에 살아갈 힘을 또 내 보는 것이 아닐까. 

 

처음에는 그 크기에 압도되었지만 자주 보고 지내다 보니 바다의 작은 부분들에 정이 들었다. 비가 온 다음날의 바다 냄새, 백사장으로 밀려오는 물의 소리, 하얀 포말, 얇은 조개껍데기 안쪽의 부드러운 감촉, 밀려 나온 해초 더미들, 모래사장을 걸을 때의 느낌, 해가 질 때 변하는 수평선 너머의 색깔............

 

 

 

 

세대를 넘나들며 겪는 주인공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관계의 어긋남에 깊은 슬픔을 느끼며 나는 위로를 받는다.

슬픔을 위로하는 슬픔. 

 

이 책이 가진 힘이다.

 

 

 

 

 

 

민음사

 

 

 

 

서른일곱 살, 그때 나는 보잉 747기 좌석에 앉아 있었다.

 

함부르크 공항에 막 도착한 비행기 안에서 비틀즈의 <Norwegian wood>가 흘러나오고, 그것과 함께 떠오른 와타나베의 옛 추억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1969년 가을, 나는 곧 스무 살이 될 참이었다.

 

기성세대가 이끌어낸 눈부신 성장과 새로운 세대가 불러일으킨 저항문화가 공존했던 1960년대 말 일본.

사상의 대립과 혼란 속에 살아가고 있었던 많은 젊은이들은 소란함에 발을 담그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다지 진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뭘 보고 뭘 느끼고 뭘 생각해도, 결국 모든 것이 부메랑처럼 나 자신에게로 돌아오고 마는 나이였다. (........) 주변 풍경에 관심을 기울일 마음의 여유 같은 건 아예 없었다.

 

그 시절이 지난 후, 전부인 것 같았던 것들은 상실되어 조각난 파편들로 잊히고 풍경만이 기억된다. 소름 끼치게 공허하고 슬프다.

 

나는 고개를 들고 북해 상공을 덮은 검은 구름을 바라보며 지금까지 살아오는 과정에서 잃어버렸던 많은 것에 대해 생각했다. 잃어버린 시간, 죽거나 떠나간 사람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추억.

 

가장 사랑했던 친구 기즈키의 자살 이후, 와타나베와 기즈키의 여자 친구였던 나오코는 위태로운 삶을 이어간다.

토요일 신주쿠의 번화한 밤, 술에 취해 흔들리는 정체 모를 분위기처럼 허공을 떠돌며 방황하는 젊은 나날들이 이어진다.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 죽음은 나라는 존재 속에 이미 갖추어졌고, 그런 사실은 아무리 애를 써도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 열일곱 살 5월의 어느 날 밤에 기즈키를 잡아챈 죽음은, 바로 그때 나를 잡아채기도 한 것이다.

 

존재의 뒤틀림. 다리미로 펴 반반해진 천처럼 구김살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성격과 경험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모두 뒤틀림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달프고 불행하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경험을 공유한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혼란 속에서 서로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와타나베는 요양원에 있는 나오코에게 편지를 쓰고, 찾아가기도 하며 함께 극복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바람을 이루지 못한다.

 

 

 

죽음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잠겨 있다. 그것은 분명 진실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죽음을 키워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나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결국 그녀의 죽음은 극도의 아픔과 방황의 끝으로 그를 몰아세웠지만, 살아있는 자는 어찌 되었던 또 살아가야만 했다.

 

 

 

고뇌하지 마요. 가만 내버려 두어도 흘러가야 할 곳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갈 것이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에게 상처를 주어야 할 때는 상처를 주게 되는 법이니, 좀 잘난 체를 할게요. 와타나베도 인생의 그런 모습을 이제 슬슬 배울 때가 되었어요. 당신은 때로 인생을 너무 자기 방식에만 맞추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정신 병원에 들어가는 게 싫다면 마음을 조금 열고 그냥 흐름에 몸을 맡겨요. 나처럼 무력하고 불완전한 여자도 때로는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멋진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거든요. 정말이에요, 이거! 그러니 더 많이 많이 행복해져요. 행복해지려고 노력해요.

 

나오코의 요양원 룸메였던 레이코의 편지는 마음을 울린다.

상처를 안고 흐르는 세월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함.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이라는 존재에 내재된 일이며 결코 바꿀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상처를 딛고 행복을 찾아 살아갈 수 있는 끈질긴 강인함도 있음을 깨닫는다.

 

 

 

'봄날의 곰'처럼 다가온 미도리라는 소녀. 그녀 역시 삶의 뒤틀림이 있었지만 생명력이 넘치는 발랄한 소녀였다. 

그는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서 애타게 미도리를 불렀다.

 

 

 

567 페이지의 긴 장편을 두 번 읽으니 꽤 오랜 시간이 지나갔다.

우울한 내용, 일반적이지 않은 성문화가 뒤섞인 글이 조금은 불편하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소설 전체에 나오코가 비틀즈의 <Norwegian wood>을 들으면서 느꼈던 춥고, 외롭고, 깊은 숲 속을 홀로 헤매는 듯한 느낌이 잘 스며있었다.

슬프지만 이 곡을 좋아했던 나오코, 그리고 묵묵히 혼자 모든 것을 참아내고 있었던 와타나베처럼 격동의 시기, 혼란스러운 청년들의 방황을 사무치게 느낄 수 있었던 소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제목 <노르웨이의 숲>과, 비틀즈의 노래 제목과 가사 <Norwegian wood>는 해석의 차이로 의견이 분분하다. 원곡의 wood가 가구인지, 나무인지, 숲인지 모호하지만, 난해성으로 소설의 느낌을 더 드러내는 제목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는 건 젊은이들 뿐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잃어가며 살고 있다. 사람도, 기억도, 추억도, 기쁨도 슬픔도......

 

엊그제 조카의 결혼식이 있었다.

청담동의 화려한 웨딩홀, 눈부신 신부와 신랑, 곳곳에 화려하고 아름답게 장식된 꽃들, 많은 하객들과 일류 호텔 부럽지 않게 서빙되어 나오는 음식들.....,

나무랄 데 하나 없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마음껏 축하를 해주었다. 

 

그러나 기쁨 뒤에 남는 허전함과 상실감은 무엇이었을까?

곱고 우아한 한복을 입은 신랑 신부의 엄마나 단정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아빠가 아님에도 말이다.

이야기 도중, 울컥 울음에 목이 메인 부모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웃음 뒤에 남는 허무와 상실도 있으니, 울음 뒤 남는 상실은 또 얼마나 감당하기 어려울까?

죽음이 삶의 대극이 아니 듯, 기쁨과 슬픔도 연속성을 가지고 이어진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과 죽음, 상실과 회복을 온몸으로 겪으며 우리는 또 오늘 하루를 살아내야 한다.

 

 

 

 

 

 

 

 

 

민음사

 

 

 

각 권 마다 상당한 두께의 책을 정말 오랜 기간 붙들고 있었다.

올해가 가기 전, 3권의 마지막 장을 읽을 수 있어 다행이다.

 

너무도 잘 알려진 소설의 내용과 소피 마르소,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의 영화도 본 적이 있어서인지 책을 예전에 읽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끝까지 읽고 나니 내가 알고 있었던 내용은 정말이지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1948년 제작된 오래된 영화는 책의 내용을 좀 더 담고 있을까 싶어 찾아보았지만,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맡긴 비비안 리의 슬픈 얼굴 그리고 비극적인 결말과 함께 흑백 영화의 엔딩 크레딧은 올라갔다. 

 

톨스토이의 원작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안나의 비극적 죽음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지 않는다. 마지막 장에 레빈을 중심으로 한 주인공들의 소소한 삶이 새롭게 이어진다. 

 

다양한 인간 감정의 묘사와 사회구조에 대한 문제, 정치, 철학, 종교를 아우르는 거대한 서사를 한 편의 영화로 제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럼에도 톨스토이의 원작 소설을 토대로 수많은 영화가 제작된다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 안에 있다는 것이리라.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너무나 유명한, 21세기인 지금도 완벽하게 공감되는 첫 문장이다.

소설 속 등장하는 세 쌍의 부부인 안나와 카레닌, 스티바와 돌리, 레빈과 키티 그리고 안나와 브론스키의 관계를 통해서 개인의 삶과 세상은 어떻게 움직이는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갈망했던 톨스토이의 고뇌를 느낄 수 있었다.

 

'선'을 인지하는 농민의 말에 자극을 받아 신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으로 나아갔던 레빈은 깨달음 후에도 현실과의 충돌로 괴로워한다. 그러나 자신을 너절하게 만드는 현실은 그가 찾은 평온을 잠시 가렸을 뿐 그 정신적 평온은 그의 안에 오롯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난 여전히 마부 이반에게 화를 내겠지. 여전히 논쟁을 벌이고, 여전히 내 생각을 부적절하게 표현할 거야. 나의 지성소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는, 심지어 아내와의 사이에도 여전히 벽이 존재할 거야. 난 여전히 나의 두려움 때문에 아내를 비난하고 그것을 후회하겠지. 나의 이성으로는 내가 왜 기도를 하는지 깨닫지 못할 테고, 그러면서도 난 여전히 기도를 할 거야. 하지만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그 모든 일에 상관없이, 이제 나의 삶은, 나의 모든 삶은, 삶의 매 순간은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의 명백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 나에게는 그것을 삶의 매 순간 속에 불어넣을 힘이 있어!

 

 

첵의 첫 문장에 공감했다면, 마지막은 나에게 적잖은 위로를 주었다.

 

우리는 잘 살기 위해,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며 살지만, 뒤돌아서면 전혀 달라지지 않은 자신, 욕심과 시기로 불행하며 불안정한 나를 발견하기 일쑤다. 

 

그러나 삶에 '선'을 위한 방향성을 유지하고 있다면, 피해 갈 수 없는 그늘들에 절망하고 자책만 할 것이 아니라 걷어내며 지혜롭게 반응하며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삶에 정답은 없고 완벽하게 선하고 온전히 평온한 삶은 없을 테니, 선을 향해 나아가는 그 방향성을 가지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이 책을 언제 다시 꺼내 들지 모르겠지만 다시 읽을 때는 꼭 정독해보고 싶은 책이다.

 

 

 

 

 

 

 

 

 

 

 

 

노들 서가에서 로맹 가리의 책을 발견하고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일러스트, 자기 앞의 생>이다.

마누엘레 피오르의 따뜻한 색감의 그림이 더해진 이 아름다운 책은 청소년 코너에서 만날 수 있었다.

 

 

 

먼저 말해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의 칠 층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모모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소설의 첫 문장에서 소외되고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임을 짐작할 수 있다. 흑인, 유태인, 아랍인들이 모여 사는 프랑스 한 구역에 자리 잡은 로자 아줌마와 모하메드(모모)의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그녀가 냉정하다고들 했지만, 세상에 그녀를 돌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혼자 육십오 년 동안 온갖 풍상을 견디어 왔으니 때로는 그녀를 용서해줘야 한다.

 

유태인인 로자 아줌마는 젊어서는 몸으로 벌어먹고 살았고, 전쟁 중 아우슈비츠를 경험하고 살아 돌아왔다.

그 후 양육권을 박탈당한 창녀들의 아이를 돌봐주며 생계를 유지해 간다.

 

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히틀러에 대한 공포심으로 자신만의 지하 대피소를 비밀스럽게 가지고 있는 그녀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왔음이 분명하다.

 

 

 

 

 

 

암만 생각해도 이상한 건, 인간 안에 붙박이장처럼 눈물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원래 울게 돼 있는 것이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인간을 만드신 분은 체면 같은 게 없음이 분명하다.

 

아랍인 모모는 세 살 때 로자 아줌마 집에 왔다. 돈을 받고 자신을 돌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커다란 슬픔을 느끼게 된다. 의지할 곳 없었던 두 사람은 소란스러운 삶을 살면서도 끈끈한 정과 사랑으로 삶을 이어나간다.

 

로자 아줌마가 늙고 병들어 칠 층 계단을 더 이상 오르내리지 못하게 되자, 아이들은 입양되거나 하나 둘 떠나고 그녀 곁에는 모모만 남게 된다.

 

조물주가 세상 모든 것을 다 잘 만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조물주는 아무에게나 무슨 일이든 일어나게 하는가 하면,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기도 한다. 꽃이며 새를 만들기도 하지만 이젠 칠 층에서 내려가지도 못하는 유태인 노파를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세상과 생을 고통 없이 디자인할 수 있었을 거란 한탄은 책 곳곳에서 모모의 표현으로 드러난다.

오지 않을 엄마, 똥오줌 못 가리는 로자 아줌마를 떠나지 못했던 열네 살 모모의 외로움과 고독, 생에 대한 불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 구경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그들 모두가 실제 인간이 아니라 기계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고통받지 않고 늙지도 않고 불행에 빠지지도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네 인간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 그것은 정말 별세계였다. 나는 너무 행복해서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손 닿은 곳에 있을 때 바로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모모는 화려한 백화점 진열장에 마련된 서커스 모형을 보며 즐거워하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영원한 행복은 인간에게 없고, 행복은 순간이며 이내 생은 고통으로 돌아갈 거라는 것을 너무 빨리 알아버린 모모가 한없이 슬프다.

 

 

 

 

 

 

 

그럼에도 모모와 로자 아줌마를 도왔던 이웃들이 있었다. 그들 역시 힘없는 사람들이었지만 말이다. 양탄자 행상을 하는 하밀 할아버지는 모모에게 글도 생각도 인생도 가르쳐주셨던 분이었다. 

 

하밀 할아버지는 빅토르 위고도 읽었고 그 나이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경험이 많았는데, 내게 웃으며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오래 산 경험에서 나온 말이란다. 하밀 할아버지는 위대한 분이었다. 다만 주변 상황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

 

하밀 할아버지 역시 자연의 공격을 받아 눈은 흐려지고, 치매에 걸리고, 오줌을 누러 가는데 부축을 받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늘 손에 쥐고 있었던 그는 위대한 사람이다.

 

 

 

 

 

 

그녀는 유태인 대 학살 전인 열다섯 살 적 사진을 한 장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사진의 주인공이 오늘날의 로자 아줌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로자 아줌마가 열다섯 살의 사진 속 주인공이었다는 사실 역시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열다섯 살 때의 로자 아줌마는 아름다운 다갈색 머리를 하고 마치 앞날이 행복하기만 하리라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열다섯 살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를 비교하다 보면 속이 상해서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생이 그녀를 파괴한 것이다.

 

나이가 들고 아이들이 독립할 즈음이 되니 나의 노후는 어떨까 생각하게 된다. 지금 그 시기를 겪는 나의 부모님들에 대한 생각도 고통스럽다. 생이 나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짓밟고 있다.

 

 

 

 

 

 

 

한 가지 말해둘 게 있다.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내 생각일 뿐이지만,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는 가능한 안락사가 왜 노인에게는 금지되어 있는지 말이다. 나는 식물인간으로 세계기록을 세운 미국인이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더 심한 고행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십자가에 십칠 년여를 매달려 있었던 셈이니까. 더 이상 살아갈 능력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의 목구멍에 억지로 생을 처넣는 것보다 더 구역질 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유시민의의 책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는 행복한 삶은 잘 사는 것이고, 잘 사는 것은 잘 죽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이다.

 

"내가 바라는 끝을 줘요"

조조 모예스의 소설 <미 비포 유>에서 교통사고로 사지마비가 된 주인공 월이 했던 말이다. 인간은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존엄성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줌마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 사람이에요. 의사들을 즐겁게 해 주자고 아줌마를 식물처럼 살게 해서 세계 챔피언이 되게 할 생각은 없어요. 내가 불쌍한 사람들 얘기를 쓸 때는 누굴 죽이지 않고도 하고 싶은 얘기를 모두 다 쓸 거예요. 그건 누굴 죽기는 것과 같은 힘이 있대요. 선생님이 인정머리 없는 늙은 유태인이 아니고 심장이 제 자리에 붙어 있는 진짜 유태인이라면, 좋은 일 한번 해주세요. 로자 아줌마를 고통스러운 생에서 구해주세요. 생이란 것은 아줌마를 엉덩이로 걷어차버렸어요. 그놈의 알지도 못하는 하느님 아버지란 작자 때문이에요. 그 작자는 어찌나 잘 숨어 있는지 낯짝도 잘 안 보여요. 그 낯짝을 재현시키는 것조차도 안 된대요. 붙잡히지 않으려고 마피아들을 풀어서 막잖아요.......... 로자 아줌마를 도와주지 않는 더럽고 멍청한 의사들은 비난받아야 해요. 그건 범죄라고요.......

 

모모는 로자아줌마를 병원에 들여보내 식물처럼 생명을 연장하는 대신, 그녀의 비밀 장소인 지하실로 데려간다.

히틀러를 피해, 대학살을 피해, 동정심 없는 이 세상을 피해 말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숨을 거두게 된다.

그녀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지만 모모는 숨을 쉬지 않아도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있어 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도 살 수 있나요? (.......) 제가 어릴 때 할아버지가 그러셨잖아요,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그의 얼굴이 속에서부터 환하게 밝아졌다. 그래, 그래, 정말이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던 것 같다.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 더 두고 봐야 알 것이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고, 계속 그녀가 그리울 것이다.
(............) 
사랑해야 한다.

 

시체와 함께 지하실에서 여러 날을 보낸 모모는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구급차에 실려간다. 그의 주머니에 친절한 나단 아줌마의 연락처가 남아 있었기에 그는 다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정말 특별하다.

한 편의 그림동화 같기도, 청소년 성장 소설 같기도, 철학 도서 같기도, 장편의 대하드라마 같기도 하다.

로맹 가리란 이름을 감추고 가명 에밀 아자르로 책을 내야 했던 사연과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그의 인생이 스며들어서일까.

 

삶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내 앞에는 주어진 삶.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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