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읽어야 한다는 약간의 의무감으로 얼마간의 시간을 보낸 후 드디어 책과 마주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그녀의 친필 사인이 있었다. 마치 뽑기에서 행운권이 당첨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작별하지 않는다.

무엇과 작별하지 않는 걸까?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 뻔뻔스럽게 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그녀의 소설 <소년이 온다>는 학살로 인해 죽어간 자들,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과 아픔을 절절하게 그려내고 있는 또 하나의 기록 소설이다. 여러 개의 사적인 작별 후, 유서를 준비하고 있던 경하는 작가의 분신처럼 이야기의 시작을 알린다.

 

인선은 제주 사건으로 가족을 잃고 아슬아슬하게 살아왔던 엄마의 죽음 후, 엄마의 끔찍했던 시절과 가족의 유골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사실을 알게 된다. 경하와 인선은 믿을 수 없는 이 사건에 대한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연대를 느끼게 된다. 광주와 다르지 않은 잔인한 역사에 대한.

 

 

 

 

제주 4.3 사건.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이어진 7년 이상의 길고도 긴 지옥 같은 세월이었다.

동서로 긴 타원형의 섬, 한라산을 포함해 해안선 5km 안쪽 해당지 통행자들을 폭도로 몰아 이유 불문하고 사살했다.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 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 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이 섬에서 했던 그대로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휴전된 것뿐이었으니까. 휴전선 너머에 여전히 적이 있었으니까. 낙인찍힌 유족들도, 입을 떼는 순간 적의 편으로 낙인찍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침묵했으니까. 골짜기와 광산과 활주로 아래에서 구슬 무더기와 구멍 뚫린 조그만 두개골들이 발굴될 때까지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고, 아직도 뼈와 뼈들이 뒤섞인 채 묻혀 있어.

 

 

 

 

책의 공간적 배경은 눈과 추위 그리고 어둠이다.

 

눈(雪)

가벼운 눈에도 무게가 있다. 육각형의 결정이 있다. 따스함과 보드라움이 있다.

 

물이 순환한다면,

과거 학살당했던 사람들의 차가운 얼굴 위에 내려 녹지 않던 눈이, 경하와 인선의 머리와 얼굴 위에 떨어져 녹아내리고,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손등에 살포시 내려앉는 눈과 다르다는 법이 없다. 

 

바람과 해류도 순환한다면,

베트남에 있는 한국군 성폭력 생존자의 집 마당에 쏟아지는 비와, 열여섯 나이 눈 덮인 만주 벌판을 통과해 독립군 캠프로 돌아가던 중 동상으로 발가락 네 개를 잃어버린 치매 노인의 시선에 흩날리는 눈과, 제주의 우듬지에서 빛을 받아 반짝이는 눈 그리고 서울 천변에 내리는 눈이 그때의 그 눈이 아니라는 법이 없다.

 

 

 

 

섬을 떠나 있던 십오 년 동안 아버지가 저 건너편을 지켜봤다고 그날 엄마는 말했어. 어떤 밤에는 환하게 달이 뜨고, 그 빛을 받는 동백 잎들이 반들반들 윤이 났다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게 아니다. 제주, 광주, 서울, 대한민국 그리고 온 세계는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순환하는 바람처럼 눈처럼 비처럼, 지구 상에서 벌어졌던 일들,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한 개인의 얼굴에도 불고 내리고 때리고 쌓인다. 

 

몰라서도, 간과해서도, 잊어서도, 체념해서도 안 되는 사실들이 있다. 알아야 하고, 알려야 하고, 함께 아파해야 하고, 반성해야 하고, 사과해야 하고,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다.

 

제목 <작별하지 않는다>는 이 사건을, 이 만행을, 무고하게 희생된 자들의 아픔을 잊지 않겠다, 잊지 말자는 결의에 찬 호소로 들렸다.

 

 

 

 

책상 한 구석, 4월 16일에 노란 리본이 인쇄되어 있는 달력을 본다.

벚꽃 소식에 들렸던 현충원, 김대중 대통령 묘 입구 비석에 새겨진 문구를 생각한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고, 통일에의 희망이 무지개같이 피어오르는 나라를 만들 것입니다."

 

 

 

부디, 우리 모두 그 무언가와 작별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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