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아하는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얇지만 대단한 책, <깊이에의 강요>를 다시 읽었다.
세 편의 단편 소설 <깊이에의 강요>, <승부>, <장인 뮈사르의 유언>과, 한 편의 짧은 에세이 <문학의 건망증>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승부>에 관하여.
체스의 고수, 쟝.
일흔 살가량의 적잖이 비열하고 왜소한 남자, 손에는 검버섯, 텁수룩한 모습에 담배꽁초를 푹푹 빨아 내뿜는 노인.
그의 도전자,
매력적인 외모, 창백하고 냉담한 표정, 침착하고 자신감 있는 분위기의 검은 머리 젊은이.
열 명이 넘은 구경꾼들,
쟝에게 번번이 체스를 진 그들은 노인에게 시기심과 악의를 가지고 있었고, 처음 보는 젊은이가 승자가 되기를 바라며 게임을 지켜본다.
체스게임이 진행될수록, 구경꾼들은 과감하고 독창적인 패를 내놓는 젊은이를 향한 무한한 신뢰를 갖게 된다. 젊은이의 게임 방식은 자살하듯이 모험적이며 어처구니 없었지만, 대중은 뭔가에 홀린 듯, 그를 아름답다고 느끼며 승리를 거머쥘 거라 의심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게임은 쟝의 승리로 끝난다.
젊은이는 자신의 킹을 손으로 쓰러뜨리고, 무례하게 자리를 떠난다.
명백하게도 일치감치 승리를 할 수 있었던 쟝은 무언가에 홀린 듯, 도전자의 천재성, 자신감, 젊음에서 오는 후광을 이기지 못하고 게임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이 멋진 남자에게 참패를 당하고 챔피언의 자리에 대한 부담을 덜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 남자의 자신감, 천재성, 그리고 젊음에서 오는 후광을 그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뿐이 아니다. 아주 솔직하게 말하면,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낯선 이에게 감탄했으며, 심지어는 그가 승리해서 가능한 인상적이고 천재적인 방법으로 몇 년 전부터 기다리고 기다려 온 참패를 마침내 자신, 쟝에게 안겨 주기를 바랐었다고 고백해야 했다. 그러면 마침내 그는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모든 사람을 물리쳐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났을 것이며, 마침내 구경하고 있던 악의에 찬 군상들, 이 시기심 넘치는 패거리들에게 만족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평온을 찾았을 것이다. 마침내.......
게임에 이기고도 실제로는 패배했다는 것을 깨달은 쟝은, 마침내 체스를 영영 그만두게 된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승부에서 두 명의 체스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삶의 축소판이다. 삶과 사회의 규칙을 곧이곧대로 준수해 어느 정도의 것은 얻었지만, 현재의 나를 지키기 위해 늘 전전긍긍하는 늙은 체스의 고수 쟝. 인습을 과감하게 무시하고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서 정열적으로 용기 있게 돌진하는 젊은 도전자. 그리고 쟝처럼 확실하게 무엇을 이룬 것도 아니면서, 젊은 도전자처럼 과감하게 뛰어들 수 있는 뱃심도 없는 나머지 구경꾼들. 그들은 마음 한구석에 젊은 도전자와 같은 욕망을 지니고는 있지만 실행에 옮길 용기가 없어 욕망을 억누르고 살아가는 소시민들이다.
나에게는, 도전자인 젊은이의 모습이 용기 있거나 멋져 보이기보다 무모하고 허세에 차 보였다.
그는 실력과 경험보다는, 젊음과 패기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은 얼마나 쉽게 선입견과 편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노화로 자신감을 잃고, 변화를 두려워하며, 열등감에 잠식되어 있었던 쟝에게는 연민의 감정이 들었다.
젊음은 아름답고 귀하다. 그렇다고 늙음이 추하거나 함부로 대해야 할 것은 아니다.
온유와 친절, 인정과 포용의 따뜻함을 간직한 채, 세월을 통과해 온 경험으로 두려움에 맞서고, 당당함과 자존감을 잃지 않은 노인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연약함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삶과 인간이라는 주제, 잡힐 듯 사실적인 묘사, 긴장감과 재미를 잃지 않는 작가의 글이 너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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