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란 추체험의 기록.
있을 수 있는 인간관계에 대한 도식.
구제받지 못한 상태에 대한 연민.
모순에 대한 예민한 반응.
혼란한 삶의 모습 그 자체.
나는 판단하지도 분노하지도 않겠다.
그것은 하느님이 하실 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의미 없는 삶에 의미의 조명을 비춰 보는 일일 뿐.
1980년. 작가의 말
민음사에서 출판된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1960년대 이후 근대화 되어가는 서울을 배경으로 근대인의 일상과 탈일상을 그려내고 있다. 9편의 단편과 1편의 중편, 총 10편의 소설 중 1964년 사상계에 발표한 <무진기행>에 대해서......
무진기행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무진(霧津), 안개 나루, 짙은 안개가 늘 껴 있는 항구도시. 이곳은 가상의 도시다.
일상에서 벗어나 안개와 바다로 나타나는 비일상의 이상 세계.
비밀스러운 장소.
주어진 삶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며 치열하게 살다,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비밀스러운 장소는 어디일까?
일상 회복을 위한 휴식, 잠시 떠나는 여행, 일탈을 위한 개개인의 행위들.
현실을 완전히 피해 파라다이스행을 할 순 없지만, 잠시나마 도피할 무언가에 기대는 것은 필요하다.
주인공 윤희중은 서울에서의 일상을 피해 잠시 무진으로 내려온다.
무진은 그에게 낭만적인 도시라기보다는, 어둡던 청년 시절이 떠오르는 장소이다. 그럼에도 그는 무진을 '긴장을 풀어 버릴 수 있는, 아니 풀어 버릴 수밖에 없는 곳'이라 생각한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하지 않았던 엉뚱한 생각을, 나는 무진에서는 아무런 부끄럼 없이, 거침없이 해내곤 했던 것이다. 아니 무진에서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쩌고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생각들이 나의 밖에서 제멋대로 이루어진 뒤 나의 머릿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듯했었다.
무진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은 모두 속물들이라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이 하는 모든 행위는 무위와 똑같은 무게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장난이라고.
그는 무진에서 후배이자 순수함을 지닌 국어 교사 '박', 동기이자 세무서장이 된 속물적 인간 '조', 그리고 무진을 떠나 서울로 가고자 하는 열망을 숨기지 않는 음악 교사 '인숙'을 만난다. 그들 모두에게서 비치는 희중의 다중적인 모습은 씁쓸하다.
그는 무진을 벗어나고 싶었던 과거를 마주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에서 일탈을 감행할 무모한 용기가 생긴다.
아내의 전보가 무진에 와서 내가 한 모든 행동과 사고를 내게 점점 명료하게 드러내 보여 주었다.
모든 것이 선입견 때문이었다. 결국 아내의 전보는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흔히 여행자들에게 주어지는 그 자유 때문이라고 아내의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잊힐 수 있다고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가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결국, 아내의 전보는 새벽잠을 깨우는 자명종의 요란함처럼 그를 깨운다.
종내 머물 수 없는 무진, 결코 지속되지 않을 일탈을 떠나 그는 서울행 버스를 탄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순수했던 청년, 무진의 안개를 떠나고 싶어 했던 시절이 있었던 희중은 이제, 서울 한 제약회사 전무이사로 승진을 앞두고 있다. 그가 느꼈을 부끄러움이란 무엇일까. 무진에서의 일탈일까. 세속적인 명예와 이익을 좇는 속물적 인간으로 돌아감일까. 자기 성찰에서 나오는 부끄러움. 부끄러움을 느끼는 인간은 성숙할 수 있다.
무진기행은 귀향 소설이 아닌, 귀경 소설이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세계를 인정하는 역유피아 소설인 것이다.
서울과 무진 두 공간은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의미를 가진 곳으로 어느 곳에서도 나는 '나'를 상실할 위기에 처해있다. (서울의 우울_김미현)
처음에 무진은 내가 생각하는 비밀스러운 치유의 장소, 성장의 장소로 생각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소설을 다 읽은 지금은 세계의 본질과 이면을 직시하며, 자학을 통해 극기를 이루고, 환멸을 체험한 후에야 비로소 성장하는 김승옥식 성장을 이해할 것 같다.
김승옥은 자아의 파괴를 통해 자아의 발전을 도모하는 작가이고, 이분법적 시각이 아닌 이중적 시각에서 자아의 양면성에 주목하는 입체적 작가이다.
스스로가 주체이자 객체이고,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모순과 역설 속에서 김승옥 소설의 인물들은 근대와 대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근대를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를 행해 화살을 쏜다. 독하고 숭고하다.
(서울의 우울_김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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