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의 단편집, 우스운 사랑의 첫 번 째 이야기, <아무도 웃지 않으리>의 주인공처럼,
소설 <농담> 속, 루드빅의 삶은 농담 한 마디로 유린된다.
 
복수와 회복을 꿈꾸며 버텨온 삶은 결국,
허무와 하강으로 잠식된다.
 
사실은 잊히고, 회복의 가능성은 전무할 뿐,
삶이란 허무 그 자체이다.
 
사랑이 사랑이고, 고통이 고통인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세상은 상상이고 기념비이다.
 
결국,
농담도 우연도 자신이 짊어져야 할 무거운 십자가.
 

그렇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등을) 고쳐볼 수 있다는 가능성데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모든 것은 잊히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말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치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힐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노래들 속에서(이 노래의 유리집 속에서) 행복했다.
거기에서는 슬픔이 가볍지 않고, 웃음이 비웃음이 아니고, 사랑이 우습지 않으며, 증오심이 맥없지 않고, 사람들은 온몸과 마음으로 사랑하며, 행복은 사람들을 춤추게 만들고, 절망은 다뉴브 강으로 뛰어들게 만들며, 그곳에서는 그러니까 사랑이 사랑으로, 고통이 고통으로 머물러 있었고, 아직 가치들이 유린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노래들 속에 나의 출구가 있고, 나의 본원의 표지가, 내가 배반한 나의 집,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 나의 집인 집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깨달았다.

이 나의 집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우리가 노래하는 것들은 모두가 단지 추억이고 기념물이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으로 보존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느꼈다. 나의 집의 바닥이 내 발밑으로 꺼져 내려앉는 것을, 그리고 내가 클라리넷을 입에 문 채 수십 년 수백 년의 심연 속으로, 바닥 없는 심연(사랑이 사랑이고 고통이 고통인 곳)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을, 무언가를 찾고 갈망하는 이 추락이라고 나 자신에게 말하며 놀라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나의 집에, 내 황홀한 현기증에 자신을 내맡겼다.

 
 

내게는 언제나 너무도 현재적이고 생생한 그와 나 사이의 투쟁 위로 모든 것을 잠재우는 위무(위로하고 어루만지어서 달램)의 물결이 파도처럼 넘쳐오는 것을 나는 보았다. 시간의 물결, 그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모든 시대들 사이의 차이들마저 다 씻어가 버리는데, 하물며 보잘것없는 두 개인 사이의 차이는 얼마나 쉽게 씻어가겠는가.

 
 
세월은 앞으로 빠르게 질주한다. 아무리 열심히 과거로 달려봐야, 달려가는 방향과 반대편에 있는 목적지로 서서히 갈 수밖에 없다. 역사는 뒤로 가고, 시대는 바뀌어, 영원한 것은 없으며, 미루어진 복수는 환상으로, 자신만의 종교로, 신화로 바뀌어버리고 만다. 허망한 일이다.
 
농담은 진담이 되고, 진실된 말은 허공에 가볍게 흩어지는 일들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목격하는가. 
밀란 쿤데라의 초기 작인 <농담>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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