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가늠할 수 없었던 부모의 삶.
그들의 이면에 눈을 돌리거나,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의 문턱, 죽음, 그리고 사후의 시간들인 것 같다.
김정현의 <아버지>, 정진영의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두 소설을 생각했다.
아버지의 해방
빨치산이었던 '나'(고아리)의 아버지 '고상욱'은 이십 년 가까운 감옥살이를 마친 후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 살아간다.
늙은 혁명가는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면서도, 쇠심줄 보다 질긴 고집으로 '사회주의'니 '민중'이니를 논하며 호기롭다.
현실로 닿을 수 없었던 그의 사상, 연좌제로 고통받은 가족들, 자신을 향한 원망의 목소리를 감내하며 외롭게 살아갔던 아버지. 그렇게 허울뿐인 듯했던 혁명가의 삶이 끝났다.
사회주의자 아닌 아버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나는 아버지를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장례식장에 찾아온 기이하고 오랜 인연의 조문객들로 인해 내가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인간적인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자식이자 형제였고, 남자이자 연인이었으며, 친구와 이웃이었고, 한 여자의 남편이었고 나의 아버지였던 그를 말이다.
아버지는 갔어도 어떤 순간의 아버지는 누군가의 시간 속에 각인되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생생하게 살아날 것이다. 나의 시간 속에 존재할 숱한 순간의 아버지가 문득 그리워졌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영정 속 아버지가, 이틀 내 봤던, 아까도 봤던 영정 속 아버지가 전과 달리 그립던 어떤 날들처럼 친밀하게 느껴졌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빨치산의 딸이란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평생 발버둥 쳤던 '나'는 아버지의 진심을,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그가 떠난 것이 사무치게 슬퍼 울음을 터트린다. 고작 사 년 빨치산이었던 아버지의 경력은 이 땅에서 아버지의 평생을 옥죄었다.
세상은 평등하지 않다. 결코 인간적이지 않다. 삶은 인간에게 너무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아버지의 유골을 손에 쥔 채 나는 울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이상한 인연 둘이 말없이 내 곁을 지켰다. 그들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나를 감쌌다.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해방일지
결국 아버지는 죽음으로 인생의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나'에게 그의 삶을 부활시켜 연민과 사랑과 화해와 용서의 기회를 주었다.
나는 결국, 빨치산의 딸이란 수렁에서,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과 미움에서 해방되어 아름다운 한 인간, 나의 아버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죽음이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아버지는 보통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 해방의 기쁨 또한 그만큼 크지 않을까, 다시는 눈 뜰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삶과 죽음. 무엇이 속박이며 무엇이 해방일까.
한 사람의 삶의 무게를 결코 알 수 없다. 그 수많은 속박과 고통, 고독 그 삶의 무게를.
최애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주인공들은 제목과 다르게 결국 온전한 해방을 맞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루하루, 하루 몇 초씩이라도 나의 고통스러운 삶의 해방을 위해 애를 쓰며 힘겹게 힘겹게 하루를 몰고 간다. 그렇게 때로는 찬란한 순간이 있음으로 영원의 해방은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
'나'의 아버지 고상욱의 삶 한가운데에도 그런 순간과 해방이,
보고 싶은 내 아버지의 삶에도 싱그러웠던 청춘과 맘 가득 품었던 해방일지들이 존재했음을 생각하니 마음이 벅차고 눈시울이 뜨끈해진다.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유럽 소설] 우스운 사랑들(사랑)_ 밀란 쿤데라 (0) | 2023.08.07 |
---|---|
[독일 문학] 리스본행 야간열차_파스칼 메르시어 (0) | 2023.07.20 |
[교양 인문학] 나는 독일인입니다_노라 크루크 (0) | 2023.06.29 |
[예술/대중문화] 아름다운 사람 이중섭(전인권),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 (0) | 2023.06.21 |
[러시아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_레프 톨스토이 (2) | 2023.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