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육식을 끊고 나무가 되려고 했던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처럼, 인간은 폭력적인 세계를 거부할 수도 피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했다는 한강 작가의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
 
 
주인공 정희.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자랐고, 식당을 운영하는 바쁜 엄마를 도와 오빠와 남동생의 도시락을 싸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사랑했던 사람이 병으로 죽고, 집을 떠나고, 불행한 3년의 결혼 생활과 세 번의 유산 경험, 손목에 주저흔을 가지고 있는 여자. 그녀의 인생을 짐작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주인공 인주.
의사였던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이후 엄마는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을 겪다 자살했다. 11살이었던 인주는 외삼촌 동주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았지만 가족력이 있던 병으로 그는 사망한다. 같은 병을 앓던 남동생의 간호를 홀로 감당하며, 결혼과 이혼을 하고 딸 하나를 남겨 둔 채 자살한다. 그녀의 인생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을까?
 
219. 내가 아픈 곳은 달의 뒷면 같은 데. 피 흘리는 곳도, 아무는 곳도, 짓무르고 덧나는 곳도, 썩어가는 곳도 거기. 당신에게도,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달의 뒷면. 비밀스러운 장소. 어쩌면 가장 진실한 부분. 아주 잠깐씩 드러나기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결코 들여다볼 수도 알 수도 없다. 타인의 아픔을 고뇌를 치욕을 사랑을 진실을. 
 
 
 
146. 한 번도 종교를 가져본 적 없지만,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기도해 본 적은 있습니다. 가장 많이, 간절하게 기도한 내용은 죽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를 들어주는 누군가가 정말 존재했다면 난 이미 여러 번 죽었을 겁니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건, 그때마다 내가 그만큼 더 강하게 살아 있길 택했다는 걸 뜻합니다. 이건 말장난이 아닙니다.
 
340. 짐작할 수 있겠니. 나약함이 죄의 시작일 수 있다는 걸. 간절함이 알 속의 죄를 깨어나게도 한다는 걸. 문밖이 낭떠러지인 줄 알면서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어리석음을. 모든 일들의 시작이 자신이었음을. 그러니 자신을 제거하는 것만이 단 하나의 논리적인 길임을 확신하는 순간을. 무의미로 무의미를. 어리석음으로 어리석음을 밀봉하려는 결단을. 
 
인주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정희는 자살이 아니라는 확신으로 그 사실을 증명하고자 일어서고 맞서고 견딘다. 폭력적이고 부조리하며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리라 안간힘을 써본다. 정희 역시 인정할 수 없는 세상이지만 생수와 두부, 계란 한 줄과 봉지 김치, 들고 올 수 있을 만큼의 감귤을 산다. 다시 토하더라도 먹을 것이다. 움직일 것이다.
 
346. 두려움 없이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게 어떤 일입니까?) 거짓으로부터 인주의 아이를 보호하는 거예요.
 
정희의 이 치열함은 무엇일까. 위태롭게 또 일어서는 거대한 힘은 무엇일까.
아마 결국, 사랑일 것이다. 동주에 대한, 인주에 대한, 삶에 대한 사랑.
 
 
 

76. 바람이 분다. 마른 나뭇가지들이 허공을 할퀸다.

146. 얼음을 머금은 바람이 분다. 

328. 인주의 텅 빈 그림을 기억한다...... 바람이 불지 않았다. 어슴푸레한 빛이 영원히 움직이지 않았다.

366. 바람이 불고 있다. 간밤보다 강하고 습해진 바람이다. 거리를 걷는 모든 사람들의 체취가 섞이며 흩어진다. 마른 것과 축축한 것,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 부서지는 것과 영원한 것이 힘차게 뒤섞이며 날아간다.

367. 기억해. 바람이 부니까 뛰지 말까, 그때 생각했었어.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 넘어가고 싶었어. 정말 넘어가고 싶었어.

369. 이런 바람이 불면 말이야. 이만큼의 습기를 품은 바람이, 이만큼의 세기로 불면 말이야........ 혈관 속으로 바람이 밀고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져. 모든 것이 커다란 전체로 느껴져. 언제고 내 다리를........ 단박에 목숨까지 꿰뚫을 수 있는 삶을 지금 살아내고 있다는 게, 무섭도록 분명하게 느껴져.

 
나를 할퀴는 바람, 얼음을 머금은 바람이 부니 밖으로 나가지 않고, 몸을 사리고, 맞서기를 포기하고 싶다.
바람이 불지 않기를, 멈추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한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도 맞서 걸어가고, 뛰어 넘어가고, 바람이 잠시나마 그치기를 기다리며 끝끝내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참 이상도 하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어떤 것은 늘 닿아있다. 전혀 다르지만 또 같다. 소설 속 등장하는 마크로스코 화가의 그림과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노트북 화면으로 찾아보고, 말러의 2번 교향곡을 플레이해 보았다. 
 
서로 다른 색채가 서로 번지고 스며드는 그림, 가파른 협곡에 난 길 끝에 자리한 아름답고 붉은 복사나무 숲, 삶과 죽음 부활을 구현하며 절망을 희망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승화시켰다는 교향곡. 두 개의 다른 어떤 것이 한 화면에, 공간에 존재한다. 그 둘은 독립적인가 싶다가도 스미고 번지고 섞여 마침내 함께 있다.
 
 
 
어제 카라바조와 바로크 시대 그림 전시를 둘러보며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사람들의 표정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진한 슬픔이 배어나는 그 얼굴들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카라마조의 작품인 <도마뱀에 물린 소년>은 어둠과 빛, 장미와 가시, 체리와 도마뱀, 사랑의 쾌락과 고통이 공존한다. 사랑의 관능적인 즐거움에 가득 차 있던 소년이 도마뱀에 손가락을 물리자 순간의 고통으로 얼굴은 일그러지고 오른쪽 눈에는 눈물이 맺힌다.  
 
너무 행복해서 슬프고, 너무 차가워서 뜨겁게 느껴지고, 죽음이 있기에 삶의 의미가 존재하듯이, 바람이 부니 씩씩하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것도 찾아지지 않고, 어떤 것도 완성되지 않을지라도 또 두려움 없이 내가 할 일을 하면서 삶을 건져 올려야 하는 건가 보다.
 
324. 다시 시작하는 게 가능하다면....... 정말 가능하다면 말이야. 뭔가를 더 살리는 게 아니라, 복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부서야 하는 것 같아. 아니, 그건 달라.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부서야 하는 거야.
 
381. 살고 싶다. 포기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마다 가슴과 배가 벌레처럼 필사적으로 꿈틀거렸다. 한 뼘, 또 한 뼘. 폭발하는 소리를 내며 책상이 부서져 내렸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382. 눈을 감은 채 나는 앞으로, 깨끗한 공기가 있는 쪽으로, 차가운 쪽으로 기었다.
 
 
 
인주의 어린 시절, 미시령 절벽에서 버스 사고가 났었다. 동생과 엄마는 빠져나가고 절벽 아래로 기울어지는 버스 안에 혼자 남겨졌던 그녀는 기적적으로 삶으로 돌려보내졌었다.
 
293. 어머니를 이해했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았어. 용서했지만, 용서하고 싶지 않았어. (.......) 그런데, 이상한 게 있어. 그날, 버스가 회전하며 절벽을 향해 기울어가던 그 순간을 생각할 때마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한 빛이 그곳에 흘러넘치고 있었던 것처럼 기억해. 마치 거대한 천사 같은 게 날 막아서 돌려보내고 있었던 것처럼.
 
어쩌면 인주는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삶의 한가운데로 돌려보냈던 그 거대한 힘을 믿고 싶었던 것 아닐까? 다시 시작하고 싶은 강렬한 생명의 힘으로.
 
295. 단칼로 끊어낸 것처럼 죽음과 삶이 갈라지던 순간을 다시 경험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거기서부터 새로 시작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작가가 말한 '생명'이라는 말에 집중하고 그것을 발견하려 애쓰며 소설을 두 번 읽었지만, 소설은 나에게 여전히 희망적이라기보다 우울하고 절망적인 느낌이 들었다. 인주의 삶이, 정희의 삶이, 동주의 삶이, 모든 인물들의 삶이, 우리들의 삶이 말이다.
 
385. 눈두덩을 후벼 파는 안두통, 펴지지 않는 허리, 헝클어진 머리로 차가운 방바닥을 뒹굴었다. 처음으로 문을 열고 나가자 햇빛이 눈을 찔렀다. 다시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 때문에 허리를 접고 걸었다. 보도블록 틈으로 파릇한 싹이 돋은 것을, 가로수 밑동에 물이 오른 것을, 사람들이 봄옷 차림으로 걸어가는 것을 흔들리는 시야로 봤다. 미친 여자처럼 겨울 외투를 껴입은 채 그 눈부신 거리를 걸어 올라갔다......... 봄이 왔어. 너를 잃은 뒤 처음으로 입술을 열고 새어 나온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내 혀를 믿을 수 없었다.
 
386. 두 눈을 홉뜬다. 고개를 비튼다. 빗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울부짖는 사이렌이 멈추지 않는다. 누군가가 부풀어 오른 팔로 물속에서 파란 돌을 건져 올린다. 누군가가 무릎이 짓이겨진 채 뜨거운 배로 바닥을 밀고 간다.
 
내가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삶의 고통과 폭력은 피할 수 없는 길이다. 짓이겨진 삶을 자책하고 절망하는 대신, 삶을 건져 올려, 더운 심장과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이 안쓰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소중한 무언가를 건져 올려 삶을 이어간다. 어지러운 마음과 두통을 감내하며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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