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하는 이야기 좀 잘 들어보세요!   /   괜찮았나요? 오늘은 이 정도로 할게요!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은 각 파트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이렇게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보후밀 흐라발은 이야기꾼이다. 그의 이야기는 재미나고 위트 넘친다. 우스꽝스럽게 그려지는 인물 디테는 그에 걸맞은 주인공이다. 이야기를 쫓아가다 보니 체코의 파란만장한 역사 속을 관통하여 살았던 디테의 삶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체코에 남아 고군분투했던 작가의 인생을 가늠해 보니 마음이 저릿하다.

 

 

독일이 체코를 점령했던 시기, 키가 작고 보잘것없는 웨이터 디테는 돈이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확신하며 백만장자를 꿈꾼다.

 

21. 무엇이 사람들을 움직이며 사람들이 무엇을 믿는지, 몇 푼 안 되는 동전 몇 개를 위해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곧바로 알게 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디테는 닥치는 대로 일하고 벌었다. 운이 따랐던 그는 영국왕을 모셨던 지배인에게 교육을 받기도 하고, 직접 아비시니아 황제를 모셔 황금훈장을 받기도 한다. 독일인 체육교사였던 리사와 사랑하고 결혼까지 하며 주류층에 들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갖는다.

 

198. 웨이터복에 딱딱한 옷깃을 달지 않았어도 내 생애 처음으로 사람이 꼭 체격이 클 필요는 없으며 자신 스스로가 크다고 느끼면 되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제부터 웨이터 조수이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견습 웨이터이기를, 작은 웨이터이기를, 날 때부터 그렇게 운명 지어져 이 삶이 끝날 때까지 작은 존재이기를, 난쟁이 꼬마라고 불리는 것을 그리고 아이란 뜻의 디테란 내 성을 갖고 놀리는 소리를 듣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그러나 전쟁은 아내를 앗아가고, 정신지체를 앓는 아들 지크프리트는 고통일 뿐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디테는 체코 애국자들이 처형당하고 있는 동안 나치 의사들에게 독일 여자와 성교할 능력이 있는지 검사를 받았다는 이유로 감옥에서 반년을 지낸다. 

 

222. 기차역에서 플랫폼을 따라 걷다가 우연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스스로 낯선 사람인 것처럼 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  독일인들이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했을 때 결혼식을 올리고 군가 <대열을 바싹 좁혀라!>를 부르고 있었고, 고향에서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을 때 독일 호텔에서 독일 군인들과 에스에스 대원들의 시중을 들면서 잘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전쟁이 끝나면 프라하로 더 이상 돌아갈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나를, 아니 나 스스로 첫 번째 가로등에서 목을 매다는 모습이 내 눈에 보였고, 나 자신에게 십 년형 이상을 언도했다. 

 

 

출소 후 리사의 우표를 팔아 백만장자가 되고 호텔을 운영하며 인생의 정점을 찍었지만 공산정권이 들어서며 호텔은 국가에 귀속된다. 이후 백만장자들이 수감된 감옥에 자진해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있었지만, 애초에 신분이 달랐던 디테는 다른 호텔 사장들이나 부자들에게 여전히 굴욕감을 느낀다. 모든 건 허상이었을 뿐이었다.


281. 그들은 내 백만, 내 이백만 코루나를 인정하지 않았다. 내가 자신들 사이에 있는 걸 참곤 있었지만, 내가 자신들에게 결코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백만장자들은 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오래전부터 많은 돈을 갖고 있었지만 나는 전쟁으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벼락부자를 자신들 사이에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았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나는 그 신분에 어울리는 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디테는 결국 자신의 삶을 똑바로 마주 보며 내가 원했던 모습이 아니라 나 자신을 그대로 직시한다.

 

286. 여태까지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았으며 오로지 내가 절대로 될 수 없는, 비록 이백만 코루나를 갖고 있었을지라도 될 수 없는 사람인 백만장자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이제 처음으로 비둘기들이 나의 친구이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말씀의 비유라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하면서야 나는 몇 곱의 백만장자가 되었다. 

 

국경지역 삼림작업반에서 만난 외눈박이 문학교수와 빨강머리 아가씨 마르첼라와의 생활은 고되었지만 행복했다. 마르첼라에게서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며 인생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교수와 마르첼라를 떠난 후, 산골 외딴곳에서 조랑말과 염소 셰퍼드 그리고 고양이와 함께 살며 도로를 보수하고 유지하는 일을 하게 된다. 노동의 수고는 거만하거나 오만할 시간이 없도록 겸손함을 가르쳐 주었다.

 

327. 나는 길을 정비하며 돌을 잘게 깨부숴 만든 쇄석으로 길을 메웠다. 그 길은 내 인생과 닮아 있었다. 내가 서 있는 길 뒤로도 앞으로도 잡초와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일을 마치고 나면 그 부분만 내 손이 닿은 흔적이 남았다. 장대비와 장맛비가 퍼붓고 나면 복구해 놓은 길이 모래와 작은 돌들로 다시 덮였지만 나는 화를 내지도 욕을 하지도 내 운명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대신 참을성 있게 다시 일을 시작했다. 

 

 

디테는 인생은 결국 혼자라는 것, 자연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생의 허무를 깨닫는다. 그는 순간순간 자신과의 대화를 하며,  경이롭게 다가오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쓸 미래를 생각한다.

 

330. 무엇보다도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가장 좋아할 수 있어야 한다. 우선 처음에는 아무 말하지 말고 필름을 돌리듯 자신의 과거를 떠올려본다. 그러고 나서 나처럼 자신에게 말을 걸고 조언을 하고 따져보고 질문하고, 또 가만히 마음속에 귀를 기울이다가 무의식 속에 감춰진 것을 꺼내보고 스스로 검사가 되어 자신을 기소도 하고 스스로를 변호도 하면서 인생의 의미에 대해 자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과거에 있었던 삶에 대한 의미가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면서 내가 두들기고 또 두들겨야 하는 이 길이 과연 어떤 길인지, 고독에서 도망치고 싶거나 직면하려면 용기와 힘이 필요한 근본적인 문제들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를 지켜줄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시간이 아직 남아 있는지......

331. 인생의 본질이 사실은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나의 때가 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음, 죽음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은 영원과 불멸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면서 자신과 나누는 대화인 것이다. 이때 자신의 인생 여정의 무의미를 맛보며 어차피 지속되지 못할 아름다운 것들 안에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 바로 그것이 벌써 죽음의 문제에 대한 답의 시작인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맛보고 경험하는 일은 인간을 비통하게 만들지만 또한 아름다움으로 채워주기도 한다.

 

 

 

이야기가 흡족하셨는지요? 이제 이것으로 정말 끝입니다.

 

작가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난다. 책을 읽으며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이 많았다. 디테의 '자신과의 대화법'은 그대로 따라 해보고 싶다. 디테의 말년은 외로웠지만 아름다웠고 혼자인 듯했지만 또 그와 함께한 것들, 그를 찾아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별 볼 일 없었지만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는 정말로 영국왕을 모셨던 지배인의 조수였으며 아비시니아 황제를 모시고 황금훈장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은 지금 우리 주위에도 무수히 일어나고 있다.

뭔가 놀랄만한 일들은 일생 동안 나를 따라다니며 내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눈부시게 빛나는 별빛을 걷어내고, 그 별의 희미한 중심을 볼 수 있게 되기를.

허황된 빛이 아닌 희미한 심장을 볼 수 있기를.

 

이 책은 1971년에 쓰였지만 작가가 출판 금지를 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체코에서는 1989년에야 공식적으로 출판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006년에 작가의 친구인 이리 멘젤 감독에 의해 <나는 영국 왕을 섬겼다>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영화는 이 훌륭한 책을 어떻게 담아냈을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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