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의 소설 [디디의 우산] & 조현철 감독의 영화 [너와 나]
<d>,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었다> 두 편의 연작 소설이 실려있다.
선물 받은 책이었고, 제목만으로는 어떤류의 소설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채, 붉은 표지에 매료되어 읽기 시작했다.
소설은 혁명에 관한 이야기였다.
1950. 6.28 한강대교 폭파로 붕괴된 개개인의 두개골
1960년대 후반 세운상가의 화려한 완공식과, 세월이 지난 후 상가 재생 프로젝트에서 제외된 상인들
1983. 2.25 북한의 공군 이웅평 대위가 북쪽 삶에 환멸을 느끼고 남한으로 귀순한 사건
1996년의 연세대 사태로 고립된 학생들
2008. 6.10 명박산성
2009. 1.20 용산구 남일당 건물 철거민들의 농성과 사망
2014. 4.16 세월호
2016 수차례의 촛불집회
그리고,
2017. 3. 10. 박근혜 대통령직 파면
열차 안 차창으로 지나치는 풍경처럼 역사적인 사건들이 배경이 되어 소설을 이끌어 간다.
조현철 감독의 영화 [너와 나] 생각을 했다.
2014년 4월에 대한 이야기를 절절한 방식으로 추모하고 위로한 대단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정동진 독립 영화제를 시작으로, 최근 N차 관람을 했다.
부조리한 현실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소극적 혹은 적극적으로, 시위 참여 혹은 주도로 각자의 촛불을 손에 들고 거대한 무언가에 소리치며 대항한다. 각자가 생각하는 수준의 혁명가가 되어 혁명을 기대하고, 때로는 약간의 위안과 찰나의 희망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혁명은 바르게 진행되고 있는가?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되고 있는가?
우리가 들었던 촛불은 개개인의 삶을 변화시켰는가?
영화 [너와 나]에서 세미가 수학여행 가기 전 날, 엄마 아빠와 국수를 먹는 장면이 나온다.
세미가 자신의 태몽을 물어보자, 엄마는 빨간 수박 이야기를 한다. 세미가 '수박은 다 빨갛지' 하며 시시하게 생각하자, 엄마는 수박이 정말 선명하고 빨갰다고, 아빠는 '우주에 단 하나' 밖에 없는 빨간색이라고 이야기해 준다.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빨간색.
단 하나의 우주가 파괴되었다. 그 유일했던 것이.
개개인의 맥락이 없는, 나와는 무관한, 내가 소외된 상태로 전개되는 혁명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냥 조용히 아닌 척하고 망해가는 것보다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박조배는 금방이라도 세계가 망할 것처럼 이야기했으나 디는 의아했다. 망한 다고? 왜 망해.
내내 이어질 것이다. 더는 아름답지 않고 솔직하지도 않은 삶이. 거기엔 망함조차 없고....... 그냥 적나라한 채 이어질 뿐.
진공관은 소리를 좌우한다고 그는 말했다.
정류와 증폭이라고..... 들어봤나? 정류는 산만하게 흩어진 것을 한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것이고, 증폭은 신호의 진폭을 늘리는 것인데 말이야. 이 앰프에서 그걸 하는 게 얘네들이야. 이게 제대로 켜져야 이 앰프가 사는 것이고, 모든 게 제대로 흐르는 거라고.
디는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느꼈던 진공을 생각하고, 문득 흐림이 사라진 그 공간과 그 너머, 거기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과 디에게는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다른 장소, 다른 삶, 다른 죽음을 겪은 사람들.
그들은 애인을 잃었고 나도 애인을 잃었다. 그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디는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무엇에 저항하고 있나.
하찮음에 하찮음에.
세운상가에서 진공관 앰프를 수리하는 여소녀의 낡은 가게에서, d는 불을 밝힌 유리 벌브에 무심히 손을 대어 본다.
디는 놀라 진공관을 바라보았다. 이미 손을 뗐는데도 그 얇고 뜨거운 유리막이 달라붙어 있는 듯했다. 통증은 피부를 뚫고 들어온 가시처럼 집요하게 남아 있었다.
우습게 보지 말라고 여소녀가 말했다. 그것이 무척 뜨거우니, 조심을 하라고.
누구도 죽지 않는 이야기를 꿈꾸는 이 소설들이 그의 손에서 아직 완결되지 않았으므로, 혁명으로 이루어진 날은 오늘이 아닐 것이다. 일상 속에서 사소하게 치부되어 온 문제들과 지워져 온 존재들을 무한히 많은 혁명들이 계속되어야 하고, 정말 혁명이 도래하는 그날에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는 대신에 모두가 말하게 될 것이다. <문학 평론가 강지희>
하찮음에 하찮음에 끝없이 저항하고 있는 우리는, 낡아 거무스름하게 그을린 유리 벌브 안 빛처럼, 정류와 증폭을 거쳐 우습게 보지 못할 강력한 빛을 뿜어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건네는 이 책.
무한한 혁명.
진실된 관심, 글, 박수, 응원, 기부, 참여, 시간, 노동, 연대의 힘은 결코 하찮거나 우습지 않다.
그러니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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