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힐 리조트

 

 

새벽에 에어컨을 끄고 잤는데도 이불을 끌어당겼다. 밤공기가 다르다. 오랜만에 이불을 덮고 자니 포근한 느낌마저 들었다. 우리는 주방 테이블에 쌓여있는 아침거리들을 포기하고 늘어지게 뒹굴었다.

 

11시 체크아웃 시간이 가까울 무렵 비가 후드득 떨어진다. 

 

 

 

메이힐 리조트에서 내다보이는 창밖 풍경이 낯설었다.

압도적인 산 아래로 비를 맞으며 간간히 자동차들이 지나다녔다.

 

오늘의 일정은 병방치 스카이워크 전망대에서 한반도 지형을 본 후, 정선 아리랑시장에서 콧등 치기 국수 먹기, 아우라지에서 돌다리와 출렁다리를 밟아 보고, 나전역 카페에서 커피 한잔, 어둑해질 즈음 집으로 향해 오다 덕평휴게소에 들러 '별빛 우주정원'을 관람하는 것으로 계획이 잡혀 있었다. 완벽했다.

 

그러나 시장 국수 먹기는 여행 전부터 못 가리라 생각했었고, 어제부터 멀미로 고생한 딸, 잠깐의 소나기 후 쨍쨍한 햇살은 아우라지행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것들을 포기한다면 별빛정원을 볼 수 있는 밤이 되기 전 집에 도착하게 될터다. 계획이란 꼭 지켜지지 않아도 된다는 여유로운 마음도 한몫을 단단히 했다. 

 

과감히 동선을 최소화했다.

 

 

 

 

병방치 스카이워크

 

 

해발 583m 절벽 위에 마련된 이 전망대는 한반도 모양의 지형을 볼 수 있어 유명한 곳이다.

 

어제의 고요하고 여유로웠던 여행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알고 보니, 아리힐스 리조트는 스카이워크 외에도 글램핑, 짚 와이어, 래프팅, 산악 바이크 등 다양한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티켓팅을 하고 시설을 이용하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운동과 레포츠를 즐기지 않는 우리로서는 놀라웠다.

 

 

스카이워크를 걸어보기 위해 2,000(성인) 원의 입장료를 지불했다.

투명한 유리를 밟고 절벽 끝에 서서 내려다보는 광경은 아찔했고, 강 흐름의 차이로 생겨난 한반도 모양 지형이 매우 독특했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다.

나비처럼 춤추는 카메라 시선에 담긴 뉴질랜드의 끝없는 산들과, 아래로 흐르는 강의 흐름.

그리고 나직하게 말하는 인우(이병헌)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인생의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대도 그 아래는 끝이 아닐 거라고 당신은 말했었습니다. 다시 만나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스카이워크는 너무 짧았다.

거꾸로 된 U자형의 투명 유리를 걷고 몇 장의 사진을 간직하고 나오는데 십 분이 채 안 걸릴 정도였으니.......

관광객이 적었다면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남기며 여유롭게 감상했겠지만, 유리 보호를 위해 덧신을 신은 사람들의 발이 어지럽게 엉켰다.

 

놀라운 지형을 본 것에 만족하며 금세 복잡한 장소를 빠져나왔다.

 

 

 

 

성마령 가든

 

 

빈속이라 출출했다. 

번잡한 아우라지 시장 대신, 눈에 띄는 식당으로 들어섰다.

 

 

 

신을 벗고 들어서니 식당 문 앞 자리에서 한 팀이 식사 중이었고 다른 손님은 없었다. 우리는 방으로 자리를 잡았다. 테이블이나 수저, 내부 분위기가 깔끔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든든하게 곤드레 정식을 먹으면 좋겠지만 모두 부담스럽지 않은 시원한 음식을 원했다.

 

 

 

단출한 반찬과 함께 나온 평범해 보이는 막국수는 한 입 먹는 순간 반전의 맛을 선사했다.

시원하고 새콤 달콤한 육수와 그 속에 담겨 어우러진 쫄깃쫄깃한 면은 정말 최고였다.

 

 

 

 

나전역 Cafe 

 

 

디저트와 관람을 책임질 나전역으로 향했다. 정선역과 아우라지역의 사이에 있는 간이역. 

과거의 모습을 간직한 역을 감각적인 카페로 개조한 공간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민트색으로 치장한 문으로 입장했다.

 

 

 

석탄산업 쇠퇴 이후 2011년 무정차 역이 되었지만, 2015년부터 정선 아리랑 열차가 운행을 재개하면서 실제로 기차가 정차하는 간이역이라 한다. 처음엔 폐역인 줄 알았다.

 

 

 

 

대합실을 예쁘게 꾸민 공간에 어느 정도 사람들이 차 있었지만, 코너를 돌면 있는 넓은 테이블을 운 좋게 차지할 수 있었다. 카페 구경을 하다 보니 정성스럽고 세심한 인테리어와 소품들이 인상적이었다. 역무원 옷을 입고 사진도 찍어볼 수 있다.

 

 

 

카운터 앞, 오래된 역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키오스크에서 주문했다. 다양한 음료가 있었고 젤라토 아이스크림 사진은 곳곳에 걸려 있었다. 

 

나는 나전역 크림 커피, 남편은 블루베리 스무디, 딸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한쪽 코너에 머그잔과 시계 등 몇 가지 물건을 전시 판매하고 있었고, 나전역 문방구에서는 옛날 과자 등 익숙한 군것질들도 살 수 있었다. 마치 추억의 박물관에 온 듯 설레는 느낌마저 들었다.

 

 

 

무료로 제공하는 엽서와 명함 등이 예쁘다. 작은 것들은 책갈피용으로 넉넉히 챙겼다.

 

 

 

시그니처인 나전역 크림 커피는 3단 커피다. 우유 위에 에스프레소, 그 위를 덮은 곤드레 크림이 독특하다.

빨대를 이용하지 말고 첫 모금에 크림의 달콤함, 다음엔 샷의 은은함, 마지막으로 우유의 깔끔함을 느끼며 마시라는 안내가 있었다. 당부대로 마시니 정말 맛있다.

 

좀 더 그렇게 마실걸...... 너무 빨리 섞어 빨대를 이용했다. 

 

 

 

타는 곳으로 나가보니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형이 정겹다.

지금은 보기 힘든 문방구 앞 게임기와, 낡아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피아노도 추억을 부른다.

 

 

 

뒤편으로는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어 더운 날에도 사람들이 오고 갔다.

딸이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남편과 나의 모습을 즉석 사진에 담아 주었다. 

장소와 어울리는 사진이다.

 

많은 일정이 생략되었지만 충분히 재미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려면 3~4시간은 족히 가야 한다.

 

별빛 정원에 들리는 대신 안흥 손 찐빵 가게로 들어섰다.

 

 

 

냉동해 보관할 생각으로 식은 찐빵 20개를 만원을 주고 구입하니, 김이 나는 찐빵을 비닐봉지에 색별로 하나씩 담아주셨다. 통팥이 살아 있는 찐빵은 맛있었다.

 

늘 그렇듯 여행 계획과 운전 담당인 남편의 수고,

세대차이나는 부모와 함께 선뜻 여행을 나서 준 딸,

모든 여행에 의미를 주고 행복해하는 나,

 

우리의 여름 여행은 마무리되었다.

 

이박 삼일의 휴가는 내일부터다. 아들의 휴가가 8월 중에는 있을 것 같다. 기대되고 설레었다.

 

 

 

 

 

타임캡슐 공원에서 나와 하이원 리조트까지 꽤 이동을 했고, 이미 점심시간은 훌쩍 지나 있었다.

코로나로 휴가철 식당은 건너뛰려고 했지만 이러다가는 모두 녹초가 될 지경이었다.

 

곤돌라 타는 근처에 식당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마운틴 콘도 내에 있는 큰 식당을 발견했다. 

중식 Last Order가 3시. 폰 시계를 보니 3시 2분 전. 다행이다. 식사는 30분 내로 마쳐야 했다.

 

 

 

아테나 키친

 

마운틴 스키하우스 3층 

 

 

조식은 뷔페로, 중. 석식은 몇 가지의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늦은 점심을 먹는 손님은 우리가 유일했고, 코로나 걱정을 한 우리로서는 다행이었다.

 

 

 

남편의 식사 차돌박이 된장찌개(14.0), 딸의 만찬 해물 자장면과 춘권(14.0), 나의 픽 해산물 토마토 스파게티(17.0)다.

가격이 어마어마했지만 소박한 식당을 찾기에는 너무 지쳐있었다.

'딸과 함께 휴가 중이니까'라는 생각으로 부담 없이 맛있게 먹었다. 놀랍게도 주문부터 조리 그리고 취식까지 30분 안에 가능했다. 

 

 

 

 

스카이 1340

 

 

레스토랑과 같은 건물에서 곤돌라를 탈 수 있었는데 우리는 하이원 탑으로 가는 코스다.

'딸과 함께 휴가 중이니까'가 또 발동했다. 발아래가 투명 유리로 된 크리스털 버전으로 표를 구입했다.

일반은 성인 16,000원, 크리스털은 20,000원이니 우리는 12,000원의 비용을 더 지불한 셈이다.

 

 

 

예쁘고 깔끔한 이 보라가 투명 곤돌라다. 특별한 케빈은 몇 대 없었고, 타기 위해 대기시간이 좀 필요했다. 

 

 

 

양 옆으로 큰 창과 아래가 내려다보이는 케빈 안에서 아찔함과 멀미를 동시에 느꼈다. 때문에 발아래 풍경은 그리 오래 감상하지 못했다. 산 정상을 향해 20분 정도 이동했다.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산의 부드러운 곡선과 초록 물결, 노랗고 하얀 꽃들이 환상적이었지만 산을 매끄럽게 다듬어 길을 낸 스키장을 보니 제 모습을 잃은 자연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하이원 탑

 

 

드디어 Top.

곤돌라에서 내리니 이곳의 온도는 23도. 서늘하기까지 한 기운은 가을 냄새가 물씬 풍겼다. 

 

 

 

내려다 보이는 산줄기는 말할 것도 없고, 동화 속처럼 꾸며 놓은 조형물들과 아기자기한 정원도 너무 예뻤다.

위치도 기분도 최고다. 

 

 

 

옆으로 아름다운 정원과 '탑 오브 더 탑' 레스토랑을 잇는 소추원 계단으로 올라가 보니 또 하나의 전망이 펼쳐진다.

벤치와 의자가 있어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얼음이 가득 든 음료를 하나씩 들고 벤치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즐겼다.

35도를 넘나드는 한 여름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피서를 제대로 왔다.

 

 

 

시원하고 깨끗한 공기, 아름다운 야생화들, 백두대간이 내려다보이는 풍경 그 안에 머무는 사랑스러운 우리 가족.

올 2월 입대 후, 아직 한 번의 휴가를 얻지 못한 아들이 자연스레 생각났다.

이번 여행은 함께 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휴가는 자꾸 뒤로 밀리기만 한다. 

 

 

 

보라 케빈을 타고 다시 20분을 내려왔다. 곤돌라를 오래 타고 싶으면 이곳이다.

 

 

고한 구공탄 시장에서 음식을 이것저것 산 후, 숙소인 메이힐스 리조트로 가기로 했었지만, 아무래도 코로나와 무더위 그리고 바닥난 체력으로 어려워 보였다. 

 

룸에 들어가기 전 편의점에서 군것질을 잔뜩 사고, 깨끗이 씻은 후 치킨 배달과 함께 올림픽 보기!로 의견이 일치했다.

 

 

 

딸이 좋아하는 BHC 뿌링클과 뿌링클 치즈볼. 정선은 치즈볼을 하나 더 준다. 서비스인가?

컵라면을 골라 함께 먹으니 배가 부르다. 나머지는 내일 아침과 차에서 먹을 간식이다. 

 

먼 여행으로 힘들었지만 많은 추억을 쌓은 하루였다. 내일의 일정을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정선 여행

 

 

 

꽤 오래전 정선에 왔었다.

달리는 차창 양 옆으로 솟아있던 거대한 산들의 이미지가 다른 기억으로 선명히 남아있었던 곳.

나의 어린 아이들과 아우라지에서 뗏목을 탔던 것, 더운 날 전통시장에서 찐빵과 감자떡을 사 먹은 기억도 남아있다.

 

이번 여름 여행은 딸과 함께 정선이다. 

꽤 오랜 시간을 달렸다. 멀미가 심한 딸이 조금 고생을 했다.

 

 



 

타임캡슐 공원

 

 

 

첫 여행지는 바로, 전지현 차태현 주연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촬영지로 알려진 타임캡슐 공원이다.

 

'엽기소나무 길'로 올라가야 하는 데 우리는 구불구불한 다른 길로 잘못 들어섰다.

아찔한 광경이 주변으로 펼쳐졌다. 남편은 운전하느라 진땀을 뺐겠지만 덕분에 평생 못 볼 풍경들을 간직할 수 있었다.

 

 

 

주차는 공원 앞, 무료로 가능하다. 

해발 850m.

계단을 오르니 사방이 탁 트인 믿을 수 없는 경치가 이어진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다니!

 

 

눈앞에 내려다보이는 산 봉우리들. 

파도가 일렁이듯 부드럽게 솟아있는 산들의 향연은 파란 하늘을 차지한 구름을 배경으로 너무 아름다웠다.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는 밭들의 단정한 모습이 시야를 더욱 시원하게 만들어 주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소나무를 봐야 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담느라 그건 뒷전이었다. 

 

 

 

그녀와 견우가 2년 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타임캡슐을 소나무에 아래 묻는 장면이 기억난다.

이곳에는 실제로 재미난 이벤트가 있었는데, 소나무를 중심으로 보이는 12개의 원형 블록 아래 타임캡슐을 구매 후 묻으면 된다. 

 

 

 

영화에서는 지금처럼 공원이 조성되지 않았기에 고지에 홀로 서있는 소나무 한 그루의 처연함이 더 살아있었던 것 같다.

 

 

 

더위를 피해 특이한 모양의 카페 아띠엔솔로 들어가 보았다.

 

 

 

타임캡슐은 이곳에서 구입할 수 있다. 

차에서 햄버거 하나씩을 먹고는 출출했던 차, 달달한 라테 등 든든한 음료를 기대했지만 아메리카노만 주문 가능했다.

다행히 아이스로 마실 수 있었다.

 

 

 

아담한 카페에는 아직 손님이 없어 잠시 앉아 있기로 했다.

소나무가 정면으로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 즐거운 수다를 떨었다.

 

 

 

이곳이 또 하나의 포토존이다.

피아노 계단은 하늘에 떠 있는 그믐달로 가는 길이다. 

계단을 걸어가도, 달에 앉아 토끼 흉내를 내도,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마주해도 모두 환상적인 사진이 나온다.

용기를 내어 포즈를 취해도 좋을 장소다.

 

무척 더운 날이었지만 고도가 높아 그런대로 선선한 느낌이 들었다.

아름다운 자연을 마음껏 느끼고 간직할 수 있었던 아담하지만 특별한 공간이었다.

 

 

다음 목적지는 하이원리조트 내에 마련된 스카이 1340.

곤돌라를 타고 하이원 탑까지 올라가면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기대가 되었다.

 

독특한 정선의 풍경을 감상하며 다음 목적지로 이동했다.

 

 

 

 

 

 

 

 

정유정 장편소설

 

종의 기원

 

<2016, 은행나무>

 

 

 

찰스 다윈의 책 <종의 기원>에서 왔으리라 짐작되는 소설의 타이틀.

 

다윈의 책 원제가 <자연선택 혹은 생존경쟁에서 유리한 종의 보존에 의한 종의 기원에 대하여>, 영어로는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이니, 그의 이론에 따르면 생존이란 경쟁을 통한 살아남기 싸움이다.

 

유진이는 포식자야.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최고 레벨에 속하는 프레데터.

 

Predator, 포식자

아기새를 물어오는 고양이, 개구리를 잡아먹는 뱀, 토끼를 사냥하는 여우, 물고들의 포식자 상어, 사슴을 해치는 사자.

TV나 책에서 종종 보던 광경이다. 누군가를 잡아먹으며 생존해야 하는 동물들. 인간은 이들의 최상위 포식자이다.

같은 종끼리도 경쟁하며 고군분투를 해야 살아남는다면 우리는 서로를 물고 뜯어먹으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자연 속에서 뿐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경쟁들을 보면, 종의 번식과 생존을 위해 이기고 지는 싸움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살인이라는 지점으로 옮겨가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게다가 존속 살인이라면 더 참담하다.

 

사이코 패스 증상이 선천적 영향이 큰지, 후천적인 환경이 더 중요한지 잘 모르겠지만, 그들은 사회의 규범에 공감하지 않고 편향된 인식을 가지며, 자신의 이익에 따라 타인에게 해를 입힌다. 공감이나 죄책감은 전혀 느끼지 못한다.

 

소설 속 한유진은 어려서부터 자기중심적 생각을 하고, 조용하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고, 사회성이 부족했으며, 특이한 놀이를 즐기며 놀았다. (여자아이들 물건을 훔친 후 수집 등)

활달하고 리더십 있는 잘난 형의 그늘에 가리어 부모로부터 주목받지 못하며 자라기도 했다.

 

어느 날의 가족 여행.

형과 서바이벌 게임을 하고 놀던 중 반칙으로 승리를 거머쥔 형을 바닷가 절벽 아래로 밀어 떨어뜨려 죽게 만든다.

 

웃기지 마 살아남는 쪽이 이기는 거야

 

사건은 동생과 놀다 바다에 빠져 죽은 초등학생과 그를 구하다 죽은 아빠로 기사화된다.

멀리서 현장을 목격했던 엄마는 진실을 밝히고 그를 처벌받게 하는 대신, 신경정신과 전문의인 자신의 동생 혜원에게 데려가게 된다. 사이코패스 진단을 받은 유진에게는 그 사실을 숨긴 채 '간질약'이라는 명목으로 충동 억제제를 처방하고 먹이게 된다.

 

약의 부작용으로 고통받으며 지내는 유진은 엄마와 이모를 속이고 약을 끊어보니 말짱한 정신의 자신과 만나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고, 이후 상습적으로 약을 먹지 않게 된다.

 

그날 형이 공정하게 게임을 했다면, 이모와 엄마가 그를 속이는 대신 솔직하게 말하고 함께 노력하며 약을 먹었다면, 정당한 벌을 받고 본인의 죄를 뉘우쳤다면, 부모가 형에게 준 사랑을 그에게도 주었더라면, 수많은 '그랬다면'이 있었다면......... 그는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며 엄마와 행복했을까?

 

어머니가 내 말을 믿어줬다면, 이 기사를 쓴 기자처럼 그 일이 사고라고 믿었더라면, 우리의 운명이 조금쯤 달라졌을까. 어머니의 소망대로 나는 무해하고 평범한 사람이 되었을까. 그리하여 오래오래 오순도순 살 수 있었을까.

 

지층처럼 단단하게 쌓였다고 믿어온 것 역시 믿음, 배려, 이해, 연민........., 사랑이라는 이름 안에 수렴되는 수많은 감정들. 어쩌면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신의 의도가 아닌지도 몰랐다. 만약 그것이 신의 뜻이었다면, 세상을 창조할 때 만물이 만물을 사랑하는 관계로 설계했어야 한다. 서로 잡아먹으면서 살아남는 사슬로 엮는 게 아니라.

 

인류가 받은 저주 중의 하나가, 어떤 상황에도 적응한다는 거래.

 

 

유진은 몇 번의 살인을 더 저지르는 악마가 되어 포식자로서 그의 삶의 자유의지를 행사한다.

자신의 흥미와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남편과 아들을 잃고 사이코패스 유진과 살아가는 엄마 지원의 마음이 어떨지 생각해 보았다.

내 속으로 낳은 아들이 사랑하는 또 다른 아들을 죽인 살인자다. 사이코패스 기질이 있다.

그를 용서하고 믿으며 살 수 있겠는가. 

 

그녀는 큰아들의 죽음 이후 가족이 없는 유진의 친구 '해진'을 아들처럼 데리고 살게 된다.

죽은 아들 유민과 너무 닮아있는 그에게 애정을 주며 말이다. 해진은 유진의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매일 매 순간 아이의 눈이 내게 애원한다. 나를 물로 돌려보내 주세요,라고, 자식의 그런 눈을 무시할 수 있는 어미가 세상에 대체 몇이나 될까.

 

나는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내 삶의 목표, 혜원이의 치료 목적이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무탈하고, 무해한 존재로 평범하게 사는 것.

 

유진이 잔다. 시름없이, 새근새근 잔다. 나는 여전히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나는 혜원이에게 매달렸다, 뭐든지 하겠다고, 내 인생을 걸어 유진이를 책임지겠다고, 내가 유진이보다 더 오래 살면서 끝가지 책임지겠노라고, 약속에 대한 징표로, 가슴을 갈라 내 심장이라도 꺼내놓고 싶었다. 

 

"엄마, 사랑해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분노가 와르르 무너졌다. 나를 지배하던 충동이 일순간에 가라앉았다. 핏줄의 저주에 걸려든 순간이었다. 내가 얼마나 아이를 사랑하는지 새삼스레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결코 용서하지 못하리라는 걸 예감한 순간이었다.  

나는 유진의 엄마였다. 유진은 내 아이였다. 그것은 세상 무엇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는 하릴없이 성모 마리아 앞에 꿇어앉아 묻는다. 어머니, 지혜로운 어머니.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 참혹한 폭력에서 살아남아 새끼를 낳은 질긴 생명력이 경이로웠다. 다 자란 새끼를 곁에 끼고 다니며 밥을 얻어 먹이는 어미로서의 책임감이 서글펐다. 자신의 허기를 누르고 새끼가 다 먹을 때까지 물러나 기다리는 참을성이 감탄스러웠다.

 

 

 

어느 작가의 말처럼 '세상이 용서하지 않는 죄일지라도 기꺼이 용서하고 안아주는 곳'이 가족의 정의 중 하나라면, 유진은 가족의 품에서 용서받고 사랑받고 지낼 수 있는 걸까?

 

유진을 바라보며 어쩔 도리 없이 어찌해야 할지 모른 채 세월을 살아냈던 지원의 삶은 하루하루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두 번째 살인 현장을 목격한 그녀는 결국 아들을 용납할 수 없게 된다.

 

"이 세상에 살아서는 안 될 놈이야" 

"그때 끝냈어야 했어" 

"그때, 죽었어야 했어. 너도 죽고, 나도 죽고, "

 

 

아들에게 자살을 유도하고, 자신도 함께 떠나려고 했던 그녀. 결국 아들의 손에 처참히 살해당하고 만다.

 

방송을 탔던 희대의 살인마들, 존속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사이코패스들, 그들이 가족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도화지 같이 희었던 갓난아기 시절부터 그들의 성향은 그랬던 걸까?

뱃속부터 편하게 육아했더라면, 경제적으로 풍족한 가정환경이었더라면, 온 가족이 함께하는 따뜻한 가족의 저녁시간이 있었더라면, 공부와 성적에 아이를 옥죄지 않았더라면, 친구들과 더 많이 놀게 허락했더라면, 차별을 하지 않았더라면, 끔찍한 사건 사고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부모의 폭력이 없었더라면, 따돌림을 당하며 소외당하지 않았더라면, 부모가 맞벌이를 하지 않았더라면, 아빠가 알코올 중독자가 아니었더라면, 처참한 전쟁터에 가지 않았더라면, 복지가 잘 되는 나라였다면,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였다면, 빈부의 차이가 없는 사회였다면,...........

 

수많은 '그랬더라면'이 그들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범죄다. 그들의 과거가 어쨌든, 의도가 어쨌든 처벌받아 마땅한 일이다. 

가족이라면 사랑의 마음으로 치료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고통스럽겠지만 처벌받을 것은 받고, 병원도 다니고, 치료도 받고, 약도 먹이고, 사랑을 주면서 그래야 할 것 같다.

말처럼 쉽지 않겠지만..... 도리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조금 줄일 수는 없는 걸까?

전적으로 누구의 책임이라기보다는 본인의 잘못된 성향이라고 생각하지만, 세상이, 나라가, 사회가, 가정이 손 놓고 있을 문제는 아니여 보인다.

 

이 책의 결말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고생스럽게 살았고, 마음이 순수하고 착한, 꿈이 있었고 매 순간 열심히 살았던 청년 해진의 죽음이 이해되지 않는다. 세상을 살아가며 자주 느끼는 불쾌하고 슬픈 감정을 책의 말미에 또 경험했다.

약한 사람, 착한 사람, 열심히 산 사람, 요령 없는 사람, 빽 없고 돈 없는 사람이 늘 피해를 입는 세상 말이다.

 

살인마 이춘재 대신 범인으로 몰려 20년간 복역한 윤 씨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늦게나마 억울한 누명을 벗었지만, 잃어버린 무수한 세월의 억울함과 고통은 보상받을 방법이 없다.

이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제 내가 왜 인간의 '악'에 관심을 갖는지에 대해 대답할 차례다. 평범한 비둘기라 믿는 우리의 본성 안에도 매의 '어두운 숲'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똑바로 응시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 내면의 악, 타인의 악, 나아가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의 악에 대처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분신 유진이 미미하나마 어떤 역할을 해주리라 믿고 싶다. 

_작가의 말 "인간은 살인으로 진화했다" 중

 

 

정유정 작가의 무거운 책 세 권을 연달아 읽었다. <28>, <7년의 밤>, 그리고 <종의 기원>까지.

TV 채널을 돌리다 보면 범죄와 사이코 패스를 다루는 프로그램들도 쉽게 만날 수 있다.

나의 마음과 정서가 우울하고 무겁게 가라앉는다.

 

이런 콘텐츠들이 그 안에서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들을 찾아내며, 사회악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하나의 역할을 해주리라 나도 믿고 싶다. 

 

 

 

 

 

 

선궁

중화요리

 

 

 

서초동 한가람미술관에서 피카소전 관람 후, 중식을 먹기 위해 찾아간 식당 선궁.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지만 사람들이 꽤 있었다.

널찍한 홀과 분리된 룸이 있어 조금은 안심이 되는 식당이다. 남편이 미리 예약을 해두어 우리는 룸으로 들어갔다.

 

 

 

Lunch Course 

 

 

평일 점심을 남편과 함께 먹다니! 여름휴가가 맞아떨어지기 쉽지 않았는데 올해는 행운이다.

그러니 레스토랑마다 야심 차게 내놓은 평일 런치 코스 중 하나는 꼭 먹어야 하는 날.

그나마 부담스럽지 않은 25,000원 코스를 선택했다. 

 

 

짜사이와 양배추 초절임

 

게살스프

 

류산슬

 

칠리중새우

 

고추잡채와 꽃빵

 

탕수육

 

식사 

 

후식

 

나는 짬뽕을 남편은 자장을 식사로 선택하고, 디저트까지 야무지게 먹으니 무척 배가 불렀다.

조리 후 바로 서빙되는 음식들은 따뜻하고 식감이 살아있어 더 맛있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먹는 코스요리라 특별했고, 분리된 공간에서 조용한 식사를 할 수 있어 더 좋았다.

 

 

 

 

Cafe Todah

토다 우면동 지점

 

 

식당이 있는 평화빌딩에서 차로 조금 이동해야 하는 이 카페는 서초동 지점도 있다.

어디가 더 가까운지는 모르겠지만, 남편이 공들여 찾았다는 곳인 우면동 지점으로 갔다.

 

코로나 때문에 야외 좌석이 있거나 거리두기가 충분해 보이는 곳을 찾으려는 남편의 배려가 고마웠다.

 

 

 

 

베이글 맛집인지 크림 맛집인지 카운터 옆 유리 진열대 안에는 빵에 발라 먹는 크림의 종류가 빵 보다 많았다.

네임텍만 남아있는 다양한 베이글들은 이미 다 팔린 듯했다.

 

주차장이 없어 길가에 주차된 차들과 열을 맞추어 둔 것이 이내 마음에 걸렸다. 근처 세진 모터스 주차장에 주차하면 처음 한 시간은 2.000원에 이용 가능하다는 안내가 있었지만 다시 주차하기에는 조금 번거로웠다.

 

야외 좌석은 더위로 마땅치 않았고, 에어컨 바람이 시원한 내부는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그래 Take Out이다!

 

 

 

 

바닐라 라테(5.5)와 모히또 에이드(5.5)를 들고 나왔다.

주차도 더위도 코로나도 안심이다.

 

돌아오는 길에 독특한 카페 인테리어, 유명하다는 베이글 등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라테가 너무 맛있어 정말 만족스러웠다.

 

많은 것을 느끼고 본 전시회와 맛있는 코스요리 그리고 달달한 라테까지 행복한 여름휴가다.

 

 

 

 

PICASSO

- INTO THE MYTH -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프랑스 파리 국립 피카소 미술관에 소장된 걸작 110점이 우리나라로 건너왔다.

세기의 화가 피카소의 회화, 조각, 판화, 도자기 등의 작품을 원본으로 감상할 수 있는 믿기지 않는 기회다.

 

남편과 나의 휴가가 일치해 평일 관람이 가능하게 되었음에도, 대기줄이 어마어마하다는 후기들을 읽고는 일찌감치 출발했다. 

 

 

30분 전 도착.

온라인으로 티켓 구매를 하였으나 발권을 위해 기다려야 했다. 우리보다 부지런한 팀들이 이미 줄을 서 있었다.

티켓팅은 9시 50분이 되어서야 시작되었고, OR코드 입력을 하니 대기번호가 24번이다.

처음 입장은 팀으로 37번 정도까지 입장하였으니 한 100명 정도일까?

 

인원 제한 덕에 쫓기지 않고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의 학살(1951)

내부 사진 촬영이 금지된 관계로 관람 전 후, 홀과 아트샵 등에 있는 작품들을 열심히 담았다.

 

스페인 내전 당시 나치군이 게르니카 지역을 비행기로 폭격하는 장면을 그린 <게르니카(1937)>, 식탁 아래 뒤죽박죽 뒤섞인 시체들을 그려 낸 <시체안치소(1944-45)>와 더불어 피카소 반전 예술 3대 걸작 중 하나인 작품 <한국에서의 학살(1951)>이다. 한국전쟁이 모티브가 되었다는 이 작품은 오늘 꼭 감상해야 할 작품 중 하나였다.

 

흑백의 인물들 뒤로 희미한 색채를 띄고 있는 배경을 보니 묘한 슬픔이 느껴진다.

 

 

 

마리테레즈의 초상(1937)

오늘 가장 많이 눈에 띈 그림일 듯한 <마리 테레즈의 초상(1937)>

여인과 뗄 수 없었던 그의 예술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주었을 여인 중 하나인 마리 테레즈의 초상이다.

젊고 눈부시게 아름다웠다던 그녀의 모습은 회화, 조각, 판화 등에 자주 등장하였고 알쏭달쏭한 피카소 작품이지만 그녀의 모습이 가장 부드럽고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했다.

 

 

 

 

꿈(1932)

"지금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모습이 어쩌면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라는 피카소의 말처럼 <꿈(1932)>은 따뜻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팔장을 끼고 앉아있는 여인 (1937) / 파란모자를 쓴 여인 상반신 (1944)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여인(1937)>은 마리 테레즈를, <파란 모자를 쓴 여인 상반신(1944)>은 마리 테레즈와 헤어진 후 만난 도라마르라는 여성을 그린 작품이다. 마리 테레즈의 모습은 <꿈>에서 보다는 차갑고 우울해 보인다. 

 

 

"나는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_파블로 피카소

 

 

'그의 그림은 독특하고 이해하기 쉽지 않다'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나에게 오늘의 관람은 파카소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 주었다. 난해하지 않은 작품들이 정말 많이 있었고, 조각이나 도자기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들도 아름답고 대단했다.

 

 

 

지중해 해안의 풍경을 담은 <주앙래팽의 풍경(1920)>과 아들 폴을 그린 <피에로 복장의 폴(1925)>,

 

 

 

푸른 색감이 인상적인 말년에 그린 풍경 <칸느 해안(1958)>,

 

 

 

이 외에도 이게 피카소 작품이야?라는 생각이 드는 것들이 많았다.

 

 

"나에게 미술관을 달라, 나는 그 안을 가득 채울 것이다."_파블로 피카소

 

 

5만 점이 넘는 작품을 남긴 그는 아흔 넘어까지 작품 활동에 몰두한 믿기지 않은 열정을 가진 예술가였다.

세기의 화가라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아트샵에는 다양한 피카소 관련 굿즈들이 있었다.

 

 

 

눈길을 끄는 머그, 오늘 봤던 익숙한 그림이 새겨진 엽서와 마그넷, 학용품류 등 다양했다.

마음에 드는 포스터를 구입해 예쁜 액자에 담아 두어도 좋겠다 라는 생각도 했지만 이러다간 끝도 없다.

 

냉장고를 장식한 마그넷들에 식구 하나를 더 데려가는 것과, 피카소 관련 상품은 아니지만 남편의 휴대용 약통 하나를 구입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시간을 내어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미술관을 빠져나오니 뜨거운 햇살과 후끈한 공기가 여름휴가 중 임을 일깨워 주었다. 특별한 날 특별한 음식을 먹기로 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그리움의 문장들

 

림태주

 

 

 

<2021, 행성B>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하는 길. 남편이 <그리움의 문장들>에 나온 글이라며 소개해 준 가족의 정의.

끝까지 읽다 보니 맘 한편이 짠해지며 눈가가 촉촉해진다.

 

 

가족의 정의 

욕실 헤어드라이어의 줄이 꼬여 있을 때 플러그를 빼 풀어두는 것. 내가 설거지를 하지 못하더라도 밥그릇에 남은 밥풀이 말라 달라붙지 않도록 물을 개수대에 놓아두는 것. 머리를 감고 수건을 두르고 나올 때 수건걸이에 새 수건을 꺼내 걸어두고 나오는 것. 치약이 떨어지고 화장지가 떨어지면 새것을 꺼내 바꿔두고 나오는 것. 화장실 휴지통이 가득 부풀어 있을 때 엄마를 부르기 전에 새 비닐봉지를 먼저 부르는 것. 세탁기 정도는 스스로 돌릴 줄 아는 것. 벗어놓은 양말과 빨랫감들이 방바닥이 아니라 세탁바구니 안에 얌전히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 수챗 구멍을 막고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담아 고인 비누 물이 잘 빠져나가게 해 주는 것. 방바닥에 벗어놓은 옷가지들이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려 있거나 옷장 속에 들어가 있을 때 그게 신데렐라가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 누군가의 식사량이나 웃음의 양이 줄었을 때 그것을 알아채는 것. 웃음이 줄어든 대신 근심과 외로움의 양이 늘지 않도록 마음의 눈금을 세심히 살펴주는 것. 아프게 말하고 몰라주는 말을 하는 때가 있더라도,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끝까지 믿어주는 것. 다투었더라도 마주 앉아 밥을 나누고 서로의 물 잔에 물을 채워주는 것. 빗소리 뒤에 숨어서 한숨을 내쉬는 엄마가 보이거나 자주 창밖의 석양을 내다보는 아빠의 등이 보일 때, 그분들의 인생을 헐어내며 내가 살아왔다는 걸 고요히 생각해 보는 것. 세상이 용서하지 않는 죄일지라도 기꺼이 용서하고 안아주는 곳. 끝까지 내편이 되어주는 곳. '우리'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곳. 나를 넘어 세상으로 가는 길이 시작된 곳. 신이 다 돌볼 수 없어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곳. 하나가 없으면 전부가 없는 곳.

<그리움의 문장들_림태주>

 

 

상대가 알아주지 않아도 서로를 배려하는 사소한 행동들을 하며, 의견 차이와 서운함을 느끼더라도 끝까지 너를 믿겠다는 약속을 지켜내는 것, 가족이라면 그래야 하는 것이다. 

좋을 때만 행복하고 궂을 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가족이 아니다. 행복하고 슬픈 두 지점을 넘나들며 생기는 많은 순간들이 아마 그리움 생산의 가장 큰 재료 들일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에 가족의 정의가 삽입되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그리움_ <Daum 사전>

 

1. 어떤 대상을 좋아하거나 곁에 두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애타는 마음.

2. 과거의 경험이나 추억을 그리는 애틋한 마음.

 

사전적 정의로 빠르게 생각해보니, 1번 애타는 마음은 떠나간 사람들, 2번 애틋한 마음은 가족이 먼저 떠 오른다.

사람으로 한정 짓지 않고 생각해 보면, 1번은 간절했던 꿈이나 동경하는 것들, 2번은 행복했던 지난날의 순간들이 필름처럼 지나간다.

 

그리움을 볼 수는 없지만 냄새 맡을 수는 있다. 그리운 것들은 모두 냄새로 온다. 아기 냄새, 엄마 냄새, 겨울바람 냄새, 설탕 냄새, 생선 냄새, 고양이 털 냄새, 자운영꽃 냄새, 비 냄새, 유자 냄새, 재스민 냄새, 사람 냄새. 그렇게 실제적이고, 생생하고, 곁에 있다. 나는 그것들을 느끼고, 내 사랑은 모두 그리운 것들의 고유한 냄새로 온다.

<그리움의 문장들_림태주>

 

 

저자가 수집한 그리움에 대한 글을 읽어보니, 그리움이란 늘 내 곁에서 나를 채우는 그 어떤 것임을 새삼 느낀다. 

때론 아프기도, 때론 기쁘기도 한 아련하고도 애틋한 것들.

 

세월을 살 수록 그리움의 무게는 더해진다. 아쉬운 것도 추억할 것도 겹겹이 쌓여간다.

 

 

 

꽤 오래전, 친정아버지 생신날 아침, 장문의 문자를 아빠에게 보냈다.

죄송한 마음, 감사한 마음, 사랑의 메시지를 담아서.......

잠시 후 울린 폰 알람은 나를 길거리에 주저앉아 울게 만들었다.

 

"고맙다. OO이가 태어나던 날을 잊을 수가 없구나. 아빠는 너무 행복했다. 오늘은 마음껏 그때를 그리워하며 추억하련다..... 나도 사랑한다."

 

유난히 예민했던 나의 첫 아이. 그 아이가 태어나던 날의 감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나의 아빠.

한동안 딸의 직장생활을 위해 고된 육아로 고통받았을 나의 부모님. 행복했지만 힘들었을 그때를 '오늘은 맘껏 그리워하겠다'는 말이 왜 그리 슬펐는지 모르겠다.

 

당신을 향한 그리움이라서 아껴서 그리워합니다. <그리움의 문장들_림태주> 

 

 

두해 전 여든 고개를 넘기신 아버지.

아껴두었던 지난날의 추억과 그리움을 이제는 맘껏 꺼내 특별한 하루하루를 만들어 가시라고 마음을 전해 본다.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표현들로 진한 그리움을 전한 작가의 편지와 엽서 덕에 나의 그리움 목록도 풍성해졌다.

 

생각해보니, 그리움을 의식적으로 밀어내려고 한 적도 있는 것 같다.

슬퍼지기 싫어, 우울해지기 싫어, 혹은 삶이 바쁘다는 핑계와 감성적으로 되는 상황을 피하려.

 

비가 오는 날, 우울한 날, 낭만적인 장소에서만 거하게 날을 잡고 깊숙한 그리움을 꺼낼 노력을 했던 것도 같다.

 

고 이영훈 님의 아름다운 가사 <옛사랑>의 한 구절처럼,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 거야

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난 대로 내버려 두듯이

 

떠오르는 그리움의 생각들을 멈추려 노력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움의 문장들을 기록해 봐도 좋을 것 같다.

이 책의 저자처럼 말이다.

 

살아가며 많은 추억을 쌓고 순간들에 소박한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 그리움의 부자가 되는 것. 

추억할 것이 많은 사람의 노후는 더 따뜻하고 행복할 것 같으니 말이다.

 

그리움의 힘을 끝까지 믿으라는 것. 그 사람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면 그는 아직 지지 않은 사람이고, 충분히 살아갈 힘이 있다는 증거라는 것 

<그리움의 문장들_림태주> 

 

 

 

 

 

 

 

 

 

Cafe DAENERYS

카페 대너리스

 

 

양평 세미원에서 나와, 북한강변 뷰가 좋다는 카페를 찾아 조금 북쪽으로 이동했다. 

 

유명한 카페, 게다가 주말이니 자리가 없을 수도 있겠다, 아쉽지만 테이크 아웃을 해야 하나, 가격이 만만치 않을 텐데, 

점심도 못 먹었는데 등등의 생각이 머리를 채웠다.

 

 

 

 

카페 앞 주차장은 이미 만차. 안내를 따라 옆으로 내려가니 다른 주차 공간이 나온다. 이곳에 차를 주차했다.

 

건물 외벽이 수직정원이다. 관리가 어렵긴 하지만 대기오염과 실내온도를 낮추는 등 환경 친화적이라 들었던 정원.

담쟁이덩굴들에 뒤덮인 고풍스러운 건물을 보니 내부도 신비로울 것만 같았다. 

모든 생각이 이상하리만치 날아가던 순간이다. 

 

 

 

 

들어서니 에어컨 바람이 유독 시원하게 느껴졌다. 

입구부터 럭셔리한 케이크 코너, 계산대 옆에 진열된 베이커리들이 배고픈 나를 자극했지만, 열체크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주문하려는 사람들이 뒤엉키며 복잡했다. 여유로운 자리를 먼저 찾아야 했다.

 

 

 

 

테이블의 크기가 다른 카페들과 달리 널찍하다.

테이블마다 자리를 차지한 팀 옆으로 충분히 함께 앉을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거리두기를 넉넉히 해야 할 듯했다.

 

 

 

지하로 내려가 야외 좌석으로 나가봤다. 북한강을 바라볼 수 있는 좌석들이 곳곳에 무척 많다.

넓은 공간과 좌석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그다지 많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침 자리를 비웠는지, 최고의 뷰와 최고의 거리두기가 가능한 파라솔 아래 빈 테이블이 눈에 띄었다.

이 자리다!

무척 더운 날이었지만, 강바람이 불어와 시원했다.

 

 

 

 

좋아하는 그린티 라테 Iced(8.5)와 시원한 망고에이드(8.0) 그리고 어니언 스위트콘(7.0)을 주문했다.

음료는 가격에 비해 평범했지만 역시 자리값이다.

 

 

 

 

점심으로 대충 때우려고 주문한 빵은 별 기대 없이 잘랐는데, 생각보다 안에 내용물이 실하게 들어있었다.

맛있었다.

 

 

 

 

수상 스키를 즐기는 사람들도 몇 보였다.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고 모터보트에 이끌려 시원하게 강을 가르는 모습이 역동적이고 대단해 보였다.

윙~~ 하고 울리는 모터의 소리가 생각보다 시끄러웠다. 

 

간혹 그 소리가 멈출 때의 고요한 강이 더 좋았다.

 

 

 

 

강의 매력에 푹 빠져 한없이 그 앞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후드득 비가 쏟아진다. 이번엔 폭우다.

다행히 나무와 파라솔이 겹으로 안전하게 지켜주었고, 내리 꽂히는 강한 빗줄기는 강 표면에 무늬를 선사했다.

환상적이었다.

 

 

 

 

이런 낭만적인 일은 매주 벌어진다. 현실감 없는 현실. 

소설이나 꿈과 다를 바 없는 매일의 일상들. 오늘은 소설의 행복한 장이고 즐거운 꿈이다.

 

 

 

 

한동안 비 구경을 했다. 그칠 것 같지 않은 비는 마른하늘을 이기지 못해 기세가 꺾이고, 잦아들었다.

 

돌아가야 할 시간.

테이블을 치우고 나오는데 사실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자리를 선뜻 다른 이에게 내주는 대신, 음료와 빵을 리필하며 어두워진 하늘 아래 조명받은 강의 모습을 볼 때까지 한없이 앉아 있고 싶었다.

 

 

 

 

수직정원은 건물 뒤쪽도 마찬가지였다. 무수한 잎들 사이 하늘이 들어서 있는 네모난 창의 모습만 다를 뿐.

 

 

수직으로 이어진 담쟁이 잎들의 초록 물결, 손만 뻗으면 닿을 북한강, 파란 하늘과 갑작스러운 소나기,

이 모든 것이 너무 아름다웠다.

 

 

 

 

물과 꽃의 정원 

세미원

 

 

오랜만에 다시 찾은 세미원.

무더위에 대비해 챙이 넓은 모자와 선글라스 그리고 시원한 옷을 챙겨 입었다.

 

 

 

더위와 사람들을 피해 일찌감치 길을 나섰지만, 둘 다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주차장에 서있는 차들이 만만치 않다.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하고(성인 : 5,000) 들어서니 불이문이 보인다. 

태극기 속에 담긴 '사람과 자연은 둘이 아닌 하나'라는 사상을 담은 문이다.

 

문을 통과하니 징검다리 길이 운치 있다. 위로 난 길로 올라가 봤다.

 

 

 

국사원

아담한 한반도 모양의 연못에 살포시 떠 있는 수련. 주위를 둘러싼 소나무와 무궁화나무들.

신화 속 신들이 머무는 곳처럼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독특한 연못의 모양을 카메라에 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나의 눈길을 끈 것은 바로 무궁화나무였다. 이렇게 싱싱하고 선명한 색의 무궁화 꽃은 본 적이 없었다.

길을 지나치며 만났던 여리하고 초라했던 그것들과는 다르다. 가지도 잎도 무성하다.

 

 

 

장독대 분수

국사원을 빠져나오니 시원한 물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소나무 아래 수십 개의 장독대가 물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분수를 배경으로 포토존이 있다. 모처럼 하늘이 파랗고 선명하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연꽃들.

꽃망울을 드러내거나, 수줍게 피어 있거나, 활짝 피어 아슬아슬하게 꽃잎이 붙어 있거나, 혹은 떨어진 꽃잎을 아쉬워하며 연밥에서 씨앗 떨굴 준비를 하는 등 각양각색의 연꽃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청초한 백련과 화려한 홍련은 제각각 다른 매력을 풍기고, 파란 하늘과 부드럽게 떠다니는 구름은 선뜻 꽃들의 배경이 되어주었다.

 

 

 

세한정 쪽으로 들어서니 키 큰 어린 왕자가 반긴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플러와 주머니에 넣은 손이 귀엽다.

따뜻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배다리

정조시대 배다리를 재현한 곳이다.

살짝 덜컹거리는 배 위 길을 걸으니 임금이 아니라 동심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다리 끝은 두물머리로 가는 길과 연결이 된다. 두물머리를 들린 후 재입장도 가능했다.

우리는 다시 세미원으로 돌아갔다.

 

 

 

모네의 정원 (사랑의 연못)

사랑의 연못 쪽으로 오니 다리 아래 예쁜 수련들과, 남녀의 입맞춤 상이 있었다.

관광객들에게 사랑과 낭만을 일깨울 의도로 만들어졌다는 이 작품은 정말 정열적이게 느껴졌다.

 

 

 

신양수대교 아래 그늘에서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조금 쉬어갔다. 


수련도 곳곳에 있었고, 다양한 수련을 보기위해 세계수련관을 들어가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곳은 연꽃이 대세다. 오늘은 연꽃으로 충분했다.

 

 

 

열대수련 정원

어린 왕자는 이곳에도 있었는데 무늬와 장식이 조금 다른 옷과 머플러를 입고 있었다. 

예전보다 한층 볼거리가 많아진 정원의 모습에 마음도 풍성해졌다.

 

 

 

출구로 돌아오는 길에는 징검다리 길로 걸어봤다. 

무척 더운 날씨였지만 만반의 준비를 한 복장과, 아름다운 연꽃과 풍경들 덕에 정말 다닐만했던 것 같다.

 

 

 

연꽃 박물관

매표소 옆에 있는 박물관에 들려 더위를 식혔다.

3층은 기획전시관으로 한 화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고, 2층은 연꽃을 테마로 한 상설 전시관이었다. 

 

 

 

아름다운 연꽃 문양을 새긴 다양한 생활용품들이 있었는데, 그동안 무심하게 지나쳤던 무늬들이었다.

우리 문화와 끈끈하게 이어져온 꽃 중의 하나인 연꽃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던 하루였다.

 

 

수련과 연꽃에 매료되어 행복한 여름이다.

 

 

 

 

 

7년의 밤

정유정

 

 

<2011, 은행나무>

 

얼마 전 방구석 1열에 소개된 영화의 원작이기도 한 <7년의 밤>

영화를 먼저 볼까 고민하다 책을 먼저 들었다.

 

 

 

현수의 사실

 

한 때 야구선수, 포지션 포수. 현재는 댐 보안팀장.

마티즈가 갑옷처럼 느껴질 정도의 거구. 강력한 팔의 힘.

상습적인 술꾼. 면허정지 상태에서 음주운전 중 달려 나오는 여자아이를 차로 친 후 질식사 시킴.  호수에 사체 유기. 

물에 빠져가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댐 수문을 열어 저지대 사람들의 수많은 목숨을 하루아침에 앗아간 주인공.

교도소 수감 7년 만에 사형집행을 선고받은 남자.

 

이 모든 것이 사실이다. 당신은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그 남자에 대해서.

일말의 연민이라도 느낄 수 있겠는가?

 

 

 

현수의 진실

 

사실에 감추인 이 남자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왜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가?

 

월남전에서 한 쪽 팔을 잃은 아버지의 폭력으로 불행하게 자라온 소년. 

아버지의 신발을 우물에 던지며 그의 죽음을 바랐던 아이. 실제로 그 우물에 빠져 생을 마감한 아버지.

어린 시절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현수.

 

2군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야구 경력. 

신혼여행길 교통사고 부상으로 1군으로의 진출에 실패하고 인생을 걸었던 야구를 접어야 했던 남자.

집 한 채 없는 초라한 현실과 무능력한 남편이라는 타이틀. 그를 피 말리게 괴롭히는 아내의 잔소리. 

문득문득 나타나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술.

그리고 자신과 같은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되는 그의 전부였던 아들 서원.

 

한 순간의 실수로 오영제라는 남자의 딸을 죽이게 된다.

오영제는 상습적으로 아내와 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이코 패스.

딸이 그의 폭행을 피해 도망가던 중 현수의 차에 치이게 되고,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놀라 아이의 입을 틀어막으며 의도치 않게 살해를 저지르게 된다.

자기 세계가 파괴되었을 때 보이는 미치광이와 같은 영제의 칼날로부터 아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남자.

 

물론, 불행한 과거의 트라우마가, '실수로'라는 타이틀이, 아들에 대한 사랑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오영제라는 인물의 신들린 복수가 아니었다면 그는 마을 전체를 물지옥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아내 영주의 죽음도 없었을 것이고, 아들 서원은 7년 동안 떠돌아다니며 고통스럽게 살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사형을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까.

 

"물론, 자살도 생각했네. 매일, 매 순간. 실행하지 않은 건,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구원이기 때문이었어.
종교를 거부한 것도 비숫한 이유고. 내겐 신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게 할 자유가 있네.
내가 기다리는 건 구원이 아니라 운명이 나를 놓아주는 때야.
삶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지는 순간......... "

_<7년의 밤> 중

 

 

영화 <밀양>에서 자신의 아들을 살해 후 복역하고 있는 범인이, 신께 이미 용서를 받았다며 평화로운 얼굴로 자신 앞에 앉은 모습을 본 여자(전도연 분)는 종교에 대한 배신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거의 미쳐버리게 된다. 

 

신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게 할 자유. 구원을 바랄 수 없는 처지. 

현수는 <밀양>의 뻔뻔한 살인자와 달리 자신이 저지른 사실에 대한 죗값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7년의 밤을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이 소설은 '그러나'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순간의 실수로 인해 파멸의 질주를 멈출 수 없었던 한 사내의 이야기이자, 누구에게나 있는 자기만의 지옥에 관한 이야기이며, 물러설 곳 없는 벼랑 끝에서 자신의 생을 걸어 지켜낸 '무엇'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_<작가의 말 중>

 

 

 

승환이 알고자 했던 사실과 진실 

 

사건를 소설로 담은 승환은 사실과 사실 사이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알아내려 애쓴 인물이며 부자의 충실한 조력가이다.

그러나 현수가 저지른 사실은 팩트다.

그 사이에 숨겨진 진실들 따위가 이 사실을 뒤집을 수도, 상황을 역전시킬 수도, 현수의 사형집행을 되돌릴 수도 없다.

 

이 부분이 마음이 아팠다.

 

하인리히 뵐의 소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에서 주인공이 기자를 권총으로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의 진실 따위는 그녀를 구제하지 못했다.

신문기사와 TV 보도의 모든 사실들은 그녀를 빠져나올 수 없는 회오리 속으로 끌어당겼다.

 

 

사실과 진실 사이에는 바로 이 '그러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야기되지 않은, 혹은 이야기할 수 없는 '이면 세계' 불편하고 혼란스럽지만 우리가 한사코 들여다봐야 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모두 '그러나'를 피해 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겠다.

_<작가의 말 중>

 

 

 

사실과 진실 사이.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사이를 들여다보는 것은 어렵고 불편하고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듣고 있는 것, 보고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사실과 진실 사이의 그 깊숙한 이면을 들여다 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꽤 긴 장편이지만 두 번을 내리읽었다. 

 

한 번 읽고는 영화도 챙겨봤다.

원작의 내용을 담기에 영화 러닝타임으로는 한계가 있어 보였다.

결말의 내용도 조금 다르다.

 

그러나 책과 영화가 말하고 있는 메시지와 무거움은 어느 정도 일치해 보였다.

책과 영화 모두 여운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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