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함과 미숙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십 대와 이십 대. 민감하고 순수한 그들은 관계를 맺기도 상처 받기도 쉬워 보인다.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에는 내가 지나온 미성년의 시간이 스며있다. 쉽게 다루어지고, 함부로 이용될 수 있는 어린 몸과 마음에 대해 나는 이 글들을 쓰며 오래 생각했다. _<작가의 말> 중
표지 제목 <무해한 사람>이라는 제목의 소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다섯 번째 이야기「고백」에서 미주가 생각했던 진희의 정의였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그러나 표제는 책을 읽는 내내 나의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던 말이었다.
진희가 엎드려 자고 있을 때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볼펜을 이리저리 돌릴 때 미주는 자신이 진희를 안다고 생각했다.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진희와 함께할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 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그때가 미주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미주의 행복은 진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_ <고백>
나는 무해한 사람인가?
나에겐 누가 무해한 사람인가?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 노력한다. 누군가에게 무해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나 자신을 장렬히 희생하기도 한다. 그러한 노력 없이 원만한 관계가 유지되기란 어렵다.
그러나, 나에게 무해한 그 누군가의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 보기란 쉽지 않다.
상대의 고민과 인내의 시간들, 공허함과 가슴 아린 아픔을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만약, 적나라하게 알게 된다면 그 희생을 밟고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
수이는 단 한 번도 자기 상처를 과시한 적이 없었다. 자기 상처로 누군가를 조종하는 일이 가장 역겹다고 믿는 사람처럼 그런 가능성 자체를 차단했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려 했고, 그게 무엇이든 모든 것을 삼켜내려 했다. 그런 수이가 소리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울고 있었다. _ <그 여름>
어쩌면 여자도 울고 싶었는지 모른다. 혜인에게 기대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행동들이 혜인과 자신 사이를 망쳐버릴까 봐, 혜인을 떠나게 할까 봐 자제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명랑한 사람이고, 나는 심각하지 않은 사람이고, 나는 가벼운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어야지 버림받지 않고 관계를 맺어갈 수 있다고 배우며 자라왔는지도 모른다. 더 이상 웃음으로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순간이 되었을 때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_ <손길>
사소한 하나의 눈빛, 표정, 말, 행동으로도 관계는 뒤틀려버릴 수 있다.
크게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어쩌다 한 그 사소함이 상대에게 큰 상처를 줄 수가 있다.
단 한번 긴장의 끈을 놓았을 때, 관계의 절단을 초래한다면 그건 가혹하다. 가슴 아프다.
나는 언제나 사람들이 내게 실망을 줬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실망을 준 나 자신이었다. 나를 사랑할 준비가 된 사람조차 등을 돌리게 한 나의 메마름이었다. _ <모래로 지은 집>
그녀의 소설은 마음을 울린다. 아주 미세하고 예민한 관계의 감정들을 건드린다.
그녀의 첫 소설집, <쇼코의 미소>를 읽고 관계의 외로움과 슬픔에 대해 공감하고 눈시울이 붉어졌었다.
십 대 이십 대는 아니지만 이 책도 다르지 않았다.
지금도 주희는 예전처럼 이 관계를 돌보려 하고 있었다. 하기 힘든 말을 애써서 겨우겨우 이어나가면서. 그런데도 윤희는 그 마음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_ <지나가는 밤>
나에게 무해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중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희생을 인지하는 것이 나의 달콤한 행복을 앗아가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소설들의 결말은 결코 해피 엔딩이 아니다. <쇼코의 미소>의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헤어짐으로 끝난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아마 인간에 대한 연민일 것이다.
참아내는 것이 사람들의 윤리라면 인생은 참 쓰디쓴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언제나 알아서 잘하고 동생 잘 챙긴다고 칭찬을 받았던 누나도 하민처럼 외로웠을까. 누구에게도 걱정을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그녀도 애를 썼을까. 그렇게 태어난 사람은 없는 거잖아._ <아치다에서>
나에게 전혀 무해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내가 전혀 무해한 사람이 되어 줄 수 있을까?
나의 희생과 다른 이의 희생이 얼마나 넘쳐야 그게 가능할까?
다른 이의 희생을 담보로 행복해지고 싶지도, 나의 희생을 감수한 채 다른 이의 행복을 마냥 지지해 주고 싶지도 않은 미묘한 감정들......... 우리는 어쩌면 그 경계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창경궁은 가을 단풍을 보러 두어 번 갔었기에 선명하지만, 창덕궁은 오래전 일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임금들이 거처했던 곳이라 한다.
고궁의 매력을 알아버린 가을, 오늘은 창덕궁이다.
창덕궁
돈화문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
문의 규모라기에는 엄청나다. 위엄이 느껴졌다.
돈화문 일원에 마련된 통유리 건물에서 표를 구입하고 기념품 몇 가지를 구경했다.
금천교와 진선문
돌다리 건너 진선문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멋스럽다. 입구부터 잘 심긴 고목들이 운치 있다.
꽃은 지고 단풍은 아직인 계절이지만, 종일 나의 눈에 들어왔던 건 사연이 담긴 듯한 나무 기둥과, 다양한 모양으로 뻗은 가지, 제각각 푸르름으로 달린 잎의 화려함이었다.
경복궁의 건물들이 좌우 대칭을 이루며 일직선상에 배치된 것과는 다르게, 창덕궁은 북악산 응봉 자락 지형에 맞게 배치하여 자연과 조화롭게 어울린다. 경복궁은 유교, 창덕궁은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니 정말 느낌이 다른 두 궁이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이곳은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인정문과 숙장문
좌측은 정전으로 통하는 인정문, 정면은 숙장문이다.
인정문
인정문 안으로 보이는 인정전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인정전
문 안으로 들어서니 정전인 인정전이 흐린 하늘 아래 서있다.
경복궁 근정정과 다르게 창호지가 황색이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순종황제가 거처했기 때문에 황제의 색인 황금색을 사용했다고 한다.
용마루에 박힌 오얏꽃도 생소하다. 오얏은 자두의 순우리말로 조선왕실을 상징하는 꽃문양이기는 하지만 다른 조선 궁궐에는 없는 장식이다. 개화기 서양이나 혹은 일본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추측된다고 하는데 어떤 이유이던 우리의 슬픈 역사가 스며있는 정전이다. 그 위를 검은 새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인정전 내부
경복궁의 어좌가 붉은색인 것과 다르게 황색 어좌다.
유리창과 커튼, 서양식 마루, 전등 등 외국 문물을 궁에서 보니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선정문
선정전
선정전으로 들어가 어로인 복도를 지나면 편전인 선정전이다. 궁궐의 전각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청기와 건물이다.
아쉽게 특별한 기와는 사진에 담지 못했다.
희정당
전통과 근대가 잘 어우러진 건물 희정당은 조선시대에는 침전으로 사용되다 순조부터는 편전이었다고 한다.
동행각, 서행각, 접견실로 이루어진 내부는 조선 후기 및 근대 왕실의 생활모습이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희정당
화려하게 얽혀있는 지붕이 멋스럽고 희정당에서 바라본 소나무들은 액자 그림처럼 아름답다.
선평문대조전
선평문을 들어서니 왕비의 침소였던 대조전이 우아하게 자리한다.
대조란 크게 만든다는 뜻으로 왕자 마마를 생산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임금의 침소이기도 했던 이곳은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 왕자가 태어나면 두 마리의 용이 충돌할 수 있어 만들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대조전 일원
내부를 들여다보니 서양풍의 장식과 소품들이 방 안을 차지하고 있었고, 뒤뜰에는 왕비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화계가 어김없이 마련되어 있었다.
정면으로 고송 한그루와 희정당이 보이는 카페 야외 좌석에 앉았다.
내내 흐렸던 하늘에서 비가 떨어진다. 카페 왼쪽 숙장문으로 우산을 쓴 관광객들이 오고 갔다.
따뜻한 카푸치노를 마시며 비를 머금은 고궁을 둘러보는 순간이 황홀했다.
낙선재 일원
길 아래로 조금 내려오니 낙선재 일원이다. 단청을 입히지 않은 담백한 이 건물들은 헌종이 경빈 김 씨를 염두에 두고 만든 곳으로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가 있다.
장락문과 낙선재
헌종의 서재겸 사랑채로 사용되었던 낙선재.
정문인 장락문의 편액이 색다르다. 알고 보니 흥선대원군의 글씨란다. 뒤쪽으로 누각 상량정과 화계도 보인다.
석복헌
경빈 김 씨의 처소인 석복헌.
수강재
수강재 창으로 바라본 화계에 걸린 감나무.
계단에서 소나무가 자라는 건 처음 본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도 환상적인 풍경이다.
창덕궁은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정형화되지 않은 건물 배치, 전통과 근대적인 모습의 조화, 우거진 특별한 나무들이 인상적이었다.
역사를 증명하듯이 근대적인 모습이 곳곳에 남아있는 궁은 그 시대의 시간들이 생생하게 느껴지게 만들어 주었다.
상량정 근처에 창경궁으로 들어가기 위한 매표소와 입구 그리고 창덕궁 후원 가는 길이 이어진다.
후원은 인원 제한이 있어 온라인으로 예약해야 했었지만, 운 좋게도 오늘은 현장에서 가능했다.
영국대사관 왼편, 덕수궁 안쪽에 마련된 보행테크를 통과해 고종의 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데크에서는 유료 관람인 덕수궁으로 넘어갈 순 없지만 넘겨다 볼 수는 있어 궁의 웅장함을 잠시나마 구경할 수 있었다.
고종의 길은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부터 덕수궁까지 오갔던 길로 알려져 있다.
길의 끝까지 걸으니 정동공원이 있다. 언덕 위 구 러시아 공사관은 공사 중이었다.
주차해 놓은 콘코디언 빌딩 쪽으로 가던 중 캐나다 대사관에 들려 사진을 찍었다.
요즘 다시 보고 있는 드라마 <도깨비>에서 단풍국으로 친근한 나라.
TV 화면 속, 붉게 물든 커다랗고 풍성한 메이플 트리를 보며 가보고 싶은 나라 목록에 슬그머니 올려보기도 했던 곳.
사실 이 드라마에 빠져있는 건 나보다 남편이 더 유난하다. 폰카메라를 들어 정성스레 구도를 잡고 사진을 찍는 그의 뒷모습이 마냥 사랑스럽다.
오늘 걸었던 정동길은 고 이영훈의 노래 광화문 연가와 함께 기억날 것 같다.
쓸쓸한 날씨가 그 길의 분위기를 더해 주었고, 소박한 이름의 작은 카페는 정이갔다.
붉은 벽돌 건물들과 돌담이 어우러진 풍경은 색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고, 가로수 아래 지나치는 사람들의 환한 얼굴들이 정겨웠다. 길에서 만난 작은 비석과 새겨진 가사는 옛 감정들을 불러일으켰고, 돌아오는 내내 차 안에서 들었던 광화문연가는 정동길을 나의 길로 만들어 주었다.
폐암으로 오랜 기간 투병하셨고, 얼마 전 대동맥 파열로 쓰러지신 후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들었었다.
육아로 오랜 기간 쉬다 다시 일하신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가벼운 인사 정도만 하고 지냈다.
활달한 성격에 키가 크고 덩치도 좋아 화통해 보이지만, 늘 인사를 건네는 건 내쪽이었고 그녀는 무언가로 바빠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가지 못했었다.
카톡의 프로필 사진을 열어 보았다.
500개 이상의 사진 중 1페이지는 부친의 사진이다. 활짝 웃고 계셨다.
조금 더 넘겨보니 그녀 아이들의 재미난 포즈 사진들, 남편과 함께한 가족사진, 그리고 같은 노인 사진 몇 개를 더 볼 수 있었다.
친정아버지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 더 누워있지 못하고 일어났다.
얼마 전 통화할 때 "아빠는 이제 그만 가야지." 하며 평화롭게 말씀하시던 목소리가 마음을 누른다. 늦게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셨지만 지금까지 신실한 기독교 신자이신 아빠는 늘 감사함으로 때를 기다리신다고 하신다. 그게 가능이나 할까? 두려움 없이 그날을 기다릴 수 있을까?
젊은 시절의 나는 왜 아빠에게 그렇게 퉁명스럽게 대했을까? 함께 더 많이 웃고, 더 상냥하게 해드리지 못했을까?
가난했어도, 우리에게 사랑의 표현이 서툴렀어도, 엄마를 고생시켰어도 나의 아빠였는데 말이다.
어떻게 그러셨는지 모르지만 없는 살림에 세 남매 대학교육, 결혼까지 다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셨으니 충분했는데 말이다.
아빠의 세월의 시간을 나는 정말 조금도 알지 못한다.
장례식은 가족분들이 모여 가족장을 하려 합니다. 멀리서나마 따뜻한 마음의 위로를 부탁드리며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