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친구들을 만났다. 코로나 이후 처음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살아 중간지점인 강남에서 만나곤 했었다.

 

2년 만에 탄 빨간 좌석버스는 그새 요금도 올랐고 좌석 앞에 핸드폰 충전장치까지 생겼다.

편안한 자세로 등을 맞춘 후 차창으로 지나치는 가로수들을 바라보니 마음이 설렌다. 

 

친구들과의 만남도, 시야 가득 물들고 있는 가을도, 좌석버스에 기댄 나의 모습도,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음악도, 목적지가 강남인 것도 모두 나를 설레게 했다. 

 

 

 

 

남양성모성지

다음 날은 남편과 화성시 남양 성모성지를 찾았다.

불타는 듯한 단풍나무, 노란 은행나무, 갈색으로 물드는 느티나무, 미처 물들지 않은 초록잎들이 어우러져 화려하다.

 

 

 

 

어찌 이리 다른 색감으로 물드는지 사람과 같다.

다른 색, 다른 속도로 물들어 간다. 다른 모양 다른 속도로 떨어진다.

 

 

 

 

다채로운 봄꽃도 화려하고, 여름의 초록잎도 싱그럽지만, 적색, 황색, 갈색 꽃이 최고다.

나무 전체에 피는 강렬한 꽃을 당해낼 수 없다.

 

아카시아 꽃잎이 떨어지듯, 단풍이 떨어진다. 

하늘거리며 떨어지는 잎이 외로워 보이고, 낙엽들의 바스락 거림이 쓸쓸하다.

강렬한 꽃은 남김없이 떨어져 나무는 더 외롭다.

 

 

 

 

오랜만에 만나 소식을 들은 친구들의 안부는 예전보다 더 공감되고 마음이 쓰인다.

세월의 후반으로 함께 달려가는 동지 같은 느낌이다. 

 

성지에서 돌아오는 차창 밖으로 커다란 갈색 꽃이 나린다.

쓸쓸하고 외로워 보여 눈가가 붉어졌다. 

 

차고 쓸쓸하지만 가을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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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 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굿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란시스 잠'과 도연명과 라이널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 시인.

 

오래전 어느 명절, 큰댁에 갔을 때였다.

대학 입학 후 처음 파마를 한 아들을 보고 형님께서 백석 시인 같다고 하셔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있다.

뼛속까지 문인들로 모인 이 집안에서 모두 관심 있는 시인인 듯했지만, 사실 나는 그의 시를 잘 몰랐었다.

 

얼마 전 딸이 아빠 생일 선물로 백석 시집 <사슴>을 사드렸다.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시는 '흰 바람벽이 있어'라며 책을 펼쳐 소개하자 남편은 그 시에 표시를 해두었다.

 

몇 번을 읽어 보았다.

1941년 4월 문장지에 발표된 시이다.

일제 식민지 시기 시인이 만주에 있을 당시에 발표된 작품이다.

타지에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며 시를 써 내려갔을 쓸쓸함이 내가 그 방안에 누워 있는 것처럼 전달된다.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어두컴컴한 좁은 방에 누워 흰 벽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그리운 것들.

빼앗긴 조국, 고향에 계신 늙은 어머니, 이루어지지 못했던 사랑, 평화로웠던 소소한 일상들.......

 

그러나 시인은 가난과 외로움 쓸쓸함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한다. 

슬픔 안에서 극대되는 사랑과 벅찬 그리움은 하늘이 사랑하는 이에게 내린 귀한 선물이라 여기며 말이다.

 

외롭고 여린 초생달, 바구지꽃, 짝새 그리고 당나귀를 생각하며, 

고독과 외로움을 노래했던 시인들을 벗 삼아 말이다.

 

그래서 그는 높은 사람이다. 뜨겁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사랑과 슬픔을 아는 사람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외로운 방에서 삶의 고통과 슬픔을 이겨내려 안간힘을 쓰는 시인의 모습을 생각하니 불쌍하고 가엾다.

나의 모습,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 인간의 모습이 떠올라 괴롭고 아프다.

 

더없이 슬픈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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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이른 추위로 가을이 저만치 가버린 줄 알았는데 모처럼 따스한 날이 이어졌다. 오랜만에 하늘도 파랗다.

공사 중인 대한문을 돌아 덕수궁 안으로 들어갔다.

 

덕수궁은 다른 궁들 보다 좁은 공간에 건물들이 뒤죽박죽 섞여있는 느낌이 들었지만 다양성은 최고였다.

이 때문인지, 공간이 협소해서인지, 날씨가 화창해서인지 관광객들이 정말 많게 느껴졌다.

 

 

 

 

 

함녕전 영역

 

 

광명문

광명문으로 입장하니 왼편으로 정전이 보인다.

늘 정전을 먼저 관람하게 되는 동선이었는데 오늘은 다음 코스다.

 

 

 

 

 

함녕전

고종의 침전이었고, 고종이 승하한 장소이기도 했던 함녕전이다.

 

[덕수궁 프로젝트 2021 : 상상의 정원] 전시회가 덕수궁 안 여기저기에서 진행 중이었다.

고궁에서 열리는 전시회, 사람들과 소통하는 문화재의 느낌이 신선하고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문화유산이 훼손되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보물이기도 한 함녕전 안에서는 '고종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정원'이 애니메이션으로 상영되고 있었다.

고종의 침전에 들어와 볼 기회가 생기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함녕전 뒤뜰에 마련된 화계는 계단이 넓어 안정적으로 보였다. 커다란 굴뚝도 보인다.

 

 

 

 

덕홍전

덕홍전은 외국 사신을 접견할 목적으로 마련된 공간이다. 

원래 이 자리에 명성황후의 신주를 모셨던 경효전이 있었는데, 화재로 타 버린 후 덕홍전이 생겼다고 한다.

이곳 역시 전시가 있었지만 오늘은 궁 관람에 집중하기로 했다.

 

 

 

 

덕홍전 처마와 함께 보이는 석어당과 나무 한그루가 이 가을 멋진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 석조전도 보인다.

 

 

 

 

정관헌

덕홍전 뒤쪽으로 궁과 어울리지 않는 이 건물은 정관헌이다.

러시아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 기둥 상부에는 한국 전통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한국과 서양의 건축 양식을 절충해 만든 건물이 세련되어 보였다.

 

 

 

 

커피를 즐겨 마셨던 고종의 휴식공간이기도, 외교사절들과 연회를 즐기기도 했을 이 공간은, 궐 뒤뜰 언덕에 있어 궁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중화전 영역

 

 

중화문

중화문 사방에 있었다던 행각들은 일제 강점기 이후 훼손되었고 정원이 생기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중화전

덕수궁의 정전이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덕수궁을 정비하며 계단 가운데 가마가 지나다니는 사각형 돌에 용 문양을 새기고 창호를 황금색으로 칠해 황제의 위상을 갖추었다고 한다.

중화전은 1902년 중층건물이었으나 1904년 화재 후 1906년 다시 지으면서 단층으로 축소하였다고 한다.

 

 

 

 

정전 내부

대한제국의 황실 내부가 위용 있어 보이지만 파란만장한 시기를 겪었을 고종의 자리는 위용 아래 더 서글퍼 보였다.

 

 

 

 

맑은 하늘 아래 재킷을 벗어 들고 거니는 사람, 서로 인생 사진을 찍어 주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 전시회를 보기 위해 온 젊은 예술학도 등 다양한 사람들의 물결에 맘에 드는 사진을 얻기는 힘들었지만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석어당

유서 깊은 건물 석어당은 덕수궁에 남아있는 유일한 중층 목조건물이다.

1904년 화재로 다시 지었다고 한다.

 

 

 

 

건물의 진한 빛깔과 처마 끝으로 가지를 내린 살구나무 한그루의 연초록 잎은 이날 가장 인상적인 풍경 중 하나였다.

 

 

 

 

준명당과 즉조당

석어당 옆으로 복도각으로 이어진 두 건물이 나란히 있다.

즉조당은 대한제국 초기에는 정전이었다가 중화전이 완성된 이후로 편전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뒤쪽으로는 정원과 예쁜 담벼락 그리고 고종의 길 가던 길에 걸었던 나무 데크도 반갑게 자리하고 있었다.

 

 

 

 

 

석조전 영역

 

 

석조전

석조전은 내부에 접견실, 대식당, 침실 서재 등을 갖춘 근대 건축물이다.

대한 제국 선포 후 1910년에 완공되었지만 1907년 고종이 일제 강압으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였고, 이 해 국권이 피탈된다.

 

 

 

 

석조전

기단 위에 이오니아 기둥을 줄지어 세운 건물은 근사한 대학교 느낌이 나기도 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후에 서관을 증축하면서 분수정원도 조성했다고 한다. 서관은 지금은 덕수궁 미술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고즈넉한 분수정원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석조전 일원을 감상할 수 있었다.

 

 

 

 

석조전을 끝으로 한 바퀴를 돌았다.

전통과 서양의 모습이 뒤섞인 궁은 매우 인상적이었고, 전체가 미술관이었던 오늘의 광경은 오래 기억될 것 같았다.

 

 

고종이 서양 가베를 즐겼던 정관헌도, 황제의 계획으로 완공된 후 그는 사용하지 못했던 석조전도, 권위가 땅에 떨어졌던 어좌도, 황후의 침전 없는 궁궐도, 그가 쓸쓸하게 승하했던 함녕전도 모두 애잔하다.

맑은 하늘 아래 위엄이 느껴지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건물들을 보았지만, 이면에 남아있는 이야기들로 오늘의 덕수궁은 흐리고 슬프다.

 

유래없이 평화로운 현재의 날들을 잘 지키는 것만이 그들의 희생과 슬픔을 위로할 수 있을 듯하다.

 

 

 

 

 

 

 

 

 

 

 

 

 

 

유림면

 

 

 

시청 길 건너 이 오래된 식당은 메밀 전문 국숫집이다.

유명한 식당이라기에 붐비기 전 오픈 시간 맞추어 방문했다. 이미 두 팀이나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그리 많지 않은 메뉴지만, 선뜻 선택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판 메밀은 필수, 비빔메밀과 냄비국수 중 고민하다 따뜻한 국수를 선택했다.

 

 

 

 

 

먼저 메밀간장과 파 그리고 투박하게 썰린 여린 색의 단무지가 나왔다.

커다란 단무지를 조금씩 베어 국수와 함께 먹는 재미가 있었다.

 

 

 

 

냄비국수(8.5)

 

국수라기보다는 우동에 가까운 면은 부드러우면서 쫄깃하고, 입안 가득 씹히는 어묵의 맛도 담백했다.

국물 한 숟가락 떠먹으니 짜지 않은 깊은 맛이 최고다. 수란을 반 갈라 터트려 먹으니 고소한 맛이 잘 어우러졌다.

 

 

 

 

메밀국수(8.5)

 

판 메밀의 면은 부드럽고 매끌매끌하다. 파를 듬뿍 담은 메밀 간장에 꼭 담가 적셔 먹으니 입안에 은은하게 퍼지는 맛이 일품이다. 아래로 한 단 더 있었지만 양도 무척 적게 느껴졌다. 남은 메밀 간장을 후루룩 마시니 수정과를 먹는 듯 계피향이 돌았다. 

 

모든 음식이 짜지 않고 담백했고 넉넉하지 않은 양이었지만 그 정도 먹으니 만족스러웠다.

모든 것이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것이 오랜 식당의 비결인 듯싶었다.

 

 

 

 

 

Cafe

정담

 

 

 

정동극장 1층에 마련된 카페다. 맞은편으로 정동교회가 보인다.

토요일 볕 좋은 날 교회 마당에서 신부와 신랑이 웃으며 서 있었다.

 

오래전 가을 나의 결혼식 날도 이 비슷한 날씨였던 듯하다.

말로는 이제 불행 시작이라느니, 결혼을 왜 하냐느니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눈부신 신부의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한옥 느낌이 나는 한쪽 벽면과 야외 마당이 내다보이는 유리 벽 사이 카페의 내부는 길고 좁다. 

음료와 디저트를 주문하고 야외로 나갔다.

 

 

 

 

 

마당가에 마련된 자리에 앉으니 따뜻한 햇살이 좋다.

다가오는 추위에는 야외 좌석들이 무색할 것이다. 늦기 전에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즌 한정메뉴 차이티라테는 따뜻한 우유에 꿀을 넣어 먹는 듯한 느낌이었다. 중간중간 나는 중국차 향이 좋았다.

 

 

 

 

 

겉바속촉을 기대했던 허니브레드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빵이 눅눅한 느낌이 들었다.

빵 위로 화려한 크림이 올라간 비주얼이 아니라, 그릇에 따로 담긴 묽은 소스도 내가 생각했던 디저트가 아니었다.

 

출출하던 차에 남편은 맛있다며 먹었고 나도 달달한 빵으로 에너지를 보충했다.

 

 

다시 걷는 정동길은 이제 익숙하다. 

하루에 한 두가지만 하고 돌아가도 그 흔적에 낭만이 머문다.

 

 

 

 

 

 

창덕궁은 넓은 후원을 가지고 있어 왕들의 사랑을 받았던 궁궐이다.

자연 지형을 훼손하지 않고 4개의 골짜기마다 정원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부용지, 애련지, 관람지, 옥류천 정원이다.

4개의 정원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크고 개방적인 형태에서 작고 은밀한 곳으로 변하다 매봉으로 이어진다.

 

 

 

 

후원 가는 길은 깊은 산속을 향해 가는 길 같았다.

창덕궁과 창경궁 두 돌담 안으로 뻗어있는 나무들의 울창함이 신비로움을 더해주었다. 

 

 

 

 

 

부용지 일원

 

 

영화당

꽤나 한참을 걸었던 것 같다. 하나의 골짜기를 넘으니 울창한 숲 사이 첫 번째 정원이 보인다.

 

 

 

 

부용지

나무를 걷고 보니 꿈속에서나 볼법한 고요한 풍경이다.

크고 네모난 연못에 둥근 섬 하나, 물 위에 유유히 떠다니는 새들이 평화로워 보였다.

 

 

 

 

부용정과 사정기비각

연못 주변에는 부용정과 4개의 우물을 지키는 비석을 담은 작은 누각 하나가 서있다. 

두 기둥을 물속에 담은 독특한 모양의 정자는 왕이 사색의 시간을 갖거나 휴식을 취하기에 안성맞춤이여 보였다.

 

 

 

 

어수문과 주합루(규장각)

주합루는 1층은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 2층은 열람실인 주합루였다가 지금은 함께 주합루로 부른다고 한다.

정조가 세운 규장각은 단순한 서고가 아닌 정조의 개혁의지를 반영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궁궐 정원에 도서관이라니 참신하다.

 

 

 

 

영화당에서 보이는 부용지와 영화당의 앞마당 춘당대 

영화당 앞 너른 마당에서는 연회를 열거나 과거시험 활쏘기 시합 등 다양한 행사가 있었다 한다.

지금은 창경궁 담으로 막혀있다.

 

 

 

 

 

 

애련지 일원

 

 

불로문

 

애련지와 애련정

돌로 깍아 세운 불로문을 통하면 두 번째 정원, 애련지가 있다. 

부용지의 규모나 화려함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고즈넉한 분위기의 이곳도 왕의 사랑받는 장소였으리라 짐작되었다.

 

 

 

 

 

연경당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의 진작례를 위해 마련한 처소이다.

사대부 집 느낌이 나는 이곳은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국적인 느낌이 나는 서재도 인상적이었다.

 

 

연경당의 대문 장락문

 

연경당 건물 뒷모습

 

선향재

중국풍의 벽체와 서양풍 차양을 설치한 서재 선향재는 전통 사대부 가옥 사이에서 특별함이 느껴졌다.

 

 

 

 

능수정

선향제 뒷마당에는 화계와 모퉁이 높은 곳에 정자 하나가 있다.

날렵하게 날개를 펴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매의 모습을 한 정자는 연경당을 지키는 수문장 같다.

 

 

 

 

 

존덕정 일원

 

 

관람지와 관람정

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오면 길고 좁은 연못 위에 부채꼴 모양을 한 정자가 눈에 띈다.

이곳 주변에는 다양한 모습의 정자들이 있었는데 이 일대는 창덕궁 후원 중 가장 늦게 모습을 갖춘 곳이라 한다.

 

관람지는 원래 작고 네모난 연못 두 개와 동그란 연못 하나로 이루어져 한반도 모양과 같아 반도지라고 불렸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하나의 연못으로 합쳐져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고 관람지라 칭하게 되었다.

 

 

 

 

존덕정

관람지 위쪽으로 작은 연못이 하나 더 있다.

육각 겹 모양 정자인 존덕정 옆에는 궁궐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도 볼 수 있었는데 노랗게 잎이 물들면 환상적일 것 같았다.

 

 

 

 

 

존덕정과 폄우사

존덕정 옆에는 사각형의 길쭉한 정자 폄우사가 있다.

폄우는 '어리석음을 고치다'라는 의미로 이곳은 효명세자가 독서를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 궁을 보고 후원으로 들어온 길이라 많이 걸었다. 쓸쓸한 날씨에 몸에 한기도 느껴졌다.

후원을 구석구석 둘러보지 못했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봉우리 중턱인지 고개를 넘었는지도 모른 채 정원을 거닐다 보니 어느새 옥류천까지 도달했다. 

 

 

 

 

 

 

옥류천 일원

 

 

 

태극정
소요정

소요정은 크기나 모양은 그리 특별하지 않으나 옥류천의 물길을 끼고 자리해 물의 흐름을 지켜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 특별하다.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유상곡수연을 즐기는 선조들의 낭만이 느껴지는 곳이다.

 

깊은 가을 다시 이곳을 찾게 된다면 이곳 소요정에서 한참 머무르리라 생각했다.

 

 

 

 

청의정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유일한 초가지붕 정자다. 세워 둔 허수아비가 시골 풍경을 자아낸다.

정자 앞에 논을 만들고 벼를 심어, 농사의 중요성을 일깨우거나 그해의 풍년과 흉년을 짐작하기도 했으며, 수확 후 볏짚으로는 지붕을 이었다고 전해진다.

 

 

 

 

물푸레 나무

후원을 둘러보고 골짜기를 빠져나오는 길은 그야말로 소리들의 향연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며 부딪히는 잎들의 소리는 거친 파도의 철석 거리는 소리 같았고, 흐린 날 울어대는 새소리 풀벌레 소리는 장단을 맞춰 주었다. 아무도 없이 우리 둘 뿐인 고요한 숲 속은 소리의 웅장함을 더해주는 좋은 공연장 같았다.

 

이럴 수가. 황홀한 정원을 빠져나오는 길이 이내 아쉬웠다. 갈수록 연약해지는 체력도 한탄스럽다.

글을 쓰다 보니 정자 하나에도 수십 가지 사연들이 숨어있다. 이곳은 하루에 둘러볼 곳이 아니지 싶다.

 

 

 

 

 

친절하게도 길을 따라 내리막길을 걸으면 자연스레 출구로 안내된다. 

후원을 빠져나가기 전에 만난 천연기념물 향나무다.

나이가 700년쯤 된다고 하니 무수한 세월의 역사를 다 간직한 나무다. 

 

 

 

 

중국이나 다른 궁들의 후원과는 다르게 창덕궁 후원은 다양한 활동 무대였다.

휴식을 취하거나 사색에 잠기고,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며, 군사훈련이나 과거시험을 치르며 인재를 양성하기도 했던 곳.

왕권 강화와 개혁 정치를 논했던 정치적인 장소 규장각도, 왕과 왕비가 농사를 짓고 누에도 치던 정원도 공존하고 있었다.

 

창덕궁 전체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넓은 후원이라기에 의아했지만 둘러보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다.

아름다웠던 후원을 깊은 가을 다시 방문할 계획이다. 

 

 

 

 

 

 

 

 

 

<문학동네>

 

 

 

 

사랑하는 책, <쇼코의 미소>의 저자. 그녀의 소설이다.

장편인 줄 알았는데 중단편 소설 모음집이었다.

 

 

그 여름

601, 602

지나가는 밤

모래로 지은 집

고백

손길

아치다에서

 

 

총 일곱 편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어리고 젊다. 

찬란함과 미숙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십 대와 이십 대. 민감하고 순수한 그들은 관계를 맺기도 상처 받기도 쉬워 보인다.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에는 내가 지나온 미성년의 시간이 스며있다. 쉽게 다루어지고, 함부로 이용될 수 있는 어린 몸과 마음에 대해 나는 이 글들을 쓰며 오래 생각했다. _<작가의 말> 중

 

 

 

 

 

표지 제목 <무해한 사람>이라는 제목의 소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다섯 번째 이야기「고백」에서 미주가 생각했던 진희의 정의였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그러나 표제는 책을 읽는 내내 나의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던 말이었다.

 

진희가 엎드려 자고 있을 때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볼펜을 이리저리 돌릴 때 미주는 자신이 진희를 안다고 생각했다.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진희와 함께할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 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그때가 미주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미주의 행복은 진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_ <고백>

 

 

 

 

 

나는 무해한 사람인가?

나에겐 누가 무해한 사람인가?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 노력한다. 누군가에게 무해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나 자신을 장렬히 희생하기도 한다. 그러한 노력 없이 원만한 관계가 유지되기란 어렵다.

 

그러나, 나에게 무해한 그 누군가의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 보기란 쉽지 않다.

상대의 고민과 인내의 시간들, 공허함과 가슴 아린 아픔을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만약, 적나라하게 알게 된다면 그 희생을 밟고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 

 

수이는 단 한 번도 자기 상처를 과시한 적이 없었다. 자기 상처로 누군가를 조종하는 일이 가장 역겹다고 믿는 사람처럼 그런 가능성 자체를 차단했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려 했고, 그게 무엇이든 모든 것을 삼켜내려 했다. 그런 수이가 소리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울고 있었다. _ <그 여름>

 

어쩌면 여자도 울고 싶었는지 모른다. 혜인에게 기대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행동들이 혜인과 자신 사이를 망쳐버릴까 봐, 혜인을 떠나게 할까 봐 자제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명랑한 사람이고, 나는 심각하지 않은 사람이고, 나는 가벼운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어야지 버림받지 않고 관계를 맺어갈 수 있다고 배우며 자라왔는지도 모른다. 더 이상 웃음으로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순간이 되었을 때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_ <손길>

 

 

 

 

 

사소한 하나의 눈빛, 표정, 말, 행동으로도 관계는 뒤틀려버릴 수 있다.

크게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어쩌다 한 그 사소함이 상대에게 큰 상처를 줄 수가 있다.

단 한번 긴장의 끈을 놓았을 때, 관계의 절단을 초래한다면 그건 가혹하다. 가슴 아프다.

 

나는 언제나 사람들이 내게 실망을 줬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실망을 준 나 자신이었다. 나를 사랑할 준비가 된 사람조차 등을 돌리게 한 나의 메마름이었다. _ <모래로 지은 집>

 

 

 

 

 

그녀의 소설은 마음을 울린다. 아주 미세하고 예민한 관계의 감정들을 건드린다.

그녀의 첫 소설집, <쇼코의 미소>를 읽고 관계의 외로움과 슬픔에 대해 공감하고 눈시울이 붉어졌었다.

십 대 이십 대는 아니지만 이 책도 다르지 않았다. 

 

지금도 주희는 예전처럼 이 관계를 돌보려 하고 있었다. 하기 힘든 말을 애써서 겨우겨우 이어나가면서. 그런데도 윤희는 그 마음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_ <지나가는 밤>

 

 

 

 

 

나에게 무해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중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희생을 인지하는 것이 나의 달콤한 행복을 앗아가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소설들의 결말은 결코 해피 엔딩이 아니다. <쇼코의 미소>의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헤어짐으로 끝난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아마 인간에 대한 연민일 것이다.

참아내는 것이 사람들의 윤리라면 인생은 참 쓰디쓴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언제나 알아서 잘하고 동생 잘 챙긴다고 칭찬을 받았던 누나도 하민처럼 외로웠을까. 누구에게도 걱정을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그녀도 애를 썼을까. 그렇게 태어난 사람은 없는 거잖아._ <아치다에서>

 

 

 

 

 

나에게 전혀 무해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내가 전혀 무해한 사람이 되어 줄 수 있을까?

나의 희생과 다른 이의 희생이 얼마나 넘쳐야 그게 가능할까?

 

다른 이의 희생을 담보로 행복해지고 싶지도, 나의 희생을 감수한 채 다른 이의 행복을 마냥 지지해 주고 싶지도 않은 미묘한 감정들.........  우리는 어쩌면 그 경계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노란 표지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들 모두 슬프고 애련하다.

"따뜻한 온도에서 가슴이 무너지는 느낌"이다.

 

 

 

 

 

 

 

 

 

창경궁과 하나의 궁역을 이루고 있는 창덕궁.

창경궁은 가을 단풍을 보러 두어 번 갔었기에 선명하지만, 창덕궁은 오래전 일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임금들이 거처했던 곳이라 한다.

고궁의 매력을 알아버린 가을, 오늘은 창덕궁이다.

 

 

 

 

창덕궁

 

 

 

돈화문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

문의 규모라기에는 엄청나다. 위엄이 느껴졌다.

 

 

 

 

돈화문 일원에 마련된 통유리 건물에서 표를 구입하고 기념품 몇 가지를 구경했다.

 

 

 

 

금천교와 진선문

돌다리 건너 진선문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멋스럽다. 입구부터 잘 심긴 고목들이 운치 있다.

꽃은 지고 단풍은 아직인 계절이지만, 종일 나의 눈에 들어왔던 건 사연이 담긴 듯한 나무 기둥과, 다양한 모양으로 뻗은 가지, 제각각 푸르름으로 달린 잎의 화려함이었다.

 

 

 

 

경복궁의 건물들이 좌우 대칭을 이루며 일직선상에 배치된 것과는 다르게, 창덕궁은 북악산 응봉 자락 지형에 맞게 배치하여 자연과 조화롭게 어울린다. 경복궁은 유교, 창덕궁은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니 정말 느낌이 다른 두 궁이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이곳은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인정문과 숙장문

좌측은 정전으로 통하는 인정문, 정면은 숙장문이다. 

 

 

 

 

인정문

인정문 안으로 보이는 인정전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인정전

문 안으로 들어서니 정전인 인정전이 흐린 하늘 아래 서있다.

경복궁 근정정과 다르게 창호지가 황색이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순종황제가 거처했기 때문에 황제의 색인 황금색을 사용했다고 한다.

 

용마루에 박힌 오얏꽃도 생소하다. 오얏은 자두의 순우리말로 조선왕실을 상징하는 꽃문양이기는 하지만 다른 조선 궁궐에는 없는 장식이다. 개화기 서양이나 혹은 일본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추측된다고 하는데 어떤 이유이던 우리의 슬픈 역사가 스며있는 정전이다. 그 위를 검은 새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인정전 내부

경복궁의 어좌가 붉은색인 것과 다르게 황색 어좌다.

유리창과 커튼, 서양식 마루, 전등 등 외국 문물을 궁에서 보니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선정문
선정전

 

선정전으로 들어가 어로인 복도를 지나면 편전인 선정전이다. 궁궐의 전각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청기와 건물이다.

아쉽게 특별한 기와는 사진에 담지 못했다.

 

 

 

 

희정당

전통과 근대가 잘 어우러진 건물 희정당은 조선시대에는 침전으로 사용되다 순조부터는 편전이었다고 한다. 

동행각, 서행각, 접견실로 이루어진 내부는 조선 후기 및 근대 왕실의 생활모습이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희정당

화려하게 얽혀있는 지붕이 멋스럽고 희정당에서 바라본 소나무들은 액자 그림처럼 아름답다.

 

 

 

 

 

선평문
대조전

선평문을 들어서니 왕비의 침소였던 대조전이 우아하게 자리한다. 

대조란 크게 만든다는 뜻으로 왕자 마마를 생산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임금의 침소이기도 했던 이곳은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 왕자가 태어나면 두 마리의 용이 충돌할 수 있어 만들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대조전 일원

내부를 들여다보니 서양풍의 장식과 소품들이 방 안을 차지하고 있었고, 뒤뜰에는 왕비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화계가 어김없이 마련되어 있었다.

 

 

 

 

정면으로 고송 한그루와 희정당이 보이는 카페 야외 좌석에 앉았다.

 

 

 

 

내내 흐렸던 하늘에서 비가 떨어진다. 카페 왼쪽 숙장문으로 우산을 쓴 관광객들이 오고 갔다.

따뜻한 카푸치노를 마시며 비를 머금은 고궁을 둘러보는 순간이 황홀했다.

 

 

 

 

 

낙선재 일원

길 아래로 조금 내려오니 낙선재 일원이다. 단청을 입히지 않은 담백한 이 건물들은 헌종이 경빈 김 씨를 염두에 두고 만든 곳으로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가 있다.

 

 

 

 

장락문과 낙선재

헌종의 서재겸 사랑채로 사용되었던 낙선재.

정문인 장락문의 편액이 색다르다. 알고 보니 흥선대원군의 글씨란다. 뒤쪽으로 누각 상량정과 화계도 보인다.

 

 

 

 

석복헌

경빈 김 씨의 처소인 석복헌.

 

 

 

 

수강재

수강재 창으로 바라본 화계에 걸린 감나무.

 

 

 

 

계단에서 소나무가 자라는 건 처음 본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도 환상적인 풍경이다.

 

 

 

창덕궁은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정형화되지 않은 건물 배치, 전통과 근대적인 모습의 조화, 우거진 특별한 나무들이 인상적이었다.

역사를 증명하듯이 근대적인 모습이 곳곳에 남아있는 궁은 그 시대의 시간들이 생생하게 느껴지게 만들어 주었다.

 

상량정 근처에 창경궁으로 들어가기 위한 매표소와 입구 그리고 창덕궁 후원 가는 길이 이어진다.

후원은 인원 제한이 있어 온라인으로 예약해야 했었지만, 운 좋게도 오늘은 현장에서 가능했다. 

 

한국 전통 정원의 모습을 기대하며 길을 따라 올라갔다.

 

 

 

 

 

 

 

 

 

 

 

월요일 휴무로 연달아 3일을 쉬니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보너스 같은 휴일, 이름만으로도 낭만적인 정동길을 다녀왔다.

 

정동교회부터 경향 아트힐로 이어지는 이 길은 폭이 좁은 이차선 도로다.

정동길이란 이름은 태조 이성계의 둘째 부인 신덕왕후의 능묘 정릉이 이 곳에 있었던 것에서 유래했다 한다.

 

 

 

 

교회부터 시작해도, 아트힐부터 걸어도 상관없다.

양 옆을 장식한 가로수 아래 운치 있는 건물을 구경하며 천천히 걷다 보면 그리 길지 않은 이 길이 특별함을 알 수 있다.

 

정동교회, 정동극장, 구 이화학당(현재는 이화여고 박물관),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캐나다 대사관 등 유명한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고, 우리나라 최초로 커피를 팔았던 손탁호텔 터도 이곳에 있었다. 

 

 

 

 

소매를 파고드는 쌀쌀한 기운에 따뜻한 커피 생각이 났다.

이 날, 이 길에 어울리는 작은 카페, 정동 커피로 들어섰다.

 

 

 

 

넓지 않은 공간에 테이블 수도 많지 않았지만 분위기 있다. 벽면에 책을 둔 인테리어도 마음에 든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과 정동길에 놀러 온 가족, 연인들의 모습이 좋아 보였다.

 

 

 

 

국립 정동 극장 내에는 마당이 있는 카페 정담이 있었고, 지난겨울 트리 장식이 예뻤던 카페 루소도 지나쳤다.

 

 

 

 

정동교회가 보이는 길에서 만난 작곡가 고 이영훈의 추모비다.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마이크 하단에 새겨져 있다.

그를 사랑하는 친구들이 마련한 이 작은 비석은 길에서 보석을 발견한 듯 한 느낌을 주었다.

 

 

 

 

작은 비에 새겨진 <광화문 연가>를 비롯하여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옛사랑>, <사랑이 지나가면> 등등 이문세의 소리를 빌려 발표했던 그의 노래들은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들었던 주옥같은 노래들이다.

광화문 연가의 가사를 되짚어 보니 정동길의 쓸쓸함과 인생의 외로움이 사무친다. 

 

 

 

 

정동길은 덕수궁 돌담길과 통한다.

예쁜 돌담길에서 연인과 가족들이 다양한 포즈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도 돌담 아래서 사진을 남겼다.

그늘을 만들어주는 가로수 아래, 감각적인 벤치에 앉아 즐거운 연인들을 한없이 바라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대한문쪽으로 돌아나가니 분위기가 다르다. 

길 건너로 플라자 호텔과 서울광장, 서울시청이 도심 한복판임을 일깨워 준다.

 

복잡하고 바쁜 도심생활에 정동길과 덕수궁 돌담길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일 뿐 아니라 지친 사람들을 어루만져 주기에 충분해 보였다.

 

 

 

 

돌담을 돌아 계속 걸었다.

오른쪽으로 세실극장이 보이고 그 뒤로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이 자리한다.

돌담길 쪽 황실 자재들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경운궁 양이재를 지나면 정면에 영국대사관 건물이 있다.

선교사처럼 양복을 잘 차려입고 서류가방을 든 외국인이 골목을 지나 대사관으로 들어갔다.

 

 

 

 

로마네스크 양식에 한국적 건축 기법이 가미된 이 건물은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이다.

화강석과 붉은 벽돌의 조화, 아치형의 장식과 창들이 아름답다. 기와로 얹은 지붕도 묘하게 어울린다.

 

 

 

 

서양식 건물 옆 이 건물은 사제관이다.

동서양의 느낌을 함께 가진 성공회 건물은 매우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대한성공회는 유월 민주화 운동의 진원지였다.

조선의 궁들이 모여있는 이곳에서 민주화의 열망이 얼마나 뜨거웠을지 생각해 보았다.

 

 

영국대사관 왼편, 덕수궁 안쪽에 마련된 보행테크를 통과해 고종의 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데크에서는 유료 관람인 덕수궁으로 넘어갈 순 없지만 넘겨다 볼 수는 있어 궁의 웅장함을 잠시나마 구경할 수 있었다.

 

 

 

 

고종의 길은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부터 덕수궁까지 오갔던 길로 알려져 있다.

길의 끝까지 걸으니 정동공원이 있다. 언덕 위 구 러시아 공사관은 공사 중이었다.

 

 

 

 

주차해 놓은 콘코디언 빌딩 쪽으로 가던 중 캐나다 대사관에 들려 사진을 찍었다.

 

요즘 다시 보고 있는 드라마 <도깨비>에서 단풍국으로 친근한 나라.

TV 화면 속, 붉게 물든 커다랗고 풍성한 메이플 트리를 보며 가보고 싶은 나라 목록에 슬그머니 올려보기도 했던 곳.

 

사실 이 드라마에 빠져있는 건 나보다 남편이 더 유난하다. 폰카메라를 들어 정성스레 구도를 잡고 사진을 찍는 그의 뒷모습이 마냥 사랑스럽다.

 

 

 

오늘 걸었던 정동길은 고 이영훈의 노래 광화문 연가와 함께 기억날 것 같다.

 

쓸쓸한 날씨가 그 길의 분위기를 더해 주었고, 소박한 이름의 작은 카페는 정이갔다.

붉은 벽돌 건물들과 돌담이 어우러진 풍경은 색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고, 가로수 아래 지나치는 사람들의 환한 얼굴들이 정겨웠다. 길에서 만난 작은 비석과 새겨진 가사는 옛 감정들을 불러일으켰고, 돌아오는 내내 차 안에서 들었던 광화문연가는 정동길을 나의 길로 만들어 주었다.

 

이 길을 자주 오게 될 것 같다.

 

 

 

 

 

 

 

 

 

딸의 스무 살 생일.

 

공부가 우선이었던 중 고등학교 시절, 늘 시험기간에 생일이 있어 맘 편히 즐기지 못했던 날.

대학생이 되어도 이 좋은 계절은 여전히 시험 기간이지만, 그때와는 다른 마음으로 기대하고 즐기는 딸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스무 살 생일을 특별하게 축하해 주고 싶어 미리 레터링 케이크를 주문해 두었다.

생일 당일과 다음날 약속이 있는 딸을 위해 우리는 전날 움직였다.

 

 

 

 

 

진라이

 

 

경기 분당에 위치한 중식당을 찾았다. 

룸으로 예약을 해 거리두기를 하고, 딸과 오랜만에 코스요리를 먹었다.

 

 

 

냉채는 입맛을 돋우었고, 따뜻한 해물 누룽지 탕은 속을 달래주었다.

 

 

 

양념이 정말 맛있었던 팔보채와 소스의 부드러움과 달콤함이 마음에 들었던 크림 중새우.

 

 

 

튀김옷이 얇고 고기가 두꺼워 조금 부담스러웠던 탕수육과 간이 진했던 소고기 고추잡채와 꽃빵.

이때부터는 정말 배가 불렀다.

 

 

 

마지막으로 식사와 과일 디저트가 나왔다. 

분위기나 맛이 나무랄 데 없었고, 일하시는 분들의 친절함도 편안했다.

 

 

 

점심을 먹고 아울렛 신발매장에 들렸다. 생일 선물로 운동화 한 켤레와 한참 유행하는 뒤축 없는 뮬도 하나 사주었다.

쇼핑이라곤 거의 온라인으로 하는 딸과 함께 돌아다니니 내 생일인 듯 즐거웠다.

 

 

 

 

 

 

집으로 돌아와 케이크를 자르고 TV를 보며 웃고 떠들었다.

 

생일 0시가 되자 쏟아지는 장문의 축하 메시지들과 쌓이는 모바일로 온 선물들.

친구들에게 친절하게 배려하고 잘 챙기더니, 정말 많은 축하를 받는다.

 

홀케이크, 아이패드 파우치, 화장품, 목걸이, 레토르트 식품, 베라, 스타벅스, 치킨, 초콜릿 등등 손가락으로 죽죽 올리며 보여주는 폰 화면에 선물이 그득하다. 우리 때와는 다른 생일 축하다.

 

여기저기서 오는 문자에 고마움과 감동으로 어쩔 줄 몰라하던 딸은 지인들과 소통을 위해 방으로 들어간다.

새벽 세 네시까지 잠을 자지 못한 듯했다.

 

 

 

 

생일 아침상.

점심 약속이 있다 했지만 미역국은 먹일 요량으로 먹을 만큼만 아침을 준비했다.

맛있게 먹는 딸을 보며 행복했다.

 

전보다 편하게 말하고 농담하고 더 많이 시간을 함께 한다.

엄마 아빠랑 노는 게 제일 재미있다며 우리를 으쓱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스무 살의 시작을 본인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여러 날 즐겼다.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받은 손편지와 선물들, 취향저격인 레터링 케이크들도 선물 목록에 추가되었다.

 

 

 

부모는 역시 부모인가 보다.

기특해하며 안심하면 될 일에 걱정을 보탠다.

너무 배려하고 착하게 살면 안 되는데, 자신을 희생하며 다른 이들에게 맞출 필요는 없는데, 조금 못되게 살아야 편할 텐데.............

후배, 친구, 선배들에게 사랑받는 딸아이가 기특하기도 하지만, 착하디 착한 성품에 짠한 마음을 어쩔 수 없다.

 

기우이길.

너의 친절을 이용하지 않는 좋은 사람들이 곁에 머물길.

언제나 너를 지켜주는 가족이 있음을 기억하길.

 

 

이런저런 시끄러운 생각이 꼬리를 무는 건 부모만.

너는 스무 살의 특별했을 생일을 오롯이 즐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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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빛과 함께 카톡 알림.

 

 

부고

부친 ooo님께서 2021년 10월 8일 별세를 하셨기에 삼가 안내드립니다.

 

 

직장 동료의 아버님이 어젯밤 세상과 이별하셨다.

폐암으로 오랜 기간 투병하셨고, 얼마 전 대동맥 파열로 쓰러지신 후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들었었다.

 

육아로 오랜 기간 쉬다 다시 일하신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가벼운 인사 정도만 하고 지냈다.

활달한 성격에 키가 크고 덩치도 좋아 화통해 보이지만, 늘 인사를 건네는 건 내쪽이었고 그녀는 무언가로 바빠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가지 못했었다.

 

카톡의 프로필 사진을 열어 보았다.

500개 이상의 사진 중 1페이지는 부친의 사진이다. 활짝 웃고 계셨다.

조금 더 넘겨보니 그녀 아이들의 재미난 포즈 사진들, 남편과 함께한 가족사진, 그리고 같은 노인 사진 몇 개를 더 볼 수 있었다.

 

 

친정아버지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 더 누워있지 못하고 일어났다.

얼마 전 통화할 때 "아빠는 이제 그만 가야지." 하며 평화롭게 말씀하시던 목소리가 마음을 누른다. 늦게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셨지만 지금까지 신실한 기독교 신자이신 아빠는 늘 감사함으로 때를 기다리신다고 하신다. 그게 가능이나 할까? 두려움 없이 그날을 기다릴 수 있을까?

 

젊은 시절의 나는 왜 아빠에게 그렇게 퉁명스럽게 대했을까? 함께 더 많이 웃고, 더 상냥하게 해드리지 못했을까?

가난했어도, 우리에게 사랑의 표현이 서툴렀어도, 엄마를 고생시켰어도 나의 아빠였는데 말이다.

어떻게 그러셨는지 모르지만 없는 살림에 세 남매 대학교육, 결혼까지 다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셨으니 충분했는데 말이다.

아빠의 세월의 시간을 나는 정말 조금도 알지 못한다. 

 

 

 

장례식은 가족분들이 모여 가족장을 하려 합니다. 멀리서나마 따뜻한 마음의 위로를 부탁드리며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녀의 마음이 어떨까 헤아리다 애잔해진다.

강해 보이는 그녀가 겪어왔고, 겪어 내야 할 시간들을 생각하다 나의 감정들과 뒤섞인다.

마음이 아리고 슬픈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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