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이른 추위로 가을이 저만치 가버린 줄 알았는데 모처럼 따스한 날이 이어졌다. 오랜만에 하늘도 파랗다.
공사 중인 대한문을 돌아 덕수궁 안으로 들어갔다.
덕수궁은 다른 궁들 보다 좁은 공간에 건물들이 뒤죽박죽 섞여있는 느낌이 들었지만 다양성은 최고였다.
이 때문인지, 공간이 협소해서인지, 날씨가 화창해서인지 관광객들이 정말 많게 느껴졌다.
함녕전 영역
광명문으로 입장하니 왼편으로 정전이 보인다.
늘 정전을 먼저 관람하게 되는 동선이었는데 오늘은 다음 코스다.
고종의 침전이었고, 고종이 승하한 장소이기도 했던 함녕전이다.
[덕수궁 프로젝트 2021 : 상상의 정원] 전시회가 덕수궁 안 여기저기에서 진행 중이었다.
고궁에서 열리는 전시회, 사람들과 소통하는 문화재의 느낌이 신선하고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문화유산이 훼손되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보물이기도 한 함녕전 안에서는 '고종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정원'이 애니메이션으로 상영되고 있었다.
고종의 침전에 들어와 볼 기회가 생기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함녕전 뒤뜰에 마련된 화계는 계단이 넓어 안정적으로 보였다. 커다란 굴뚝도 보인다.
덕홍전은 외국 사신을 접견할 목적으로 마련된 공간이다.
원래 이 자리에 명성황후의 신주를 모셨던 경효전이 있었는데, 화재로 타 버린 후 덕홍전이 생겼다고 한다.
이곳 역시 전시가 있었지만 오늘은 궁 관람에 집중하기로 했다.
덕홍전 처마와 함께 보이는 석어당과 나무 한그루가 이 가을 멋진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 석조전도 보인다.
덕홍전 뒤쪽으로 궁과 어울리지 않는 이 건물은 정관헌이다.
러시아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 기둥 상부에는 한국 전통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한국과 서양의 건축 양식을 절충해 만든 건물이 세련되어 보였다.
커피를 즐겨 마셨던 고종의 휴식공간이기도, 외교사절들과 연회를 즐기기도 했을 이 공간은, 궐 뒤뜰 언덕에 있어 궁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중화전 영역
중화문 사방에 있었다던 행각들은 일제 강점기 이후 훼손되었고 정원이 생기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덕수궁의 정전이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덕수궁을 정비하며 계단 가운데 가마가 지나다니는 사각형 돌에 용 문양을 새기고 창호를 황금색으로 칠해 황제의 위상을 갖추었다고 한다.
중화전은 1902년 중층건물이었으나 1904년 화재 후 1906년 다시 지으면서 단층으로 축소하였다고 한다.
대한제국의 황실 내부가 위용 있어 보이지만 파란만장한 시기를 겪었을 고종의 자리는 위용 아래 더 서글퍼 보였다.
맑은 하늘 아래 재킷을 벗어 들고 거니는 사람, 서로 인생 사진을 찍어 주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 전시회를 보기 위해 온 젊은 예술학도 등 다양한 사람들의 물결에 맘에 드는 사진을 얻기는 힘들었지만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유서 깊은 건물 석어당은 덕수궁에 남아있는 유일한 중층 목조건물이다.
1904년 화재로 다시 지었다고 한다.
건물의 진한 빛깔과 처마 끝으로 가지를 내린 살구나무 한그루의 연초록 잎은 이날 가장 인상적인 풍경 중 하나였다.
석어당 옆으로 복도각으로 이어진 두 건물이 나란히 있다.
즉조당은 대한제국 초기에는 정전이었다가 중화전이 완성된 이후로 편전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뒤쪽으로는 정원과 예쁜 담벼락 그리고 고종의 길 가던 길에 걸었던 나무 데크도 반갑게 자리하고 있었다.
석조전 영역
석조전은 내부에 접견실, 대식당, 침실 서재 등을 갖춘 근대 건축물이다.
대한 제국 선포 후 1910년에 완공되었지만 1907년 고종이 일제 강압으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였고, 이 해 국권이 피탈된다.
기단 위에 이오니아 기둥을 줄지어 세운 건물은 근사한 대학교 느낌이 나기도 했다.
후에 서관을 증축하면서 분수정원도 조성했다고 한다. 서관은 지금은 덕수궁 미술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고즈넉한 분수정원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석조전 일원을 감상할 수 있었다.
석조전을 끝으로 한 바퀴를 돌았다.
전통과 서양의 모습이 뒤섞인 궁은 매우 인상적이었고, 전체가 미술관이었던 오늘의 광경은 오래 기억될 것 같았다.
고종이 서양 가베를 즐겼던 정관헌도, 황제의 계획으로 완공된 후 그는 사용하지 못했던 석조전도, 권위가 땅에 떨어졌던 어좌도, 황후의 침전 없는 궁궐도, 그가 쓸쓸하게 승하했던 함녕전도 모두 애잔하다.
맑은 하늘 아래 위엄이 느껴지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건물들을 보았지만, 이면에 남아있는 이야기들로 오늘의 덕수궁은 흐리고 슬프다.
유래없이 평화로운 현재의 날들을 잘 지키는 것만이 그들의 희생과 슬픔을 위로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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