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아자르(로맹 가리)의 소설 [자기 앞의 생]  & 에두아르도 폰티 감독의 영화 [자기 앞의 생] 

 

몇 해 전 읽었던 삽화가 있는 책도 너무 좋았지만, 글에 집중해서 읽는 것 또한 다른 매력이 있었다. 내친김에 소피아 로렌이 주연한 영화도 봤다. 지난번, 영화 초반만 보고 책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라 보기를 멈췄던 영화다.

이번에는 끝까지 봤지만 아쉬운 점이 많았다. 소설과 다른 설정도 많았고, 인상적이었던 인물들이 생략된 영화는 나에게는 무척 실망스러웠다. 책의 느낌이 전달되지 않아 다른 작품을 보는 듯했다. 

 

에밀 아자르의 소설은 부조리하고 불행한 인간 삶을 이야기하지만, 슬픔과 아픔 그 어딘가에 줄곧 따뜻하고 아름다운 기운이 흐른다. 에두아르도 폰티 감독의 영화는, 그러한 인간의 삶이 내내 어둡게 느껴졌고 슬픔 가운데 숨어 반짝이는 그 무엇이 잘 전해지지 않았다. 

 

 

 

온갖 풍상을 겪고 늙어 죽음을 앞두고 있는 노인의 모습은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 또한 젊고 화사했던 시절이 있었다. 동정심 없는 자연의 법칙은 인간을 추하게 만든다. 생이 그들을 파괴한 것이다. 온화한 노인의 얼굴, 심술궂은 노인의 얼굴, 요양원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인들의 모습, 검버섯과 주름으로 가득한 그 얼굴들을 보면 속이 상한다. 밉다. 추하다. 눈물이 난다. 

 

p. 280 "난 너무 추한 꼴이 되었구나, 모모야." 나는 화가 났다. 늙고 병든 여자에게 나쁘게 말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니까. 하나의 자로 모든 것을 잴 수는 없지 않은가. 하마나 거북이 다른 모든 것들과 다르듯이 말이다. 그녀는 두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p. 137 거꾸로 된 세상. 이건 정말 나의 빌어먹을 인생 중에서 내가 본 가장 멋진 일이었다. 나는 튼튼한 다리로 서 있는 생기 있는 로자 아줌마를 떠올렸다. 나는 좀 더 시간을 거슬러올라 아줌마를 아름다운 처녀로 만들었다. 그러자 눈물이 났다.

 

그러나 늙지도, 고통받지도, 불행에 빠지지도 않는 삶은 없다. 그것은 인간 세상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생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다. 

 

p. 300 더 이상 살아갈 능력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의 목구멍에 억지로 생을 처넣는 것보다 구역질 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삶이 고통스러울지라도 모모와 리사 아줌마를 도울 이웃들이 있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p. 97 하밀 할아버지는 위대한 분이셨다. 다만 주변 상황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

p. 275 그 세네갈인이 나타나면 언제나 해가 뜨는 것 같았다.

p. 246 그들에게 얘기를 하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끔찍했던 일들도, 일단 입 밖에 내고 나면 별게 아닌 것이 되는 법이다.

 

이웃들의 보살핌 속에서 모모와 리사 아줌마, 그 둘은 트라우마와 가난과 모욕과 고통 가운데 두 손을 맞잡고 생을 살았다. 그렇게 함께한 순간은 삶의 추함도 불행도 고통도 잠시 잊을 수 있었고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했다. 노인들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본다면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줄 수 있다.

 

p. 279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던 것 같다.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p. 305 그녀는 이제 숨을 쉬지 않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숨을 쉬지 않아도 그녀를 사랑했으니까.

 

 

 

소설과는 다른 감정이었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한 암사자, 모모의 엷은 미소, 서로 어깨를 토닥이며 멀어져 가는 이웃들의 모습에서 가슴이 찡했다. 소설과 영화 속 모모는 리사 아줌마에 대한 기억과, 이웃들의 사랑으로 자기 앞에 주어진 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슬프지만 또 아름답게. 불행하지만 또 행복하게. 

 

p. 311 사랑해야 한다.

 

 

 

 

 

 

 

 

 

 

 

[아침 그리고 저녁]에 이어 읽은, 욘 포세의 두 번째 소설이다.

이전 소설이 한 인간의 탄생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샤이닝]은 한 인간이 죽음을 마주하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의 이름, 나이, 어떤 서사도 나오지 않지만 몇몇 글들로 그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혼자 사는 사람 / 내가 젊었을 때, 아주 오래전 / 죄 많은 나의 한평생 / 사실 누군가 마지막으로 나를 방문한 게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 나는 그들을 단 한 번도 어머니와 아버지라 불러본 적이 없다 

 

주인공은 어느 정도 나이 들었을 것이고, 부모의 풍족한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자랐을 것이고,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않은 외로운 사람일 것이다.

 

p.7 나는 차를 타고 벗어났다. 기분이 좋았다. 움직이니 기분이 좋았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랐다. 단지 나는 운전을 할 뿐이었다. 나를 덮친 것은 지루함이었다.

 

그를 둘러싼 외로움과 지루함, 어떤 고통들로 인해 그는 삶의 방향을 잃었다. 충동적으로 차를 몰고 나와 일상으로부터 달아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오히려, 공허함과 두려움으로 자신을 몰고 간다.

 

p.9 내가 두려움을 느낀 건 바로 그 때문이리라. 나는 차를 타고 가다가 숲 속의 막다른 길에서 꼼짝도 못 하게 되었고, 그곳에서는 차를 돌릴 수도 없었으니까. 사실 이 숲길에 들어선 후 차를 돌릴 만한 곳을 지나온 기억도 없었다. 그럴 리는 없었을 것이다. 

 

p.17 도대체 나는 무슨 생각으로 이토록 깊숙한 숲 속으로 차를 몰았을까. 어쩌면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차를 몰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얼마나 멀리까지 왔는지는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그렇다, 바로 그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내 차를 빼내줄 수 있는 사람, 트랙터나 차를 소유한 사람을 찾아 나서야 한다. 한데 문제는 바로 그거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도와줄 사람이 절실하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이상하기만 하다. 그를 도울 누군가를 혹은 무엇을 찾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부터 멀어지고 있다. 설상가상 눈은 점점 더 많이 내려 쌓이고, 어둠이 밀려든다. 

 

p.21 내 머릿속에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최대한 빨리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그런데 나는 무슨 생각으로 더 깊은 숲 속으로 들어왔을까, 이처럼 깊은 숲 속에서 정말 사람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이보다 더 절망적일 수는 없었다. 

 

헤어 나올 수 없는 공포의 순간 따스한 손 내미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달랐을까. 아니 어쩌면 도움을 주려하는 사람들을 애써 피하며 숨어버리는 나약함이었을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제대로 된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는 인간 세상에 도무지 없는 것일까.

 

p.21 나는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 깊은 숲 속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 그것을 생각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조차 옳지 않다, 그것은 문득 떠오른 무엇, 일시적인 충동이라든가, 뭐 비슷한 것이었다. 어리석은 일이었다. 너무 바보 같은 일이었다. 멍청했다. 그보다 더 멍청할 수는 없었다. 나는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p.25 어쩌면 내가 숲 속으로 들어온 것은 얼어 죽고 싶어서였을까. 아니, 그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아니,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왜 죽고 싶은 것일까. 아니, 내가 원하는 건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차로 되돌아가려는 것이다. 

 

결국, 어둠 안에 숨고 갇혀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진퇴양난의 지경에 처한 인간은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이 쉽지 않다. 심지어 죽음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 고통스럽고 두렵다.

 

 

 

이 책은 열린 결말이다. 주인공이 죽음에 이르렀는지, 아니면 살아남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가 죽음에 이르는 어떤 과정을 지나갔음을 느낀다. [아침 그리고 저녁]에서 요한네스는 죽음 직전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샤이닝]의 주인공은 순백색의 형체와 부모님을 만난다.

 

어둠 속에 나타난 하나의 하얀 형체, 밝은 빛을 내뿜는 존재, 완전히 순백색의 알 수 없는 형체, 어떤 윤곽이라기보다는 하얗고 선명한 공간에 가까운, 사람의 형체를 닮은, 강렬하지만 눈이 아프지 않은 기분 좋은 빛, 편안한 빛, 그 하얀 존재와 나.

 

죽음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따스한 느낌을 주는 이유는 이 순백색의 빛 때문이다. 어둠과 추위의 한가운데서 빛을 만난 주인공은 더 이상 춥지 않았다. 온기를 느꼈다. 누군가의 팔이 따뜻하게 어깨를 감싸는 것 같은 빛.

빛과 온기가 삶일 수도 있지만, 죽음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 죽음이 나를 위로하며 어깨를 두드려 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를 찾아 나선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목소리를 듣는다. 또한  검은 양복을 입은 알 수 없는 형체도 본다. 

 

p.56 그들은 내게 대답해야 한다, 나는 적어도 그들이 낳은 아들이 아닌가, 나는 말한다 : 제가 뭘 물어보면 대답을 해주셔야죠, 대답해 보세요, 거기 가만히 서 계시지만 말고 무슨 말이라도 해주세요, 제게 대답을 해주시란 말이에요- 내 귀에 들리는 내 목소리는 애원하는 듯하다, 불쌍하고 처량한 데다, 완전히 울먹이고 있고, 무기력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p.66 어머니는 내게 변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나는 항상 그랬다고,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했지 어머니가 원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예나 지금이나 다른 사람의 말은 들은 적이 없다고, 그러니 자, 이제 그 결과가 어떤지 한번 보라고, 그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머니는 이대로는 안 된다고, 너무 추워서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지 나는 궁금하다, 하긴 아버지는 언제나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p.74 그들은 나만 바라보고 있다. 이제 나를 그만 좀 바라보면 안 될까. 왜 그들은 나만, 다른 것은 보지 않고 오직 나만 바라보고 있을까. 이제 다른 걸 좀 쳐다보면 안 되는 걸까.

 

가장 가깝고 사랑해야 할 존재들이 어떤 상황들로 멀어져 회복할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언제 도움이 필요한지 무엇을 도와야 할지 알 수 없다. 도움을 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가 안타깝고 슬프다.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 그가 떠올릴 수 있었던 사람은 부모님이었다. 여러 감정이 들었던 부분이다.

 

 

 

지루함에서 시작된 그의 충동적인 여정은, 공허와 두려움, 후회와 번민, 텅 빈 무(無)의 세계, 결국 죽음에 이른다.

 

p. 8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또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든, 항상 다른 무언가로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 80 문득 나는 그 빛나는 존재가, 순백색의 반짝이는 존재가 우리 앞에 서있는 것을 본다, 그가 따라오라고 말하고,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간다, 아주 천천히, 한 발짝 또 한 발짝, 한숨 또 한숨, 검은 양복을 입은 얼굴 없는 남자, 나의 어머니, 나의 아버지, 그리고 나, 우리는 맨발로 무의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한숨 또 한숨, 어느 순간 숨이 사라지고, 그곳에 있는 것은 오직 호흡하는 무를 빛처럼 뿜어내는 존재뿐이고, 어느새 숨을 쉬고 있는 것은 우리다. 각각의 순백색 속에서.

 

 

 

짧지만 어렵고 철학적인 이 소설은 작가의 의도도, 독자들의 다양한 해석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 주인공의 죽음은 자살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소설의 제목(Shining)처럼, 반짝이고 빛나는 순백색의 존재 때문에 그의 죽음이 더 애처롭고 안타까운 느낌이 들었다. 

 

외로운 삶의 끝에서 만난 따뜻한 빛,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부모님, 맨발로 말없이 동행하는 검은 양복을 입은 누군가의 존재. 죽음의 순간 그것들과 함께 할 수 있어 다행이지만, 삶 속에서 내내 그렇게 살 수 없음이 마음 아프다.

 

p. 38 여기 누구 없나요 / 나는 여기 있습니다, 나는 항상 여기 있고, 여기에는 항상 내가 있습니다.

 

우리의 곁에는 항상 누군가가 있다. 그것은 내가 믿는 신일수도, 사랑하는 가족 혹은 친구, 이웃일 수도, 또 그저 타인을 도울 준비가 되어있는 누군가 일 수도, 그것도 아니면 어떤 희망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삶과 죽음이 내내 빛날 수는 없겠지만, 내 어깨를 살포시 두드리는 무언가의 위로를 받으며 살 수 있기를, 또 그런 사람이 되어 주기를.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의 작품이다.
 
마침표가 거의 없다는 얘기를 듣고 포르투갈 출신 작가, 주제 사라마구가 생각났다.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을 때 마침표와 쉼표 외의 문장 부호가 전혀 없고 심지어 줄 바꿈도 없어 온 신경을 집중했던 기억이다. 주제 사라마구도 198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라는 사실이 신기하다.
 
 
 
[아침 그리고 저녁]
 
1부는 요한네스의 탄생, 2부는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을 읽으면 늙고 죽는다는 것은 고약한 일임에 분명하지만, 아침이 지나 저녁이 오고, 또 저녁은 아침으로 이어지듯이, 삶과 죽음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고요히 흘러가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슬프고 외롭지만, 또 아름답고 평화롭다.
 
작가 특유의 의식의 흐름대로 써 내려간 문체는 반복과 여백으로 음악적인 리듬감을 주고, 한 인물의 침묵과 고뇌는 그 인물에 대한 신뢰와 연민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1부>
 
p.15-16 이제 사내아이, 어린 요한네스가 세상 빛을 보게 된다. 아이는 마르타의 몸 안에서, 그녀의 뱃속에서 자라났다, 충분히 크고 강하고 어여쁜 모습을 갖출 때까지, 아무것도 아니던 것이 사람이 되어, 작은 사내아이가 되어, 그래 저기 마르타의 몸 안에서, 그녀의 뱃속에서 손가락을 얻고, 발가락과 얼굴, 눈이 생겨나고 뇌와, 아마 머리카락도 약간 자라 있겠지, 그리고 그 아이가 이제 나온다. 마르타, 아이의 어머니는 고통으로 비명을 지른다, 이제 아이는 추운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혼자가 된다, 마르타와 분리되어, 다른 모든 사람과 분리되어 혼자가 될 것이며, 언제나 혼자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 모든 것이 지나가, 그의 때가 되면, 스러져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무에서 무로, 그것이 살아가는 과정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새, 물고기, 집, 그릇,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올라이는 생각한다,
 
p.17 확실한 것은, 그가 올라이이고 어부이며 마르타와 결혼했고 요한네스의 아들이며 이제, 언제라도, 조그만 사내아이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 아이가 할아버지처럼 요한네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리라는 것이다. 신이 존재하기는 하겠지, 올라이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너무 멀리 있거나 너무 가까이 있다. 그리고 그는 전지전능하지도 않다
 
열네 개의 마침표를 찾았다. 또 어디 숨어있을지 모르지만.
작가 혹은 올라이가 결론에 이른 것만이 유일하게 마침표를 갖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머지 문장들은 모호하고 정해져 있지 않은 그저 불확실한 것들일까? 그렇다면 그저 꿈같은 몽롱함 속에서 살아가는 게 인생일까?
 
 
 
<2부>
 
잠에서 깬 요한네스는 몸이 가볍게 느껴지고 모든 것이 여느 때와 다르다. 아주 이상하게 느껴진다.

p.42-43 그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 선 채로 자전거를 바라본다, 빨래통 두 개, 모탕, 벽에 걸린 갈퀴와 삽, 어쩐지 모든 것이 제 안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말하는 듯하다, 자신이 무엇인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쓰였는지, 모든 것이 그 자신처럼 나이 들어, 각자의 무게를 지탱하며 거기 서서, 전에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고요를 내뿜고 있다,
 
p.43 그러나 물건들은 제각기 지금까지 해온 일들로 인해 무겁고, 동시에 가볍다,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요한네스는 생각한다, 상상해 보라, 세탁기가 생기기 전에 에르나가 저 통을 얼마나 자주 사용했는지, 저 안에다 얼마나 많은 빨래를 했는지, 그래 결코 적지 않은 빨래였다. 그리도 이제 에르나는 가고 없는데 빨래통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것이다, 사람은 가고 사물은 남는다,
 
p.49 달라진 것이 있어도, 그것은 아마 그의 내부에서 일어났다고 보는 게 가장 그럴듯한 것이다, 아니면 혹시 밖으로부터 온 것일 수도 있을까? 저 바깥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을까, 대수로운 게 아니라도, 그에게 이런 느낌을 주는, 그저 뭔가 아주 사소하지만 모든 것을 완전히 달라 보이게 하는 그런 일이? 
 
 
 
새벽에 죽음을 맞이한 그의 영혼은 영원한 무로 돌아가기 전 사랑했던 사람들을 기억한다. 아내 에르나, 막내딸 싱네, 친구 페테르, 구두장이 야코프, 아마도 짝사랑했었을 안나 페테르센. 
 
p.37 요한네스는 에르나가 늘 앉던 식탁 맞은편을 바라본다, 그리고 지금은 빈 의자인데도 오늘 아침에는 그녀가 앉아 있는 것만 같다
 
p.101 에르나가 살아 있다면 더없이 좋을 텐데, 에르나가 가고 없는 것이 슬프다, 그래도 집이 따뜻하기는 하겠지, 먹을 것도 조금 있고, 하지만 에르나 일은 너무나 안타깝다, 그녀가 떠나야 했던 것은, 그는 늘 자기 차례가 먼저 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르나가 앞서갔고, 혼자 사는 일은 익숙지 않았다, 그들은 오랜 세월 금실 좋은 부부로 살았고 일곱 명의 아이를 낳았다, 물론 티격태격 싸울 때도 있었지만 고요하고 평화롭게 산 편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영영 가고 없다 그래 그런 거지, 요한네스는 말한다
 
p.47 막내 싱네는 거의 매일 그를 보러 오다시피 한다, 장을 보러 갈 때면 꼭 들러 살펴보고 전화도 자주 한다,
 
p.47 페테르와 요한네스, 그들은 오랜 세월 서로의 머리를 잘라주었다, 그런 식으로 둘은 많은 돈을 절약했고 단정해 보이도록 신경 썼다, 하지만 이제 페테르는 죽고 없다,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난 것은 슬픈 일이다,
 
p.51-52 그래 구두장이 야코프는 사람이 좋고 믿음도 강했다, 다른 사람은 흉내도 못 낼 만큼, 그랬고말고, 그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믿고 싶은 것을 믿게 두었다, (........) 구두장이 야코프는 친절하고 선한 사람이었다, 그는 신발을 고쳐주고도 거의 돈을 받지 않았다,
 
p.86 다시 젊은이가 된 것처럼 가볍고 건강한 느낌이 드는걸, 그리고 부두를 내려다보는데 거기 안나 페테르센이 다가오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는 이제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지? 그가 보낸 편지에 그녀가 답장을 하지 않았으니, 서로 민망한 일이었다,
 
 
 
삶이 더 이상 우리를 원하지 않을 때, 우리는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다. 하지만 죽음도 삶과 그렇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무거우면서 가볍고, 다르면서 같고, 꿈같으면서 또 현실 같고, 마침표 없이 무수한 쉼표가 쓰인 소설처럼 그렇게 쉬엄쉬엄 흘러가다 스러지는 것이다.
 
p.81 루어가 내려가지 않는 건가? 페테르가 묻는다 안 내려가, 요한네스가 말한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젓는다 그거 고약한 일이군, 페테르가 말한다 그리고 요한네스가 올려다보니 페테르의 눈에 눈물이 고여있다 정말 고약한 일이다, 페테르가 말한다 바다가 더 이상 자네를 원하지 않는구먼, 그가 말한다 그리고 페테르는 눈물을 닦아낸다 그럼 남는 건 땅뿐인가, 페테르가 말한다
 
p.134 그들은 더 이상 페테르의 고깃배가 아닌 다른 배에 앉아 바다 위에 떠 있다 그리고 하늘과 바다는 둘이 아닌 하나이고 바다와 구름과 바람이 하나이면서 모든 것, 빚과 물이 하나가 된다 그리고 거기, 에르나가 눈을 반짝이며 서 있다, 그녀의 눈에서 나오는 빛 역시 다른 모든 것과 같다, 그러고 나서 페테르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래 이제 길에 접어들었네, 페테르가 말한다 그리고 페테르와 그는 그 자신이면서 동시에 아니기도 하다, 모든 것이 하나이며 서로 다르고, 하나이면서 정확히 바로, 그 자신이기도 하다, 저마다 다르면서 차이가 없고 모든 것이 고요하다
 
 
 
그럼에도 역시 늙는다는 건 고약한 일이다. 죽는다는 건 마음이 너무 아픈 일이다.
일주일 동안 죽음으로 건너간 몇몇 사람들의 소식을 들었다. 조문을 가야 하는 한 친척, 지인에게 들은 노부부의 고요한 죽음, 중년에 돌연사한 한 직장인의 가족, 그리고 나는 욘 포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소설, [아침 그리고 저녁]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 [샤이닝]을 읽고 있다. 그렇게 삶은 죽음과 하나란 사실에 불현듯 놀란다.
 
p.111 에르나가 아직 살아 있던, 지난 몇 년 동안 그들은 참 편하게 살았다고, 돈 걱정 없이, 고생도 걱정도 없이 조용하고 만족스럽게, 그러다 어느 날 아침 에르나가 돌연 다락방 침대에 누운 채 숨을 거뒀다, 그리고 그는 에르나가 늘 서 있던 부엌 창가를 바라보지만, 에르나는 거기 없고 텅 빈 마룻바닥만 남아 있다, 
 
p.135 그리고 싱네는 요한네스의 관 위로 목사가 흙을 더지는 것을 보며 생각한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요한네스, 아버지는 독특한 분이었죠, 유별난 구석이 있었지만, 자애롭고 선한 분이었어요, 그리고 아버지의 삶이 녹록지 않았다는 걸 저도 알아요, 아침에 일어나면 늘 속을 게워내야 했죠, 하지만 아버지는 자애롭고 선한 분이었어요, 싱네는 생각한다,
 
 
 
또 한 해가 지나고, 늙음과 죽음은 나에게 많은 자극을 준다. 타인의 늙음이 거울로 다가온다. 현재의 나와, 죽음이 멀지 않은 그때의 나를 비춘다. 뭐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예측 불가능하고 두렵다. 살아온 날들을 생각해 보면 최선을 다했고 허투루 살진 않았지만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조용하고 만족스러운 삶은 너무 늦게 찾아왔고, 이 평안은 잠시 지속되다 에르나처럼, 요한네스처럼 끝이 날 것이다.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죽음도 삶의 한 부분이고 돌아가야 할 장소임에 틀림없으니, 하루하루에 감사하며 친절하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말이 없는 세계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또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p. 133  하지만 에르나, 에르나도 거기 있나? 요한네스가 묻는다 자네가 사랑하는 건 거기 다 있네, 사랑하지 않는 건 없고 말이야, 페테르가 말한다
 
 
 
 
 
 
 
 

 

 

 

 

한강의  소설 [여수의 사랑]

 
한강 작가가 20대 초반에 썼던 단편 소설들을 모은 <여수의 사랑>.
여수가 주는 낭만과 그곳에서의 좋은 추억으로 소설의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 책은 여수의 낭만에 대한 글이 아니었다. 여수는 삶의 고통이 시작된 지점, 아픔을 끊어내는 공간, 영혼의 장소였다.
 
42. 다만 그녀의 지치고 외로운 얼굴에 여수[麗水] 아닌 여수[旅愁]가 어두운 그림자를 끌고 지나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 여수[旅愁] : 객지에서 느끼는 시름이나 걱정
 
작가는 가족을 잃은 상실의 고통으로 인해 안정된 생활이라곤 전혀 할 수 없는 청년들의 외로움과 지난한 삶을 그려낸다. 그녀의 책을 읽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럽다. 이 소설 역시 다른 작품들과 결이 같다. 폭력적인 삶, 끝이 없는 고통,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인간들.
 
 
 
10. 음산한 하늘 아래 나무들은 비바람에 뿌리 뽑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젖은 줄기와 가지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휘어졌다. 노랗고 붉게 탈색된 낙엽들이 무수한 불티처럼 바람 부는 방향으로 흩날렸다. 조금 큰 활열수 들은 의연하게, 줄기가 여린 묘목들과 갈대숲은 송두리째 제 몸을 고통에 바치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도, 그들의 뿌리를 움켜 안은 대지도 놀라운 힘으로 인내하고 있었다.
 
나무는 사람 같다.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는 인간들은 놀랍다.
소설의 주인공 정선과 자흔 역시 고통의 나날들을 견디고 또 견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은?
 
정선, 스물여덟.
그녀는 다섯 살에 어머니를 잃고, 일곱 살에 아버지의 동반 자살 시도로 동생과 아버지는 죽고 그녀 혼자 살아남는다. 이후 여수를 떠나 외가댁에서 지내다, 서울에서 홀로살이 하며 발작적인 결벽증과 위장경련을 앓으며 힘겹게 지내고 있다.
 
자흔, 스물여섯.

두 살 때 강보에 싸인 채 여수발 서울행 열차 안에 버려져 발견된 자흔은 보호 기관을 떠돌다 고아원을 거쳐 입양된다. 양아버지가 죽고 양어머니 밑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후, 여수가 고향이라고 믿으며 여기저기 떠도는 삶을 살고 있다. 
 
둘은 우연히 한 자취방을 공유하며 살게 되지만, 그들이 가진 상처와 고통은 서로에게 힘겨울 뿐이다. 결국 자흔은 떠나고 정선은 여수를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13. 명치끝이 찢기듯이 아파왔다. 적요한 햇빛 속으로 무수한 먼지 입자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아름답구나, 하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먼지는 진눈깨비 같았다. 먼 하늘로부터 춤추며 내려와 따듯한 바닷 물결 위로 흐느끼듯 스미는 진눈깨비......, 여수의 진눈깨비였다.

 

상처의 시절은 단단히 기억하지,
밀려온 진눈깨비조차
참 따뜻한 나라라고
-김영인의 시 [여수]


비가 섞여 내리는 눈. 진눈깨비. 차갑고 우울한 눈비. 정선은 그것을 따뜻하고 아름답다고 느낀다. 삶의 고통이 얼마나 크기에 그 안에서 발견하는 작은 어떤 것에 위로를 받는 것일까.

 


 
25. 이렇게 고요해질 통증인 것을, 지난밤에는, 또 수없이 반복되었던 그 밤들에는 이런 순간을 믿지 못했었다. 마치 밤이 깊을 때마다 새벽을 믿지 못하듯이, 겨울이 올 때마다 봄을 의심하듯이 나는 어리석은 절망감에 사로잡히곤 했던 것이다.
 
폭풍 속에서의 인내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아 견딜 수 없이 괴롭고 절망한다. 그러나, 지나간다. 모든 일들은 어떻게든 끝이 난다. 통증은 가라앉고, 상처는 흐려지고, 슬픔은 추억을 불러일으키며, 생은 죽음으로 끝이 난다. 그렇다면 또 한 번 용기를 내어 견뎌야 하는 것일까.
 
 
 
34. 다만 신기한 것은 때때로 자흔의 얼굴에 떠오르는 웃음이었다. 모든 것에 지쳤으나 결코 모든 것을 버리지 않은 것 같은 무구하고도 빛나는 웃음이 순간순간 거짓말처럼 그녀의 어둠을 지워내버리곤 했다. 그런 자흔을 보면서 나는 종종 어떻게 사람이 저토록 희망 없이 세상을 긍정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의아해지곤 했던 것이었다.
 

62. 마침내 오래 기다렸던 전동차가 라이트를 밝히며 천천히 승강장으로 들어왔을 때, 저마다의 눈에서 어슴푸레하게 빛났다가 이내 스러지는 무감각한 희망들을 나는 보았다.


희망 없이 세상을 긍정한다는 말. 
가난과 부조리에 짓밟힌 사람들의 소박한 웃음, 암으로 죽어가는 한 여인의 의연하고 담담한 표정, 실패의 실패를 경험하고 이제는 다른 길을 선택한 사람의 긍정.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한 것일까. 

웃음 너머에 슬픔, 희망 너머에 체념이, 외로움이, 절망이 느껴진다. 그래서 그 모든 긍정은 슬프도록 아름답다.
 
 
 
64. 차창 밖 승강장에는 얼마나 바람이 불어대는지 승객들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 흩날리는 모습이 보였다. 저마다 빗물에 젖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승객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역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타지에서 고향으로, 혹은 어딘가를 떠나 또 다른 목적지로 돌아온 그들은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 속으로 담담하게 용기 내어 달려간다. 어떤 고통을 마치고 또 다른 시련 속으로 들어가고 있지만, 하나의 산을 넘었다는 안도감이 그들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일까. 그 찰나의 안도감과 평화로 인간들은 숨을 쉬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
 

 

 

 

 

 

 

케네스 로너건 감독의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영화의 주인공 리(케이시 애플렉)는 자신의 실수로 두 딸을 잃고, 아내와 헤어진 후, 맨체스터를 떠나 매사추세츠에서 잡역부로 일하고 있다. 심장병이 있던 형의 부음을 듣고 맨체스터로 돌아가 모든 일을 처리하고 조카 패트릭을 보살펴야 했던 그는, 그곳에서 담담하게 지내보려고 하지만 과거의 고통과 삶을 견딜 수 없어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된다.

 

리가 뱉은 한 마디, "I can't beat it." 


어떤 마무리도, 어떤 결말도, 어떤 해결도 없이 그저 또 살아가야 하는 너무나 인생 그 자체였던 영화. 

떠나는 리는 조카가 언제든 올 수 있게 두 개의 방 혹은 소파배드를 준비하려고 한다. 견딜 수 없는 삶의 한가운데 숨을 쉴만한 그 작은 공간 때문에 리도 패트릭도 또 다음 삶을 이어나가지 않을까.  

 

 

 

한강의 단편 [여수의 사랑]과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가족을 잃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견딜 수 없는 삶을 살아내며 무감각한 희망, 희망 없는 긍정을 반복하며 나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지독히 슬프고, 외롭고, 우울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기 위해 여수로 떠나는 정선과,

견딜 수 없어 맨체스터를 떠나는 리의 삶은, 또 다른 아침을 맞이하듯 다를 것이다.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육식을 끊고 나무가 되려고 했던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처럼, 인간은 폭력적인 세계를 거부할 수도 피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했다는 한강 작가의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
 
 
주인공 정희.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자랐고, 식당을 운영하는 바쁜 엄마를 도와 오빠와 남동생의 도시락을 싸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사랑했던 사람이 병으로 죽고, 집을 떠나고, 불행한 3년의 결혼 생활과 세 번의 유산 경험, 손목에 주저흔을 가지고 있는 여자. 그녀의 인생을 짐작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주인공 인주.
의사였던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이후 엄마는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을 겪다 자살했다. 11살이었던 인주는 외삼촌 동주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았지만 가족력이 있던 병으로 그는 사망한다. 같은 병을 앓던 남동생의 간호를 홀로 감당하며, 결혼과 이혼을 하고 딸 하나를 남겨 둔 채 자살한다. 그녀의 인생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을까?
 
219. 내가 아픈 곳은 달의 뒷면 같은 데. 피 흘리는 곳도, 아무는 곳도, 짓무르고 덧나는 곳도, 썩어가는 곳도 거기. 당신에게도,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달의 뒷면. 비밀스러운 장소. 어쩌면 가장 진실한 부분. 아주 잠깐씩 드러나기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결코 들여다볼 수도 알 수도 없다. 타인의 아픔을 고뇌를 치욕을 사랑을 진실을. 
 
 
 
146. 한 번도 종교를 가져본 적 없지만,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기도해 본 적은 있습니다. 가장 많이, 간절하게 기도한 내용은 죽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를 들어주는 누군가가 정말 존재했다면 난 이미 여러 번 죽었을 겁니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건, 그때마다 내가 그만큼 더 강하게 살아 있길 택했다는 걸 뜻합니다. 이건 말장난이 아닙니다.
 
340. 짐작할 수 있겠니. 나약함이 죄의 시작일 수 있다는 걸. 간절함이 알 속의 죄를 깨어나게도 한다는 걸. 문밖이 낭떠러지인 줄 알면서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어리석음을. 모든 일들의 시작이 자신이었음을. 그러니 자신을 제거하는 것만이 단 하나의 논리적인 길임을 확신하는 순간을. 무의미로 무의미를. 어리석음으로 어리석음을 밀봉하려는 결단을. 
 
인주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정희는 자살이 아니라는 확신으로 그 사실을 증명하고자 일어서고 맞서고 견딘다. 폭력적이고 부조리하며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리라 안간힘을 써본다. 정희 역시 인정할 수 없는 세상이지만 생수와 두부, 계란 한 줄과 봉지 김치, 들고 올 수 있을 만큼의 감귤을 산다. 다시 토하더라도 먹을 것이다. 움직일 것이다.
 
346. 두려움 없이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게 어떤 일입니까?) 거짓으로부터 인주의 아이를 보호하는 거예요.
 
정희의 이 치열함은 무엇일까. 위태롭게 또 일어서는 거대한 힘은 무엇일까.
아마 결국, 사랑일 것이다. 동주에 대한, 인주에 대한, 삶에 대한 사랑.
 
 
 

76. 바람이 분다. 마른 나뭇가지들이 허공을 할퀸다.

146. 얼음을 머금은 바람이 분다. 

328. 인주의 텅 빈 그림을 기억한다...... 바람이 불지 않았다. 어슴푸레한 빛이 영원히 움직이지 않았다.

366. 바람이 불고 있다. 간밤보다 강하고 습해진 바람이다. 거리를 걷는 모든 사람들의 체취가 섞이며 흩어진다. 마른 것과 축축한 것,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 부서지는 것과 영원한 것이 힘차게 뒤섞이며 날아간다.

367. 기억해. 바람이 부니까 뛰지 말까, 그때 생각했었어.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 넘어가고 싶었어. 정말 넘어가고 싶었어.

369. 이런 바람이 불면 말이야. 이만큼의 습기를 품은 바람이, 이만큼의 세기로 불면 말이야........ 혈관 속으로 바람이 밀고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져. 모든 것이 커다란 전체로 느껴져. 언제고 내 다리를........ 단박에 목숨까지 꿰뚫을 수 있는 삶을 지금 살아내고 있다는 게, 무섭도록 분명하게 느껴져.

 
나를 할퀴는 바람, 얼음을 머금은 바람이 부니 밖으로 나가지 않고, 몸을 사리고, 맞서기를 포기하고 싶다.
바람이 불지 않기를, 멈추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한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도 맞서 걸어가고, 뛰어 넘어가고, 바람이 잠시나마 그치기를 기다리며 끝끝내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참 이상도 하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어떤 것은 늘 닿아있다. 전혀 다르지만 또 같다. 소설 속 등장하는 마크로스코 화가의 그림과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노트북 화면으로 찾아보고, 말러의 2번 교향곡을 플레이해 보았다. 
 
서로 다른 색채가 서로 번지고 스며드는 그림, 가파른 협곡에 난 길 끝에 자리한 아름답고 붉은 복사나무 숲, 삶과 죽음 부활을 구현하며 절망을 희망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승화시켰다는 교향곡. 두 개의 다른 어떤 것이 한 화면에, 공간에 존재한다. 그 둘은 독립적인가 싶다가도 스미고 번지고 섞여 마침내 함께 있다.
 
 
 
어제 카라바조와 바로크 시대 그림 전시를 둘러보며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사람들의 표정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진한 슬픔이 배어나는 그 얼굴들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카라마조의 작품인 <도마뱀에 물린 소년>은 어둠과 빛, 장미와 가시, 체리와 도마뱀, 사랑의 쾌락과 고통이 공존한다. 사랑의 관능적인 즐거움에 가득 차 있던 소년이 도마뱀에 손가락을 물리자 순간의 고통으로 얼굴은 일그러지고 오른쪽 눈에는 눈물이 맺힌다.  
 
너무 행복해서 슬프고, 너무 차가워서 뜨겁게 느껴지고, 죽음이 있기에 삶의 의미가 존재하듯이, 바람이 부니 씩씩하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것도 찾아지지 않고, 어떤 것도 완성되지 않을지라도 또 두려움 없이 내가 할 일을 하면서 삶을 건져 올려야 하는 건가 보다.
 
324. 다시 시작하는 게 가능하다면....... 정말 가능하다면 말이야. 뭔가를 더 살리는 게 아니라, 복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부서야 하는 것 같아. 아니, 그건 달라.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부서야 하는 거야.
 
381. 살고 싶다. 포기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마다 가슴과 배가 벌레처럼 필사적으로 꿈틀거렸다. 한 뼘, 또 한 뼘. 폭발하는 소리를 내며 책상이 부서져 내렸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382. 눈을 감은 채 나는 앞으로, 깨끗한 공기가 있는 쪽으로, 차가운 쪽으로 기었다.
 
 
 
인주의 어린 시절, 미시령 절벽에서 버스 사고가 났었다. 동생과 엄마는 빠져나가고 절벽 아래로 기울어지는 버스 안에 혼자 남겨졌던 그녀는 기적적으로 삶으로 돌려보내졌었다.
 
293. 어머니를 이해했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았어. 용서했지만, 용서하고 싶지 않았어. (.......) 그런데, 이상한 게 있어. 그날, 버스가 회전하며 절벽을 향해 기울어가던 그 순간을 생각할 때마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한 빛이 그곳에 흘러넘치고 있었던 것처럼 기억해. 마치 거대한 천사 같은 게 날 막아서 돌려보내고 있었던 것처럼.
 
어쩌면 인주는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삶의 한가운데로 돌려보냈던 그 거대한 힘을 믿고 싶었던 것 아닐까? 다시 시작하고 싶은 강렬한 생명의 힘으로.
 
295. 단칼로 끊어낸 것처럼 죽음과 삶이 갈라지던 순간을 다시 경험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거기서부터 새로 시작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작가가 말한 '생명'이라는 말에 집중하고 그것을 발견하려 애쓰며 소설을 두 번 읽었지만, 소설은 나에게 여전히 희망적이라기보다 우울하고 절망적인 느낌이 들었다. 인주의 삶이, 정희의 삶이, 동주의 삶이, 모든 인물들의 삶이, 우리들의 삶이 말이다.
 
385. 눈두덩을 후벼 파는 안두통, 펴지지 않는 허리, 헝클어진 머리로 차가운 방바닥을 뒹굴었다. 처음으로 문을 열고 나가자 햇빛이 눈을 찔렀다. 다시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 때문에 허리를 접고 걸었다. 보도블록 틈으로 파릇한 싹이 돋은 것을, 가로수 밑동에 물이 오른 것을, 사람들이 봄옷 차림으로 걸어가는 것을 흔들리는 시야로 봤다. 미친 여자처럼 겨울 외투를 껴입은 채 그 눈부신 거리를 걸어 올라갔다......... 봄이 왔어. 너를 잃은 뒤 처음으로 입술을 열고 새어 나온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내 혀를 믿을 수 없었다.
 
386. 두 눈을 홉뜬다. 고개를 비튼다. 빗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울부짖는 사이렌이 멈추지 않는다. 누군가가 부풀어 오른 팔로 물속에서 파란 돌을 건져 올린다. 누군가가 무릎이 짓이겨진 채 뜨거운 배로 바닥을 밀고 간다.
 
내가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삶의 고통과 폭력은 피할 수 없는 길이다. 짓이겨진 삶을 자책하고 절망하는 대신, 삶을 건져 올려, 더운 심장과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이 안쓰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소중한 무언가를 건져 올려 삶을 이어간다. 어지러운 마음과 두통을 감내하며 길을 나선다. 
 
 
 
 
 
 
 

 

 

[서영동 이야기] 조남주 연작소설 (한겨레 출판)

 

[82년생 김지영]의 저자, 조남주의 소설은 우리네 삶의 모습을 덜거나 보탬 없이 자연스럽게 묘사한다. 긴장감과 반전 없이 잔잔하지만, 인간의 욕심과 간사함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서영동을 배경으로 한 일곱 편의 연작소설은 조금씩 연결되어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부모 잘 만나 안정적이고 편안한 생의 기반을 마련하는 이들이 있다. 반면에 가난한 부모 탓에 독립할 자금은커녕 그나마 번 돈을 집에 갖다 바쳐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능력과 운의 기막힌 조화로 자수성가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그 재능이 발목을 잡고 초라한 삶을 살아간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하루하루 고단하게 살아 가지만,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는 것은 너무도 멀리 있는 일이다. 

 

이런 불균형의 세계에서 사람들이 품고 있는 욕망, 이기심 등의 마음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이익을 좇아 반응하며, 갖지 못한 어떤 것들을 선망하고, 남과의 비교로 괴로워한다.

38. 아내는 그만 욕심을 부리라지만 용근은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8월 말의 실거래 정보를 보면 지금 내놓은 가격에도 거래가 될 것 같다. 분명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인데 내 것이었던 것 같고, 빼앗긴 것 같다. 용근은 박탈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봄날아빠)

72. 대답할 수 없었다. 말한다고 네가 이해할 수 있을까.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서울의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 소유주가 된 네가, 작은 아버지의 레스토랑에서 일하다가 큰 아버지의 회사로 이직한 네가, 가족 단톡방의 부모님 해외여행 사진에 무심히 이모티콘을 보내는 네가, 그 모든 일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네가 이해할 수 있을까 (경고맨)

96. 단지 입구 쪽에 작은 평형이 모여 있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은 평형이다. 은주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샐리엄마 은주)

241. 학원 사이트에서 초등부 진도표를 확인하려고 크롬을 열었는데 포털 사이트 메인에 '2030 영끌족, 수도권 아파트 매수세 심상찮아'라는 기사가 떠 있었다. 아영은 기사에 나열된 30대의 사례들이 무척 낯설었다. 너무 다른 세상 이야기라 오히려 황당하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끌어모으면 아파트를 살 수 있는 영혼은 대체 어떤 영혼일까. 나는 영혼마저도 실속이 없네, 웃음이 나왔는데 솔직히 웃기지는 않았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

 

 

 

내 아파트 가격이 오르는 것을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 돈을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나 역시 부동산 사이트를 드나들었던 기억, 남편의 승진과 더불어 생긴 이러저러한 혜택들에 좋아했던 일들이 이렇게 선명한데 말이다. 속물적인 마음을 표현하는 정도야 다르겠지만, 인간은 못나고 미운 마음을 가슴 한 구석에 아슬아슬하게 숨기고 살아간다.

188. 그런데요, 사장님. 저는 전세보다는 자가인 게 좋고요. 작은 집보다는 큰 집이 좋아요. 집값 오르는 거 느긋하게 보면서 그때 무리해서 사길 잘했지, 그때 안 샀으면 지금 넓혀가지도 못했지, 하는 기분도 썩 나쁘지는 않더라고요.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속물이고 투기꾼이라고 생각하시겠죠? 그래서 말하지는 않으려고요. 생각이야 참을 수 없지만 말은 가릴 줄 알거든요. 이게 현대인의 교양이죠. (교양 있는 서울 시민 희진)

109. 지긋지긋하기는 은주도 마찬가지였다. 샐리 엄마도, 새봄엄마도, 그런 여자들 중 하나로 보이지 않으려 애쓰는 생활도, 그런 여자들을 둘러싼 말들도, 오해도, 적의도, 정말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대체 그런 여자는 어떤 여자고 그렇지 않은 여자는 또 어떤 여자인데. (샐리엄마 은주)

 

 

 

그러나 욕심과 이기심, 못나고 미운 마음을 품고 표현하고 심지어 행동한 후, 또 인간이라면 가지게 되는 미안함과 후회, 수치심이 밀려온다. 양심버튼이 작동하는 순간이다. 

143. 부끄러웠다. 무례한 아버지가, 속물 같은 아버지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아버지가, 그리고 그런 아버지와 다르다고 생각했던 자기 자신이. (다큐멘터리감독 안보미)

160. 노인이나 어린이, 장애인 시설을 기피하는 이기적인 주민들. 경화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두통이 밀려왔다.  (백은학원 연합회 회장 경화)

174. 카메라가 있고 없고서가 아니라 그냥 제 처지가 달라졌어요. 그때도 지금도 저는 아무 생각이 없고 이런 제가 한심하고 답답하고 부끄러워요. 부끄럽다고요. 이제 와 부끄럽다고 말하는 것도 부끄러워요. 경화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백은학원 연합회 회장 경화)

 

 

 

인간은 어떻게 디자인되었길래 이러나저러나 괴로운 마음을 안고 고통받으며 살아야 하는 걸까.

피해보지 않겠다고, 내 자식은 굶기거나 고생시키지 않겠다고, 잘 살아보겠다고 했던 것들. 나의 이익을 위해 정의를 모른 척했고, 나의 편안함을 위해 손 내미는 어떤 것들을 마다했던 일들. 이런 속물적인 이기심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은 늘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존재일까.

143. 부족한 것 없이 자랐다. 넘치도록 지원을 받았고, 결혼하고도 부모님께 기대어 살았다. 게다가 아버지의 속물근성을 까발리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커리어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 어쩌면 보미도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속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큐멘터리감독 안보미)

194. 남편의 가치관과 생활습관을 존중하려 노력했고, 딸 하나 아들 하나 잘 키웠고, 회사도 성실하게 다녔다.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은 사람이고 삶이라고, 좋은 아내라고 자부해 왔다. 그런데 남편에게는 희진이 자산 관리를 잘해서, 부동산 투자를 잘해서, 결국 10억을 만들어내서 최고의 아내인 걸까. (교양 있는 서울 시민 희진)

 

 

 

<서영동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고위직도, 기업인도, 정치인도, 연예인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 소설들을 쓰는 내내 무척 어렵고 괴롭고 부끄러웠습니다."라는 작가의 말도 어쩌면 너무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이기에 그랬으리라 짐작한다. 

 

그렇게 다행이기도 불행이기도, 행복하기도 우울하기도, 자랑스럽기도 부끄럽기도 한 삶은 지속된다. 

208. 그렇게 시끄러운 윗집과 예민한 아랫집 사이에서 병들어가는 사이 집값은 계속 올랐다. 이사한 지 1년여 만에 시세는 15억이 되었다. 희진이 집이 좋기도 싫기도 했다. 이 집을 가져서 다행이기도 불행하기도 했다. 행복하기도 우울하기도 했다. (교양 있는 서울 시민 희진)

 

 

 

인간은 약하기에 못나고 미운 마음들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하다. 누구나 그렇다. 그러나 성인(聖人)까지는 아니지만 작은 잘못에도 부끄러워하고, 예쁜 마음씨를 갖고 살려고 노력하는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고, 그렇게 조금씩 나아가고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이기심이 모여 삶이 각박해지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욕심이 더해져 세상은 무너진다. 무너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 2023

 

엄태화 감독의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위기사항에 처했을 때,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던 욕심과 이기심이 얼마나 극도의 이기주의로 발현되는지 엿볼 수 있는 영화이다.

 

대지진으로 하루아침에 서울은 처참히 무너졌고, 그 폐허 가운데 '황궁 아파트' 만이 유일하게 그대로다.

소문을 들은 생존자들이 아파트로 몰려들자 입주민들은 위협을 느끼고 집단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양심과 부끄러움을 버리지 않았던 인물, '명화'(박보영)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책과 영화의 상황과 결은 다르지만, 결국 두 이야기는 맞닿아 있는 듯하다. 

 

 

 

 

 

 

 

2024 한 해를 보내며 마지막으로 선택한 뮤지컬은 <바람으로의 여행>이다. 김광석의 오랜 팬인 나는, 그의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무척 설레었다. 오후 연극을 보기 위해 일찌감치 대학로에 도착했다.

 

유명하다는 돈카츠집에서 밥을 먹고 나오다, 지난번 왔을 때 공사 중이었던 백기완 마당집이 개관을 하여 반가운 마음에 들어가 보았다. (2024, 5.1, 노동절 개관했다고 한다.)

 

 

 

 

 

불안하고 괴로운 날들이 계속되는 요즘, 시대의 어른들이 많이 그립다. 약자와 억울한 자들의 권리를 위해 호통치고 싸웠던 사람들. 따뜻하고 정의로우며 인간적이었던 사람들. 그들의 단단하고 올곧은 성품과 앞서서 나아가고 행동했던 용기가 그립다. 

 

 

 

핀배지를 구입하고 마당집을 나왔다.

뮤지컬 <바람으로의 여행>은 노래뿐 아니라 스토리와 분위기에서도 그리운 김광석의 모습이 많이 생각났다. 공연의 마지막에 배우들 관객들과 함께 소리 높여 떼창을 부르며 한 해의 울분을, 그리움을 해소했다.

 

 

 

 

겨울 칼바람이 불었던 이 날, 낙엽이 바람에 못 이겨 떨어져 뒹굴며 쓸쓸한 가을 분위기가 났다.

추웠지만 따스한 분위기에 들떴던 여느 겨울 대학로와는 다른, 그런 하루였다.

 

 

 

 

 

 

 

 

 

 

 

한가람 미술관 <반고흐 전시회>에 다녀왔다. 고흐의 인기를 증명하듯 오픈 시간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발권과 관람을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인원을 제한한다고는 했지만 여유로운 관람은 어려웠다. 그럼에도 미술관을 다녀오는 길은 역시나 좋다.

 

전시를 앞두고, 언젠가는 봐야지 다짐만 했던 책을 책꽂이에서 꺼냈다. 질 좋은 종이에 200여 점의 그림이 삽입되어 있는 책은 생각보다 빠르게 집중해서 읽을 수 있었다.

 

 

[고흐] 주디 선드, 남경태 옮김 (한길아트)

 

한 예술가의 삶의 여정대로 기획된 알찬 전시를 본 느낌이었다. 

 

성장기, 1853~80

도시와 농촌 사이에서, 80~83

성숙기, 84~85

파리 시절, 86~88

우키요에의 영향, 87~88

아를에서 그린 인물화, 1988

예술과 병, 89~90

마지막 나날

사후에 얻은 명성

 

 

그의 유명한 작품들과 삶을 영화나 책 등을 통해 많이 알고 있다 생각했지만, 한 사람을 제대로 아는 것은 역시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외에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할까. 

 

디킨스와 공쿠르 형제, 에밀 졸라 등의 책을 좋아했던 고흐는 문학에 심취해 있었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던 듯하다. 책에 나온 지역을 탐방하며 소설 속 주인공의 심정으로 전망을 바라보는 그를 상상하니 왠지 친근하고 짠하다.

 

70. "예술은 기질을 통해 바라본 자연의 한 측면"이라는 졸라의 유명한 명제는 반 고흐의 생각에 딱 들어맞았으며, 전통을 버리더라도 자신에게 충실하고 싶다는 그의 입장을 지지해 주었다.

 

83. 반고흐는 시각적 유사성보다 언어적 유사성을 강조하면서 종교는 물러가지만 신은 남는다"는 빅토르 위고의 말을 써 보냈다. 그는 자신이 그린 장면의 의미를 이렇게 말했다. " 신앙과 종교는 썩어버리지만...... 농부들의 삶과 죽음은 마치 교회 안뜰에서 규칙적으로 자라고 시드는 풀과 꽃처럼 영원하게 마련이지." 

 

208. 그런 회화에서 색채는 화가의 감정을 담고 있으며, 음악과 같이 비형상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감상자에게 전달된다. 아를에서 반 고흐는 "회화를 베를리오즈나 바그너의 음악처럼 상심한 마음을 위로하고 위안을 주는 예술로 만들고자"결심했다.

 

 

 

독립적이고 고집이 셌지만 반면에 예술가들의 협동에 관심을 보였고, 고갱의 확고한 자신감에 매료되어 있으면서도 또 이따금 회의에 빠져 갈등을 피하지 못했던 고흐 역시 삶은 답을 낼 수 없는 어려운 것이었다. 

 

희망을 꿈꾸고 낙담하고, 자신감에 넘쳐있다 실망하는 그의 크고 작은 롤러코스터 인생 속에서 나를 본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누군가의 조언대로, 내 앞에 놓인 작품을 있는 그대로, 편견 없는 시선으로 감상하려다가도, 나는 감히 고흐의 마음을 짐작하거나, 상황을 그려보거나, 주변 인물들의 영향을 추측하거나 하는 등 인간적인 연민으로 그것들을 바라보는 나를 발견한다. 어느 누군가의 우주를 완벽히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으면서 또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4. 부풀려진 대중적 상상력의 페르소나를 제한하고 현실적인 면모를 찾아내는 것이 1980년대 이래 반 고흐 연구의 주류였고 또한 이 책의 목적이기도 하다.

 

5. 그의 그림이 큰 인기를 누리는 이유는 일단 정서가 뒷받침된 즉흥성 때문이겠지만, 실상 그의 작품은 강렬한 목적의식을 지닌 성찰적이고 지적인 산물이다. 

 

 

 

 

별이 빛나는 밤 (1889) / 캔버스에 유채 / 뉴욕 현대미술관

 

 

유럽 화가들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사이프러스 나무는 늘 인상적이었다. 이 나무는 고흐의 작품에도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그려져 있다. 너무도 유명한 그림이지만, 책에 실린 설명을 읽으니 또 다르게 다가온다.

 

257.

별이 빛나는 밤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하늘 풍경은 죽음으로써 갈 수 있는 별에서의 고결한 삶에 대한 꿈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별 아래 작고 어두운 마을은 속세의 삶이 더 원대한 범위에서는 상대적으로 왜소함을 나타내며, 그 삶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을 일깨운다. 

[별이 빛나는 밤]은 신앙을 통해 그 너머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시도를 나타낸다.

사이프러스는 지중해 문명권의 묘지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전통적으로 슬픔(색이 어둡기 때문에)과 불멸(향기가 있는 상록수 이기 때문에)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생레미에서 반 고흐는 " 내 마음에는 늘 사이프러스가 있다"라고 말했다. [별이 빛나는 밤]에 나오는 사이프러스는 죽음을 상징하는 기차 같은 교통수단을 의미하는 듯하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별에 갈 수 없으므로" 그것은 우리를 별까지 데려다주는 수단이다.

달빛이 비치는 [별이 빛나는 밤] 은 칙칙하고 제한된 속세의 영역 너머, 에너지와 빛으로 맥동하는 무한성 속의 삶을 가정한다.

 

 

조지 큐커 감독의  [Lust for Life, 열정의 랩소디] ,1956

 

 

 

1956년 제작된 전기영화 <열정의 랩소디>는 탄광지대 전도사로 부임한 고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커크 더글라스가 고흐로, 안소니 퀸이 고갱을 연기한 영화는 그의 인생을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다. 고흐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유럽의 낭만적인 장소들과,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고흐의 그림들과 동시대 예술가들의 작품들은 정말 아는 만큼 보인다. 

 

 

책과 전시 그리고 또 한 편의 영화, 모두 같은 인물에 대한 탐구이지만 묘하게 다른 느낌으로 다가와 서로 시너지 효과를 준다. 그림 그리는 것을 사랑했고, 작품을 통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주고 싶었던 그의 열정과 사랑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2024년에 읽은 책]

 

Jan.
1. 나주에 대하여_김화진 
2.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_최승자
3. 깊이에의 강요_파트리크 쥐스킨트
4.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_진은영 
5. 향수_파트리크 쥐스킨트
6. 좀머 씨 이야기_파트리크 쥐스킨트
7. 데미안_헤르만 헤세                        

Feb.
8.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_이도우
9. 라스트 러브_조우리
10.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_김영민
11.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_헬무트 디틀, 파트리크 쥐스킨트
12.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_최은영
13. 사랑을 생각하다_파트리크 쥐스킨트
14. 무진기행_김승옥
15. 단원고 4.16 기억교실        
   
Mar.
16. 오만과 편견_제인 오스틴
17. 타인의 고통_수전 손택
18. 새의 선물_은희경
19. 태연한 인생_은희경 

Apr.
20. 무의미의 축제_밀란 쿤데라
21. 마지막 춤을 나와 함께_은희경
22. 내 이름은 루시바턴_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23. 오! 윌리엄_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24. 삶의 발명_정혜윤

May
25. 설득_제인 오스틴
26. 슬픈 세상의 기쁜 말_정혜윤
27. 딸에 대하여_김혜진

Jun.
28. 너라는 생활_김혜진
29. 경청_김혜진
30. 보건교사 안은영_정세랑

Jul.

Aug.
31. 다시 올리브_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32. 아몬드_손원평

Sep.
33. 구의 증명_최진영
34. 내가 되는 꿈_최진영
35. 일인칭 단수_무라카미 하루키

Oct.
36. 반딧불이_무라카미 하루키
37. 작별하지 않는다_한강
38. GV빌런 고태경_정대건
39. 흰_한강

Nov.
40. 너무 시끄러운 고독_보후밀 흐라발 
41. 네루다의 우편배달부_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42. 어떻게 지내요_ 시그리즈 누네즈 
43. 맡겨진 소녀_클레어 키건 
44. 영화 속 샌드위치 도감_주혜린

Dec.
45. 이처럼 사소한 것들_클레어 키건 
46. 채식주의자_한강 
47. 애쓰지 않아도_최은영 
48. 소년이 온다_한강 
49. 어떤 섬세함_이석원 
50.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_보흐밀 흐라발 
51. 영국왕을 모셨지_보후밀 흐라발
52. 책 읽는 사람_문재인의 독서노트

 

 

 

[2024년에 본 영화]

 

Jan.

1. 초록비 / 2. 로마 / 3. 걸어도 걸어도 /  4. 조커  / 5. 패터슨 / 6. 괴물  7. 결혼이야기 / 8. 제인에어(2011) / 9. 말할 수 없는 비밀 / 10. 자백  / 11.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 12. 블루 발렌타인  / 13. 어나더 라운드 / 14. 싱글라이더 / 15. 파벨만스  / 16. 비긴어게인 / 17. 우리도 사랑일까 / 18. 노팅힐 / 19. 이투마마  / 20. 카페드플로르 / 21. 길 위에 김대중 / 22. 온 더 로드 / 23. 블루재스민 / 24. 아임낫데어

Feb.
25. 세 가지 색: 레드 / 26. 오베라는 남자 / 27. 오토라는 남자 / 28. 아들의 이름으로 / 29. 더 파더  / 30. 굿바이 칠드런  /  31. 터미네이터 2  / 32. 데몰리션 / 33. 나의 천사 / 34. 숏컷 / 35. Shall We Dance?  / 36. 이터널 선샤인 / 37.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 / 38. 행복  / 39. 페인티드 베일 / 40. 러브 어페어 (1957)  / 41. 아사코 / 42. 멋진 하루 / 43. 이토록 뜨거운 순간 / 44. 블랙스완 / 45. 고야의 유령 / 46. 너와 나 / 47. 만추 / 48. 명량 

Mar.
49. 범죄도시 3 / 50. 밀수 / 51. 베티블루 37.2 / 52. 제인오스틴 북클럽 / 53. 드라이브 마이카 / 54. 메이 디셈버 / 55. 해피 아워 / 56. 파묘 / 57. 오만과 편견 / 58. 극한직업 / 59. 미안해요 리키 / 60. 공동경비구역 JSA / 61. 오만과 편견 / 62. 조블랙의 사랑 / 63. 컨택트 / 64. 투러버스 / 65. 센스 앤 센서빌리티 / 66.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 67.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 /  68. 여배우는 오늘도 / 69. 왕의 남자 / 70. 미쓰백 / 71.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 72. 나의 올드오크 

Apr.
73. 아비정전 / 74. 이레셔널 맨 / 75. 랑데부 / 76. 지슬 / 77. 퍼펙트 센스 / 78.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79. 클로저 / 80. 우연과 상상 /  81. 뉴욕아이러브유 / 82. 세 자매 / 83. 길버트 그레이프 / 84. 맨체스터 바이 더 씨 / 85. 벤 이브 백 / 86. 매그놀리아 / 87.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 / 88. 다가오는 것들 / 89. 어느 멋진 아침 / 90. 모던타임스

May
91. 전망 좋은 방 / 92. 마담프루스트의 비밀정원 / 93. 중경삼림 / 94. 낭트의 자코 / 95. 셀부르의 우산 / 96. 스카우트 /  97. 교토에서 온 편지 / 98. 제인오스틴 북클럽 / 99. 원더풀 라이프 / 100. 휴가 / 101. 비포선셋 / 102. 비포미드나잇

Jun.
103. 딸에 대하여 / 104. 펀치 드렁크 러브 / 105. 원더랜드 / 106. 팬텀 스레드 / 107. 한공주 / 108. 인사이드아웃 / 109. 인사이드 아웃(2) / 110.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 111. 천국보다 낯선 / 112. 자전거 탄 소년 / 113. 존 오브 인터레스트 / 114. 추락의 해부 / 115. 그해, 여름 / 116. 한나 아렌트 / 117. 피아니스트 / 118. 착각 / 119. 실비아 / 120.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 121. 다음 소희 

Jul.
122. 파더 앤 도터 / 123.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 124. 파이란 / 125. 위아영 / 126. 지금은 맞고그때는 틀리다 / 127. 러브 라이프 /  128. 옆얼굴 / 129. 8월의 크리스마스 / 130. 강원도의 힘 / 131. 타인의 취향 /132. 카페 소사이어티 / 133. 매직 인 더 문라이트 / 134. 매치포인트 / 135. 마더 / 136. 리빙:어떤 인생 / 137. 이키루 / 138. 라라랜드 / 139. 레이니데이인뉴욕 / 140. 맘마미아 / 141. 나의 사랑 그리스 / 142 로마위드러브 / 143. 리플리(맷 데이먼) / 144. 올리브나무 사이로 / 145.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 146. 퍼펙트 데이즈 / 147. 그을린 사랑 / 148. 오징어와 고래 / 149. 그랑블루 / 150. 어거 스트 가족의 초상 / 151. 어바웃타임 

 

Aug.
152. 아이엠러브(틸다 스윈튼) / 153. 바튼아카데미 / 154. 콜미바이유어네임 / 155. 보헤미안랩소디 / 156. 빅피쉬 

 

Sep.
157. 위대한 쇼맨 / 158.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 159. 내 사랑 / 160. 사랑이 지나간 자리 / 161. 로리타 / 162. 디 아워스 / 163. 베니스의 상인 / 164.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 165.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166. 아이 오브 더 스톰 / 167. 화차 / 168. 위플래쉬 / 169. 래이첼, 결혼하다 / 170. 나나 / 171. 케빈에 대하여 

 

Oct.
172. 레이디 버드/ 173. 아이엠러브(백승빈 감독) / 174. 환희의 얼굴/ 175. 여름날의 레몬 그라스 / 176. 블루 발렌타인 / 177. 귀향 / 178. 브로크백마운틴 / 179. 노트북 / 180. 홀리모터스 / 181. 다크 나이트 / 182. 영원한 휴가 / 183. 나의 그리스식 웨딩 / 184. 괴테 / 185. 러덜리스 / 186.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 / 187. 어떤 여자들 / 188. 사랑을 카피하다 / 189. 논-픽션 / 190. 러브레터 / 191. 하얀 리본 / 192. 노킹 온 헤븐스 도어 / 193. 아무르 / 194. 창밖은 겨울  / 195. 소라닌 / 196.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 197. 아멜리에 / 198. 안녕, 유에프오

 

Nov.
199. 독 / 200. 백조 / 201. 바르샤바 1944 / 202. 문라이즈킹덤 / 203. 트루스 / 204.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 205. 더킹 / 206. 셰임 / 207. 제인 에어 / 208. 피아니스트 / 209. 렛 더 선샤인 인 / 210. Lost in Translation / 211. 스탠 바이 미 / 212. 분무기 / 213. 애프터썬 / 214. 마지막 레슨 / 215. 어디 갔어, 버나뎃 / 216. 밤의 해변에서 혼자 / 217. 납치 / 218. 졸업 / 219. 누구나 아는 비밀 / 220. 보이후드 / 221. 쉘브르의 우산 / 222. 가버나움 / 223.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 224. 더룸넥스트도어 / 225. 칠드런오브맨 / 226. 나쁜 피 / 227. 말없는 소녀 / 228. 에드워드 호퍼 

 

Dec.

229. 기억은 먹구름 / 230. 버섯이 피어날 때  / 231. 작별 / 232.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오면 하루를 보내 / 233.1987 / 234. 캐롤 / 235. 작은아씨들(1994) / 236. 작은아씨들(2019) / 237. 열정과 냉정사이 / 238. 다우트 / 239. 사랑은 낙엽을 타고 / 240. 러브 액츄얼리 / 241. 디태치먼트 / 242. 흐르는 강물처럼 

 

 

[2024년 가봤던 영화제]

4월 서울 4.3 영화제

6월 무주산골영화제

7월 들꽃영화제

10월 부산국제영화제

12월 서울독립영화제

 

 

 

2024년이 저문다. 세월은 가속도가 붙은 듯 더 빠르게 지나간다. 지난 주말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 다녀온 겨울 춘천은 여유롭고 좋았다. 행복한 순간들도 많았던 한 해의 마지막 페이지가 충격적이고 참담한 일들로 얼룩진다. TV 화면에 보이는 영상과 내용들이 내가 알지 못하는 머나먼 오지에서 벌어지는 일인 듯하다.

 

 

핀란드 헬싱키 배경의 영화를 보았다. 춥지만 살기 좋은 곳으로 꼽히는 북유럽 국가들.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과 함께 핀란드의 이미지도 그러했었다. 그러나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핀란드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가난한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은 우울하고,  알코올에 의존하는 인간의 나약한 모습은 위태롭다. 인근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삶의 위협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한다. 영화는 이런 상황 속에서 따스한 온기를 잡아낸다. 귀에 익은 음악들, 시답지 않은 유머와, 연민을 느끼게 만드는 사람들의 표정이 너무 좋았던 영화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 처음 영화의 제목을 접하고 어색한 느낌에 어떤 이야기일까 호기심이 생겼었다.  '사랑은 비를 타고', '사랑은 꽃잎을 타고', '사랑은 눈을 타고'라는 낭만적인 제목도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봄과 여름처럼 찬란하게 윤기를 머금고 반짝이진 않지만, 가을의 쓸쓸함, 낙엽의 위태로운 바스락 거림, 차갑고 건조한 공기 가운데서도 사랑은 존재한다. 삶이 마냥 아름답고 행복하진 않지만, 온기가 느껴지는 사랑으로 다가오는 겨울을 맞이할 수 있다.

 

 

 

스위스, 덴마크 국민들은 완벽하게 행복할까? 억 소리 나는 부자들은 고통을 피해 갈까? 훌륭한 스펙과 사회적인 성공이 인생의 전부일까? 기갈나게 운빨이 따라주는 사람은? 멋진 외모와 스타일을 소유했다고? 

인생은 그렇게 계산기를 두드리듯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나보다 조건이 좋은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시간 낭비하기보다는 내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순간순간 자족하며, 나만의 아기자기한 행복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름답고 가치있는 삶이란 생각이 든다.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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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평산책방에서 샀던 책, <책 읽는 사람>을 올해의 마지막 책으로 꺼내 읽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추천한 책들과 그것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실려있다. 그의 독서 목록의 일부일 뿐인 소개된 책들만으로도 참으로 다양한 분야의 책들로 깊고 넓은 독서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추천 도서 중, 내가 읽었던 책 여일곱 권 정도가 정말 반갑게 느껴졌고, 읽고 싶은 책 몇 권은 폰 메모장에 저장해 두었다. 그러나 상당 수의 책들은 내가 읽기에 부담스럽거나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실 소설을 좋아하는 나의 책 읽기는 편식에 가깝다. 게다가 판타지 소설은 거의 읽지 않으니 소설도 가리는 것이다. 나의 책 읽기가 얼마나 빈약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p 10. 일행가운데 시를 좋아하는 국어 선생님이 있어서 평소 산행할 때마다 도종환 시인의 '여백'이란 시를 함께 낭송한 다음 산행을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오랜만에 함께 산행하게 된 우리 부부를 위해 부산 출신 김종해 시인의 '그대 앞에 봄이 있다'라는 시를 한 편 더 준비해 왔습니다. 처음 경험한 일인데 그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시를 함께 낭송했더니 놀랍게도 산행 내내 시가 머릿속에 맴돌아 시와 함께하는 산행이 되었습니다.

 

시와 함께하는 산행. 너무 멋지지 않은가!

 

시 한 편으로 시작하는 하루.

시 한 편으로 시작하는 산책.

시 한 편으로 시작하는 여행.

 

정말 근사하다.

 

 

그들이 산행에 함께했던 시,

김종해 시인의 <그대 앞에 봄이 있다>를 다시 읽어 본다.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 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 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내년에는 다양한 책들을 읽어보리라' 생각할 수 있게 해 준, 연말을 마무리하기에 적절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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