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 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굿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란시스 잠'과 도연명과 라이널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 시인.

 

오래전 어느 명절, 큰댁에 갔을 때였다.

대학 입학 후 처음 파마를 한 아들을 보고 형님께서 백석 시인 같다고 하셔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있다.

뼛속까지 문인들로 모인 이 집안에서 모두 관심 있는 시인인 듯했지만, 사실 나는 그의 시를 잘 몰랐었다.

 

얼마 전 딸이 아빠 생일 선물로 백석 시집 <사슴>을 사드렸다.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시는 '흰 바람벽이 있어'라며 책을 펼쳐 소개하자 남편은 그 시에 표시를 해두었다.

 

몇 번을 읽어 보았다.

1941년 4월 문장지에 발표된 시이다.

일제 식민지 시기 시인이 만주에 있을 당시에 발표된 작품이다.

타지에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며 시를 써 내려갔을 쓸쓸함이 내가 그 방안에 누워 있는 것처럼 전달된다.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어두컴컴한 좁은 방에 누워 흰 벽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그리운 것들.

빼앗긴 조국, 고향에 계신 늙은 어머니, 이루어지지 못했던 사랑, 평화로웠던 소소한 일상들.......

 

그러나 시인은 가난과 외로움 쓸쓸함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한다. 

슬픔 안에서 극대되는 사랑과 벅찬 그리움은 하늘이 사랑하는 이에게 내린 귀한 선물이라 여기며 말이다.

 

외롭고 여린 초생달, 바구지꽃, 짝새 그리고 당나귀를 생각하며, 

고독과 외로움을 노래했던 시인들을 벗 삼아 말이다.

 

그래서 그는 높은 사람이다. 뜨겁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사랑과 슬픔을 아는 사람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외로운 방에서 삶의 고통과 슬픔을 이겨내려 안간힘을 쓰는 시인의 모습을 생각하니 불쌍하고 가엾다.

나의 모습,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 인간의 모습이 떠올라 괴롭고 아프다.

 

더없이 슬픈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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