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이 23살에 쓴 첫 소설이다. (세상에!) 나는 집에있는 파란 커버의 책으로 읽었다.
영국에서는 <Essays In Love> 미국에서는 <On Love> 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고 한다.
영어 제목 그대로 사랑에 관한 책!이다. 이 글을 읽는 내내 재미있었지만, 철학적 내용이 많아 잠시라도 집중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이 있었다. 이 책은 1인칭 남성 화자의 목소리로 글을 전개해 나간다.
나와 클로이라는 여성이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하고, 위기를 겪으며, 헤어지고... 그 과정을 통해 사랑에 대한 교훈을 얻으려 노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또 다른 사랑에 다시 한번 빠지게 되는 정말 평범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필자의 재미난 표현들과 박학다식한 지식들을 동원하여 글을 세련되고, 재미있게,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나가기에 이 책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누구나 경험해봤을 법한 일들을 가지고, '어떻게 이렇게 표현하고 생각하지?'라는 놀라움을 끊임없이 가지면서 읽었다. 알랭 드 보통의 창의력과 상상력은 거의 천재에 가까운 듯하다.
아래 소개하는, 이 책의 차례에 나온 소제목들만 봐도, 그 내용을 상상하기에 만만치 않다.
내가 책을 읽으며 집중하려 했던 한 방법은, 글이 제목을 어떻게 설명했을까?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읽어 내려갔다.
제1장 낭만적 운명론 : 클로이와의 만남! 상황의 우연적 성격을 보지 못하고 신비주의적인 의미를 부여함. 운명이구나! 첫눈에 반함.
제2장 이상화 : ~가 어색해 보이지만, 그래도 그녀가 사랑스럽다. 그녀는 완벽해! 자기 자신을 용납하기는 어려워하면서도, 다른 사람은 끝도 없이 이상화함.
제3장 이면의 의미 : 그녀의 행동은 어떤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나의 욕망은 그녀의 모든 것에서 (내 사랑의 정당한) 의미를 읽어내려 한다.
제4장 진정성 :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열등감으로 진정한 자아를 감추고, 그녀의 욕망에 맞게 얼마든지 나를 바꾸는 비진정성을 보임. ex) 나는 알코올을 원함, 그녀는 물을 원함, 고로 나도 물을 원하는 거짓된 자아.
제5장 정신과 육체 : 육체적인 쾌락 vs 더불어 피어나는 생각/ 친밀성 vs 나머지 미지의 영역/ 사랑하는 사람 vs 생각하는 사람의 충돌... 결국 정신과 육체의 결합을 시도.
제6장 마르크스주의 : 자기 증오에서 생겨난 마르크스주의. 대단한 사람이라면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야! 하며, 나를 우습게 생각할 때만 사랑하는 사람을 존중. 크로이가 나를 사랑하기를 바랐으면서, 막상 그녀가 나를 사랑하자 그녀에게 화를 냄.
제7장 틀린 음정 : 관계 초기, 내적인 공상과 외적 현실 사이의 과도기에 탐지해 낸 수많은 틀린 음정. 그러나 국적, 계급이나 직업이 아닌 아주 사소한 취향과 의견의 차이가 더 위협적. 그 결과 피곤함, 두려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갈망하는 마음마저 생김.
제8장 사랑이냐 자유주의냐 : 사랑에 대해 얘기하면서 상대를 마음대로 살게 해주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사랑하기 때문이라 하면서 자신의 개인적 판단을 앞세워 강요. 이것은 사랑의 비자유적인 면. 사랑? 자유주의? 선택 필요. 그러나 클로이와 나는 유. 머. 감. 각.으로 편협함에 이르지 않고 벽을 넘어간다.
제9장 아름다움 : 플라톤의 '이상적 형상'보다는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은 '결정 근거가 주관적'이라는 칸트의 견해에 동조. 고로, 클로이는 아름답다. 이런 주관적 이론은 관찰자를 없어선 안될 존재로 만드는 기분 좋음을 동행한다.
제10장 사랑을 말하기 : 사랑이란 언어는 가장 모호한 것. 역사적으로 걸쳐진 공동의 영역.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는 불완전한 송신기로 암호화된 메시지를 타전하는 것. 그래서 나만의 언어"나는 클로이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마시멜로 한다"라고고백.
제11장 그녀에게 무엇을 보는가? : 그녀는 나에게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도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사랑스러울까?
【왕관→군주, 바퀴→자동차, 백악관→미국 정부, 클로이의 천사 같은 표정→클로이】로 실체의 속성 한 가지를 실제 자체로 해석한 것은 아닐까?
제12장 회의주의와 신앙 : "신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라도, 그 적은 가능성이 주는 기쁨이 더 큰 가능성이 주는 공포를 압도하기에 신앙은 정당화될 수 있다."_파스칼./연인들은 사랑 없이 의심하는 것보다는, 틀려도 사랑을 하는 모험을 더 좋아한다.
제13장 친밀성 : 자아/타아 가 아닌, /자아 타아/.클로이를 '나의 당근'이라는 친밀한 언어로 부름. 비논리와 장난으로, 그녀와 나의 개인적 사건들과 습관들이 친밀성을 형성.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중심 악상(라이트 모티브)처럼 익숙함은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고 친밀성에 기초한 집안 언어가 생김. 그것이 나와 클로이 간의 접착제 역할. 클로이는 세상에 대한 나의 판단의 최종 저장소.(사랑의 음모성)
제14장 "나"의 확인 : 다른 사람들이 나의 존재에 대해 정통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정확한 정체성을 가지는 일이 다른 사람에 의해 좌우될 위험이 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나에 대한 느낌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어떤 눈도 우리의 '나'를 온전히 담을 수는 없다. 사랑도 왜곡될 수 있다는 얘기.
제15장 마음의 동요 : 사랑이란 단어는 내 감정을 얼마나 나타낼까? 감정의 유동성, 변덕스러움, 배신, 권태, 짜증, 무관심이 들어설 공간이 있을까? 나무를 나무라고 부르지만, 1년 내내 나무는 변하고 있듯이, 클로이에 대한 내 감정이 변했다면,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그녀 자신도 변하는 존재란 사실이다. 영원할 수 없다는 사랑의 비극. 지나간 사랑들에 무관심한 반응을 보이는 나를 보며 슬퍼짐.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훨씬 더복잡하고, 덜 유쾌한 현실의 생략형 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식했다.
제16장 행복에 대한 두려움 : 행복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내 행복의 원인인 클로이가 쉽게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우리는 행복을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 속에서만 찾으려고 하지만, 기억과 기대와 절대 같을 수 없는 현재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가 현재를 살지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평생 갈망해온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깨달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일지도...
제17장 수축 : 잠자리에서의 다름. 사소한 일에서의 다툼. 다른 남자와의 관계 속에서 내 가치에 의문을 품는 듯한 느낌. 한편에는 여자를 천사와 동일시하는 남자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사랑을 병과 동일시하는 여자가 있는 희비극.
제18장 낭만적 테러리즘 : 일단 한쪽이 관심을 잃기 시작하면, 다른 한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는 듯하다. 돌이킬 수 있는 어떤 행동을 해도 매력 없이 짜증만 일으키게 되고, 다시 사랑을 소생시키려 해 보지만, 오히려 상대를 질식시키는 아이러니한 결과가 올뿐이다. 그 결과 사랑의 응답을 강요하기 위해서 '낭만적 테러리즘'의 방법을 동원한다. 꾀(삐지기, 질투 유발, 죄책감 자극), 폭발 등 사랑의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삐진 것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성공은 공허했다. "그 성공(나의 강요)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나는 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요구 해소 과정에서 요구를 부정하는 아이러니.
제19장 선악을 넘어서 : 나의 친구 윌을 만나고 있던 클로이. 배신의 짐을 덜 듯 울며 고백하는 클로이. 이제 끝!
사랑이 윤리의 한 지류인 것처럼, 사랑을 거부하는 사람은 '악', 거부를 당한 사람은 '선'의 화신이 되는 경우가 많다. 나를 떠난 그녀는 '악', 그녀를 바란다는 그 이유로 나는 그녀에게 여전히 '너무 좋은' 사람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나 나의 사랑의 갈구도, 클로이의 사랑의 거부도 근본적으로는 이기적인 두 충동일 뿐인 것이다. / 나는 클로이가 나를 불쾌하게 했기 때문에 그녀를 악이라 불렀다. 나의 도덕률은 나의 욕망의 승화된 형태일 분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사랑을 한다거나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을 할 수는 없다.
제20장 심리적 운명론 : 참담한 사건일수록 가당치 않은 의미를 붙이게 되고, 심리적 운명론으로 빠져드는 경향도 강해진다. 왜 나인가? 왜 이런 일이? 왜 지금? 나는 극작가가 아닌 연기자였다. 정신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드라마 속에 살면서, 안으로부터 나온 운명 즉 심리적 운명의 저주에 깔려 괴로워했다.
제21장 자살 : 나의 죽음을 통해서만 내 사랑의 중요함과 불멸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죽게 되면 나의 소멸이라는 것으로 어떤 기쁨도 나는 얻지 못할 것임. 그럼에도 모아 둔 알약들을 먹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것들은 비타민C였다.
제22장 예수 콤플렉스 : 나는 고통을 받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더 낫다. 클로이는 그렇게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의 고통은 다른 사람들 때문이다. 예수처럼! 예수는 완전히 의로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배반당했다. 예수 콤플렉스는 자기 방어 메커니즘에 불과하지만, 어느 정도 건강한 면이 있다.
제23장 생략 : "영혼은 낙타의 속도로 움직인다"는 아랍 속담처럼 클로이를 잊기까지는 시간이 더디갔다. 그러다 불가피하게 그녀에 대한 기억이 전처럼 괴롭지 않은 시간들이 왔다. 새로운 습관들이 만들어졌고, 클로이 없는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시간은 자신을 생략한다. 확장된 상태에 살지만 수축된 상태에서만 기억되는 아코디언 같다. 나의 연애는 정제되어 몇 개의 아이콘적 요소만 남았다.
제24장 사랑의 교훈 : 사는 것도 하나의 기술로 받아들이면 지혜로워지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사랑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도록 지혜의 조각들을 배울 수는 없을까? 어쩌면, 지혜로운 또는 전혀 고통 없는 사랑이라는 개념은 무혈 전투와 같이 모순일지도 모른다. 낭만적 실증주의의 도움으로 클로이와 나눈 사랑의 결과, 나에게 어떤 지혜의 도움을 주지 못했다. 대책 없는 사랑 때문에 비관적이 된 나는 금욕주의를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금욕주의는 사랑의 순간 겁쟁이에 불과한 부적절한 해답이었다. 사랑은 분석적 정신에 겸손을 가르쳤다. 결국 분석에는 결함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내가 다시 한번 빠지기 시작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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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교훈은 뭘까?
개인적이 생각이긴 하지만,
결혼 전 청춘들의 연애에 있어서, 초기에 일어나기 쉬운 낭만적 운명론, 이상화, 이면의 의미 등에 너무 속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사랑을 낭만적인 환상으로 보아선 안 될 듯하다. 물론 사랑은 어느 정도는 낭만적이고, 환상적이고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설렘에 잠시 나를 맡겨볼 순 있지만, 마냥 달콤한 사랑, 나날이 행복한 삶은 없다!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기억과 기대가 만들어 낸 망상일 뿐이다. 완벽한 사랑이 있음을 믿고 현재를 부인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그러니 사랑을 선택할 때 이성적일 필요가 있다. 서로가 덜 고통스러울, 상대를 고르는 것. 사랑은 현실이니까.
연인뿐 아니라, 가족과의 사랑도 아름답게 느껴질 때도, 고통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지 않은가. 그런 순간이 모두 사랑이다. 다가올 행복을 고대하며 지금 두려움을 가지지 말자. 현재를 살자. 사랑도 지금이고, 행복도 지금이다. 완벽해 보이는 언어... 사! 랑! 행! 복! 도, 그 이면에는 웃음과 눈물, 달콤함과 쌉쌀함이, +와 -가, 매 순간 회오리치며 공존하는 게 아닐까. 내가 살 수 있는 단 한 번의 삶! 기대와 기억의 방해로 망치지 말자. 지금이 행복이요. 사랑이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이 책은 이제껏 내가 알고 있던 성경 속 예수님에 대한 선입견을 상당 부분 깰 수 있었던 책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예수님 당시의 시대성과 정치적인 맥락을 간과하고, 단편적인 성경을 알고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인간 예수의 삶이 없다면 그리스도 예수도 기독교도 없다는 당연한 이치를 잊어선 안 된다_예수전 中>
인간 예수의 삶을 알고자 한다면 그 시대로 나를 데리고 가서, 함께 경험하며 이해하는 노력이 있을 때 가능한 것 같다.
이스라엘은 수백 년째 주변의 강대국들에 의해 주권을 잃은 상태였고, 예수가 태어나기 60년 전부터는 로마의 식민지 상태였다.
외세와 그에 결탁한 지배세력은 영화를 누리고 있었고 사실 아쉬울 게 없었던 상황. 그러나 양쪽으로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던 인민들은 하루하루 살기가 버겁고,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웠으리라. (마치 우리의 일제강점기처럼 말이다.)
바로 그 시기, 갈릴래아에서 온 메시아. 그는 영광의 왕으로서의 메시아가 아니라 인민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함께하는 메시아이었던 것이다.
<평화란 온 세상이 잃어버린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유지되는 조용하고 온순한 상태는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악랄한 형태의 폭력이다. 평화는 바로 그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인간적인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론 가장 소란스럽고 가장 사나울 수 있다. '열혈 당원' 시몬은 예수와 하느님 나라 운동에 당연히 그런 소란스러움과 사나움이 포함되어 있음을 드러낸다._예수전 中>
타락한 자본주의의 깊숙한 곳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며 살고 있는 우리는, 어쩌면 부의 잘못된 분배나 다양한 불평등이 존재하는 그 가운데서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소란스러움과 사나움을 두려워하여, 혹은 희망 없음에 기반하여...
지금 인간 예수가 존재한다면 이 상황을 뭐라고 하실까? 기업과도 같은 교회에 가서 한바탕 소동을 벌이시고, 자신의 배 불리기 바쁜 정치인들에게 호통을 치실까? 아무 말 못 하고 체제에 순응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라며 가르침을 주실까?
상황은 그 때나 지금이나 달라 보이지 않는다.
2. 하느님은 누구신가? 절대적인 신. 천치를 창조하신 분. 우리 삶과 세계를 마음대로 관장하는 존재?
<그러나 하나님이 그런 존재라면, 우리 눈앞에 일어나는 수많은 불의와 학살과 기아와 참상은 그가 자행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의 묵인 아래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양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하느님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_예수전 中>
저자는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무신론을 선택하는 이유일 거라 한다.
공감한다. 신이 진정 계시다면, 이 세상이 인간적인 조화를 회복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여야 한다.
정말 궁금했던 부분이고,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궁금증에 저자가 주는 답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인간에서 시작한다.
<하느님은 우리 삶과 세계의 외곽에서 우리를 절대적 힘으로 관장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내 안에 '본디의 나'로 살아있는 하느님인 것이다. 우리 눈앞에 일어나는 수많은 불의와 학살과 기아와 참상을 자행하거나 외면하는 분이 아니라 불의와 학살과 기아와 참상 속에서 함께 고통받는 분인 것이다._예수전 中>
조금 이해가 되겠는가?
3. 오병이어의 기적 : 나눔
이 에피소드에서 중요한 점은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나누어 먹을 때 함께 만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먹을 만큼 먹고, 쓸 만큼 쓰고 남는 물질을 남에게 주는 건 진정한 도움이 아니다. 남을 도우려면 부자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예수의 진정한 나눔은 적선이나 자선이 아니라 적선과 자선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그것이 진정한 하느님 나라이다.
<나눔은 '불쌍한 사람'과 그 불쌍한 사람을 돕는 '훌륭한 사람'으로 역할을 나누어서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쇼가 아니라, 누구든 제 능력과 개성에 맞추어 정직하게 일하는 것만으로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품위와 자존심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이다._예수전 中>
4. 예수의 죽음과 부활
예수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지만,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예수는 "지배체제에 의해 사형당했다"는 사실이다.
각각의 시각을 주장하는 이들은 예수가 왜. 사. 형. 당. 했. 는. 지. 에 대한 명쾌한 해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불의와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이라면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은 지배세력과 불화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지배체제와 불화하지 않으면서, 아무런 오해와 곤경에 처하지 않으면서, 이쪽에서도 칭찬받고 저쪽에서도 존경받으면서, 예수를 좇고 있다 말하는 건 가소로운 일이다.._예수전 中>
예수의 부활이 믿어지는가? 신화와 같은 이야기인가? 이에 대한 저자의 의견은,
예수의 부활이 사실인가 아닌가라고 접근하기보다는, 부활이 무엇인가?로 이해하라는 것이다.
죽은 육체가 다시 살아난 것이라면 세포들의 재생일 뿐 영원한 생명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기에 존경이나 신앙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내 삶 속에서 예수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순간의 선택으로 가능한!
<남보다 많이 가진 것을 자랑스러워하던 사람이 이 순간 그런 삶을 부끄럽게 여기고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다면, 예수가 그 안에서 부활한 것이다.................................... 중략....................................... 제 삶의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던 사람이,
이 순간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으로 새처럼 훌쩍 날아오른다면 예수가 그 안에서 부활한 것이다.._예수전 中>
5. 예수전!
제1장부터 제16장까지의소제목을 가지고 전개된다. 중간중간 [200주년 신약성서] 마르코 복음의 말씀이 삽입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There’s a thousand reasons I should go about my day
나의 일상을 살아야 하는 수많은 이유들이 있어 And ignore your whispers
그래서 너의 속삭임을 무시할거야
Which I wish would go away…
사라지기를 바라는 속삭임을...
Oh-oh
THE VOICE
Ah-ah-ah-ah
ELSA
Oh-oh
THE VOICE
Ah-ah-ah-ahh--ah-ah
ELSA
You’re not a voice.
너는 목소리가 아니야 You’re just a ringing in my ear
단지 내 귀에 울리는 울림일 뿐 And if I heard you (which I don’t)
그리고 내가 너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그렇지 않겠지만) I’m spoken for,I fear.
유감이지만, 난 이미 할 일이 있어. Everyone I’ve ever loved is here within these walls
내가 사랑해 온 모든 사람들이 여기 이 성벽들 안에 있어. I’m sorry, secret siren, but I’m blocking out your calls. 미안해, 비밀스런 소리야, 그러나 난 너의 부름을 차단할거야. I’ve had my adventure
나는 나의 모험을 지금까지도 해왔어. I don’t need something new!
새로운 어떤 것도 필요 없어. I’m afraid of what I’m risking if I follow you
내가 너를 따라간다면 내가 위험해질 것이 두려워. Into the unknown Into the unknown Into the unknown!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로 THE VOICE
Ah-ah-ah-ahh--ah-ah
ELSA
What do you want?
무엇을 원하는 거야? ’Cause you’ve been keeping me awake
왜 나를 계속해서 깨우는 거니? Are you here to distract me
너는 나를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 여기 있니? So I make a big mistake?
그래서 내가 큰 실수를 하도록? Or are you someone out there who’s a little bit like me?
아니면, 넌 나와 조금은 비슷한 누군가 이니? Who knows deep down I’m not where I’m meant to be? 누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다는 걸 실제로 아는걸까? Every day’s a little harder as I feel my power grow!
내 힘이 세져가는 걸 느낄 때 매일 조금씩 더 힘들어져. Don’t you know there’s part of me that longs to go…
내가 정말 가고 싶어하는 곳이 있다는 걸 너도 알지 않니? Into the unknown?
Into the unknown! Into the unknown!!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로